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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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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2:37‐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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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http://www.nosuchjesus.com |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강해 (13)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2:37‐41)
구원 과정의 시간적순서
불신자가 구원 받는 첫 과정이 인간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도덕적 회개가 아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인한 영적인 찔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자신의 궁극적 생명을 걸고서 “내가 어찌하여야 구원을 얻을꼬?”라고 갈구하는 탄식이 먼저다.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로 회심하게 된 3천 명의 유대인들이 사도들에게 맨 먼저 던진 질문이 바로 그것이었다. 과거에 지은 몇 가지 윤리적, 그것도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회개한다고 구원을 얻는 것은 기독교에선 절대로 없다.
청중들의 그 질문에 대해 베드로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고, 성령을 선물로 얻으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청중이 그의 설교에 보인 첫 반응, 영적 찔림과 그가 제시한 구원을 얻는 네 가지 절차와는 어떤 관계가 있으며 또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따져볼 필요가 생긴다.
우선 주지해야 할 사항은 이 네 가지 과정, 아니 영적 찔림까지 포함해 다섯 단계가 반드시 시간적 순서를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적인 찔림이 있고난 다음 회개를 하고 세례라는 절차를 거치면 하나님이 죄 사함을 허락하고 또 그렇게 하나님 앞에 돌아 온 자녀에게 보상의 의미로 성령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앞 단계가 있어야만 다음 단계가 따라오는 절대적 전후 관계가 아니다.
지난주에 예를 든 빌립보 감옥의 간수나 다메섹 도상의 바울은 스스로 회개하거나 세례 받을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었고 심지어 꿈도 꾸지 않았다. 전혀 예상치도 않던 우연한 장소와 시간에서 살아계신 주님을 마주치게 되었고 또 주님의 일방적 간섭과 은혜로 즉각적인 구원을 현장에서 얻었다. 오순절에 모인 청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단지 유대절기를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지내려고 모였다. 그러다 사도들이 각 나라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는 신기한 현상을 생전 처음 목격했고 또 베드로의 설교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의 찔림을 받았다. 구원 받은 삼천 명 모두에게 계획은커녕 아예 상상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었다.
한 마디로 구원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에게 당신의 절대적 주권으로 베푸시는 선물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이 주관한다. 그러나 인간의 지정의적 분별, 동의, 결단이 전혀 따르지 않고 마치 마취시키듯이 하나님이 순식간에 일방적으로 믿게 만든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의 사고활동마저도 당신의 주권과 일체 상호충돌이 없게끔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나아가 한 개인의 구원은 하나님 쪽에서 먼저 계획을 세운 후에 당신의 권능으로 앞서 주도하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신자들이 이런 부분에 대해 명료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다. 심지어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만 신자가 되는 줄 즉, 세례 자체가 능력을 갖는 양 착각하고 있는 경우마저 종종 접한다. 오순절 삼천 명의 회심 사건만 따져 봐도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임을 쉽게 알 수 있지 않는가?
물론 예수님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2,33)"고 말씀하셨다. 바울사도는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니라”(롬10:9,10)"라고 아예 입으로 시인하는 절차를 필수적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말씀이 세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세례는 예수를 진심으로 영접하고 난 후 즉, 그분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온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였음을 하나님과 교회 앞에 고백하는 예식일 뿐이다. 그런 진정한 믿음 없이 세례를 통해 믿음이 생기리라 기대하거나, 기독교적 예식이니까 교인이라면 일단 받고 봐야 한다는 생각이라면 큰 오산이다. 그런데도 그 정도 인식만으로 세례 받고 경건한 교인으로 오랫동안 행세하는 자들이 꽤 많다. 나중에라도 온전한 영적 중생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혼자서 종교 놀음에 취한 것일 뿐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최초의 기독교 신자들의 경우에도 베드로가 말한 네 절차의 전후 순서를 명백히 구분할 수 없다. 성령이 가장 충만하게 역사해 제 삼자가 봐도 중생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때도 그랬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사실은 베드로의 설명과는 달리 성령을 선물로 받는 일이 반드시 제일 먼저 일어났다는 것이다. 가이사랴의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 일행에게도 베드로가 설교하자 성령이 먼저 임하여 구원받았고 그 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세례를 주었다.(10:44-48)
그럼 베드로가 말한 순서는 틀렸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는 의미는 성령의 은사와 권능을 받아 누리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구원은 반드시 먼저 성령이 한 죄인의 영혼에 파고들어 영적 찔림이 생기게 함으로써 지금껏 예수를 부인 외면하고 살았던 삶이 너무나 헛되고 하나님 앞에 죄였음을 깨달아야 일어난다. 바로 그것이 회개이자 영적 중생의 근본이다. 세례는 자기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음을 외적으로 고백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물세례를 받는 여부와 관계없이 진정한 회심이 일어났다면 성령은 이미 신자에게 내주해 있다. 또 구원 받은 신자에게는 성령이 각 사람에게 맞는 은사를 선물로 주신다. 사마리아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난 후에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을 위해 성령의 세례를 간구했었다.(행8:14‐17) 사마리아 사람 전부가 영적 중생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복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였던 자라면 이미 구원은 확정되었다. 그럼에도 성경이 사도들이 기도하자 성령을 받았다고 표현한 것은 방언이나 신유 같은 특별한 개별적 은사를 받게 되었다는 뜻이다.
구원에서의 회개, 죄 사함, 물세례, 성령 세례의 의미와 그 관계를 잘 알지 못하거나 착각하는 신자가 의외로 많다. 착각은 북한에서도 자유이며 세금이 안 붙는다고 농담하듯이 남에게 큰 피해를 안주는 정도는 애교로 보아 넘겨줄 수가 있다. 그러나 정도가 심하면 당장은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자신과 주위에 심각한 해악으로 나타날 수 있다. 착각인 줄 모르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 착각의 가장 큰 착각인 셈이다.
