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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되었다는 뜻은?

사도행전 최용우............... 조회 수 1957 추천 수 0 2012.01.03 23: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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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2:25‐36 
설교자 : 박신 목사 
참고 : http://www.nosuchjesus.com 
신자가 되었다는 뜻은?  
사도행전 강해 (11)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2:25‐36)

예수가 그리스도인 세 가지 근거

본문은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 되심을 구약의 예언을 들어 다시 한 번 더 확인 하는 내용이다. 설교의 초점은 아주 간단하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를 보내셨고 죽이셨고 다시 살리셨기에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이다. 간략한 설교이긴 해도 예수가 주가 되는 근거로 세 가지나 들어 변증하고 있다. 증거가 셋이라면 예수가 주되심에 전혀 부족하지 않다는 뜻이다.

우선 다윗이 시편에서 메시아에 대해 예언한 내용을 들고 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16:8‐11)

그런데 바울은 영혼이 음부에 버려지지 않아 썩지 않게 되는 것이 다윗 본인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 이유는 다윗은 이미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우리 중에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는 실제로 부활하였고 우리 모두가 그 일에 증인이라고 했다.

베드로는 또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110:1)는 예언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에 의해 성취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여서 성육신에 의한 구원 계획을 실패시키려는 사단의 계략은 주님의 부활하심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당연히 사단은 그분의 발등상 신세가 되어버렸다. 즉 예수님은 지금 성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하셔서 인간, 특별히 신자를 향한 사단의 어떤 훼방도 당신의 절대적 권능으로 통제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생전에 다윗의 이 시편 구절을 인용해 본인의 메시아 되심을 자증(自證)한 바 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하시더라 이에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막12:35‐37).

예수님은 “주께서 내 주께”라고 ‘주’라는 단어를 반복하여 인용했다. 그러나 다윗의 원래 시편에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라고 표현되어 있다. 말하자면 다윗은 예수님이 설명한 대로 예수님 오시기 천 년 전에 이미 성령의 감동으로 “내 주되시는 메시아”가 부활하며 승천하리라는 것을 예언했던 것이다. 지금 베드로도 “다윗은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즉 다윗의 후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라고 예언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요컨대 성령이 다윗을 통해  예언한 내용들이 예수 개인에게 전부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가 메시아이신 두 번째 근거로 사도들이 성령의 강림으로 방언을 한 것을 들었다. 방언은 당시로선 아주 생소하고 인간 이성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기 직전에 이미 성령을 보내기로 약속했던 그대로 강림하였고 그로 인해 방언을 하게 됐다면, 그것도 120여명이 한꺼번에 동일한 모습으로, 그분은 결코 인간일 수 없다는 뜻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16,26).

성령을 받아 방언을 하게 된 베드로로선 자연히 이런 일들이 하나님에 의해 주관되고 있음을 실감했다. 또 요엘 선지자와 다윗의 예언들이 무엇을 뜻하며 어떻게 이뤄졌는지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무식한 자신을 성령이 깨우쳐 주지 않고는 알 수 없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무엇보다 자신을 포함한 120 여명의 사도가 일시에 방언하는 것을 너희들이 직접 보고 들었으므로 예수가 메시아임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아니냐고 변증한 것이다.

그가 마지막 세 번째로 든 증거는 예수님의 부활이다. 율법에선 두 명 이상의 증인만 있으면 되는데  지금 이 자리에 함께 한 120 여명의 제자 모두가 그분의 부활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증인(Eye Witness)이라는 것이다. 어떤 도독이 잡혀 와서 재판을 받는데 현장에서 눈으로 본 증인이 4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이도독이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재판장님 제가 도적질을 하는 것을 본 증인은 4명뿐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제가 도적질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증인은 40명도 더 세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직접 본 증인은 500 명이 넘었지만, 오순절 현장에 그중 120명이나 있었다. 그런데도 그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못하면 바로 이런 도독 같은 궤변을 늘어놓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결국 베드로의 변증은 “예수가 부활하셨기에 메시아다”라는 사실에 초점이 모여졌다. 생명과 사망을 주관하고 초월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로 구세주인 최종적이며 완전한 증거는 부활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인간 다윗의 육체는 장사되어 썩었기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갈 수 없었지만 부활한 예수는 다르다고 강조한 것이다. 즉 구약의 모든 예언이 사실은 예수에 대한 것이지만 특별히 이 시편을 인용한 것은 메시아의 부활을 예시하는 내용 때문이었던 것이다.  

