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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억하라

신명기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651 추천 수 0 2011.12.18 21: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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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신8:11-18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557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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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억하라

신명기 8:11-18, 창조절 열둘째(추수감사) 주일, 2011년 11월20일

 

오늘 설교 본문인 신 8:11-18절은 진부해 보입니다. 소위 ‘신명기사관’의 논점을 그대로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신명기의 역사관은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19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이런 말씀은 마치 조상을 잘 섬기면 복을 받고 섬기지 못하면 복을 받지 못한다는 동양의 유교적 가르침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신명기의 이런 말씀을 좀 유치하다고, 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일단 세상살이를 겉으로만 보면 그런 주장이 옳긴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늘 복을 받았거나, 거꾸로 불순종했다고 해서 늘 벌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복과 벌은 기계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생활이 아무리 좋아도 복을 받지 못하기도 하고, 믿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도 복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명기 기자가 이런 세상살이의 이치를 모르고 하나님의 복과 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고유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을 천천히 따라가겠습니다.

 

광야와 가나안

    

신명기는 출애굽 이후 광야 40년을 끝내고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행한 모세의 연설로 알려져 있습니다. 앞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충고입니다. 형식적으로는 모세의 연설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이미 가나안에 들어가서 왕조를 세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예언자들의 설교입니다. 미래에 벌어질 문제라기보다는 과거에, 또는 현재 벌어진 문제에 대한 예언자들의 영적 통찰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알기 쉽게 예를 든다면 신자유주의 체제 앞에서 살아가는, 특히 FTA 체제 앞에서 살아가야 할 대한민국 사람들을 향한 목사들의 설교와 비슷합니다. 신명기 본문은 관념적이고 일반적인 종교적 훈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에 대한 분석, 경고, 대안 제시라는 뜻입니다.

    

신명기 기자는 본문에서 광야의 삶과 가나안의 삶을 대비합니다. 광야의 삶은 생존 자체가 위태로웠던 시절을 가리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이스라엘은 소수민족으로 소외당하던 애굽을 탈출한 뒤에 광야에서 생존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 상황이 얼마나 열악했을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한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많았습니다. 실제로 돌아간 사람도 많았을 겁니다. 신명기 기자는 이 끔찍한 광야시절을 오히려 복된 시절로 기억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생존의 위기에서 이스라엘이 낮아졌기 때문입니다.(16절) 겸손해졌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겸손해진 이유는 생존의 근원이 자기들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겸손이 바로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는 겁니다.(16절)

    

이와 달리 가나안 시절은 겸손이 아니라 교만의 가능성이 높은 시절이었습니다. 이유는 풍요에 놓여 있습니다. 광야의 유목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에 정착해서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 소유가 늘었습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가나안에는 아름다운 여인들과 잘생긴 남자들도 많았습니다. 풍년과 다산을 기념하는 축제도 흔했습니다. 그야말로 인생을 엔조이할 수 있는 조건이 잘 갖추어졌습니다. 거칠고 척박한 광야와는 완전히 다른 삶입니다. 신명기 기자는 이런 풍요의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교만해진다고 보았습니다. 교만은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17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가나안의 풍요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교만해졌다는 사실은 좀 아이러니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으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어야만 했는데, 왜 교만해졌다는 것일까요? 신명기 기자가 현실을 과장해서 표현한 것은 아닐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난은 겸손하게 하고, 부는 교만하게 하나요? 그리고 실제로 가난한 사람은 겸손하고, 부자는 교만한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가난하지만 교만한 사람도 있고, 부자지만 겸손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 전체로 보며, 즉 시대정신에서 보면 가난이 겸손하게 만들며, 부가 교만하게 만든다는 말을 옳습니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자나라 사람들은, 졸부가 된 대한민국에서 그런 현상을 자주 볼 수 있듯이, 교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과 부의 문제는 아주 미묘하기 때문에 그것을 말하는 성경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전인수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팔복의 첫 항목은 가난한 자에 대한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누가복음은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이 말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나 누가복음이 말하는 가난한 자나 기본적으로는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하면 마음도 가난하게 됩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을 신명기 기자의 표현으로 바꾸면 겸손입니다. 이것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가난한 자는 자기의 능력을 의지할 수 없기 때문에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서는 이것을 복이라고 말합니다. 무언가를 소유하기 때문에 복되다는 게 아니라 소유하지 않기 때문에 복되다는 겁니다. 이런 말씀에 근거해서 가난한 교회가 복이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거꾸로 부자교회는 교만할 위험성이 많습니다. 자기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문제를 세상의 법정에 끌고 가서 해결하려는 교회들을 보십시오. 거의 다 부자교회입니다. 이런 점에서 부자가 된다는 것, 부자교회가 된다는 것, 부자나라가 된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런 나라들은 정말 예민하게 자기를 통찰해야 합니다. 그런 영적 성찰을 게을리 하면 순식간에 교만에 떨어집니다. 혹시 교만해지더라도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가요? 또는 부자가 되더라도 겸손하기만 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분들이 계신가요? 예, 여러분 각자가 알아서 판단하십시오. 그러나 가나안의 풍요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혼을 파괴할 수 있다는 신명기 기자의 경고를 잊지 마십시오.