신앙의 착각도 마찬가지다. 사실은 심각한 착각인데도 모르고 지나치면 끝가지 올바른 신앙을 형성할 수 없어 자신뿐 아니라 주위에까지 중차대한 영향을 미친다. 특별히 구원에 관한 착각은 본인에게 치명적이다. 자신은 구원 받았으며 신앙생활을 충분히 경건하게 하고 있다고 평생 착각하고 보내지만 실제로 구원과 거리가 멀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결과는 끔찍하게도 영원한 불 못으로 떨어지는 것이지 않는가?
잘못된 신앙의 출발
구원을 자기 노력으로 취득하려는 여타의 모든 종교와는 달리 기독교 신앙은 구원을 받은 후에 비로소 시작된다. 신앙이 자라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후 신앙이 자란다. 물론 그 전에라도 교회 생활은 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다. 또 구원도 점진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 그러다 어떤 시점에선가 성령의 간섭으로 구원의 확신이 생기면 세례 의식을 거치면 된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칭의(稱義 통칭 구원:Redemption)와, 그 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신의 성품과 삶이 의롭게 자라나가는 성화(聖化 Sanctification)와, 죽은 후 천국에서 그리스도처럼 거룩하게 변하는 영화(榮化 Glorification)의 세 단계로 대별할 수 있다.
첫 단계 칭의가 잘못되면 그 다음 단계가 잘못될 것은 불 보듯 빤하다. 그럼에도 교회 출석하여 경건히 살고 있으니 성화의 단계에 들어섰다고 착각한다. 비록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의로울지라도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했어도 기독교 신앙의 출발조차 하지 않았을 수 있다. 신앙이 올바르게 자라지 않을뿐더러 달려가는 길이 다르기에 궁극적인 도착지도 엉뚱한 곳이 될 수 있다.
구원 과정에서 신자들이 가장 많이 그것도 치명적으로 착각하는 것은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는 원리다. 하도 익숙하게 듣고 배운 교리인지라 신자라면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당신을 믿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던 것을 예로 들면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롬5:1)이라고 선언했다. 또 로마서 전체의 주제도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이지만 그 의미하는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자가 사실 드물다.
한국말 어법이 거의 그렇긴 하지만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는 논리적으로 정밀한 표현이 아니다. 선행이나 공적으로 구원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초점을 두다 보니 지금껏 그냥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그 이상의 간단하고 좋은 표현도 현실적으로는 딱히 없다.
우선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고 강조하면 믿음이 있는 자는 구원을 받고 믿음이 없는 자는 받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인간의 믿음을 평가한 결과에 의거해 구원을 선별해서 준다는 의미가 된다. 그럼 믿는다는 행위 자체가 구원의 원인 내지 조건이 되어버린다. 이는 잘못이다. 구원을 얻는 데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 외에는 다른 어떤 전제, 조건, 자격, 공적, 기준이 절대 있을 수 없다. 비록 선행을 내세우지 않고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 들였다 해도 믿음 자체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
바울이 이신칭의를 어떻게 부연 설명했는가?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롬5:2) 분명히 이 은혜 즉, 구원을 얻고 난 후의 상태로 들어 간 것은 순전히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고 했지 않는가? 또 구원을 얻고 난 이후의 상태를 어떻게 표현했는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라고 했다.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가서 이미 서있는데 그 일은 믿음으로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드시 주지해야 할 것은 믿음으로 이 은혜를 “얻었다”고 하지 않았다. 대신에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라고 했다. 이미 은혜 안에 서 있는 것을 믿는다는 뜻이다.
이 주제만큼은 영어 표현이 오히려 이해하기 쉽다. 영어로는 대개 믿음을 통해(through faith) 주님의 은혜로(by His grace)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반면에 우리말 어법은 단순히 “믿어서(by faith)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전자는 믿음이 경로가 되었고 후자는 믿음 자체가 구원을 얻는 수단이 되었다.
경로와 수단은 엄연히 다르다. 알기 쉽게 비유하면 옹달샘에서 물을 받는데 샘에 붙어 있는 파이프는 경로이지만 수단은 반드시 수도꼭지를 직접 틀어야 하는 것이다. 파이프의 경우 물은 전적으로 샘에서 나오고 또 그 샘에서 분출하는 힘에 의해 파이프를 통과한다. 파이프가 물을 만들어 내거나 물을 빨아들이는 힘은 전혀 없다. 단순히 샘에 붙어 있기만 했는데도 물을 받고 물이 통과한다. 그러나 수도꼭지를 통해 물을 얻는 자는 꼭지를 틀지 않으면 물이 절대 나오지 않는다. 옹달샘의 물과 그 샘 자체의 힘 외에도 수도꼭지라는 다른 도구가 필수적이다.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가 전자의 뜻이 되어야지 후자가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차이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 진리의 영 ‐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죄에 대하여 심판하시게 되는데 그 죄는 예수를 믿지 않은 것이었다.(요16:7‐9). 요컨대 예수 믿지 않는 죄를 사함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다.(고전12:3).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 있던 죄인이 구원을 얻는 것은 즉, 그전까지 죽도록 부인하고 싫어했던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것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간섭 없이는 불가능하다. 전도 현장에서 보면, 아니 우리 모두가 사실 하나님은 그런대로 인정했어도 예수는 어지간해선 믿지 못했지 않는가?
구원의 핵심은 예수님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 구원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예수님은 반드시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 죄를 지고 죽으셔야 했다. 역으로 말해 골고다 십자가가 없었다면 아직도 인류에게 구원의 길은 오리무중이며 죄의 노예가 되어 있을 것이다. 믿어야 할 대상은 당연히 그분이지만 믿음을 갖게 되는 경로도 오직 그분이라는 뜻이다. .