초대 교회 설교의 핵심 주제

베드로의 이 설교는 예수님의 직접제자로서 일반인을 상대로 한 첫 설교였다. 말하자면 기독교 역사상 첫 설교였다. 그 이후 모든 설교가 따라야 할 본이라는 뜻이다. 그는 성령의 완전한 충만함을 입고 성령의 인도대로 선포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직접 하신 설교였다. 그리고 그 설교의 핵심은 예수님이 부활하였기에 메시아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 이후 초대교회 사도들의 설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메시아이므로 그 분만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아주 단순한 내용이었다.

베드로가 설교할 이 당시는 바울이 로마서에서 설명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써 의롭다하심을 얻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가 아직 확립되기 전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체계적 교리로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대부분의 청중이 예수님이 지상 사역 동안에 베풀었던 많은 치유와 이적의 직간접적인 증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또 그분의 골고다 십자가 처형 사건은 물론이거니와 부활에 대한 소문도 유대 사회에 널리 펴져 있었다. 거기에 부활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이 바로 눈앞에서 각기 자기들이 사는 나라의 언어로 그분의 부활을 증거 했다.    

한 마디로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과 동시대의 사람이었다. 그분의 지상 사역과 가르침을 많이 알고 있었기에 당신의 예언대로 부활했다는 사실만 확인시키면 생전의 가르침은 당연히 진리로 확증되는 셈이다. 구태여 교리를 들어서 처음부터 다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지금 베드로의 비교적 단순했던  설교가 끝나자 그날로 구원받은 자가 삼천이 더 되었다. 그들에겐 위에 들은 3가지 증거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마가의 다락방에 충만하게 임했던 성령이 그 회개한 삼천의 심령들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임했기 때문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초대교회의 예배는 성령의 충만한 임재 아래 말 그대로 예수님만을 기념하는 추모의 모임이었다. 오늘날처럼 묵도, 찬송, 성시교독, 성가대 찬송, 헌금, 기도, 설교 등등 복잡한 순서와 형식을 처음부터 갖추지는 않았다. 아주 자연스런 분위기에서 단순히 자기들 스승이자 구세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이었다. 주로 가정에서 함께 모여 예수님이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고 어떤 기적을 보였다고 기억을 더듬어 서로 증언했다. 또 왜 아무 말 없이 십자가 처형을 당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는 식으로 각자 성령의 인도를 받아 깨우친 대로 나누었다.

아마 그 중에는 이런 식의 설왕설래도 있었을 것이다. “도마야! 주님이 다시 살아서 오셨을 때 조금 심했잖아? 기어이 주님이 너더러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할 만큼 믿지 못하다니... 그런데 어쨌든 우리 선생님은 대단하셔. 메시야임이 틀림없어! 우리 중 한 명도 사흘 만에 다시 사신다는 말을 안 믿었잖아? 지금쯤 빌라도나 가야바가 잠을 못 잘 거야.”

지금 설교를 하고 있는 베드로도 틀림없이 자신의 여러 부끄러웠던 실수들을 뒤늦게 회개했을 것이다. 특별히 자기가 스승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감히 나섰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했을 때의 비참했던 심경을 눈물 흘리며 솔직하게 토로했을 것이다. 그 때 아무 말 없이 자기를 쳐다보던 주님의 눈에서 읽었던 사랑과 긍휼의 뜻과 함께 말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세 번이나 받고선 주님으로부터 온전한 용서와 구원을 받았음을 확신하게 되었고 또 그분께 전적으로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헌신하게 된 내면의 영적 변화도 간증했을 것이다.    

