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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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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 http://www.inbora.com/bbs/board.php?bo_table=board13&wr_id=67&page=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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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겐
신학자, 변증가, 영성가 그리고 주님을 소유한 오리겐
교회탄생 후 수십년 동안 기독교신자들은 대부분 구체적인 문제나 사건들에 관해 저술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바울서신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그는 기독교교리 전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가 처했던 구체적인 상황들을 취급하고 있다. 사도시대 이후에도 기독교 저술가나 변증가들은 교리적인 중요한 것들만을 다루었는데 그 누구도 전체를 해석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비교적 전반적인 기독교 진리를 해석함으로 기독교 안에서 뿐 아니라 사상계 전체에서 최고의 지성으로 인정받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교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오리겐이다. 그는 변증가이며 신학자요 또한 영성의 선구자였으며 , 나아가 수도원 운동에 교리적 초석을 놓은 사람이었다. 위대한 신학자 제롬은 그를 일컬어 “사도들 이후에 그리스도 교회의 가장 위대한 선생이다”라고 말했으며, 실로 교회사에 있어서 그의 학문의 심오함과 광범위함을 견줄만한 사람은 가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질문이 많았던 소년
3세기 전반의 기독교회의 최대학자인 오리겐(Origenes Admantius)은 주후 185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경건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수사학 교사였던 아버지 레오니다스로부터 성경과 희랍문학을 배웠고, 교리문답학교에서 클레멘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의 기독교교육은 매우 엄격하면서도 세심하였다. 매일 성경을 정독하고 암송하게 하였다. 어린 오리겐은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성경을 부지런히 외웠으며, 그 단계를 초월하여 본문의 깊은 의미를 추구하였고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깊은 사색에 잠겼다. 그는 종종 아버지에게 영감된 성서의 참 의미를 질문하여 아버지를 곤란케 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분명한 성경의 의미 이상의 것은 알려하지 말라고 꾸짖었지만, 내심 크게 기뻐하여 하나님께 이런 아들을 주신 것을 감사하였다.
오리겐은 소년시절에도 교회의 규칙을 잘 지켰으며 이단적 교리의 가르침을 혐오했다. 그는 많은 책을 읽었으며 더욱 학문에 전념하여 언어학에 상당한 지식을 습득했다. 어려서부터 성경을 암송하고 의미를 탐구하는 일은 오리겐 평생의 작업이 되었고 이 작업에서 얻은 영적인 열매는 그의 영성에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순교에의 열망
오리겐이 17세때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193-211)가 박해를 일으켰다. 도처에서 수천명의 기독교인이 순교하였다. 이때에 오리겐의 아버지도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당시 소년이었던 오리겐은 순교에 대한 열망에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오리겐이 너무나 어린 나이에 순교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꼭 순교하는 것만이 참된 크리스찬이 되는 것은 아니라며 만류했다. 어머니는 오리겐의 옷을 감추고 그를 방에 가둠으로서 순교를 막았다. 할 수없이 그는 편지로 아버지의 용기를 격려하였다. “우리는 염려하지 마시고 재판관 앞에서 담대하십시오.” 아버지는 자신의 신앙을 순교로 장식했고 그의 재산은 몰수되었다. 오리겐은 졸지에 어머니와 동생 6명의 소년가장이 되었다. 오리겐은 그리스문학을 가르치고 사본을 필사하는 일을 하며 가족을 도왔다. 박해가 있는 동안 많은 학자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교회에는 교리를 가르칠 교사가 크게 부족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8세의 나이로 클레멘트의 후임으로 교리학교의 교장이 되었으며 그때를 기점으로 교육과 연구, 저술에 바친 그의 오랜 인생이 시작되었다.