바울이 “그로 말미암아” - 믿음의 대상으로서 예수와 믿음의 경로로서의 예수 둘 다 - 은혜를 얻었다고 했다. 예수 그분을 믿지 않고는 절대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믿음의 대상) 또 죄인 쪽에서 그분의 은혜를 구하거나 택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구원을 주시러 그분이 먼저 한 죄인을 택하여 찾아 오셨다는 것이다. 자신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성령의 간섭으로 심령에 찔림이 있어야 한다.(믿음의 경로) 그 후에 본인이 그분의 십자가 은혜를 진심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또 그분의 은혜 안에 자기가 서 있음도 믿게 된다.(믿음의 결과)
구원을 얻는데 믿음이 경로 혹은 수단 어느 쪽으로 동원 되었든 간에 눈에 보이는 외적 결과는 동일한 것처럼 보인다. 일단 교회 안에 들어온 모든 자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경건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을 도구로 사용한 자는 자신의 죄가 사해졌다는 믿음조차 자꾸 흔들린다. 반면에 믿음이란 경로를 통해 성령의 간섭이 자기 심령에 일어난 자는 자신이 구원 받았다는 믿음에 더 이상 흔들림이 없게 된다. 믿음의 결과에도 남들의 눈에는 안 보이지만 이런 분명한 차이가 있다. 최초의 구원 자체가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의 영과 신자의 영의 교통 관계 내에서만 일어났기 때문이다.
전도의 미련함
성경은 구원 과정을 자세히 풀어서 설명하고 있지 않다. 대신에 단순히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만 표현한다. 예수님 말씀대로 성령의 간섭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인간이 잘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성경은 하나님이 선포한 말씀이지 논리체계를 갖춘 과학적 기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절대적 진리를 구태여 미주알고주알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앞뒤 문맥을 검토하여 성경 66권을 관통하는 구속사적 원리에 연계하면 얼마든지 올바른 해석이 가능하다.
교단마다 구원 과정에서 하나님 은혜와 인간 자유의지의 상관관계에 대한 이해는 다르지만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점에는 일치한다. 그러나 행위를 육체가 동원되는 외적 행동으로 한정하는 잘못을 종종 범하고 있다. 즉 스스로 믿기로 한 것은 행위가 아니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지적활동이니 사고활동이라고 표현하지 않는가? 자신이 믿기로 한 것은 겉으로 행동만 안했다 뿐이지 내면의 사고영역 안에서 분명히 어떤 행위가, 그것도 인간이 주도권을 잡고, 일어난 것이다.
자신이 믿는 일을 행위가 아니라고 착각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비록 초자연적인 성령의 간섭으로 구원을 얻게 되지만 신자가 그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여전히 눈에 안 보이는 지정의 활동의 영역 안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도 인간이 외부 사항에 접하든 스스로 생각하던 어떤 확정된 개념으로 마음속에 정리되는 과정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또 어떤 사고가 정리되면 그 정리된 개념만 남아서 인식되지 이전의 정리되는 과정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언어적 표현은 이미 모든 생각이 정리된 후에야 나온다. 요컨대 인간이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자기가 믿었다는 사실 뿐이라는 뜻이다.
성령의 초자연적 간섭은 더더욱 그렇다. 성령이 최초로 자신에게 임재 하는 것은 아예 인식조차 할 수 없다. 뭔가 꼭 집어서 말할 수 없는 찔림이 심령에 생겼다가 점차 주님의 죄 사함의 긍휼 안에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그러다 최종적으로 구원의 확신이 생긴 후에는 자신이 믿었다는 표현밖에 할 수 없다. 정히 문법상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믿었다, 믿기로 했다, 믿게 되었다, 믿어졌다, 믿어지게 된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등등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엄밀히 구분해서 사용하면 자칫 내용이 오히려 불분명하거나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통칭해서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는 이상의 좋은 표현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뭘 그렇게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느냐? 어쨌든 결과적으로 믿음을 갖게 되었고 구원을 얻었으면 그만이지 않느냐? 쉽게 반박할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었던 한 영혼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일을 두루 뭉실 넘어갈 수는 없다. 신앙을 갖는 궁극적 목적지는 영생을 얻는 구원이다. 그러나 목적지가 같다고 도착지도 같으리라는 보장은 절대 할 수 없다. 우선 출발지가 다르고 가는 방향이 다르면 도착지는 자연히 달라질 것 아닌가? 어쨌든 믿었으면 되었지 하고 넘어갈 문제가 결코 아니다.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심판 둘 중 하나로만 나눠지는 치명적인 과제다.
구원은 “믿어서 얻는 것”이 아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믿게 된 것”이다.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 남들은 믿지 못했지만 나는 믿었다는 뜻이다. 또 아무리 믿기 힘들더라도 일단 믿고 보라고 권유하게 된다. 그런 권유를 받은 사람도 진정한 믿음과는 거리가 먼 채 예수 믿는 믿음을 가진 체 가장할 수도, 실제로는 잘 몰라서 믿음을 가진 양 착각하는 자가 대부분이지만, 있다.
전도할 때에 주로 어떤 이야기를 건네는가? “당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십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셨고 그 예수님이 여러분의 죄를 사해 주려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당신은 그 분을 구세주로 영접만하시면 모든 죄를 용서 받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이제 믿음으로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입술로 시인하십시오.” 가장 기본적인 복음전파 방식을 가만히 살펴보면 어떤 뉘앙스를 지니는가? 일단 믿어보시라니까요 혹은 무조건 교회에 출석하셔서 믿음을 가지도록 노력하라는 이미지가 다분하지 않는가?