그런 담론이 계속 이어지는 중에 누군가가 주님이 우리가 모일 때마다 떡을 떼고 잔을 나누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이야기만 하고 있으면 어떡하느냐고 상기시켰을 것이다. 그래서 떡을 떼고 잔을 나눌 때에 성령이 그들의 심령에 충만하게 임하자 누군가 감격과 환희에 잠겨 찬양을 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또 이어서 누군가는 십자가 구원의 크신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를 눈물로 드렸을 것이다.

일련의 자연스런 예수님 추모 모임들을 통해 초대 교회 예배 방식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주님의 가르침을 다시 조명하는 사도들의 설교와, 성찬 예식과, 기도와 찬양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물 흐르듯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예배 참석자 모두에게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회개와 감격과 헌신과 순종이 따랐을 것이다. 요즘 열린 예배가 유행처럼 시도되고 있지만 사실 그 안에서도 어떤 틀이 형식적으로 반복해서 지켜지면 엄격히 말해 이미 열린 예배는 아니다. 그러나 이 초대교회의 예배야 말로 열린 예배, 성령이 인도하는 예배, 주님의 임재가 충만한 예배였던 것이다.

또 그 모든 열린 예배의 핵심 주제는 오직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이었다. 역으로 오직 부활하신 주님의 영이 함께 했기에 그런 예배는 가능했다. 모든 참석자가 부활하신 주님의 권능을 덧입고 간절한 영생의 소망을 가지는 예배였다. 만약 오늘날 예배에도 부활하신 예수를 믿어야만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단순한 메시지만 매주 전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식상한 교인들의 숫자가 줄고 얼마 안 가 교회 문을 닫아야할까? 절대 그렇지 않다. 인간적 추측일 뿐이다. 진정한 부활의 메시지가 성령의 권능을 입고 울려 퍼진다면 그야말로 진정한 열린 예배가 되고 오히려 초대교회처럼 폭발적인 부흥이 일어날 것이다.  

예배의 형식에서 열렸다고 열린 예배가 될 수 없다. 사단에 묶여 죄에 찌든 영혼이 열려야만 열린 예배다. 또 그렇게 열 수 있는 키는 오직 십자가 복음뿐이다. 예수님이 기독교 최초의 설교를 하고 있는 베드로가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믿음을 보시고 이미 그렇게 약속하셨지 않는가?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마16:16-20)

부활 증인이 되어 있는가?

베드로는 예수가 부활하신 사실에 “우리가 다 증인”이라고 했다. 단순히 증인 숫자가 많으니 충분히 믿을 만하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이 승천 직전에 제자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성령을 받은 자들은 모두 증인이 될 것이라고 했다.

지금 함께한 사도들이 천하 각국의 말로 복음을 전하고 있으니 예수님의 이 예언도 그대로 응해졌다고 간증한 것이다. 예수님 부활의 진위(眞僞) 여부만 확증한 것이 아니었다. 사도 이후 성령으로 거듭난 모든 신자들은, 평신도 목사 선교사 등 맡은 직분에 관계없이 증인으로 부름 받았다는 뜻이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에 그리스도 되심을 전하는 증인으로 말이다.  

따라서 신자라면 세상 사람들 앞에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 서야 하는데 과연 우리가 그 직무를 잘 감당하고 있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부활을 증언하고 있는가? 말로 설명하는가? 과학적인 실험과 자료로 증명하는가? 신학적 논리로 토론을 하는가? 성경구절을 갖다 대며 지금 당장은 안 믿기어도 믿어야만 한다고 반 강제적으로 설득하는가? 솔직히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크게 효과적이지 않다. 부활을 어떻게 속 시원하게 증명할 수 있겠는가?

부활을 증명해낼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 밖에 없다. 바로 신자 자신의 정말로 신자 된 모습을 통해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로서 이전 것은 지나간 새것이 되었다.(고후5:17) 또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 자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는 것이며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된 것이다.(롬6:3‐5) 말하자면 신자가 바로 이미 부활한 신분이기에 그 바뀐 실체를 정확히 보이기만 하면 된다.  

