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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갈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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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동현 목사 |
참고 : |
< Dec. 11, 2011 라스베가스 복된교회 / 대림절 세 번째 주일 / 성서주일 / 2부 예배 >
< Dec. 11, 2011 / This message is for third Lord's Day of Advent. >
갈 5:1, 『 자유한가요? 』
Galatians 5:1, 『 Are you Freed? 』
미국 오클라호마대학의 한 연구팀이 '바슈'라는 이름을 가진 침팬지에게 140 가지 사인 랭귀지(sign language)를 가르쳤습니다. 단어를 손짓 발짓으로 표현하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동안 이 침팬지는 최고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연구팀은 단어들을 가르치고 침팬지가 제 생각에 따라 그거들을 연결하여 말을 만들도록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침팬지가 제일 먼저 표현한 말이 'Let me go!'이었다고 합니다. '나를 놓아 달라!' 의역하면 '나에게 자유를 달라!'입니다.
「아키발드 루트리지」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키발드는 어린 시절에 살아 있는 것들을 잡아서 기르기를 좋아했습니다. 특히 앵무새 소리를 좋아했던 그는 앵무새를 잡아 언제든지 그 노래 소리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어린 앵무새 새끼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잡아 새장 안에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어미새가 날아와 새장 틈으로 새끼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젠 걱정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고 일어나서 보니 새끼 앵무새는 죽어 있었습니다. 아키발드는 유명한 조류학자인 「아더 웨인」에게 그렇게 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아더 웨인은 그의 궁금증을 풀어주었습니다. 아더웨인은 “어미 앵무새는 새끼가 새장 안에 갇혀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사랑하는 새끼가 갇힌 채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여 때로는 독이 있는 열매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라고 답변해 주었습니다.
침팬지에게 있어서 최고의 대접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자유가 최고입니다. 앵무새라는 미물에게서 조차 자유는 생명과도 맞바꿀 정도로 가장 중요합니다.
국어 사전에서는 자유를 "마음대로의 상태, 장애가 없는 활동, 남에게 구속이나 강제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자유를 백과사전적 개념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도외시하고, 타인을 배려하지 아니하고, 윤리적인 책임이 부재한 것이 자유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기자가 평균 연령 90세 이상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장수 마을에 갔습니다.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기자는 장수하는 비결이 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만난 사람에게 “지금까지 어떻게 삶을 살아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질문을 받은 남자가 “그 무엇에도 구애됨 없이 자유로이 살아왔어, 담배도 마음껏 피우고, 술도 마음껏 마시고, 많은 여자와도 사귀었지. 하고싶은 것 마음대로 하고, 가고싶은 곳에 마음대로 다녔지.”라고 대답했습니다. 기자는 “연세가 한 90세 정도 되 보이시는데, 실제 연세가 어떻게 되시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남자가 “내 나이 이제 50세가 넘어섰는데, 무슨 말을 하는 것이야!”라고 벌컥 화를 내면서 일어서더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인생을 살았다고 하는 사람, 구애됨 없이, 거침거리 없이 마음대로 살았다고 한 삶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50세의 나이에 90세처럼 보였다는 사실입니다. 한참 나이에 인생의 막바지에 다다른 90세의 모습을 하고 있다니, 그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앞의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마음대로 하는 것, 그 무엇에도 구애됨 없는 것이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분별, 무질서, 방종이지 자유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현 시대의 사람들은 외적인 많은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심각한 문제는 외적 자유를 누리는 것과는 달리 내적 자유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자유인이지만 본능과 욕망의 노예, 불안과 두려움의 노예, 불평과 원망과 미움의 노예, 상처 난 감정과 증오의 노예, 술과 돈의 노예, 악한 습관의 노예, 약물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현대인들을 향해 일본의 우찌무라 간죠 목사는 "내면적 자유가 없는 외면적 자유란 무가치한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철학자 니체는 “현대인에게 두 가지 병이 있다. 하나는 자신을 잃어버린 병이요, 둘째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병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세상의 수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으로 얻은 자유를 상실한 체, 또 그 자유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성도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초조한 믿음생활을, 또 어떤 성도는 자유를 남용하여 오히려 죄악 속에서 살아감을 보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유를 만끽하기 원하지만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말씀 중에 나타난 강조점은 "자유"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자유를 얻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에는 예수님의 희생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누가 나를 위해, 사랑해서, 대신 죽어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그 아무도 해줄 수 없는 일을 예수님께서 해 주셨습니다. 구원과 거듭남은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때에 있어지는 열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죄악과 죄악이 가져다 주는 죽음의 저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러한 자유는 결단코 인간 스스로 획득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만 주어지는 자유입니다. 그 자유는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참으로 놀라운 자유입니다.