핍박과 함께 뻗어나간 오리겐의 명성
오리겐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로 자기의 생명이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교사겸 문답자로서 옥에 갇혀있는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심방하였다.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재판정, 교수대, 사형장까지도 따라가서 그들을 위로하고 또한 끝까지 신앙을 지키라고 권면하였다. 그의 이런 모습에 주위의 성난 군중들은 여러번 돌로 그를 치려하였다. 만일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없었다면 그는 죽음의 위기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모습은 온전한 믿음과 신앙에서 비롯한 훌륭한 행위의 표본을 제공하였으므로 그를 향한 박해가 불붙듯이 타올랐다. 불신자들은 사람들이 그에게 교리를 배우지 못하게 하려고 그가 거하는 집 주위에 병사들을 배치하였다. 할 수없이 그는 사방으로 쫓겨다녔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처럼, 많은 학생들이 오리겐을 찾아왔고, 또 그의 삶을 본받으려 하였다. 오리겐의 성결한 생활에 대한 열성과 금욕적인 경향은 그의 존경하던 선생이며 선배였던 클레멘트보다 더하였다. 그의 전기를 쓴 한사람은 ‘그의 교리는 생활이요, 그의 생활이 곧 교리였다’ 고 말했다. 오리겐의 전 인격은 바로 그의 절대적인 진실성을 실증하는 것이었다.
하루종일 가르쳤고 밤에는 성서연구와 기도하는 일로 밤을 지샜으며 수면은 맨바닥에서 최소한의 잠만 잤다. 한 벌 옷에 맨발로 다녔으며 가능한 먹고 마시는 것도 절제하여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 마태복음 19장12절의 말씀을 문자대로 지켜 모든 육체의 유혹에 대항하기 위해 스스로 거세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그가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도적 청빈과 복음에 대한 충실한 복종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그때까지 수집해 놓은 고대작가들의 귀중한 책을 팔아 자비량하였다.
그의 탁월한 재능과 학문, 보기 드문 교수능력, 거룩한 행실은 모든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오리겐은 신학과 철학 뿐 아니라 과학과 그밖의 예비적인 학문도 가르쳤다. 그는 학식이 별로 없는 사람들에게 평범한 학습자 반을 만들어 가르치고,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학생들을 위해서는 고급수준의 반을 운영하였다. 또한 남녀가 평등하게 교육받을 수 있게 하였는데 이런 행동은 3세기 로마제국에서 가장 급진적인 것이었다. 당시의 유명한 철학자들은 거의다 오리겐의 문하생이었다. 그의 명성을 듣고 기독교인, 이단자, 이교도 할 것없이 다 와서 교육을 받았다.
네안더(Neander)는 그를 두고 이렇게 말하였다. “오리겐은 도덕적이나 종교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을만한 것이면 어떠한 옛날 철학이나 다 제자들에게 해설하여 주었으며 제자들로 하여금 어디서든지 진리와 허위가 뒤섞여 있는 곳에서 진리를 구별할 수 있는 정신적인 자유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에 힘썼다. 이렇게함으로써 그는 종교교육과 과학교육에 있어서 보다 자유로운 제도를 확장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으며 그의 활동으로 생긴 여러 학교들이 바로 그 증거물들이다”
주님의 품으로
주후 230년, 아카이아로 가는 길에 예루살렘과 가이샤라의 감독은 그를 장로로 안수하였다. 하지만 정작 알렉산드리아 감독은 자신에게 허락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심히 노하여 231년과 232년에 두차례의 종교회의를 거쳐, 오리겐의 교사자격을 박탈하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하였다. 오리겐은 매우 온순한 사람이었으므로 알렉산드리아 감독이 하는 잘못을 온유한 태도로 그러나 조금도 굽히지 않는 정신으로 받아들였다. 이로서 오리겐은 문답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지 28년만에 정든 알렉산드리아를 떠나게 되었다. 오리겐은 가이샤라에 있는 동안 신학교를 또하나 설립하였는데 얼마 안되어 그 명성이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학교를 능가하였다. 그는 여기서 20여년 동안 수고하면서 많은 사람에게 큰 감화를 끼치며 교회의 장로들의 고문격으로 있었다.
그러나 그의 노년기인 250년 데키우스 황제에 의해 또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때 박해자들은 이 유명한 학자를 배교자가 되게 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경건한 노인은 그 무시무시한 고문에 항복하기는커녕, 도리어 감옥에서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서 신앙을 지키라고 격려하였다. 오리겐을 나무에 매달아 처형하라는 선고를 받았으나 251년, 황제가 죽는 바람에 풀려 나왔다. 그러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254년 그는 많은 저술들을 남기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나이 69세였다.
