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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디모데후 박신 목사............... 조회 수 2349 추천 수 0 2011.12.19 23: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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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딤후3:14-17 
설교자 : 박신 목사 
참고 : http://www.nosuchjesus.com/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을 힘써 알자.(2)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4-17)


장님 코끼리 만지기

간혹 불신자도 때로 세상사를 멋대로 조종하는 신적존재들이 있다는 것까지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 존재들이 과연 어떤 특성을 가졌으며 특별히 자기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는지에 관해선 전혀 알지 못하며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자기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만 뭔가 눈에 안 보이는 방해 세력이 있는가보다 여기는 정도다. 그래서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면 방해만 하지 말아서 내 계획대로 순탄하게 해달라고 돼지 머리 앉혀놓고 열심히 간구한다. 그러나 여럿이 모여 신에게 진정한 존경심으로 경배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불신자가 신자와 가장 다른 점은 기도는 해도 예배는 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안다면 가장 먼저 보일 반응은 그 앞에 꿇어 엎드리는 것 말고는 없다. 절대적으로 선하고 의로우신 하나님과 대비해 자신의 실체를 정확히 깨닫게 되면 한 없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특별히 그분이 죄에 찌든 추하고 더러운 나의 개인적 모습까지 세밀하게 아셔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해 주신 은혜에 잠기면 평생을 두고 엎드려도 모자람을 절감하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이 하나님 앞에 보일 첫 번째 반응은 오직 경배와 찬양뿐이다.

문제는 태초부터 영원토록 자존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일개 피조물이자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이 어떻게 제대로 알 수 있는지 여부다. 그 답은 성경뿐이다. 다른 길이 없다. 바울이  말한 대로(롬1:18-20) 웅장한 대자연을 보거나, 내 속에 남아 있는 일말의 양심을 통해 그분의 존재성은 인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절대자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어떤 분이며 또 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기독교 신앙은 절대적으로 성경을, 구체적으로는 성경이 기술하고 있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주 오래 전에 기록된 성경 문자에 갇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철학적 사상이나 종교적 개념상의, 쉽게 말해 죽어 있는, 하나님을 믿는 것에 불과하다. 영원토록 실존하고 지금도 신자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성경 말씀을 통해 실제 체험으로 교제하는 것이다. 오직 성경이 믿음의 근거가 되며 말씀에 의해 믿음의 진정성 여부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또 성숙시킨다.  

비유컨대 물을 마시면 갈증이 없어지는데 과학 교과서를 읽어서 갈증과 해소의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사후에 확인하는 것과 같다. 교과서를 읽지 않으면 갈증 나면 물 마실 줄은 알지만 물이 도대체 무엇인지, 왜 갈증이 없어지는지 모르기에 평생을 두고도 물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진정한 감사가 생기지 않아 얼마나 귀한 줄 모른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성경을 읽지 않으면 평소에 하나님의 은혜를 늘 받고 있어도 그 받은 은혜를 도무지 감지도 못하고 그냥 넘어가버리게 된다. 간혹 큰 은혜를 받았을 때 순전히 느낌으로 인식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이 왜 그런 은혜를 베풀었는지 또 그 일을 통해 자신에게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 도무지 추측도 못한다. 자연히 그분에 대한 진정한 감사와 경배를 할 수 없다. 하나님을 알고 믿기 위해선 반드시 성경을 제대로 읽어야 한다.

물론 아무리 믿음이 좋아 신령한 신자라도 절대로 하나님의 전부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성경이 말하는 즉, 신구약 전체에 일관되게 드러난 범위 내에서의 그분의 모습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도 제한된 자신의 편견, 선입관, 경험, 감정, 지식에 따라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하는 하나님밖에 모르게 된다.  
            
예컨대 불신자가 병원에서도 포기한 말기 암을 기도원에서 간절히 기도하여 기적적으로 낫게 되면 당장 교회에 출석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에게 하나님은 기도하면 뭣이든 그대로 들어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일 뿐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도 신자의 모든 기도를 기도한 그대로 다 응답해주시는 분이 아니다.