평범한 신자가 확실하게 부활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렇게 큰 권능을 보이셨던 예수님의 부활이야 당연히 꾸며낸 이야기가 결코 아님을 인정할 것 아닌가? 예수를 믿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모습을 아직 주님의 은혜를 몰라 그렇게 변화되지 못한 자들 앞에 드러내야 한다. 그래서 그 사람들로 자기도 저처럼 변화되고 싶다는 소원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

그런데 솔직히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대부분의 신자는 분명 세례를 받았다. 성경은 세례를 부활과 연합하는 일이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지 않는가? 그럼 구원의 확신도 없이 교회에 그저 다니는데 목사가 세례 받아야 한다고 권해서 받은 것인가? 또 회사에서 햇수가 차면 진급하듯 연륜과 봉사와 헌금을 기준하여 서리집사, 안수집사, 장로를 받았는가? 말하자면 교회라는 조직체의 일원이 되어져 가는 그저 그만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말이다.  

부활 증거가 사라진 것은 그야말로 한국교회를 비롯한 모든 현대 교회의 위기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했다는 순수 복음을 전하지 않고 있다. 베드로의 첫 번 설교, 아니 하나님 하신 기독교 최초의 설교의 본을 따르지 않고 있다. 초대 교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예배를 보고 있다면 당연히 그 부흥도 이뤄지지 않을 것 아닌가?

다른 말로 부활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 부활의 시작, 과정, 결과, 영향 등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아니 죄, 죽음, 부활 같은 메시지는 신자들이 이해하지도 못하고 듣기 싫어한다고 아예 설교하지 않는다. 부활절, 크리스마스 같이 어쩔 수 없이 전해야 하는 한두 번의 절기는 빼고 말이다.

그 당연한 결과로 많은 신자들이 그저 조금 선해지고 겸손해지고 유연해진 정도로 새사람이 되었다고 스스로 오해하고 있다. 주위 사람들에게도 예수 믿은 생색은 내야하니까 이전보다 조금 죄를 덜 짓는 정도다. 아니 그보다는 주일 성수를 성실하게 하고 교회 모임에 적극적이며 봉사 헌금 기도 전도 등을 많이 하는 자가 새 사람의 정의가 되어 버렸다.
이는 도덕적 종교적 중생은 될지언정 성경적 중생, 즉 새 사람으로 부활한 것이 결코 아니다. 놀랍고도 신기하게 신자들 스스로는 부활했다고 착각하지만 막상 그 증거를 보고 평가해야 하는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 자연히 예수님의 부활마저 무시되고 있는데 그 원인의 대부분이 바로 이런 신자들 때문이다. 예수라는 피고를 도와 증인이 되어야 할 자가 검찰 측에 붙어서 더 불리한 증언을 남발하고 있는 꼴이라는 뜻이다.    

부활의 진정한 의미

부활이 되려면 가장 먼저 또 반드시 죽음이 전제 되어야만 한다.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도 솔직히  가장 쉽게 잊고, 아니 모르고 있는 측면이다. 죽지 않고는 부활이 없으며 또 그 죽음은 반드시 완전한 죽음이어야 한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실제로 완전히 죽었지 않는가? 그것도 성부 하나님에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하면서까지 말이다.

그런데도 현대 교회 안의 실상은 전체가 다 죽는 완전한 죽음은 아주 드물고 일부만 죽는 가짜 죽음만 성행하고 있다. 완전히 죽지도 않고선 짐짓 중생했다고 착각한다. 예컨대 죽다가 살아났네, 하마터면 죽을 뻔 했네 같은 표현은 죽은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런 것은 죽는 시늉만 하다가 기사회생한 것에 불과하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정도가 아니다. 초대교회처럼 이전 것은 완전히 죽었으니 누구든지 보고 새것이라고 알 수 있어야만 한다.

이전 것이 그냥 지나갔거나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어떻게 되는가? 부활이 아니라 성장, 진화, 발전일 뿐이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다. 다른 모든 종교처럼 우리 자신이 노력하여 성장이나 진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갈2:20) 예수 믿기 전의 옛 사람은 진짜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매달아 완전히 죽여서 장사되어야 한다.