저서와 이단논쟁
오리겐은 7명의 비서가 부지런히 구술을 받아 적어야할 정도로 엄청난 양의 책을 저술했다. 그는 무려 2천권이 넘는 저작을 남겼다. 성경 각권에 대한 주석을 썼으며 수백편의 설교를 남겼다. 그의 저서들은 모두가 성경해석의 형식을 띄고 있는데 원문비평에 입각한 학문적 구약저술 ‘헥사플라’는 새로운 성경해석의 근거를 제시해 교회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세로로 된 6개의 단에 한쪽에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다른 한쪽에는 그리스어 역본을 나란히 적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어로 된 세 개의 해석과 70인경을 나란히 적어놓은 형태로 6500페이지, 50권의 대형 두루마리에 달하는 분량으로 약250년경에 완성되었다. 초기교부들이 인용한 신약성경구절의 50%가 오리겐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그는 이 작업을 위해 무려 27년을 보냈다.
‘켈수스를 논박함’이란 책은 이교도로서 기독교 비판가였던 셀수스를 다룬 8권으로 된 책으로 고대 기독교에서 가장 의미있는 변증서로 평가받는다. 또한 교회사에서 기독교세계관을 체계화한 ‘제1원리들’은 최초의 조직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는 이 책에서 하나님,그리스도,성령,창조,자유의지,구원,성경 등 기독교 신앙 전반에 걸친 주제들을 면밀히 조사했다. 실천적인 저술, ‘기도론’과 ‘순교에의 권면’에서는 헌신이라는 특징적인 맥락에서 많은 신학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오리겐은 특히 플라톤 철학에 대한 자신의 깊은 조예를 십분 활용하였다. 그는 철학이 성경을 이해하는 예비적 단계라고 믿었다.
또한 그는 “애굽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출12:36)는 비유적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이 말은 이방인의 풍부한 학문과 지혜를 기독교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훗날 어거스틴도 이 비유를 채택해 사용했다. 그러나 오리겐의 후기는 정통신학에서 비껴나 있었다. 그의 잘못된 사상의 배후에는 대개의 경우 물질과 물질세계는 악하다는 희랍철학의 가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의 다양한 사상편력과 저작들 때문에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교회사학을 주도하던 독일 루터교 계통의 학자들은 오리겐을 신학자라기보다는 중기 플라톤주의나 영지주의와 관련된 희랍철학자로 보면서 그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카톨릭 계통 학자들이 오리겐 연구를 주도하게 되면서 그는 위대한 성서신학자요 영성생활의 지도자로 조명받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오리겐은 이단자라는 불명예에서 벗어나 “정통신학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되찾게 된 것이다. 진실로 그의 복음의 내용은 희랍체계의 내용을 빌려서 표현했지만 근본적으로 성서와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영성
오리겐의 영성은 성서안의 영성, 성경을 통해서 얻는 영성이다. 그러기에 그는 치밀한 성경연구와 해석으로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리고 성경을 통한 영성은 일상생활 속에서 그 열매를 보여야 함을 강조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과의 합일을 향한 영혼의 순례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의 삶에 참여함으로서 타락으로 인하여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이스라엘백성이 애굽을 떠나 약속된 땅으로 향하는 여정과 같다고 말한다. 인간의 몸은 타락한 인간상태의 한 상징이기에(제1원리들,2권3:15). 인간이 몸을 제어할 때 그것이 죄를 거절하는 증거이며 높은 영적 삶을 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순간의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매일매일 전생애를 통해 자기를 부인하며 덕을 실천하며 사는 수덕적인 삶으로 영적으로 순교하며 사는 것이 완덕을 향한 길이라고 말했다.
덕스럽게 산다는 것은 남들에게는 최대한 사랑과 겸손으로 대하는 것이지만, 자신에게는 혹독하게 훈련하고 절제하며 산다는 것을 뜻한다.
