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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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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http://www.inbora.com/bbs/board.php?bo_table=board13&wr_id=70&page=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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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틴 마터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당하는 것 밖에는 원하지 않습니다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 100-165년경)
교회의 상황과 활동배경
주후 2. 3세기에는 교회사에 있어서 '영웅적인 시기'였다. 초대교회는 약 3세기 동안 지속된 로마제국의 잔혹한 박해로 인하여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렇지만 모진 고문과 죽음의 위협도 결코 그리스도인을 굴복시키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부활에 대한 확신과 임박한 재림의 주를 기다리는 강인한 믿음과 대속의 주(Lord)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종교가 그렇게 오랜 기간을 유대인과 다른 종족과 로마의 권력 아래서 견디어 왔던가. 과연 어느 집단이 도덕적이고 영적인 힘만으로 승리를 쟁취해냈던가.
이처럼 철저하게 진행되었던 박해 속에서도 기독교는 급속히 확산되어 갔다. 이것을 보고 놀란 이교도 학자들과 정부의 관리들은 정치적이나 군사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억제하려고 하는 동시에 문서로도 이 신앙을 반박하려고 하였다.
기독교를 반대하려는 자들의 논증과 중상이 잇달아 나오자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를 변호하기 위한 문서를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변증가들은 문서로서 기독교 신앙을 억제하고 반대하려는 불순한 이론적인 도전을 끊게 하였으며, 기독교 사상을 밝히고 신앙심을 깊게 하며 또한 교회의 교리적인 신조를 체계화하는데 일익을 감당하였다. 변증가들은 로마 황제들이나 정부 관리들에게 기독교인은 무신론자가 아니며, 부도덕한 정치적인 집단이 아님을 밝히면서 기독교에 대한 관용을 호소하였다. 다른 한편 이교도 학자들의 중상적인 악평에 대해서는 기독교를 이교와 대비시켜 그 우월성을 밝히고, 더 나아가서는 기독교의 신앙으로 그들을 정복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2세기에 가장 중요한 변증가로서 기독교의 우월성과 무해성을 주장하며 글로서만이 아니라 자기의 생명을 바치기까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키고 증거한 저스틴 마터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교훈을 얻고자 한다.
출생과 회심
2세기에 가장 대표적인 변증가로서 철학자이며 순교자로 불려지는 저스틴은 주후 100년경에 고대의 사마리아 세겜에 있는 한 이교도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이교도인 그의 부모는 그에게 훌륭한 교육을 받게 했고, 저스틴은 총명한 학생이었다. 그는 젊어서 여행을 많이 했으며 당대에 유행하던 온갖 철학을 열정적으로 섭렵하면서 지적인 방황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진리를 찾아 고뇌하는 젊은 철학도의 영혼의 갈망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절실한 의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스토아주의(Stoisism), 아리스토텔레스 사상(Aristotle's Thought), 피타고라스주의(Pythagoreanism), 플라톤주의(Platonism)를 차례로 타진했다.
그가 32세 되던 어느 날, 세상의 혼잡을 떠나 조용히 한적한 해변을 걸으면서 파도소리를 듣고 있었다. 전도서 1:2에 있는 솔로몬의 말은 바로 그의 기분을 묘사한 것이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러다 그날 바닷가에서 나이 지긋한 그리스도인 노인을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 노인은 저스틴의 일부 플라톤 사상들을 논박한 다음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었다. 그날 이후 저스틴의 삶은 완전히 변했다.
저스틴은 이 노인과 대화하는 중에 지금까지 가진 모든 인간적인 지혜에 대한 신뢰성이 무너지고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예언한 히브리 예언자들의 교훈에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그는 구약과 신약의 연구를 통해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확신함으로써 진리의 참 근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하여 저스틴 자신이 말하기를 "그때 내 마음속에 불이 붙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예언자들과 그리스도의 친구 되었던 사람들의 사랑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믿을 수 있고 가치 있는 유일한 철학임도 알았다."고 했다.
저스틴이 기독교의 진리를 확신하게 된 또 하나의 요인은 순교자들이 보여준 용기였다. "나 자신이 또한 플라톤의 철학을 흡족해 하였고 기독교인들을 비방하는 소문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음이나 온갖 무서운 일에 직면하면서도 용감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악하고 육신적인 일에 몰두하여 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쾌락을 즐기거나 절제가 없는 사람, 또는 육신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자기 욕망의 대상을 빼앗아갈 죽음을 환영하지 못할 것이며 행정관의 눈을 피하여 살려고 애쓸 것이며, 죽을 것을 알면서 스스로 교인이라고 고백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제2변증).
