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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 배우는 기도

마태복음 최혜영 수녀............... 조회 수 2404 추천 수 0 2011.12.17 18:2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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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6:5-15 
설교자 : 최혜영 수녀 
참고 : 2011.10.9 

sgsermon.jpg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예수님께 배우는 기도

(마태복음 6장 5-15절)

2011년 10월 9일 주일예배 말씀증거

최혜영 수녀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종교학과 교수,학교법인 성심학원 이사장,성심수녀회 수녀)

 

안녕하십니까? 성심수녀회 최혜영 수녀입니다. 가톨릭 수녀에게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에 깊이 감사

립니다. 실은 제가 여러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어려워해서 전에도 이런 기회가 있었지만 핑계를 대고 빠져 나갔었는데, 그래도 언젠가는 찾아 뵙고 제가 그동안 개신교에서 받았던 여러 은혜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습니다. 저는 태어나자마자 가톨릭 세례를 받았는데, 정신여중.고, 이화여대까지 10년을 개신교 학교를 다녔으니 개신교 학교에서 그리스도 신앙을 키워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학생 시절에 자기 문제에 빠져 고민을 많이 하느라 학교 공부에 별로 충실하지 못했지만,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나 바른 가치관과 질 좋은 교육을 받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특별히 정신여중은 입시에 낙방하여 크게 방황하던 어린 시절, 선생님들께서 상처를 보듬어 주시고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던 곳이라 더욱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가톨릭대 종교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제가 받았던 개신교 학교에서의 교육이 뿌리가 되고 있다는 것을 종종 느낍니다. 가치관 교육이나 사명감, 비그리스도인들을 대할 때 열린 마음으로 수용할 수 있는 관용의 정신은 옛 스승에게서 배운 것들입니다. 저는 학창시절에 가톨릭학생회 활동을 했었는데 교목님들께서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고 신앙생활을 격려해 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성경 말씀은 마태 복음에 실린 ‘주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이고, 복음서의 요약이라고 불릴 만큼 예수님의 핵심 사상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장 소중한 기도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성찬례의 일부로 사용되었고, 세례를 받은 신도들만이 주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까닭에 “신도들의 기도”라고도 불렸습니다. 초대 교회의 여러 교부들을 비롯하여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아빌라의 데레사 등 여러 관상가들이 주기도문으로 깊은 기도의 경지에 이르러 개인 기도의 묵상 자료로도 얼마나 탁월한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자주 외우는 기도문이다 보니 습관적으로 생각없이 암송해 버릴 때도 많지만, 기도문 청원 하나하나의 내용을 깊이 생각하면서 기도한다면, 가장 훌륭한 관상기도가 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기도 연구’로 정양모 신부님께 박사학위 논문을 쓸 수 있었던 것을 큰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신부님께서는 개신교, 가톨릭 할 것 없이 그리스도 신자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바치는 ‘주기도문’에 대해 관심이 많으셨고, 같은 기도문에 다른 번역으로 사용하기에 함께 사용할 수 없는 것을 무척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래서 김창락 목사님과 함께 1991년 <그리스도교와 겨레문화 연구회> 주최로 “주의 기도, 또는 주기도문, 천주교와 개신교가 같이 쓸 수 없을까?” 하는 주제로 토론회를 가진 이후 수 차례에 걸쳐 공청회를 여셨는데 저도 토론자로 참석했던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 기도문에 대한 신학적인 견해가 다른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르게 사용하던 우리말 번역의 어감 차이로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결국 원점으로 돌아섰던 일이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습니다. 언젠가 우리나라 개신교, 가톨릭 신자들이 한 목소리로 주기도문을 바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일치의 기도’인 주기도문의 중요 내용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맨 처음 호칭이 나오고 이어 일곱 가지 청원이 뒤따릅니다. 전반부 세 가지 청원은 하느님을 2인칭 “당신”으로 친밀하게 부르면서 우리의 궁극적인 청원이 될 하느님 이름의 성화, 하느님 나라의 도래,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비는 기도입니다, 후반부 네 가지 청원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지하여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필요, 곧 일용할 양식과 죄의 용서, 시련의 시간에서 지켜줄 것을 간구(유혹에서의 구출), 악의 세력으로부터의 보호를 요청하는 기도입니다. 기도문의 전반부가 최종적인 미래의 하느님의 다스림을 지향한다면, 기도문의 후반부는 현재 제자들이 살아갈 세상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기도를 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 뚜렷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부르는 호칭은 나와 기도를 받으시는 분의 관계를 뚜렷하게 드러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인간적으로 친밀한 호칭 “아빠”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를 만큼 가까이 느끼셨다는 것은 그 나머지 기도는 굳이 말로 다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다 알아주시리라는 확신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체험을 아빠 체험이라고 부를 만큼, 아빠라는 어감은 신뢰에 찬 언어인데, 그 후로 그분의 제자들은 그만큼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못 가졌기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수식어를 붙였고,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아버지 하느님’,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신앙이 가부장적인 교회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점은 큰 아쉬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튼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는 자기가 하느님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친밀한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하느님을 ‘당신’으로 부르는 주기도문의 전반부 기도의 주제는 ‘하느님 나라가 오소서’라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원은 궁극적으로 최종적인 종말의 완성을 지향합니다. 그 하느님 나라가 임박한 까닭에 현재의 삶은 지극히 심각한 사건이 되며, 그 현재는 미래에 대한 기대를 포함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 즉 하느님의 다스림은 하느님께서 몸소 이루시는 구원의 총체로서 인류 전체가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가리킵니다. 초대교회에서 하느님 나라는 부활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리라는 기대와 연결됩니다. 이 세상에 사탄의 세력이 있는 한, 하느님의 다스림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완전한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다스림이 올 수 있는 그 시간을 고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상 삶에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기도하는 것이 매우 피상적이 되기 쉬운데, 내가 ‘하느님 중심’으로 사는지, ‘나 중심’으로 사는지 살펴본다면, 내가 진정으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고대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 중심’으로 산다면, 우리의 사명과 정체성이 모두 오롯이 하느님께 뿌리를 두고 있기에 우리의 일상 삶과 존재의식에 갈라짐이 없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온전히 관상적이고 온전히 사도적인”(totally contemplative, totally apostolic) 삶이 되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받는데, 인간 중심으로 생각할 때는 관상적인 것과 사도적인 것이 양극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양쪽 모두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고, 기도와 일을 함께 통합해가야 한다고 봅니다. 요한 복음에 보면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요한 4,34) 라고 합니다.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오며”와 “뜻이 이루어지소서” 하는 청원은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하시면 좋겠고, 시간관계상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후반부 ‘우리’의 필요를 구하는 기도는 예수님의 고유한 사상이 잘 드러나는 내용들입니다. ‘일용할 빵’, ‘죄의 용서’, ‘유혹에서의 구출’(시련에서의 구원)은 역사적 현재 조건 안에서 제자됨의 길을 살아가는 데 은총으로 주어져야 할 선물들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기도 안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원과, 현재의 삶을 위한 요청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느님의 구원 행위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구원의 현실로 변혁시킬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완성될 미래의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기에, 우리의 현실은 하느님의 뜻에 맞갖은 것으로 변혁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궁극적인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며 살아간다 해도 우리에게 펼쳐지는 하루하루는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실존적인 필요를 정확히 간파하시고 필요한 요청을 할 수 있도록 현실적인 필요를 대변하시는 것 같습니다.