불신자들도 자기가 죄인임은 어느 정도 인정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구세주임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복음을 그렇게 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구원의 구체적 과정이 어떠하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표현해야 하듯 전도 또한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리라.”(롬10:13-15)
그래서 성경은 전도는 미련한 것이라고 표현하면서도 그런 미련한 전도를 받아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다고 말한다.(고전1:18‐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
이신칭의에 대한 치명적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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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차 강조하지만 자기가 전해들은 교리를 능동적으로 비교 분석하여 따져 본 후에 믿음을 갖기로 결심한 것이라면 어디까지나 행위가 된다. 그렇다고 그런 분별도 없이 무조건 믿기로 했다면 맹신(盲信)이다. 또 혹시 지옥에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예수 믿는 자들에게 이적도 많이 일어나니까 열심히 믿다보면 나에게도 복을 주고 천국에 보내 주리라 기대하고 믿기로 했다면 미신(迷信)이다. 맹신과 미신이야말로 신자가 능동적으로 믿는 대표적 경우다. 앞으로 따져 보겠지만 자기가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는 자는 자칫 맹신과 미신으로 흐를 소지가 다분히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일일이 분석한 후에 동의하여 믿어 보기로 하는 결단이 믿음의 출발이 되어선 안 된다. 예수님은 구세주이지 철학적인 스승에 불과할 수는 없지 않는가? 오직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분의 보혈의 공로에 의거해 도무지 자격이 없는 죄인을 하나님이 의롭다고 선언해주는 것이 믿음의 유일한 근거이자 출발점이다. 또 그런 은혜가 자신에게 이미 베풀어졌다는 사실을 성령님이 간섭하여 깨우치게 해주셔야 진정한 믿음이 생긴다.
반드시 자신의 영혼에 찔림이 먼저 있고, 점진적인 과정이든 순간적 회심이던 간에, 이어서 전인적인 회개가 따라 온다. 즉 영혼의 눈이 열려 그때까지 알지 못하던 영적 세계를 보게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그분이 다스리는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자연스레 믿어지게 된다. 무엇보다 그분이 나 자신을 일대일로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진정한 실체가 너무도 더럽고 추하고 흉악한 죄인임을 발견하고 오직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도무지 깨끗케 될 수 없음을 철저하게 깨닫는다. 죄에 빠져 그분과 원수 상태에 있었음에도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시고 내 대신 피 흘려 죽으심으로 모든 죄 값을 갚았다는 사실 앞에 심령 깊숙한 곳에서부터 눈물이 저절로 솟구치며 감사하게 된다.
말로는 간단히 설명했지만 이런 인간 내면의, 특별히 영혼에 일어나는 변화가 과연 스스로의 능동적인 사고 활동으로 일어날 수 있겠는가? 아니 그 변화를 시작해볼 엄두라도 내겠는가? 그것도 하나님은 몰라도 예수님은 로마 사형수에 불과하거나 한 명의 위인 정도로만 취급하던 사람이 말이다. 불신자에게 말로서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설득한다고 해서 그 진리가 그들로서 과연 쉽게 믿어질 내용인가 말이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그렇게 전하는 것은 듣지 않고는 복음의 내용을 전혀 알 수 없고 또 그렇게 신자가 미련하게 전하는 현장에는 성령이 역사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절대 기계나 짐승처럼 만들지 않았다. 전도자가 복음을 전혀 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이 단독으로 한 죄인의 영혼에 역사하여 복음의 내용을 강제 주입시킬 수는 없지 않는가?
우리 모두 믿기 전에는 완전히 캄캄한 방에서 칠흑같이 새카만 옷을 입고 있었던 자였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우리 모습을 스스로 분석해 자신의 상태가 시커멓고 또 캄캄한 방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빛이 들어 와야만 우리가 시커멓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 방에 전구가 되어 빛을 비추는 것은 예수님이요, 전구를 설치하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요, 그 빛에 전력을 보내고 스위치를 켜는 것은 성령님이다.
그럼에도 참으로 기막힌 사실은 우리는 어두운데 너무 익숙해지다 보니 빛이 비춰도 여전히 어두운 것을 더 사랑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두움에 익숙해진 우리 눈을 빛에 감응할 수 있도록 조절해 주는 역할을 성령님이 반드시 해주셔야만 했던 것이다. 나면서부터 봉사인 자로선 도저히 벗길 수 없었던 영혼의 눈가리개를 성령님이 벗겨주셨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요3:19‐21).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온다고 한다. 성령의 능력으로 만이 우리 모습이 시커멓고 또 캄캄한 방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구원이란 하나님께 죄의 용서를 받아 영생을 얻는 것인데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도무지 아니지 않는가?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실 수 있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오시라고, 죽으시라고, 부활하시라고, 성령을 보내달라고 하지 않았다. 예수님 그 분이 우리가 철두철미 죄에 빠져 있음을 지적했고, 회개를 촉구했으며, 하나님 앞에 나오라고 초청하셨다. 그러는 그를 우리는 싫고 미워서 죽여 버렸다.
인간은 그분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조차 십자가 구원의 의미를 사역과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구원이 인간 스스로의 지정의 활동으로 취득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다. 우리의 체질이 진토임을 아시는 그분으로선 성령의 보내심을 미리 계획하실 수밖에 없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나니.”(롬8:14,16).
비록 성경이 혹은 전도할 때에 단순히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이미 구원의 은혜 가운데 든 사람은 자신이 구원에서 한 역할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에서 열까지 자기가 계획하고 예상치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을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증거한다”고 했지 않는가? 그래서 예수를 믿게 된 믿음, 심지어 교회에 출석하기로 결단한 것조차도 하나님이 죄인인 자기를 너무나 긍휼히 여겨서 그분께서 생기게 해주신 은혜였음을 겸허하게 인정한다.
만약 그분의 예정과 선택의 은혜가 없었더라면 성령이 자신의 영에 간섭하지 않았을 것이며 여전히 사망의 진노와 흑암의 세력에 묶인 채 죄를 즐기고 있었을 것임을 절감한다. 그리고 그 상태로 멸망으로 달음질 하지, 자신의 자발적 깨우침과 노력으로 죄에서 벗어날 길이라고는 전혀 없음을 절대 부인하지 못한다. 한마디로 죽을 죄인이었던 자기를 예수님이 살려주셨다는 것이다. 제삼자가 아무리 다른 심오한 교리나 논리적 변증을 갖다 대어도 또 스스로는 구체적으로 자신의 구원 과정을 설명하지 못해도 아무 상관과 의심 없이 그렇다.