나아가 오리겐은 수덕적인 삶에 머무르지 않고 관조하는 삶을 강조했다. 그는 행동과 관조를 구분하면서 이 둘은 영혼의 교육을 위해서 함께 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두종류의 삶은 상호작용을 하면서 완성에로 인도한다. 그리스도는 신자의 모델과 인도자가 되실 뿐 아니라 신자 속에 임재하면서 힘을 주고 신앙을 성장시킨다.
오리겐은 하나님을 향한 순례의 마지막 단계를 하나님과의 합일, 완성, 신화, 회복으로 표현한다. 이 단계는 하나님을 완전히 알고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를 이루는 단계이다. 그리고 그분을 완전하게 닮았던 원래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일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다고 오리겐은 말했다.
그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 것을 끊임없이 권했고 자신도 그렇게 살았다. 역사상 기독교학자, 신학자, 변증자 성서주석가, 영성가로써 많은 신학적 업적을 남기며 경건한 삶을 살았던 오리겐은 그가 죽은 후 1700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그의 이름은 존경의 대상이고 그의 신학 역시 연구의 대상이다. 그는 누구보다 더 기독교신학의 발전과 기독교 위상을 세우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오리겐의 활기찬 금욕적, 지성적 삶은 이단들을 제지하고 이방세계로부터 개종자들을 획득하며 장차 일어날 위대한 범교회적 대연합 회의의 토대를 제공하고 아울러 수도원 운동이 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는 점에서 그의 생애는 참으로 중요하다.
신학자, 변증가, 영성가 그리고 주님을 소유한 오리겐
교회탄생 후 수십년 동안 기독교신자들은 대부분 구체적인 문제나 사건들에 관해 저술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바울서신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그는 기독교교리 전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가 처했던 구체적인 상황들을 취급하고 있다. 사도시대 이후에도 기독교 저술가나 변증가들은 교리적인 중요한 것들만을 다루었는데 그 누구도 전체를 해석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비교적 전반적인 기독교 진리를 해석함으로 기독교 안에서 뿐 아니라 사상계 전체에서 최고의 지성으로 인정받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교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오리겐이다. 그는 변증가이며 신학자요 또한 영성의 선구자였으며 , 나아가 수도원 운동에 교리적 초석을 놓은 사람이었다. 위대한 신학자 제롬은 그를 일컬어 “사도들 이후에 그리스도 교회의 가장 위대한 선생이다”라고 말했으며, 실로 교회사에 있어서 그의 학문의 심오함과 광범위함을 견줄만한 사람은 가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질문이 많았던 소년
3세기 전반의 기독교회의 최대학자인 오리겐(Origenes Admantius)은 주후 185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경건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수사학 교사였던 아버지 레오니다스로부터 성경과 희랍문학을 배웠고, 교리문답학교에서 클레멘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의 기독교교육은 매우 엄격하면서도 세심하였다. 매일 성경을 정독하고 암송하게 하였다. 어린 오리겐은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성경을 부지런히 외웠으며, 그 단계를 초월하여 본문의 깊은 의미를 추구하였고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깊은 사색에 잠겼다. 그는 종종 아버지에게 영감된 성서의 참 의미를 질문하여 아버지를 곤란케 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분명한 성경의 의미 이상의 것은 알려하지 말라고 꾸짖었지만, 내심 크게 기뻐하여 하나님께 이런 아들을 주신 것을 감사하였다.
오리겐은 소년시절에도 교회의 규칙을 잘 지켰으며 이단적 교리의 가르침을 혐오했다. 그는 많은 책을 읽었으며 더욱 학문에 전념하여 언어학에 상당한 지식을 습득했다. 어려서부터 성경을 암송하고 의미를 탐구하는 일은 오리겐 평생의 작업이 되었고 이 작업에서 얻은 영적인 열매는 그의 영성에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순교에의 열망
오리겐이 17세때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193-211)가 박해를 일으켰다. 도처에서 수천명의 기독교인이 순교하였다. 이때에 오리겐의 아버지도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당시 소년이었던 오리겐은 순교에 대한 열망에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오리겐이 너무나 어린 나이에 순교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꼭 순교하는 것만이 참된 크리스찬이 되는 것은 아니라며 만류했다. 어머니는 오리겐의 옷을 감추고 그를 방에 가둠으로서 순교를 막았다. 할 수없이 그는 편지로 아버지의 용기를 격려하였다. “우리는 염려하지 마시고 재판관 앞에서 담대하십시오.” 아버지는 자신의 신앙을 순교로 장식했고 그의 재산은 몰수되었다. 오리겐은 졸지에 어머니와 동생 6명의 소년가장이 되었다. 오리겐은 그리스문학을 가르치고 사본을 필사하는 일을 하며 가족을 도왔다. 박해가 있는 동안 많은 학자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교회에는 교리를 가르칠 교사가 크게 부족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8세의 나이로 클레멘트의 후임으로 교리학교의 교장이 되었으며 그때를 기점으로 교육과 연구, 저술에 바친 그의 오랜 인생이 시작되었다.
