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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 출처 : | 순전한 신앙이야기<http://cafe.naver.com/ghkdqndl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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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신앙생활 속에 가깝고도 무서운 적은 믿음의 염려와 은혜의 느낌이 없도록 마음이 둔해져 가게 하는 형편이나 요소들입니다.
사도바울은 증거 하기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6-7)고 했습니다. 성도라면 그 내면에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함께 서로 거슬리며 작용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성경은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 하리라”고 말씀합니다.(갈5:16-17)
성령은 우리에게 임하셔서 먼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중생케 하는 역사를 하시고 그 다음 부터는 우리를 점점 사로잡아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성취 하려고 역사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의 모습을 가지며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이루며 누리는 영생의 삶을 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원치 않고 거부하며 오히려 그 은혜와 반대가 되는 세상과 사망의 삶으로 가려는 육체의 소욕이 우리 속에 살아서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며 또 문제는 그런 육체의 소욕을 더욱 부추기며 충동 시키는 세속적인 환경이나 문화 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고 더 큰 문제는 성도가 그런 세속적인 것들을 자꾸만 찾고 점점 빠져들고 중독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됨으로 인해 산자이면서도 죽은 자의 모습을 가지게 되고 무서운 침체와 시험과 괴로움에 허덕이게 되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증거를 보면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호4:11)고 했고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다고 했습니다.(호5:4) 여기서 음행이나 음란함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바알 우상을 숭배함으로 영적간음이요 또한 실제 정욕적인 것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는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는 것들이 있음을 말하고 포도주는 우리의 육신을 취하게 하는 것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 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21:34)고 경고하셨습니다.
성도의 마음을 둔하게 하는 것들이 바로 육신적인 삶에 치우쳐 근심하고 번뇌하는 것이요 세속의 방탕한 것들에 맛들이고 빠져 취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고 증거한 것입니다. 즉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이 시대의 모든 흐름과 거기에 끌리는 우리 옛 사람된 육체의 소욕을 벗고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누리기 위해 진리로 인도 하시는 성령을 좇아 나를 굴복 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지금 이 세대는 컴퓨터 문화나 텔레비전이나 영화나 오락이나 스포츠나 그 외에 모든 육신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이나 이생의 자랑으로 넘치는 풍조나 세상 인본주의에 빠져있고 현대 교회들은 하나님을 통해 그것을 더욱 기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된 것입니다. 실로 돌아오기 어려운 상태에 처해져 있지만 그것을 죽이시고 회복 하시는 하나님의 언약만이 소망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의 보편적인 세대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마태 11:16-17)
이 말씀은 당시대 유대인들의 신앙의 상태가 무감각하고 둔해져 있음을 비유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 아이들 놀이 가운데 장례식 흉내 놀이가 있었는데 서로 상대를 나누어 한쪽에서 애곡하면 반대편에서는 가슴을 치며 반응하는 것 이였고 잔치집 흉내놀이는 한편에서 피리를 불면 반대편에서는 춤추는 반응을 보이는 것 이였습니다. 그러나 그 놀이 관계가 상대의 무반응으로 잘 이루어지지 않음을 비유로 들어 당시 유대 무리들이 세례요한이 와서 회개를 촉구했지만 별 반응 없이 마음이 둔해져있는 상태를 지적했고 예수님은 천국의 실현의 기쁨으로 오셨지만 그 복음의 역사에도 무감각했던 당시 세대를 그렇게 비유지적 하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사회는 어렵고 혼잡하고 절망적인 상황이 많아 유대 백성들은 선지자를 기다렸고, 무엇보다 메시야를 학수고대했는데 어찌 그들은 세례요한의 외침에 모여만 들었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정한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그렇게 고대하던 메시야가 와서 그 나라의 구원을 나타내며 복음으로 선포하는데도 결국 예수님을 대다수가 떠나고 외면하고 말았을까요?
그들은 진실한 것에는 마음이 둔해져 있었고 인간적이고 헛된 것에만 예민해 있었던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무감각 무반응에 대한 실제적인 요인을 살펴볼 것 같으면 당시 유대인들은 본질적으로 그 복음의 역사를 들어도 모르고 보아도 알 수 없게 허락이 되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마 13:11-15)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그들 자신이 자기에 맞는 기대의 틀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맞고 그것을 해결하고 그 기대를 실현시켜 주는 메시야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반응은 실망이었고 예수님 말씀처럼 거룩한 것과 진주를 모르는 개돼지가 그것을 주는 자에게 무섭게 역반응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 7:6)
오늘날 이 세상 세대는 인간의 도리와 양심과 도덕성에 대해서는 너무 둔해져버렸고 욕망적이고 요란하고 쾌락적인 감각으로만 예민해져 더 자극적인 것을 찾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되었습니다.문제는 현대교회 세대들입니다.현대 교회 세대들은 바른 교훈은 받지 않고 진리의 가르침에는 마음이 둔해서 진리에서 떠나 자기 사욕에 맞게 가르치는 선생들의 허탄한 이야기에만 좋은 반응을 보이며 좇는다는 것입니다. (딤후 4:3-4)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세상 적으로 크고 인간적으로 부유한 것에만 관심이 있어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벌거벗고 수치스러운 자가 되어 있음도 모르고 자신들이 영적으로 소경되어 가련한 상태가 되어 있음도 모르게 매우 둔해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안일은 자기를 퇴보 기키고 자기를 죽이는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라 했습니다.(잠1:32) 세상일에는 염려가 넘치나 믿음의 염려에는 무감각하고 특히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복음에 둔해져가는 이 시대의 교회들이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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