반면에 단지 자신의 의지적 결심으로 믿기로 한 사람은 구원 교리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그친다. 말하자면 자신은 분명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 들였고 또 그러면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 또한 잘 믿고 있다고 스스로는 생각한다. 또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고 있으니 자신의 구원에 대해 새삼스레 따지거나 의심해볼 여지도 없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십자가 구원의 깊은 의미를 모르기에 그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교인과 신자
물론 내가 믿기로 결심하여 교회에 출석했다고 해서 구원이 전혀 이뤄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택하신 자에게는 올바른 복음이 전해지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 예수 아니고는 자기에게 오직 사망뿐임을 절감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 출석을 오래 했어도 예수를 자신의 주로 모시고 오직 그분을 위해 살고 죽는 전적인 헌신이, 실천하고 있는 정도는 아직 미진할지라도, 없다면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 다른 말로 여전히 믿으려 하고 있다면 교인일지언정 신자가 된 것조차 아니다.
내가 믿기로 했다, 내가 믿었다는 것은 인간 쪽의 행위에 불과할 뿐 아니라 내 쪽에 뭔가 선한 구석이 있었다는 뜻도 된다. 스스로 양심적 회개를 했다는 공적이 생긴다. 남들은 기독교교리를 잘 이해하지 못했고 심지어 회개할 생각도 하지 못한 뻔뻔한 죄인이지만 나는 영적으로 깨어서 이해했고 양심도 비교적 깨끗해서 자발적으로 뉘우쳤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든지 더 나쁜 방향으로 비약할 수 있다. 예컨대 내가 믿어주었다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이 답답해하고 손해를 보는 것 같아 믿어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교회에도 내가 나가 주었다가 된다. 그래서 우리 가족과 일가 전부를 합치면 몇 명이고 그들이 내는 헌금 합계가 얼마인데 교회가 우리 의견을 듣지 않으면 안 된다로 가버린다. 목사나 장로가 조금만 마음에 안 들거나 요구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심심찮게 삐지고 심하면 더 이상 교회 나오지 않는다고 협박까지 한다.
교회에 안 나오면 솔직히 누가 손해인가? 교인이 줄면 복음만 바로 전하면 하나님이 다시 채워주실 것이며 그 사이에 사례비가 줄어도 목회자는 자동적으로 금식하면 그만이다. 교회를 안 나오면 안 나오는 만큼 그 사람만 손해다. 교회 안 나와서 좋은 일은 한두 시간 낮잠을 더 자고 헌금할 만큼 돈이 굳을 수 있지만 그 앞에는 영원한 죽음만 기다린다.
스스로 결단하여 믿은 교인들로선 교회 안에 다른 성도들도 다 자기 같은 줄 착각한다. 교리를 분석해 믿음을 갖게 된 것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자기처럼 잘 분석한 교인과 잘못 분석하거나 아직 분석조차 못한 교인이 있다고 판단한다. 필연적으로 믿음이 더 좋다, 약하다는 식으로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기 쉽다.
엄밀히 따지면 자신을 포함한 교인들 모두가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취득하고 있는 중이라고 보는 셈이다. 자기가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고 믿으니까 그렇다. 그럼 구원 과정에서조차 우열이 발생한다는 뜻이며 그것은 또 구원 이전의 영적 상태에도 우열이 있다는 뜻도 된다. 죄인도 더 심한 죄인이 있고 덜한 죄인이 있게 된다. 저 사람은 아직 못 깨닫고 있어, 이해력이 약해, 영적으로 미숙해, 더 깨어져야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성화단계에서는 성숙되고 덜 성숙된 믿음의 구분이 있을 수 있지만 구원을 얻는 믿음에서 만은 좋고 나쁜 믿음이 절대로 없다. 다 같이 죽은 시체였던 자들을 오직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에 의거해 하나님이 의롭다고 칭해 주는 것뿐이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조건 없이 당신의 주권으로 나눠주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구원 이전의 영적 상태의 우열이란 일절 없다. 따라서 구원 이후로도 즉, 교회 내 성도 간에는 오직 온전한 십자가 믿음이 생겼는지 아닌지만 문제될 뿐이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대분의 교인들에게 이런 구별이 없다. 그만큼 성령으로 거듭난 진정한 신앙인보다는 스스로 믿으려 노력하는 교회 멤버가 더 많다는 뜻이다. 이는 너무나 중차대한 문제다. 교회가 별 문제없이 잘 운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영원히 죽고 사는 문제를 아직도 해결 받지 못한 자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나아가 내가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교인은 불신자를 꾸짖거나 가르쳐야할 대상으로만 생각한다. 영적으로 열등한 존재요 도덕적으로 더 악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그들을 전도하기 보다는 교회 안의 권력 다툼에 더 열을 올린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음을 믿게 된 신자만이 불신자를 믿기 전의 자기와 똑같이 예수님 사랑 없이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존재로 대할 수 있다.
내가 믿었다고 생각하는 교인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과 거래하려 든다. “내가 믿었지 않습니까? 목사가 권하는 대로 세례 받고 집사가 되어 헌금 많이 하고 봉사도 성실히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지금의 내 형편은 왜 이 모양 이 꼴입니까? 하나님이 나더러 하라는 것 다 했으니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해주어야 할 차례 아닙니까?” Give and Take의 신앙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 주는 것으로는 “믿어 주었다”는 것 하나로 다 해결된 줄 안다. 그 후로는 항상 이것 달라 저것 달라만 외쳐 된다.
그러다 구한 것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자기 쪽에서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일쑤다. 어디선가 정성과 열심히 모자라는가보다 여기기 때문이다. 나아가 평소에도 교회에서 맡고 있는 직분이 없거나 종교적으로 거룩한 행위를 하고 있지 않으면 괜히 불안해한다. 말하자면 하나님께 확실히 받는 것이 없으면 바로 내가 드린 것이 적은가보다 불안해진다. 따져 볼수록 앞에서 말한 대로 맹신과 미신의 냄새를 풍기지 않는가?