핍박과 함께 뻗어나간 오리겐의 명성
오리겐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로 자기의 생명이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교사겸 문답자로서 옥에 갇혀있는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심방하였다.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재판정, 교수대, 사형장까지도 따라가서 그들을 위로하고 또한 끝까지 신앙을 지키라고 권면하였다. 그의 이런 모습에 주위의 성난 군중들은 여러번 돌로 그를 치려하였다. 만일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없었다면 그는 죽음의 위기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모습은 온전한 믿음과 신앙에서 비롯한 훌륭한 행위의 표본을 제공하였으므로 그를 향한 박해가 불붙듯이 타올랐다. 불신자들은 사람들이 그에게 교리를 배우지 못하게 하려고 그가 거하는 집 주위에 병사들을 배치하였다. 할 수없이 그는 사방으로 쫓겨다녔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처럼, 많은 학생들이 오리겐을 찾아왔고, 또 그의 삶을 본받으려 하였다. 오리겐의 성결한 생활에 대한 열성과 금욕적인 경향은 그의 존경하던 선생이며 선배였던 클레멘트보다 더하였다. 그의 전기를 쓴 한사람은 ‘그의 교리는 생활이요, 그의 생활이 곧 교리였다’ 고 말했다. 오리겐의 전 인격은 바로 그의 절대적인 진실성을 실증하는 것이었다.
하루종일 가르쳤고 밤에는 성서연구와 기도하는 일로 밤을 지샜으며 수면은 맨바닥에서 최소한의 잠만 잤다. 한 벌 옷에 맨발로 다녔으며 가능한 먹고 마시는 것도 절제하여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 마태복음 19장12절의 말씀을 문자대로 지켜 모든 육체의 유혹에 대항하기 위해 스스로 거세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그가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도적 청빈과 복음에 대한 충실한 복종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그때까지 수집해 놓은 고대작가들의 귀중한 책을 팔아 자비량하였다.
그의 탁월한 재능과 학문, 보기 드문 교수능력, 거룩한 행실은 모든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오리겐은 신학과 철학 뿐 아니라 과학과 그밖의 예비적인 학문도 가르쳤다. 그는 학식이 별로 없는 사람들에게 평범한 학습자 반을 만들어 가르치고,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학생들을 위해서는 고급수준의 반을 운영하였다. 또한 남녀가 평등하게 교육받을 수 있게 하였는데 이런 행동은 3세기 로마제국에서 가장 급진적인 것이었다. 당시의 유명한 철학자들은 거의다 오리겐의 문하생이었다. 그의 명성을 듣고 기독교인, 이단자, 이교도 할 것없이 다 와서 교육을 받았다.
네안더(Neander)는 그를 두고 이렇게 말하였다. “오리겐은 도덕적이나 종교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을만한 것이면 어떠한 옛날 철학이나 다 제자들에게 해설하여 주었으며 제자들로 하여금 어디서든지 진리와 허위가 뒤섞여 있는 곳에서 진리를 구별할 수 있는 정신적인 자유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에 힘썼다. 이렇게함으로써 그는 종교교육과 과학교육에 있어서 보다 자유로운 제도를 확장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으며 그의 활동으로 생긴 여러 학교들이 바로 그 증거물들이다”
주님의 품으로
주후 230년, 아카이아로 가는 길에 예루살렘과 가이샤라의 감독은 그를 장로로 안수하였다. 하지만 정작 알렉산드리아 감독은 자신에게 허락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심히 노하여 231년과 232년에 두차례의 종교회의를 거쳐, 오리겐의 교사자격을 박탈하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하였다. 오리겐은 매우 온순한 사람이었으므로 알렉산드리아 감독이 하는 잘못을 온유한 태도로 그러나 조금도 굽히지 않는 정신으로 받아들였다. 이로서 오리겐은 문답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지 28년만에 정든 알렉산드리아를 떠나게 되었다. 오리겐은 가이샤라에 있는 동안 신학교를 또하나 설립하였는데 얼마 안되어 그 명성이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학교를 능가하였다. 그는 여기서 20여년 동안 수고하면서 많은 사람에게 큰 감화를 끼치며 교회의 장로들의 고문격으로 있었다.