활동
청년시대에 회심한 이후로 저스틴은 기독교 단체를 찾아다니면서 열심히 기독교 신앙에 대한 역사와 교리를 배웠다. 그는 회심 이후 30여년 동안 온 힘을 다하여 기독교 신앙에 헌신하고 이를 옹호하며 널리 전파하였다. 그리스도만이 우리 마음과 정신을 만족시켜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독교를 분명하게 변증했고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했다. 그는 성직자로 안수 받지는 않았지만 틈만 나면 설교하였다. 이후에 철학자의 옷을 입고 일정한 거처도 없이 각지방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고 저술활동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나중에는 로마에 도착하여 학교를 세우고 기독교를 변증하며 가르쳤다.
한편 그가 살던 2세기는 핍박기였을 뿐만 아니라 이단들이 준동하던 때였다. 그는 초대교회의 대표적 이단자인 말시온을 로마에서 만나 논쟁하였는데, 말시온은 신약성경이 구약성경과 모순된다고 주장한 반면 저스틴은 신약이 구약의 성취라고 역설했다.
그의 변증서들
저스틴은 8권의 책을 저술했지만 현재 3권만이 남아 있다. 「제1변증서」,「제2변증서」, 그리고 「유대인 트리포와의 대화」이다. 그의 글은 2세기 기독교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는「제1변증서」에서 황제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에게 기독교에 대한 부당한 핍박에 대해 항의했다. 구체적인 범죄행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을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처벌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방종교들 및 이방철학(플라톤주의)과 기독교 사이에 형식적인 유사성이 있다고 보았다. 「제2변증서」에서 저스틴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당국의 잔인한 핍박에 대해 항의하고 기독교에 대한 이방인들의 오해, 죽음의 유희를 즐기는 자들이라는 비난 등에 대해 해명했다. 「유대인 트리포와의 대화」는 유대인들을 향한 기독교 변증서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트리포가 기독교를 건전하고 합리적인 믿음이라고 생각해야 할 이유들을 훌륭하게 설명했다. 이 책에서 그는 유대인의 반대에 대한 기독교의 변호로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메시야이심을 믿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구약의 예언들이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으며 기독교인들이 새 이스라엘이요 하나님에 의해 참으로 선택된 자들이라고 주장했다. 변증론에 있어서는 대단히 지혜롭게 대처하였다. 철학자에게는 철학자가 되어서,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관점에서 대화하며 기독교를 변증하였다.
저스틴의 저서는 대단히 중요하고 흥미가 있는 것들이다. 샤프는 말하기를 "저스틴의 저서들은 교회가 아직도 작은 종파에 지나지 않을 때에 경멸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죽음도 달게 받던 모습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의 저서는 어느 것에 있어서나 저스틴의 정직함과 열심, 기독교에 대한 열성적인 사랑, 조금도 두려움이 없이 밖에서의 공격과 안에서의 곡해(曲解)에 대하여 힘있게 변호하였음이 여실히 나타난다. 그의 저서는 또한 공중예배와 성례집행에 관한 신뢰할만한 문서로서 가장 처음 나온 것이다. "만일 로마황제들이 그들에게 보낸 이 변호론을 읽었다면 그들은 필연코 깊은 감동을 받아 적어도 저스틴이 얼마나 정직하며 그리스도인들이 무죄하다는 것을 알았으리라." 저스틴의 변증서들은 이후의 변증가들 곧,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 테오필루스(Theophilus), 터툴리안(Tertullian), 펠릭스(Minucius Felix)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순교
로마에서 가르치는 동안 그는 크레스켄스라는 견유학파(Cynic) 철학자와 대중 앞에서 논쟁을 벌이곤 하였는데 크레스켄스는 덕이 삶의 유일한 목표하고 주장했다. 그 논쟁에서 저스틴에게 완전히 패하여 화가 난 그는 저스틴을 무신론자라는 죄목으로 로마인 장관에게 고발했다. 즉 로마의 신들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A.D 165년경 '명상록'으로 잘 알려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 초기에 6명의 성도들과 함께 로마의 장군 루스티쿠스의 재판정에 끌려가서 태형과 참수형을 선고받고, 목베임을 당하는 순교를 하였다. 그는 죽는 순간에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기쁜 얼굴로 기독교 진리와 자기의 믿음을 고백하였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당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세상사람이 장차 모든 것이 나타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자리에서 구원함과 기쁨을 줄 것이 이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0-12).
저스틴은 분명 교부 중에서 박식한 초기 기독교 사상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으로, 현대의 학자들도 그의 겸손, 정직, 용기에 감명을 받아왔다. 그는 글로써만이 아니고 죽음으로까지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그리스도를 증거한 2, 3세기 순교자의 대열에서 가장 큰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버나드(L.W. Bernard)에 의하면 그는 "기독교의 일반적 요소를 파악했으며 전 문명사를 그리스도 안에서 종합, 완성한 사도 바울 이후의 최초 사상가"였다.