또 전도 집회의 찬양과 간증에 감동받아 처음으로 교회에 출석한 자가 떠올리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어떻게 되겠는가? 상한 감정을 치유해주는 신경안정제 같은 분이 되지 않겠는가? 만약 출석한 교회의 찬양이나 말씀이 정서적으로 뜨겁게 다가오지 않으면 믿음조차 약해지고 심지어 감정이 믿음을 대신할 것이다. 성경은 환난 중에도 오히려 기뻐하라고 했다.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으로 항상 구름 위에 붕붕 떠다니게 만드시는 분이 아니다.

믿음이 단순히 개인적 경험, 기도응답, 이적, 감정 등에 근거해선 안 된다. 그것들이 믿음을 체험하고 실증하는 일시적 부분적 요소는 분명 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의 전부인양 하거나, 혹은 그것에 주로 의존하는 믿음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을 배제한 채로는 절대로 그분을 제대로 알 수 없기에 스스로 만들어낸 가공의 하나님을 믿은 것뿐이다.    

신앙은 어려서부터 배우는 것이다.

사람마다 믿음을 갖게 되는 계기는 다 다르다. 예를 든 대로 불치병이 낫거나 찬양집회에서 감동받아 교회에 출석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구원을 받았거나 믿음을 가졌다고 말해선 안 된다. 대개는 단지 믿음을 가져볼까 하는 마음의 준비가 된 것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그들은 세상에 자기 힘으로 되지 않는 일도 많으며 정작 큰 능력을 가진 불가시적 존재가 있다는 정도만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외부의 어떤 영적 능력에 의해 자기가 영향 받을 수도 있다고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고 성경 공부를 하면 자동적으로 믿음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말씀을 배우는 중에 믿음이 생길 수도 있다는 뜻이다.) 믿음은 어디까지나 성령이 간섭하여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여서 겸허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 모실 때에만 생긴다. 불신자 시절에는 예수에 대해, 나아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에 대해선 콧방귀만 뀌고 아예 들을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정말 진지하고도 순수한 마음으로 귀담아 듣고선 복음 안에 자신의 남은 인생을 온전히 의탁하게 된 것이다.

그 믿음은 십자가에 죽으신 성자 하나님 예수를 일체의 선입관과 편견을 갖지 않고 오로지 성경이 말하는 바대로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진짜 정확한 실체를 발견해야만 생긴다. 그 실체가 너무나 더럽고 추해 죽을 수밖에 없기에 오직 하나님의 긍휼 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음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예수가 온전한 구세주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진다. 한 마디로 이전의 자기는 완전히 버리고 예수 안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서 새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에는 비록 초자연적인 간섭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 지정의의 총체적 반응도 필히 요구된다. 말하자면 지성과 이성을 동원해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분별, 이해, 동의하는 배움의 단계가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사역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4:23) 맨 먼저 나오는 것, 즉 예수님이 3년간의 지상사역 중에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열두 명의 제자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합숙 생활을 통해 실천의 본을 보이면서까지 가르침에 몰두했다. 그들로 배우고 확신한 가운데 거하게 하려는 뜻이었다. 그래서 그들 또한 스승이 되어 예수님께 배운 것을 다른 이에게 같은 방식으로 가르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배움이란 마땅히 배운 것에 대한 확신을 수반해야 한다. 확신은 또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배운 대로 언제 어디에서나 자신의 삶에 반영하려는 태세를 완전히 갖추는 것을 뜻한다. 나아가 확신에 거(居)하는 것은 실제 삶 속에서 계속 확신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도덕적 종교적 계명만 지키는 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하다.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을 정말 성경대로의 하나님답게 만들어야 한다. 그분의 간섭과 인도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바뀌어서 새로운 인생의 목적을 갖고 이전과는 전혀 반대되는 방식의 삶을 살아야 한다.  

청년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워 알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가정과 회당에서 구약 성경 특별히 율법과 출애굽에 관한 기사들을 가르쳐 왔다. 바울이 강조하는 바는 성경에 대한 그런 지식적 앎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능한 일찍 체험하여 평생을 두고 그분께 배우며 확신한 것에 거하라는 뜻이다.