그러나 그의 노년기인 250년 데키우스 황제에 의해 또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때 박해자들은 이 유명한 학자를 배교자가 되게 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경건한 노인은 그 무시무시한 고문에 항복하기는커녕, 도리어 감옥에서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서 신앙을 지키라고 격려하였다. 오리겐을 나무에 매달아 처형하라는 선고를 받았으나 251년, 황제가 죽는 바람에 풀려 나왔다. 그러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254년 그는 많은 저술들을 남기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나이 69세였다.
저서와 이단논쟁
오리겐은 7명의 비서가 부지런히 구술을 받아 적어야할 정도로 엄청난 양의 책을 저술했다. 그는 무려 2천권이 넘는 저작을 남겼다. 성경 각권에 대한 주석을 썼으며 수백편의 설교를 남겼다. 그의 저서들은 모두가 성경해석의 형식을 띄고 있는데 원문비평에 입각한 학문적 구약저술 ‘헥사플라’는 새로운 성경해석의 근거를 제시해 교회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세로로 된 6개의 단에 한쪽에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다른 한쪽에는 그리스어 역본을 나란히 적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어로 된 세 개의 해석과 70인경을 나란히 적어놓은 형태로 6500페이지, 50권의 대형 두루마리에 달하는 분량으로 약250년경에 완성되었다. 초기교부들이 인용한 신약성경구절의 50%가 오리겐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그는 이 작업을 위해 무려 27년을 보냈다.
‘켈수스를 논박함’이란 책은 이교도로서 기독교 비판가였던 셀수스를 다룬 8권으로 된 책으로 고대 기독교에서 가장 의미있는 변증서로 평가받는다. 또한 교회사에서 기독교세계관을 체계화한 ‘제1원리들’은 최초의 조직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는 이 책에서 하나님,그리스도,성령,창조,자유의지,구원,성경 등 기독교 신앙 전반에 걸친 주제들을 면밀히 조사했다. 실천적인 저술, ‘기도론’과 ‘순교에의 권면’에서는 헌신이라는 특징적인 맥락에서 많은 신학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오리겐은 특히 플라톤 철학에 대한 자신의 깊은 조예를 십분 활용하였다. 그는 철학이 성경을 이해하는 예비적 단계라고 믿었다.
또한 그는 “애굽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출12:36)는 비유적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이 말은 이방인의 풍부한 학문과 지혜를 기독교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훗날 어거스틴도 이 비유를 채택해 사용했다. 그러나 오리겐의 후기는 정통신학에서 비껴나 있었다. 그의 잘못된 사상의 배후에는 대개의 경우 물질과 물질세계는 악하다는 희랍철학의 가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의 다양한 사상편력과 저작들 때문에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교회사학을 주도하던 독일 루터교 계통의 학자들은 오리겐을 신학자라기보다는 중기 플라톤주의나 영지주의와 관련된 희랍철학자로 보면서 그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카톨릭 계통 학자들이 오리겐 연구를 주도하게 되면서 그는 위대한 성서신학자요 영성생활의 지도자로 조명받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오리겐은 이단자라는 불명예에서 벗어나 “정통신학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되찾게 된 것이다. 진실로 그의 복음의 내용은 희랍체계의 내용을 빌려서 표현했지만 근본적으로 성서와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영성
오리겐의 영성은 성서안의 영성, 성경을 통해서 얻는 영성이다. 그러기에 그는 치밀한 성경연구와 해석으로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리고 성경을 통한 영성은 일상생활 속에서 그 열매를 보여야 함을 강조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과의 합일을 향한 영혼의 순례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의 삶에 참여함으로서 타락으로 인하여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이스라엘백성이 애굽을 떠나 약속된 땅으로 향하는 여정과 같다고 말한다. 인간의 몸은 타락한 인간상태의 한 상징이기에(제1원리들,2권3:15). 인간이 몸을 제어할 때 그것이 죄를 거절하는 증거이며 높은 영적 삶을 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순간의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매일매일 전생애를 통해 자기를 부인하며 덕을 실천하며 사는 수덕적인 삶으로 영적으로 순교하며 사는 것이 완덕을 향한 길이라고 말했다.