간혹 교회에서 행사나 프로그램을 꾸미기를 유난히 좋아하는 분들이 있다. 성도들이 일상적으로 예배드리고 성경공부만 하고 있으면 교회가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렇지 않다. 교회의 일차적인 사명은 어디까지나 영적인 전투를 수행하여 영혼을 구하는 것이지 특정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모든 행사는 영혼 구원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말씀과 기도에만 전무하려 해도 사실 시간이 모자란다. 역으로 영적 전투를 잘하기 위해서라도 말씀과 기도가 주가 되어야 한다.
물론 교회가 구제, 봉사, 친교에 등한히 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친교는 말씀과 기도 안에서 이뤄져야 하므로 그 둘에 성실히 하면 자연히 이뤄진다. 구제와 봉사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며 교회 본연의 임무는 아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선행을 하지 않고 있으면 마치 바로 된 교회가 아닌 양 생각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주로 자기가 믿었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그런 불만을 가진다. 즉 자기가 회개라는 선한 행위를 통해 교회 멤버가 되었듯이 교회도 항상 선한 행사를 하고 있어야 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런 자들의 또 다른 심각한 잘못은 하나님도 자기가 편리한 때에 언제든 만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성도들이 만나길 소원하여 기도하면 언제든지 만나 주신다. 그런 뜻이 아니라 처음 구원 받았을 때도 내가 믿었으니까 이제는 무엇이든 내가 믿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 이뤄진다고 믿는 것이다.
여전히 자신 쪽에선 의지적으로 믿으려는 노력만 경주하면 된다는 것이다. 믿음은 오직 자신의 사고활동에 달려 있기에 결국 내가 믿고 싶을 때 믿고 또 필요할 때 믿으면 된다. 믿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능동적으로 행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결국 자기 종교적 열심과 판단 여하에 따라 하나님마저 언제든지 조종할 수 있다고 여기는 엄청난 착각에 빠진다.
그 반사작용으로 평소 때는 도리어 “하나님 가만히 계십시오. 이런 일에는 하나님 눈 좀 감고 계시죠. 이 일만 끝나면 제가 다시 또 잘 믿겠습니다.”라고 생각한다. 자기 삶의 범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자기 편의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 하나님이 되어버린다. 자신의 인격과, 품성과, 영적인 성숙과는 아예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 거룩한 영향력을 전혀 끼치지 못하는 하나님이다. 자신이 필요로 할 때만 자신의 때와 방법으로 하나님마저 이용하려 든다. 그분의 일에 자신이 쓰임 받는 종이라는 인식은 아예 없다. 정기적으로 하는 종교적 경건행위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내는 일에 도움이 될 용도 안에서만 이뤄진다.
한 마디로 만나기 싫으면 안 만나도 그만인 하나님이다. 언제든지 자신이 열심을 내어 믿으면 된다. 그래서 일주일 내내 하나님을 냉장고에 모셔두었다가 주일날 교회 나올 때만 꺼낸다. 또 이왕이면 최고 좋은 옷을 입고 가슴에 거룩하게 모시어야 그분으로부터 받을 것도 많아지리라 기대한다. 평소에는 별로 읽지도 않는 최고급 가죽 성경을 꼭 가슴에 붙이고 얼굴에는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아주 경건하게 교회에 나타나지 않는가 말이다.
내가 믿은 자의 치명적 부작용
상기의 설명은 자기가 믿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의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상의, 정확히는 교회 생활상의 부작용일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가장 치명적인 결함은 그렇게 해선 진정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옳다면 역으로 가정해 볼 때 신자들 가운데 자기가 안 믿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는 뜻이 된다. 또 인간 쪽에서 안 믿었다면 그에게 예정된 구원은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결과가 된다.
물론 외형적으로는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모습이 분명 있다. 그러나 잘 따져 보기 바란다. 인간 스스로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면 하나님 쪽에서 그를 택한 것이 아니라 자기 쪽에서 하나님을 택한 셈이다. 신자가 되는 것이 오직 인간이성에 의한 합리적 판단과 결심의 결과일 뿐이다. 역으로 따지면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할 여지가 하나 없어도 구원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한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연유가 그분의 영원하신 계획과 섭리 가운데 택하심을 입지 않아도 가능하다.
도대체 그럼 하나님이 한 개인의 구원에서 하시는 역할이 무엇인가? 전혀 없지 않는가? 예수를 십자가에 죽으시게 해서 모든 죄책을 탕감해 주었으니 믿으려면 믿고 말라면 말라는 꼴이지 않는가 말이다. 그러나 연약하고 불완전한 데다 죄에 찌들고 사단에게 미혹까지 당한 인간이 스스로 믿는 믿음이 과연 온전하고도 진정한 믿음이 되겠는가? 당연히 그렇게 믿은 후에도 제 기분이나 생각대로 믿고 싶으면 믿고 믿기 싫으면 믿지 않는 일이 벌어질 것 아닌가?
그러니까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자들이 한 번 얻은 구원도 취소될 수 있다고 함께 주장하지 않는가? 논리적으로 따지면 당연한 귀결이다. 믿음이라는 행위로 구원을 얻었으니 믿음이라는 행위의 약발(?)이 떨어져 악을 행하게 되면 하나님이 구원을 취소시킬 것은 합당하게 보인다. 그러나 당신의 독생자를 인류 역사상 단 한번 그런 비참한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에 죽여 버린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효력을 그렇게 쉽게 부인할 수 있을까? 아무리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주장 아닌가?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되지 않고 하나님의 택하심이 없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비록 하나님의 존재자체는 부인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택하심이 없이는 하나님 쪽에서 신자 개인을 알고 계시지 않다는 뜻이 된다. 십자가로 길을 열어 놓았으니 알아서 믿고 오라는 말인데 죄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구태여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이지 않는가? 마치 만물을 만들어 놓고 그 통치와 구원에는 전혀 관심 없이 손을 놓고 있는 조물자와 같다.