신자는 기독교 구원을 좀 더 넓은 차원에서 바라 볼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예정하신 자를 반드시 구원하신다. 그러나 그 구원이 단순히 지옥 형벌을 면케 하여 천국 보내는 것으로 그칠 것 같으면 구태여 어려서부터 구원의 확신을 심어줄 필요가 없다. 또 열심히 전도할 이유도 없다. 말하자면 인간의 입장에선 죽기 직전에 확신을 갖거나 죽을 때까지 그런 확신을 못 가져도 천국 가는 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모든 자가 똑 같이 죽을 죄인인데다 그 중에서 택한 자는 반드시 구원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와 달리 기독교에선 생전에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구원이 천국 가는 일로 그치지 않고 이 땅에서부터 천국의 삶을 누리고 또 주위에 나눠주라는 것이다. 특별히 어려서부터 그래야 하는 것은 새 생명 안에서 사는 새 인생을 더 풍성하고도 오랫동안 세상 앞에 증거 하라는 뜻이다. 바꿔 말해 하나님의 입장에선 구원 자체보다 구원 이후의 인생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물론 평생을 두고도 이런 저런 사정으로, 과연 그것이 정당한 핑계가 될지는 둘째 치고,  그리스도의 덕을 선전치 못할 수 있다. 비유컨대 그런 자는 입장권을 사서 디즈니랜드에 들어서긴 했지만 한 번도 놀이기구를 타지 못한 것과 같다. 천국에서 예수님이 놀이 공원에서 무엇이 가장 재미있고 신나더냐고 물어도 아무 대답도 못하게 된다. 구원은 받되 예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댄 그 영광스런 장소에서조차 그분과 전혀 교제를 나누지 못하는 부끄러운 구원이 될 뿐이다.  

현실에서 출발된 믿음

성실하게 교회 출석은 하지만 성경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를 모르며 심지어 알려고도 하지 않는 신자가 의외로 많다. 믿음을 혹시 지옥이 있을지 모르니 천국 보험에 드는 심정으로, 아니면 온갖 문제와 고난으로 힘들지만 교회에 오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기에, 또는 자기 소원을 이루려 열심히 기도하기 위해서만 가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순전히 자기 편의로만 믿는 자들이다.  

성경을 제대로 배운다면 올바른 믿음이 생기지 않을 리 없다. 성경이 엄숙히 선언하고 있지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십자가 복음만이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이다. 그런 설교를 매번 들으면서도 성경을 배우려 들지 않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절대적으로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당연히 그 믿음의  근거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하는지 여부다. 만약 그런 확신이 없다면 아무리 성경을 배워도 종교적 지식(knowledge)을 쌓는 것이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faith)이 생긴 것이 아니다. 성경을 제대로 배운다는 것은 성경을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럼 문제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여러 신학적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조금 색다르게 접근해보자.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씀이 무엇인지 아는가? 내가 너와 함께 하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말씀이 성경 전체에 몇 번 정도 나올 것 같은가? 놀랍고도 신기하게도 365번이다. 무슨 뜻인가? 우선 인생은 일 년 내내 염려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힘들고 고달프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종교를 갖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도 사실은 세상살이에 염려가 끊이지 않아서다. 한 사람의 예외 없이 인생은 정말로 평생에 걸쳐 고달프다. 믿음이 강하고 약하고 관계없다. 고난은 사람과 경우와 때를 가리지 않고 어김없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믿음이 고난을 막아주지는 못한다. 단지 모두가 겪는 고난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조절하는 능력일 뿐이다.

다른 말로 신앙은 고상하고 경건하고 심각하기보다는 기실 현실의 아주 세밀한 부분, 특별히 고난에 빠져 자신의 무력감을 절감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인간이란 존재의 너무나 미약함과 인생의 덧없음을 뼈저리게 느껴보지 못하고 교리만 배워선 명목상의 종교인은 될 수 있을지언정 생명력 넘치는 신앙인이 될 수는 없다.  