 

여호와를 기억하라

    

지금 저는 여러분들에게 가난의 미학을 음미하라고 설교하는 게 아닙니다. 가난은 부 못지않게 우리의 삶과 영혼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가치와 질서를 파괴시킬 수도 있습니다. 가난 자체가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신명기 기자도 생존이 위태로웠던 광야시절도 돌아가야 한다고 외치는 게 아닙니다. 그 시절은 이미 지났습니다. 아무도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5백 년 전 농경문화로 돌아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구슬치기와 딱지치기를 하던 우리의 어린 시절이 아무리 낭만적이었다고 하더라도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신명기 기자는 지금 풍요의 신 바알로 대표되는 가나안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를 언급하는 중입니다. 이들은 가나안에 집단 이주해서 자기 명의의 집도 장만했고, 잔액이 넉넉한 저금통장도 마련했고, 노후연금도 갖췄습니다. 어느 정도 살만하게 된 것입니다. 신명기 기자는 바로 이 순간에 영혼의 위기가 찾아온다는 사실을 짚었습니다. 그 위기는 앞에서 말씀드린 자기신뢰인 교만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명기 기자의 대답은 18a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가나안의 풍요로 인해서 영적인 교만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상투적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교회생활을 잘 하라는 말씀으로만 받으면 안 됩니다. 교회생활은 물론 필요합니다. 가능한 성실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는 말씀은 훨씬 근원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그가 누군지를 아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요? 그분이 어떻게 세상을 통치하시나요? 신명기 기자에 따르면 하나님 여호와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살아갈 능력을 주시는 분입니다.(8b절) 생명의 근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사실을 실제로 안다면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더 나가서 자신이 수고하여 얻은 모든 소유, 자기가 이룬 모든 업적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재산은 물론이고, 학문적 업적과 예술도, 그리고 자식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따로 있는데 어떻게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추수감사절이기도 합니다. 땅에서 나오는 모든 먹을거리들이 결국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그가 주인이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절기입니다. 그것을 안다면 먹을거리를 독차지할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설교는 하지만 하나님을 생명의 주인이요, 수여자로 생각하는 것은 쉬운 게 아닙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살아갑니다. 자기집중, 자기관심, 자기연민이 우리의 무의식까지 지배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집요하게 우리를 따라다니는지 모릅니다. 마치 그림자와 같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떼어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죄의 본질을 교만(휘브리스)이라고 보았습니다. 그걸 우리의 노력으로 떨쳐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운명은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자기에게만 관심을 두는 인간 본성과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는 하나님 말씀 사이에 오도 가도 못합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께 온전히 마음을 두는 것 같고, 또 어떤 때는 자기에게만 몰두하는 것 같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중첩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시계추처럼 오갈지도 모릅니다.

    

이 딜레마를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요? 죽기 전까지는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만, 즉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생명체로 변화되어야만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때를 우리는 기다립니다. 우리와 더불어 이 세상 모든 피조물도 그 구원의 때를 기다립니다. 아직 종말이 오기 전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 딜레마를 그냥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체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종말의 생명을 기다리면서 구도적인 태도로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게 최선입니다.

    

구도적인 태도로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생명의 원천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메멘토 모리’, 즉 죽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생명이 어디서 왔느냐에 대한, 그리고 그 생명이 어떻게 완성되느냐에 대한 실존적인 질문이며 고백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죽음을 극복하신 유일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기억을 통해서 여러분은 어떤 형편에서도 영적으로 겸손하게 될 것이며, 당연히 하나님의 놀라운 복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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