오명희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당하는 것 밖에는 원하지 않습니다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 100-165년경)
교회의 상황과 활동배경
주후 2. 3세기에는 교회사에 있어서 '영웅적인 시기'였다. 초대교회는 약 3세기 동안 지속된 로마제국의 잔혹한 박해로 인하여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렇지만 모진 고문과 죽음의 위협도 결코 그리스도인을 굴복시키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부활에 대한 확신과 임박한 재림의 주를 기다리는 강인한 믿음과 대속의 주(Lord)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종교가 그렇게 오랜 기간을 유대인과 다른 종족과 로마의 권력 아래서 견디어 왔던가. 과연 어느 집단이 도덕적이고 영적인 힘만으로 승리를 쟁취해냈던가.
이처럼 철저하게 진행되었던 박해 속에서도 기독교는 급속히 확산되어 갔다. 이것을 보고 놀란 이교도 학자들과 정부의 관리들은 정치적이나 군사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억제하려고 하는 동시에 문서로도 이 신앙을 반박하려고 하였다.
기독교를 반대하려는 자들의 논증과 중상이 잇달아 나오자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를 변호하기 위한 문서를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변증가들은 문서로서 기독교 신앙을 억제하고 반대하려는 불순한 이론적인 도전을 끊게 하였으며, 기독교 사상을 밝히고 신앙심을 깊게 하며 또한 교회의 교리적인 신조를 체계화하는데 일익을 감당하였다. 변증가들은 로마 황제들이나 정부 관리들에게 기독교인은 무신론자가 아니며, 부도덕한 정치적인 집단이 아님을 밝히면서 기독교에 대한 관용을 호소하였다. 다른 한편 이교도 학자들의 중상적인 악평에 대해서는 기독교를 이교와 대비시켜 그 우월성을 밝히고, 더 나아가서는 기독교의 신앙으로 그들을 정복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2세기에 가장 중요한 변증가로서 기독교의 우월성과 무해성을 주장하며 글로서만이 아니라 자기의 생명을 바치기까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키고 증거한 저스틴 마터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교훈을 얻고자 한다.
출생과 회심
2세기에 가장 대표적인 변증가로서 철학자이며 순교자로 불려지는 저스틴은 주후 100년경에 고대의 사마리아 세겜에 있는 한 이교도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이교도인 그의 부모는 그에게 훌륭한 교육을 받게 했고, 저스틴은 총명한 학생이었다. 그는 젊어서 여행을 많이 했으며 당대에 유행하던 온갖 철학을 열정적으로 섭렵하면서 지적인 방황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진리를 찾아 고뇌하는 젊은 철학도의 영혼의 갈망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절실한 의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스토아주의(Stoisism), 아리스토텔레스 사상(Aristotle's Thought), 피타고라스주의(Pythagoreanism), 플라톤주의(Platonism)를 차례로 타진했다.
그가 32세 되던 어느 날, 세상의 혼잡을 떠나 조용히 한적한 해변을 걸으면서 파도소리를 듣고 있었다. 전도서 1:2에 있는 솔로몬의 말은 바로 그의 기분을 묘사한 것이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러다 그날 바닷가에서 나이 지긋한 그리스도인 노인을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 노인은 저스틴의 일부 플라톤 사상들을 논박한 다음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었다. 그날 이후 저스틴의 삶은 완전히 변했다.
저스틴은 이 노인과 대화하는 중에 지금까지 가진 모든 인간적인 지혜에 대한 신뢰성이 무너지고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예언한 히브리 예언자들의 교훈에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그는 구약과 신약의 연구를 통해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확신함으로써 진리의 참 근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하여 저스틴 자신이 말하기를 "그때 내 마음속에 불이 붙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예언자들과 그리스도의 친구 되었던 사람들의 사랑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믿을 수 있고 가치 있는 유일한 철학임도 알았다."고 했다.
저스틴이 기독교의 진리를 확신하게 된 또 하나의 요인은 순교자들이 보여준 용기였다. "나 자신이 또한 플라톤의 철학을 흡족해 하였고 기독교인들을 비방하는 소문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음이나 온갖 무서운 일에 직면하면서도 용감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악하고 육신적인 일에 몰두하여 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쾌락을 즐기거나 절제가 없는 사람, 또는 육신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자기 욕망의 대상을 빼앗아갈 죽음을 환영하지 못할 것이며 행정관의 눈을 피하여 살려고 애쓸 것이며, 죽을 것을 알면서 스스로 교인이라고 고백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제2변증).