장사란 땅 속에 완전히 묻는 것뿐만 아니라 다시 파내지 않는 것이다. 무덤을 다시 파는 것은 도굴이나 형벌을 더 받거나 과학실험 할 때뿐인데 신앙생활에 그런 일은 아예 있을 필요조차 없지 않는가? 간혹 거듭난 자들마저 옛 사람을 다시 파내려는 경우를 보는데 그야말로 형벌을 더하려는 짓이다. 복음으로 다 씻어진 자신의 죄책을 다시 짊어지겠다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 완전한 죽음은 단 1회에 한(限)하여야 한다. 그런데도 여러 번 죽었다 여러 번 다시 사는 교인도 많다. 여러 번 죽었다 매번 다시 살아나는 것은 중국무협영화에 나오는 강시뿐이다. 죽음을 여러 번 겪을 수 없듯이 당연히 부활도 여러 번 겪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역사적 사건은 2000년 전 골고다 언덕에 단 한번만 있었다. 더 이상 따로 보탤 것이 없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은총이었다는 뜻이다. 하나님 본체이신 그분이 죽으시고 그 보혈로 인류의 죄 값을 직접 감당했는데 더 이상 무슨 일이 또 필요하겠는가?

만약 십자가 구원의 은총이 완전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부족했다면 지금껏 인류는 아무 소망 없이 죽음의 절망 아래 있었을 것이다. 베드로의 설교 또한 완전히 지어낸 헛소리에 불과하며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닌 일개 마술사에 불과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무식한 어부 베드로의 설교로 삼천 명이 넘는 자가 단번에 회개하는, 즉 완전히 죽었다 되살아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 가지로 예수를 처음 믿을 때는 그분의 십자가 은혜 아래 자기 옛사람을 완전히 죽여 장사해야 한다. 그야말로 평생에 한 번 있는 절대 절명의 사건이어야 한다. 자신의 진정한 영적 실체가 얼마나 더럽고 추한지 그래서 죽음으로도 자기 죄 값을 다 치를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껴본 체험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예수님의 보혈이 자신에게 영생의 길이자 절대적 진리 됨을 확인할 수 있는 방도는 없다. 그래서 그 죽음 이후로도 예수님이 아니고는 죽을 수밖에 없는, 다른 말로 그 분의 은혜가 없이는 단 한시도 살 수 없는 자가 되어야 한다.. 아무리 성실히 예배에 참석하고 봉사하고 기도한들 이런 죽음 없이는 부활한 것이 즉,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여 자신의 구세주로 모시는 그분에 대한 첫 사랑은 다른 어떤 체험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 아무리 가슴이 벅차고 떨리는 종교적 초자연적 체험을 했어도 자신의 죽음이 없었다면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 다시 강조하지만 정말 평생에 한 번 있는 일이다. 구원에 이르는 과정이 일회적이 아니고 점진적인 경우는 많다. 그러나 점진적인 중생을 맛보더라도 어쨌든 어느 순간인지 모르게 구원이 성립 되는 근거는 옛 사람이 한 번 완전한 죽고 다시 되살지 않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새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의미는 단 한시도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항상 종교적으로 경건하게 있으라는 뜻이 아니다. 또 예수님을 잊거나 가끔 그 반대편에서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가 닥쳐도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의 실제 주인이 그분임은 절대 부인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구원, 중생, 부활의 체험이 단속적(斷續的)이거나 반복적(反復的)일 수 없다는 점은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자신의 현재 영적 상태가 온전한 거룩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영혼만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붙들려 있어 그 은혜와 권능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확신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실상(實狀)은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수시로, 그것도 자기 기분에 따라 부활을 자주 경험하는 듯하다. 하루에 담배 한 갑을 피우는 자가 한 가피만 피고 나도 후회하고 금연 결심을 하니까 하루 20번씩 담배 끊었다고 말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일 년에 최소 52번은 부활하는 신자가 대부분이다.  매주일 교회에 나와선 죽을죄를 지었으니 용서해달라고 울고불고 기도한다. 그러나 주일 예배에 참석한데다 회개까지 했으니 틀림없이 복 주시겠지 기대하면서 교회 문을 나선다. 특별히 목사님의 축도가 축복에 대한 보증서인양 안고 안심하고 세상으로 나간다. 그야말로 52회의 부활이다.
나아가 참된 부활은 반드시 죽기 전 생명과 부활 후 생명이 완전히 다른 모습이어야 한다. 죽은 후 똑 같은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면 환생(還生)내지 소생(蘇生)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복제인간일 뿐이다. 작금 복제 인간연구가 활발한 것은 이 땅에서 영원토록 지금과 같이 잘 먹고 잘 살았으면 하는 죄스럽고 허황된 인간적 욕심의 발로다. 하나님의 최후 심판과 영원한 천국을 부인하고 오직 이 땅의 물질적인 풍요만 탐하는 짓이다.  