현실에서 출발된 믿음이라면 그 역할과 기능도 현실에 적용되어져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신자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믿음으로써 그 궁극적 운명은 천국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미 확보된 영생이 현실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 믿음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졌듯이 땅에서도 이뤄져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신자는 천국을 이 땅에서부터 실현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특별히 고난 중에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으면서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할 줄 알아야 한다. 성경이 가장 많이 말하고 있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주제라는 뜻이다. 아무리 일 년 내내 염려가 끊이지 않더라도 성경 말씀대로 믿음으로 승리하지 못하면 신앙을 가질 이유가 없고 신자라고 말하기조차 아깝다.

반면에 대부분의 종교 경전은 도덕률이나 종교적 계명이 주를 이룬다. 기도와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며 죄 안 짓고 착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을 가장 많이 설파한다. 인간이 신에게 바치고 순종하게 만드는 행동강령이다. 인간이 지어낸 종교이기에 자연히 신에게 최선의 것으로 바치겠다는 맹세와 또 신의 명령을 최대한 따르겠다는 서약이 주를 이룰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인 양  인간을 향해 염려하지 말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자기에게 최면을 거는 꼴밖에 안 된다. 인간이 지은 종교의 경전에는 그런 권면을, 그것도 공교롭게도 365번 말할 수는 결코 없다는 뜻이다. 성경이 염려하지 말라는 권면을 가장 많이 한 까닭은 오직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고난과 염려 가운데 있는 인간을 도리어 걱정하고 위로하며 힘을 주기 위해서다.  

믿음이 현실. 특별히 절망의 나락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이 분명히 임재 하셔서 위로해 주신 은혜를 실감했다는 체험적 고백이라는 뜻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장막 중에 함께 거하며 앞서 행군하셔서 자기 백성을 위해 직접 전쟁을 치르는 분이시다. 또 그 분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록한 것이 성경이다.

신조(creed)가 없는 성경

성경의 첫 말씀이 어떻게 시작되는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니라.”(창1;1)   이는 설명, 고백, 계명, 윤리, 신조가 아니다. 아주 간단한 한 마디 선언(proclamation)이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분석하여 그 존재성을 믿을 이유나 근거에 대한 언급은 사전에 전혀 없다. 나아가 기독교는 하나님이 존재하고 또 그분이 천지를 창조했음을 믿는다든지, 제 1신조로 삼는다는 식의 표현은 본 구절 뿐 아니라 성경 전체에 눈 닦고 찾으려 해도 없다.  

어찌 보면 성경 독자에게 아주 무례할 정도로 바로 갖다 들이미는 말이다. 이 진술의 진리성 여부는 아예 따질 필요도 없으니까 믿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투다. 그 선택은 오직 독자에게 달렸을 뿐이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맹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믿든 안 믿든 그 진리 됨에는 하등의 영향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성경은 거의 대부분의 내용이 진리(truth)와 사실(fact)을 담담하게 서술하는 이야기(narrative) 형식이다. 이야기 형식이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서 인간이 고안해낸 종교적 진술이 아니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성경은 결코 규정(code), 규칙(rule), 계명(law), 법규(regulation), 방안(manual), 교리(doctrine), 신조(creed) 등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야기란 듣는 자의 동의와 수용을 요구한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독자에게 오직 믿음만을 요구하며 또  믿음을 가진 독자라야 그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그런 종교적 진술이 기독교에는 있지만 성경에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불신자를 가르쳐 믿음을 갖게 하려는 목적으로 고안 된 것이 아니었다. 성경이 인간의 저작이라고 주장하며 예수님이 유일하신 구원의 길임을 완악하게 거부하는 이단들의 논리에 대응하기 위해, 이야기 형식 안에 일관되게 흐르는 뜻과 규범을 유추해 낸 것이다. 교리와 신조는 이미 완성된 성경에 의거하여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변증 내지 입증한 것일뿐이다.