 

“일용할 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에피우시오스(epiousios)라는 단어 때문에 ① ‘필요한’ 빵(epi + ousia) ② ‘오늘의, 날마다의, 현재의 날을 위한’ 빵(epi + ousa + <hemera>) ③ '내일, 다음 날, 다가오는 날’의 빵(epi + <ousa +hemera>) 등 해석이 분분합니다. 제자들의 구체적인 생활상을 고려할 때, 주님 기도에서 청원하는 빵은 구체적인 매일의 생활에 필요한 양분을 공급해 주는 빵이라고 생각합니다. 빵이 인간의 생존을 유지하는 물질을 대표한다면 우리 삶에 필요한 물질 전체를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필수품을 양도하셨으므로 “먼저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면, 다른 모든 것들을 곁들여 받을 것”(마태 6,33)이라는 신뢰 속에서 매일의 양식을 청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죄의 용서’를 비는 청원은 우리의 정신적인 필요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교의 특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서슴없이 “용서하는 사랑”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용서야말로 그리스도인의 특전입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기에 수없는 실수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용서를 청하고 용서를 할 수 있는 자유를 체험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한 사람만이 자기에게 잘못한 이를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는 자유를 느낍니다. 하느님께서 얼마나 여러 번 나를 참아주시고 용서하셨는가를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의 잘못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이들을 용서했듯이” “우리에게도 우리 빚들을 용서하소서”라는 마태오의 원문을 보면, 인간의 용서가 하느님의 용서에 선행하는 것 같은 의혹을 주지만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한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은 그 누구라도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이면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는 마치 체인과도 같이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죄 용서 선포는 궁극적으로 사랑의 계명과 일치합니다. 그것은 수동적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화해와 사랑의 자세를 의미합니다. 하느님 앞에 나서기 전에 형제끼리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라는 것이 예수의 지칠 줄 모르는 촉구였습니다(루가 17,3-4=마태 18,21-22). 형제에 대한 용서는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한 예수 제자됨의 특징이며 징표가 됩니다.