동양종교에서 말하는 환생이 비록 인간과 다른 모습으로 돌아오기도 하지만 뒤집어 보면 결국 개돼지가 되어서라도 이 땅에서 다시 살았으면 하는 추악한 욕심이 내재되어 있다. “하나님과 내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이 세상이 이렇게 재미있고 좋은데...  비록 이곳이 고해(苦海)이고 죄악(罪惡)의 구렁텅이일지라도 다시 돌아오기만 한다면 어떤 모습이 되던 무슨 상관있어?”

신자로 거듭남은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는 것이다(엡4:22‐24). 예수를 몰랐던 옛 자아가 얼룩을 씻어내고 다려서 입어도 될 만큼 반듯하고 의로운 구석이 남아있지 않다. 도저히 재생 불능으로 아예 쓰레기통에 벗어던져야 한다. 다시 새 옷으로 갈아입지 않고는 죽음과 죄와 악령의 냄새가 썩어 진동을 한다. 이미 시체의 모습과 방불(彷佛), 아니 시체 바로 그 자체다. 옛 사람의 실체는 자기 영혼이 이미 시체가 된 줄도 전혀 모르고 스스로 하늘에 오를 수 있을 만큼 깨끗하다고 착각해 죽을 때까지 안고 가려는 고집이다.

따라서 한 죄인의 영혼이 거듭나는 일은 절대로 인간의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 이미 죽어 있는 영혼이 어떻게 스스로 거듭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선행과 공로로는 결코 구원을 취득할 수 없다. 앞에 인용한 에베소서에서 새 사람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보라. “하나님을 따라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부활시켰고 그래서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입은 새 사람”은 완전히 다른 모습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지으신 새로운 피조물(被造物)인데 어떻게 이전의 더러운, 정확히는 스스로 착하고 의롭다는 완악한 고집이 지나가지 않고 남아 있겠는가?

그런데도 많은 교인들이 기껏 자기 의지로 예수를 믿기로 결단하고 교회 생활 열심히 하고 주위에  조금 선을 베풀고선 거듭났다고 자부한다. 부활의 표시로는 항상 한두 가지 윤리적 나쁜 습관을 고친 것만 내세운다. 헌 옷에 묻은 자국 한두 개 지우고서 새 옷인 양 교회에 입고나온다. 한국교회에서 술 담배 끊은 것이 교인이 된 가장 큰 표시로 착각하듯이 말이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다. 다시 에베소서(4:23)를 보면 새 사람이 될 때 어떻게 변화된다고 했는가? 심령(心靈)으로 새롭게 된다고 했다. 우리 생각이, 가치관이, 전인격체가, 내면세계 전부가, 영혼이 즉, 전 존재가 바뀌는 것이다. 내 판단과 결심으로 한두 가지 결점을 고치는 것은 기독교 신앙과 전혀 무관하다. 다른 종교에선 그래야 하는 것이 구원의 일차적인 조건이라고, 말하자면 착해져야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인간의 행동을 결정짓는 마음의 바탕 자체가 바뀌지 않고는 진실로 착해질 수 없다는 원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심령을 새롭게 부활시킬 수 있는 분은 인간에게 지정의 뿐 아니라 영혼을 심어주신 하나님뿐이다.