공지영이라고 하는 여류 작가가 쓴「수도원 기행」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여류 작가는 작품에서 자신의 심경과 경험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류 작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행복을 찾았습니다. 그 대목을 그대로 읽어 드립니다. “처음엔 소설가가 된다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소설가가 되었다. 그 다음엔 유명해지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열심히 노력하는 가운데 나는 유명해졌다. 그 다음엔 당연히 돈 걱정이 없어지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생활비를 다 쓰고 나서도 통장에 늘 100만 원만 있다면 아무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94년 여름, 내가 낸 세 권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러니 돈도 생겼다. 이제 100만 원이 문제가 아니라 하루를 자고나면 통장으로 수천만 원의 인세가 도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작품에서 여류 작가는 여러 가지 굴곡을 겪으면서 신앙을 회복하게 됩니다. 신앙의 회복을 통해 행복을 얻고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어쩌면 그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이 무려 18년이었다. 18년이 흐르고 나서야 나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다. 항복합니다, 주님, 하고 써 놓고 보니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항복과 행복, 획 하나 차이의 낱말이었다.” 이 여류 작가의 고백대로 획 하나가 그토록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항복하면 인생의 모든 사슬로부터의 자유를 얻고,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자유는 외면의 것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유하나 내면으로는 괴로워하며 자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외면과 더불어 내면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요, 그 자유는 예수님을 통해 주어짐니다. 예수님께서는 마 11:28-30에서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문제는 참자유를 주시는 예수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마음문을 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벧전 2:24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보혈을 믿고,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은 사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악들까지 남김없이 사해 주시는 예수님의 피의 능력과 권세와 역사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함께 봉독했던 본문은 뭐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구원, 곧 거듭남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하여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저 주어지는 것을 은혜 또는 선물이라고 합니다. 구원받아 거듭남을 체험한 후에는 세상 사람, 죄악의 사람, 멸망의 사람이란 신분에서 하나님의 자녀, 천국의 시민권자, 성도 등으로 신분이 변경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사랑으로서 주어진 구원, 거듭남, 성도로서의 신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받은 구원과 거듭남이 너무도 고귀한 것이고, 너무도 커다란 대가로 주어진 것이기에, 그것을 매우 소중히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킵니까? 예수님 당시로 볼 때는 율법에서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자유는 율법에서만의 자유, 정치적인 측면에서만의 자유, 굶주림에서만의 자유, 가시적인 것들인 세속의 것들로부터만의 자유 등 그 어떤 한 가지 속박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닙니다. 그 모든 것들을 아우르면서도 가장 근원적인 자유입니다.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는 것은 모든 문제의 근원인 죄로부터의 자유한 삶을 가리킵니다. 죄에서 자유하는 삶은 우리 자신만의 힘으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과 동행하므로 주어짐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죄악에 대한 저항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기도와 말씀이 부재하면 다시금 옛생활, 옛성품으로 돌아갑니다. 기도와 말씀이 부재하게 되면 우리 자신이 죄악에 너무도 쉽게 무너져 버리게 됩니다. 그렇기에 성경에서 “쉬지말고 기도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호흡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양식임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죄라고 하는 것을 바꾸어 말한다면 하나님 기뻐하시지 아니하는 것과 짝하는 것, 하나님보다 그 무엇을 더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죄라고 하는 것은 물질 만능주의, 이기주의, 나쁜 인격 곧 심술부림, 이간질, 질투, 미워하는 것 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숙의 정도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앞에 말씀 드린 죄라고 하는 요소들로부터 얼마만큼 자유하냐에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의 대전제는 책임과 절제와 경건입니다. 책임과 절제와 경건 뒤에 진정한 자유가 있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 고귀한 자유를 책임과 절제와 경건의 삶으로 더욱 귀하게 누리는 복되고 복된 삶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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