물론 교리와 신조가 결과적으로는 신자들의 믿음을 더 깊은 확신으로 이끄는 역할을 감당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교리나 신조에 의거하지 않고도 가질 수 있다. 성경에 우리는 이런 저런 것을 믿는다든지, 심지어 이렇게 저렇게 하면 신으로부터 복을 받는다는 식의 표현이 없다. 인간 역사(history)에 직접 개입하고 계시면서 특별히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His-story)들로만 채워져 있다.

따라서 모든 이야기들을 이끌어가는 주체는 “여호와가 가라사대” 혹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표현대로 하나님과 예수님이다. “우리는 이렇게 믿는다.”는 식으로 인간으로 주어를 삼는 다른 종교의 진술과는 전혀 다르다. 특별히 예수님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를 본 자가 바로 하나님을 보았다”고 도무지 인간이라면 감히 두려워서도 하지 못할 말씀을 많이 하셨다. 또 바로 그런 이유 즉, 신성모독(blasphemy)으로 사형을 당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C. S. 루이스가 지적한 대로, 반드시 미친 자가 아니면 하나님 둘 중 하나다. 마찬가지로 성경에 대한 온당한 반응도 그 모든 진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수하게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미친 헛소리로 치부해야 한다. 이 둘 중 하나가 아닌 중간 지대에 선 어정쩡한 태도는 기독교에서 만은 절대 성립되지 않는다.

성경은 그야말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믿음이 우선적으로 요구되며 또 기독교의 구원도 같은 맥락에서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 이해를 초월한다는 것은 인간의 이해력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이지 이해와 상충된다는 뜻은 아니다. 이성이나 지성과 모순된다면 구태여 배울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성과 상충되지 않으면서 이해를 초월하는 것은 오히려 더 지성을 동원해 배워야 한다. 말하자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후에 열심히 배우면 확신에 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는 배워야만 믿어지지만 기독교는 그 반대로 믿어야만 배울 수 있다.  

기독교가 그 경전인 성경에 구체적으로 규범화되어 있지 않지만 신조를 작성할 수 있었던 까닭은 신구약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가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어떤 경미한 사안이라도  성경 66권 전체가 동일한 진술을 하고 있지 서로 모순 내지 상충되는 언급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구원의 참 의미

성경은 약 1500년에 걸쳐 40여명의 저자가 지은 66권의 책이다. 저자들의 직업은 왕, 선지자, 세리, 농부, 의사 등 다양하며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장소도 다 다르다. 그들이 모여서  주제를 정하여 어떻게 저작할 것인지 구체적인 편집회의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오직 한 가지 주제에 관해 진술했다. 그리고 염려와 불안에 휩싸인 인간들을 향해 아주 건방지게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는 말을 가장 많이, 그것도 아주 공교롭게도 365번 기술했다. 어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 한 가지 주제는 죄에 빠진 인류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15절)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모든 죄를 감당하여 죽으심으로 용서해주셨고 또 부활하심으로 새 생명을 선물로 주셨음을 믿어 구원을 얻는 십자가 복음이다. 요컨대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다. 구약성경은 예수님이 꼭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야만 했던 이유를 적어 놓았고, 신약은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과 그 결과를 밝힌 것이다.

재차 강조하건대 구원이 단순히 모든 죄를 용서 받아 천국 가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만약 그것이 구원의 전부라면 어려서부터 구원을 줄 필요가 없다. 예정된 대로 죽은 후에 구원을 줘도 그만이다. 기독교 구원이 생전에 성령의 깨우침으로 확신을 갖게 하는 이유는 구원은 칭의와 동시에 성화가 필연적으로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성화가 따르지 않고 단순히 칭의만 붙들고 있는 믿음은 그 구원의 유효성마저 의심해 보아야 한다.

본문에서 바울이 어떻게 말하는가? 디모데더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17절) 되라고 하지 않았는가? 우선 신자 본인부터 일 년 365일 염려가 끊이지 않더라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세상 끝 날과 땅 끝까지 동행하시는 예수님만 굳게 의지하여 이겨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님과 동행하므로 염려에 붙잡힐 필요가 전혀 없기에 대신에 그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며 그분이 자기에게 주신 소명을 실현하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신자는 모든 선한 일을 행함에 온전케 되어야 한다. 현재 처한 어떤 위치에서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썩는 밀알이 되어 그 공동체에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이 풍성하게 열매 맺게 해야 한다.