부활 생명 속에 계속 거하고 있는가?

신실한 신자들마저 부활에서 간과하기 쉬운 가장 중요한 내용이 하나 더 있다. 부활한 새 생명은 영속(永續)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의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잠깐만 그러면 부활이 아니다. 신자가 되었으니 영원히 죄를 짓지 말라거나. 지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구원 이후 습관적으로, 실수나, 부지중에, 심지어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거룩해진 심령에는 아무 변화가 없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잠시 잠깐 부활하는 경우는 기절했다가 깨어나는 것에 불과하다. 아니면 잠시 소생했지만 금방 다시 죽어 버리는 꼴이다. 제일 급한 환부는 일시 치료 되었지만 근본적인 병의 원인을 제거하지 못해   다시 재발하는 경우다. 그래서 자꾸만 옛 사람이 그리워지고 돌아가려고 방향을 바꾼다. 교회 출석했어도 자꾸 세상 쪽으로 뒤만 돌아보는 자다.  

사도 바울이 사역 말년에 어떻게 고백했는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2:10-14)

우선 복음전파 사역에서 이미 이룬 업적들에 대해 전혀 자만심을 갖지 않겠다고 했다. 바울이 그럴진대 우리는 제대로 이룬 일도 없으면서 자꾸 뒤만 돌아보니 더 문제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를 부활시켜 새 생명을 허락하신 뜻은 뒤에 있는 것은 잊고 오직 앞에 있는 푯대만을 향하라는 것이다. 천국에 입성하는 그 날까지 쉼 없이 면류관을 소망하고 걸어가야만 참된 부활이다.

물론 새 옷으로 갈아입어 새사람이 되었지만 그 옷에 다시 흙탕물이 튈 수 있다. 그러나 이 새 옷은 이전 헌옷과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이 지어 입힌 능력의 옷이다. 아담이 스스로 나뭇잎으로 앞을 가려 봤자 하나님을 배반하여 부끄럽고 두려워진 것을 없앨 수는 없었다. 하나님이 짐승을 잡아 그 가죽으로 직접 만들어 입혀야 했다.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은 직접 피를 흘리고 살이 찢겨서 만든 사랑과 권능의 옷을 신자에게 입혀 주었다. 또 그분은 보좌우편에서 당신의 보혈의 옷을 입은 신자를 위해 중보자로 간구하고 계신다. 거듭난 신자의 새 옷은 가장 강력한 자동세척장치가 붙어 있는 셈이다. 내주하는 성령님이 신자를 끊임없이, 때로는 강권적으로라도 의와 진리와 거룩으로 인도하신다. 신자가 뒤만 돌아보지 않는 한에는 말이다.

거듭난 신자로 자부하는 자도 정말 영속되는 부활의 새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지를 매순간 자신의 정체성을 점검해야 한다. 십자가와 연합하여 죽었다 살아난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부활은 기사회생처럼 죽다 살아나는 것이 아니요, 강시처럼 여러 번 죽었다 살아나는 것도 아니요, 똑 같은 모습으로 소생하는 것도 아니요, 일시적으로 나았다 나중에 다시 재발하는 것도 아니다. 단번에 완전히 죽었다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거듭나 영원히 그 모습으로 영속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으로 신자의 옛사람을 함께 장사해주었고 또 당신의 부활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와 함께 신자가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떤 일을 만나든 바로 곁에 계신다. 신자는 그분의 모든 권능을 대신 사용할 수 있는 그분의 사신이 된 것이다. 자신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몰라도 그분의 부활하신 증거를 자신을 통해 드러내지 못할 이유나 근거라곤 하나도 없다.