활동
청년시대에 회심한 이후로 저스틴은 기독교 단체를 찾아다니면서 열심히 기독교 신앙에 대한 역사와 교리를 배웠다. 그는 회심 이후 30여년 동안 온 힘을 다하여 기독교 신앙에 헌신하고 이를 옹호하며 널리 전파하였다. 그리스도만이 우리 마음과 정신을 만족시켜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독교를 분명하게 변증했고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했다. 그는 성직자로 안수 받지는 않았지만 틈만 나면 설교하였다. 이후에 철학자의 옷을 입고 일정한 거처도 없이 각지방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고 저술활동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나중에는 로마에 도착하여 학교를 세우고 기독교를 변증하며 가르쳤다.
한편 그가 살던 2세기는 핍박기였을 뿐만 아니라 이단들이 준동하던 때였다. 그는 초대교회의 대표적 이단자인 말시온을 로마에서 만나 논쟁하였는데, 말시온은 신약성경이 구약성경과 모순된다고 주장한 반면 저스틴은 신약이 구약의 성취라고 역설했다.
그의 변증서들
저스틴은 8권의 책을 저술했지만 현재 3권만이 남아 있다. 「제1변증서」,「제2변증서」, 그리고 「유대인 트리포와의 대화」이다. 그의 글은 2세기 기독교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는「제1변증서」에서 황제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에게 기독교에 대한 부당한 핍박에 대해 항의했다. 구체적인 범죄행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을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처벌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방종교들 및 이방철학(플라톤주의)과 기독교 사이에 형식적인 유사성이 있다고 보았다. 「제2변증서」에서 저스틴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당국의 잔인한 핍박에 대해 항의하고 기독교에 대한 이방인들의 오해, 죽음의 유희를 즐기는 자들이라는 비난 등에 대해 해명했다. 「유대인 트리포와의 대화」는 유대인들을 향한 기독교 변증서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트리포가 기독교를 건전하고 합리적인 믿음이라고 생각해야 할 이유들을 훌륭하게 설명했다. 이 책에서 그는 유대인의 반대에 대한 기독교의 변호로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메시야이심을 믿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구약의 예언들이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으며 기독교인들이 새 이스라엘이요 하나님에 의해 참으로 선택된 자들이라고 주장했다. 변증론에 있어서는 대단히 지혜롭게 대처하였다. 철학자에게는 철학자가 되어서,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관점에서 대화하며 기독교를 변증하였다.
저스틴의 저서는 대단히 중요하고 흥미가 있는 것들이다. 샤프는 말하기를 "저스틴의 저서들은 교회가 아직도 작은 종파에 지나지 않을 때에 경멸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죽음도 달게 받던 모습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의 저서는 어느 것에 있어서나 저스틴의 정직함과 열심, 기독교에 대한 열성적인 사랑, 조금도 두려움이 없이 밖에서의 공격과 안에서의 곡해(曲解)에 대하여 힘있게 변호하였음이 여실히 나타난다. 그의 저서는 또한 공중예배와 성례집행에 관한 신뢰할만한 문서로서 가장 처음 나온 것이다. "만일 로마황제들이 그들에게 보낸 이 변호론을 읽었다면 그들은 필연코 깊은 감동을 받아 적어도 저스틴이 얼마나 정직하며 그리스도인들이 무죄하다는 것을 알았으리라." 저스틴의 변증서들은 이후의 변증가들 곧,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 테오필루스(Theophilus), 터툴리안(Tertullian), 펠릭스(Minucius Felix)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순교
로마에서 가르치는 동안 그는 크레스켄스라는 견유학파(Cynic) 철학자와 대중 앞에서 논쟁을 벌이곤 하였는데 크레스켄스는 덕이 삶의 유일한 목표하고 주장했다. 그 논쟁에서 저스틴에게 완전히 패하여 화가 난 그는 저스틴을 무신론자라는 죄목으로 로마인 장관에게 고발했다. 즉 로마의 신들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A.D 165년경 '명상록'으로 잘 알려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 초기에 6명의 성도들과 함께 로마의 장군 루스티쿠스의 재판정에 끌려가서 태형과 참수형을 선고받고, 목베임을 당하는 순교를 하였다. 그는 죽는 순간에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기쁜 얼굴로 기독교 진리와 자기의 믿음을 고백하였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당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세상사람이 장차 모든 것이 나타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자리에서 구원함과 기쁨을 줄 것이 이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0-12).
저스틴은 분명 교부 중에서 박식한 초기 기독교 사상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으로, 현대의 학자들도 그의 겸손, 정직, 용기에 감명을 받아왔다. 그는 글로써만이 아니고 죽음으로까지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그리스도를 증거한 2, 3세기 순교자의 대열에서 가장 큰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버나드(L.W. Bernard)에 의하면 그는 "기독교의 일반적 요소를 파악했으며 전 문명사를 그리스도 안에서 종합, 완성한 사도 바울 이후의 최초 사상가"였다.
오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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