기독교 신앙은, 특별히 구원을 받는 것은, 절대로 철학적 도덕적 종교적 개념 내지 계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신자 간의 일대일의 인격적인 만남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자신의 실체를 완전히 벌거벗겨서 엎드린 체험 없이는 하나님을 그저 절대자로 인정하는 정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신앙의 궁극적인 도착지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사실은 교회생활을 하고 있어도 전혀 엉뚱한 곳으로 달려가고 있는 꼴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믿어 보려고 꿈도 못 꾸었을 때에,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 전혀 알지 못했을 때에, 죄의 고통 아래에 신음하고 있었을 때에,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는지 모르고 있었을 때에, 예수님이 먼저 나를 찾아오신 것이다. 나에게는 전혀 구원 받을 만한 자격이나 조건이나 공로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구원 받고자 하는 마음조차 안 먹었을 때에 그 분은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해 죽으셨다.
신약 성경의 반을 저술하고 로마서에서 기독교 구원의 진리를 설파한 사도 바울마저 내가 죄인 중의 괴수였다고 고백했다. 하나님과 완전 반대편에서 예수를 핍박하고 있었을 때에 예수님이 먼저 화해의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독단적이고 무조건적인 용서와 화해와 사랑의 선언이자 그 사랑으로의 초대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구원 문제를 이미 종결시켰었다고 말이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없게 하시려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1:4‐7).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에 덧입지 않고는 구원도 기독교 신앙도 절대 있을 수 없다.
“회개하고 죄 사함을 얻고 그래서 세례를 받으면 성령을 선물을 받는다.”라는 베드로의 권유가 그 순서대로 인간이 따라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내 영혼에 찔림이 있고난 후에 십자가에 내 대신 죽으신 예수를 주라 시인하게 되었고 그래서 구원을 받게 된 사실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최초의 구원 즉, 칭의 과정에서만은 모든 과정이 수동태로 표현되어야 맞다. 행동의 주체는 전적으로 하나님 그분이시고 인간은 그분의 행동의 수혜자일 뿐이다.
베드로는 또 하나님은 얼마든지 먼데 사람을 부르신다고 했다. 먼 데 사람이 누구인가? 지역적으로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에 있는 이방족속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 하나님의 대적이 되어 우상을 숭배했던 바로 우리다. “얼마든지 부르신다.”고 했다. 성령의 능력으로 아무리 지역적 인종적으로 멀고 또 어떤 흉악한 죄수라도 사랑하고 용서하여 당신의 자녀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교회 나올 때에 어떤 마음가짐으로 나오는가? 열심과 정성을 최고로 바쳤사오니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또 이런 저런 복을 주시옵소서인가? 우리 식구가 전부 몇이고 헌금액수가 얼마인데 왜 목사가 굽실거리지 않는가인가? 혹은 누가 교회 일을 잘하고 많이 하나 감시하러 나오는가? 내가 믿어 주었으니 뭔가 반대급부를 주셔야 한다인가?
내가 죄인 중의 괴수였는데도 예수님이 먼저 오셔서 용서하시고 사랑하셨다는 확신이 있다면 어찌 감히 그런 마음으로 교회에 나올 수 있겠는가? 그저 감사의 눈물이 앞을 가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교회의 중요한 직책을 맡고 오래 신앙생활을 했어도 인간이 하나님 앞에 들고 나올 수 있는 것은 오직 경배와 감사와 찬양뿐이다. 기도는 우리가 아직 연약하고 불완전하여 그분 앞에 자꾸만 다른 것을 들고 나오려는 습성을 없애는 데에 일차적으로 동원되어야 한다.
요컨대 신자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취해야 할 태도는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뿐이다. 남들 앞에, 아니 하나님 앞에서는 더더욱 이래도 "예" 저래도 "예" 그저 "예, 예" 해야 한다. 어찌 보면 쓸개 빠진 바보 멍청이가 되어야 한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했지 않는가? 우리가 잘난 구석 하나 없었던 자들이었는데, 심지어 믿음도 선물로 받았는데 교회 안에서조차 어찌 눈에 힘이 들어가고 목이 빳빳해지고 어깨를 치켜세울 수 있다는 말인가?
구원 이후에도 평생을 두고 가장 먼저 점검해야 할 사항도 마찬가지다. 혹시 그분께 바쳐서, 특별히 좋은 믿음의 대가로 그분께 받아내려는 욕심 내지 소원이 있는지 여부다. 만약 그렇다면 아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거나 잊고 있다는 반증일 뿐이다. 진정한 신자는 교회 벽에 걸린 십자가만 봐도 눈물이 흐르고 감사가 넘쳐야 한다. 성령의 은혜로 믿음을 선물로 받게 된 신자가 바랄 것이라고는 첫째도 하나님의 긍휼이요, 둘째도 하나님의 긍휼이요, 셋째도 하나님의 긍휼뿐이다. 또 긍휼을 원하면 자연 겸손해질 수밖에 없지 않는가?
11/20/2008
(1996/5/19 유타대학촌교회 주일설교)-->
사도행전강해 (13)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2:37‐41)
구원 과정의 시간적순서
불신자가 구원 받는 첫 과정이 인간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도덕적 회개가 아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인한 영적인 찔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자신의 궁극적 생명을 걸고서 “내가 어찌하여야 구원을 얻을꼬?”라고 갈구하는 탄식이 먼저다.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로 회심하게 된 3천 명의 유대인들이 사도들에게 맨 먼저 던진 질문이 바로 그것이었다. 과거에 지은 몇 가지 윤리적, 그것도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회개한다고 구원을 얻는 것은 기독교에선 절대로 없다.
청중들의 그 질문에 대해 베드로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고, 성령을 선물로 얻으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청중이 그의 설교에 보인 첫 반응, 영적 찔림과 그가 제시한 구원을 얻는 네 가지 절차와는 어떤 관계가 있으며 또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따져볼 필요가 생긴다.
우선 주지해야 할 사항은 이 네 가지 과정, 아니 영적 찔림까지 포함해 다섯 단계가 반드시 시간적 순서를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적인 찔림이 있고난 다음 회개를 하고 세례라는 절차를 거치면 하나님이 죄 사함을 허락하고 또 그렇게 하나님 앞에 돌아 온 자녀에게 보상의 의미로 성령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앞 단계가 있어야만 다음 단계가 따라오는 절대적 전후 관계가 아니다.