인간적 감정이나 느낌에 속아선 안 된다. 또 교회에 신실하게 출석하여 거룩하게 행한 종교적 행위로 증거 할 바를 다했다고 착각해선 안 된다. 신자의 거듭난 영혼 외에 그 어떤 것으로도 예수님 부활의 증거를 대신 할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 깨끗케 되어 세상 앞에 빛과 소금으로 서 있는 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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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신자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한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와 화목하게 함으로써 신자에게도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다. 신자를 부활시켰으니 이제 신자더러 세상도 부활의 은혜에 초대하는 말씀을 증거 하라는 뜻이다. 단순히 기독교 교리를 전파하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앞에 확실하게 부활한 모습으로 영속적으로 서있어야 한다.

미국에는 말 머리 앞에 홍당무를 매달아 놓고 달리게 하는 마차 경기가 있다. 또 그레이하운드 사냥개 경주도 트랙 옆에 가짜 토끼가 달려가는 기계 장치를 해 놓았다. 좀 잔인하긴 해도 정말 앞에 있는 푯대만 향해 죽기 살기로 달리게 만든다. 뒤를 돌아 볼 필요가 전혀 없다. 바로 눈앞에 먹음직한 음식이 확실히 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모습이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아니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성경말씀을 적어서 이마와 양팔에 부치고 다녔다. 걸을 때 마다 일을 할 때마다 말씀이 눈앞에 보이도록 했다. 하나님이 죽기 살기로 그들을 훈련시키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 뜻대로 사는 자는 면류관이 확실하게 눈앞에 기다린다는 것을, 천국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상기시키려는  목적이다. 지금도 경건한 유대인들은 그 습관대로 따르기도 한다. 그들을 너무 종교적 형식만 추구한다고 비판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사실 없다. 우리는 그것도 못한다. 우리야말로 눈앞에 성경을 달고 다녀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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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어 구원 받았기에 이제 지옥의 형벌에서 벗어났다고 좋아할 것 없다. 다시 죽지 않으려고, 똑 같은 모습으로 깨어나지 않으려고,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 진정 거듭난 자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지 않는 자에게는 예비 된 면류관이 없다. 한 번 상상해보라. 예를 든 경주에서 홍당무나 토끼도 없이 경기장을 힘들게 쉴 새 없이 돌기만 한 꼴이 되지 않겠는가?

예수 믿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현실적인 고통을 감수하고, 돈이 없어도, 병이 들어도, 그저 참고 지내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 나와 미운사람을 만나도 혼자 속을 썩이면서 피해버리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 것은 그저 인내력 싸움에 불과하다. 기독교 신앙이 의지적 인내력을 키워주는 데 동원될 수는 없다. 우리를 기껏 그 정도로 변화시키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켤코 아니지 않는가?

바울처럼 예수 믿은 후에 평생을 두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싸움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당신을 따르겠다고 자원하는 자더러 예수님은 쟁기를 잡고는 뒤를 돌아보는 자가 없다고 지적했다. 그분을 따르는 것이 베게 둘 곳조차 없고 남들이 다 외면하는 좁고 협착한 길이 될지언정, 새로 얻은 생명이 너무 귀해 다시는 옛사람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한 마디로 부활 생명이 영속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데 어떻게 뒤를 돌아 볼 수가 있겠는가? 진짜 십자가를 지고 간다면 도저히 그럴 수 없다. 아주 가벼운 가짜 십자가를 졌거나 아직 십자가를 지지 않은 자만 뒤를 돌아볼 수 있을 뿐이다. 신자의 일생은 오직 앞서 가신 주님만 바라보며 매일 매일 주님이 지어주신 십자가를 지고 한 걸음 한 걸음 따라올라 가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그러다 넘어질 수 있다. 뒤로 주춤거릴 수도 있다. 그러나 두 눈이 바라보는 방향은 분명히 앞이어야 한다. 또 십자가를 졌다면 넘어져도 앞으로 넘어지지 절대 뒤로 넘어지지 않는다. 모든 신자가 정말 믿음으로 싸워야 할 싸움은. 죽는 날까지 부활의 참 증인으로 세상 앞에 서는 것 말고는 없다.  

11/5/2008
(1996/5/5/ 유타대학촌교회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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