최소한 성경이 가장 관심을 많이 권하고 있는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당신께서 함께 하시기에 염려하지 말라는 당부를 그 말씀하신 회수대로 매일 아침마다 상기해야 한다. 정말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 전부를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완전히 의탁해야 한다. 예수 믿는 신자에겐 언제 어디서 어떤 형편에 있든, 아무리 허물과 죄악이 많아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려 있다.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천국이 이 땅에 실제로 도래했으며 누구라도 믿음으로 침노하는 자가 더 많이 차지할 수 있다.

나아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의 전부를 의탁하는 자는 그분께서 기필코 궁극적인 영광으로 이끄신다. 천국의 영광은 이미 확보되어 있으며 최종 승리는 보장되어 있다. 결국 신자에게 남은 책임이라고는 이 땅에서 정말 참 인간답게 살아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천국으로 변화시키는 길 뿐이다. 예수를 믿는 것이 단순히 죽어서 지옥 가지 않는 것을 훨씬 뛰어넘어, 동물과 다르게 심히 아름답게 창조된 인간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살아야만 할 모습대로 실제로 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배워 확신하고 또 확신대로 거하는 길 뿐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16절) 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아무리 경미한 주제라도 신구약을 관통해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기에 절대로 구절별로 따로 떼어내어 문자적 해석만 해선 안 된다. 반드시 전체 맥락에 맞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 신자라면 누구라도 반드시 성경 전체를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인지? 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야만 했는지? 왜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지? 그런 나와 예수님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인지? 과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제대로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믿은 결과는 어떻게 되는지? 평생을 배워도 배울 것이 더 남아 있다. 그럼 확신하여 거하려면 더더욱 시간을 아끼며 배워야 할 것 아닌가?

모든 인생은 365일 염려가 끊이지 않을 만큼 상처와 한숨과 눈물과 고통으로 점철된다. 거기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중 대부분이 이해 못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인간의 그 모든 영적인 갈증에 대한 분명한 해결책을 성경은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이 당신께서 세상과 인간을 다스리는 원리에 관해 직접 말씀하셨다.

요컨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지 않고는 하루도 제대로 살 수 없다는 뜻이다. 만약 성경을 몰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면 우주만물을 섭리하시는 그분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자기 문제의 모든 원인을 물질의 많고 적음에 돌릴 수밖에 없다. 이방인처럼  온갖 우상을 붙들고 그저 먹고 마시고 입는 것만 구하게 된다. 아니면 아예 자기 힘만 의지해 평생을 살다 헛되고 헛되다는 고백과 함께 어이없는 죽음을 불시에 맞든지 말이다.

본문 말씀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이 어려서부터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까닭은 오로지 성경을 배우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성경의 진리 됨의 확신에 거하게 해서 365일 겹치는 염려를 이기는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위로하게 위해서다.  

오늘날 기독교가 왜 사회적 영향력이 이전에 비해 현저하게 줄었는가? 다른 이유가 없다. 성경을 성경대로 제대로 배우지 않아 확신이 없고, 확신이 없으니까 든든하게 거할 수 있는 믿음의 바탕이 없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신자마저 365일 염려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마저 자신들의 경전인 성경을 외면하는 바람에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는 쫓지 않고 인간적 사상과 유행과 사조만 따르기 바쁘기 때문이다.

당신은 진짜로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적 말씀인지 확신하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열심히 예수를 믿어도 사실은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부터 다시 점검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하고도 날마다 배운 것에 거하지 않는다면 디즈니랜드에 입장만 했지 놀이기구는 하나도 타지 않은 셈이다. 주님이 동행은 해주실지 몰라도 그분의 은혜와 권능은 절대 누릴 수 없다는 뜻이다.    
    
8/18/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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