 

마지막,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라는 여섯 번째 청원과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일곱 번째 청원은 하나의 청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영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공동번역 :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마르14,38).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사람은 그의 믿음을 증명할 기회를 찾는 것이 아니라, 시험에 들지 않기를 청합니다. 잘못된 결정을 거의 모면할 수 없게 하는 특수한 상황, 즉 특수한 “시련의 시간”에서 지켜줄 것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영’은 하느님께 받은 초월적 능력이고, ‘육’은 인간의 유한한 능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을 받은 영적 인간은 강하지만 타고난 힘만 믿는 육적 인간은 약하기 마련이므로, 하느님의 영을 간구해야만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서 보면, 예수님도 육의 약함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도록 근심에 싸여 있으므로(14,33-34) 아버지께 이 시간이 비켜가고 이 잔이 치워지도록 기도했던 것입니.]

 

유혹이란 종말 앞에서 기승을 부리게 되는 상황일 뿐 아니라(마태 24,11-13), 현재의 생활에서도 이미 실제적인 것이 됩니다. 시련 중에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하는 그 현실은(야고 1,12) 한 번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에서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해 달라”는 청원은 끊임없는 유혹의 협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며, 기정 사실인 유혹의 공격에 대한 투쟁이 될 것입니다. 또 주기도문에서 나오는 유혹(페이라스모스)에 정관사가 없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유혹, 곧 종말의 유혹을 암시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제자됨의 소명을 포기하고 변절로 이끌 수 있는 시련과 환난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해달라는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절실한 기도이며 가장 정직한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유혹을 일부러 만들고 그것을 넘어가며 자신의 용기와 힘을 자랑하는 영웅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심약하고 비겁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인생을 오래 살아온 사람일수록 사람의 힘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를 깨달을 것입니다. 연륜이 깊은 사람일수록 자만심보다는 만사에서 인간이 우주의 한 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낄 것이니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기도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첫 자리에 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면서도, 인간 실존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질적, 정신적, 영적 필요를 하느님께서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바로 ‘지금 여기’에 이루어질 때 종말론적 미래가 현재화될 것입니다.

 

L. 보프는 주의 기도문을 “총체적 해방을 위한 완전한 기도”로 정의하면서 우리가 희망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대변합니다. “하느님이 개입하시고 우리가 전향하여 한가지로 세계에 영향을 미칠 때, 이 세계는 하느님의 나라로 변혁된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는 증여(贈與)인 동시에 하나의 과제이며, 선물이면서 동시에 정복해야 할 그 무엇이고, 현재이면서 동시에 미래이며, 축하해야 할 잔치이며 동시에 미래의 약속이다. 희망은 이제 고통 받는 마음들 속에서 새로워진다. 이 빛은 그 나라의 화신(化身), 곧 예수 자신이다. 그가 있는 곳에 그 나라도 또한 돌입한다.”(『주의 기도』, 이정희역, 32쪽)

 

끝으로, 우루과이의 어느 작은 성당 벽에 있다는 글을 들으며 오늘 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너희는 ‘하늘에 계신’이라고 말하지 마라. <늘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말하지 마라. <늘 혼자만을 생각하면서>

‘아버지’라고 말하지 마라. <한 번도 아들딸로 산 적이 없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말하지 마라. <늘 자기 이름을 빛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말하지 마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지 마라. <늘 내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말하지 마라. <먹고살 재산을 다 축적해 놓았으면서>

‘저희가 용서하듯이’라고 말하지 마라. <늘 미움과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지 마라. <늘 죄지을 기회를 찾으면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지 마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응답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친 적도 없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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