덕스럽게 산다는 것은 남들에게는 최대한 사랑과 겸손으로 대하는 것이지만, 자신에게는 혹독하게 훈련하고 절제하며 산다는 것을 뜻한다.
나아가 오리겐은 수덕적인 삶에 머무르지 않고 관조하는 삶을 강조했다. 그는 행동과 관조를 구분하면서 이 둘은 영혼의 교육을 위해서 함께 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두종류의 삶은 상호작용을 하면서 완성에로 인도한다. 그리스도는 신자의 모델과 인도자가 되실 뿐 아니라 신자 속에 임재하면서 힘을 주고 신앙을 성장시킨다.
오리겐은 하나님을 향한 순례의 마지막 단계를 하나님과의 합일, 완성, 신화, 회복으로 표현한다. 이 단계는 하나님을 완전히 알고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를 이루는 단계이다. 그리고 그분을 완전하게 닮았던 원래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일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다고 오리겐은 말했다.
그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 것을 끊임없이 권했고 자신도 그렇게 살았다. 역사상 기독교학자, 신학자, 변증자 성서주석가, 영성가로써 많은 신학적 업적을 남기며 경건한 삶을 살았던 오리겐은 그가 죽은 후 1700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그의 이름은 존경의 대상이고 그의 신학 역시 연구의 대상이다. 그는 누구보다 더 기독교신학의 발전과 기독교 위상을 세우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오리겐의 활기찬 금욕적, 지성적 삶은 이단들을 제지하고 이방세계로부터 개종자들을 획득하며 장차 일어날 위대한 범교회적 대연합 회의의 토대를 제공하고 아울러 수도원 운동이 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는 점에서 그의 생애는 참으로 중요하다.
댓글 '4'
충고자
우리는 교부들의 신학을 평가하기에 앞서 그들이 세워놓은 교리와 사상이 후대에 미친 영향에 대해
보다 세밀한 관찰과 연구를 통해 이성적 논리 보다는 성경적 진리로 접근된 방식을 통해 후대에
그들의 신학이과연 교회의 진정한 신학적인 바탕이 되었는지 어떤 열매가 나타났는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평가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봅니다. 오리겐은 그의 사상으로 동방정교회에 영향을 미쳣고 그리고
오늘날까지 기독론에서는 여호와 증인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모두가 아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 이후로 로마교회로 부터 벗어나려는 개혁자들의 성경관은 빛으로인도하시려는 주님의 새로운
진리에 대한 인식이 교부들의 영향 아래에 머무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마치 향수를 불러 오듯이
교부들의 현란한 말쏨씨에 아직도 막연한 추상적인 동경심으로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보다 세밀한 관찰과 연구를 통해 이성적 논리 보다는 성경적 진리로 접근된 방식을 통해 후대에
그들의 신학이과연 교회의 진정한 신학적인 바탕이 되었는지 어떤 열매가 나타났는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평가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봅니다. 오리겐은 그의 사상으로 동방정교회에 영향을 미쳣고 그리고
오늘날까지 기독론에서는 여호와 증인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모두가 아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 이후로 로마교회로 부터 벗어나려는 개혁자들의 성경관은 빛으로인도하시려는 주님의 새로운
진리에 대한 인식이 교부들의 영향 아래에 머무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마치 향수를 불러 오듯이
교부들의 현란한 말쏨씨에 아직도 막연한 추상적인 동경심으로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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