지난주에 예를 든 빌립보 감옥의 간수나 다메섹 도상의 바울은 스스로 회개하거나 세례 받을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었고 심지어 꿈도 꾸지 않았다. 전혀 예상치도 않던 우연한 장소와 시간에서 살아계신 주님을 마주치게 되었고 또 주님의 일방적 간섭과 은혜로 즉각적인 구원을 현장에서 얻었다. 오순절에 모인 청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단지 유대절기를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지내려고 모였다. 그러다 사도들이 각 나라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는 신기한 현상을 생전 처음 목격했고 또 베드로의 설교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의 찔림을 받았다. 구원 받은 삼천 명 모두에게 계획은커녕 아예 상상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었다.
한 마디로 구원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에게 당신의 절대적 주권으로 베푸시는 선물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이 주관한다. 그러나 인간의 지정의적 분별, 동의, 결단이 전혀 따르지 않고 마치 마취시키듯이 하나님이 순식간에 일방적으로 믿게 만든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의 사고활동마저도 당신의 주권과 일체 상호충돌이 없게끔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나아가 한 개인의 구원은 하나님 쪽에서 먼저 계획을 세운 후에 당신의 권능으로 앞서 주도하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신자들이 이런 부분에 대해 명료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다. 심지어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만 신자가 되는 줄 즉, 세례 자체가 능력을 갖는 양 착각하고 있는 경우마저 종종 접한다. 오순절 삼천 명의 회심 사건만 따져 봐도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임을 쉽게 알 수 있지 않는가?
물론 예수님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2,33)"고 말씀하셨다. 바울사도는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니라”(롬10:9,10)"라고 아예 입으로 시인하는 절차를 필수적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말씀이 세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세례는 예수를 진심으로 영접하고 난 후 즉, 그분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온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였음을 하나님과 교회 앞에 고백하는 예식일 뿐이다. 그런 진정한 믿음 없이 세례를 통해 믿음이 생기리라 기대하거나, 기독교적 예식이니까 교인이라면 일단 받고 봐야 한다는 생각이라면 큰 오산이다. 그런데도 그 정도 인식만으로 세례 받고 경건한 교인으로 오랫동안 행세하는 자들이 꽤 많다. 나중에라도 온전한 영적 중생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혼자서 종교 놀음에 취한 것일 뿐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최초의 기독교 신자들의 경우에도 베드로가 말한 네 절차의 전후 순서를 명백히 구분할 수 없다. 성령이 가장 충만하게 역사해 제 삼자가 봐도 중생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때도 그랬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사실은 베드로의 설명과는 달리 성령을 선물로 받는 일이 반드시 제일 먼저 일어났다는 것이다. 가이사랴의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 일행에게도 베드로가 설교하자 성령이 먼저 임하여 구원받았고 그 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세례를 주었다.(10:44-48)
그럼 베드로가 말한 순서는 틀렸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는 의미는 성령의 은사와 권능을 받아 누리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구원은 반드시 먼저 성령이 한 죄인의 영혼에 파고들어 영적 찔림이 생기게 함으로써 지금껏 예수를 부인 외면하고 살았던 삶이 너무나 헛되고 하나님 앞에 죄였음을 깨달아야 일어난다. 바로 그것이 회개이자 영적 중생의 근본이다. 세례는 자기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음을 외적으로 고백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물세례를 받는 여부와 관계없이 진정한 회심이 일어났다면 성령은 이미 신자에게 내주해 있다. 또 구원 받은 신자에게는 성령이 각 사람에게 맞는 은사를 선물로 주신다. 사마리아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난 후에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을 위해 성령의 세례를 간구했었다.(행8:14‐17) 사마리아 사람 전부가 영적 중생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복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였던 자라면 이미 구원은 확정되었다. 그럼에도 성경이 사도들이 기도하자 성령을 받았다고 표현한 것은 방언이나 신유 같은 특별한 개별적 은사를 받게 되었다는 뜻이다.
구원에서의 회개, 죄 사함, 물세례, 성령 세례의 의미와 그 관계를 잘 알지 못하거나 착각하는 신자가 의외로 많다. 착각은 북한에서도 자유이며 세금이 안 붙는다고 농담하듯이 남에게 큰 피해를 안주는 정도는 애교로 보아 넘겨줄 수가 있다. 그러나 정도가 심하면 당장은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자신과 주위에 심각한 해악으로 나타날 수 있다. 착각인 줄 모르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 착각의 가장 큰 착각인 셈이다.
신앙의 착각도 마찬가지다. 사실은 심각한 착각인데도 모르고 지나치면 끝가지 올바른 신앙을 형성할 수 없어 자신뿐 아니라 주위에까지 중차대한 영향을 미친다. 특별히 구원에 관한 착각은 본인에게 치명적이다. 자신은 구원 받았으며 신앙생활을 충분히 경건하게 하고 있다고 평생 착각하고 보내지만 실제로 구원과 거리가 멀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결과는 끔찍하게도 영원한 불 못으로 떨어지는 것이지 않는가?
잘못된 신앙의 출발
구원을 자기 노력으로 취득하려는 여타의 모든 종교와는 달리 기독교 신앙은 구원을 받은 후에 비로소 시작된다. 신앙이 자라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후 신앙이 자란다. 물론 그 전에라도 교회 생활은 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다. 또 구원도 점진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 그러다 어떤 시점에선가 성령의 간섭으로 구원의 확신이 생기면 세례 의식을 거치면 된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칭의(稱義 통칭 구원:Redemption)와, 그 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신의 성품과 삶이 의롭게 자라나가는 성화(聖化 Sanctification)와, 죽은 후 천국에서 그리스도처럼 거룩하게 변하는 영화(榮化 Glorification)의 세 단계로 대별할 수 있다.
첫 단계 칭의가 잘못되면 그 다음 단계가 잘못될 것은 불 보듯 빤하다. 그럼에도 교회 출석하여 경건히 살고 있으니 성화의 단계에 들어섰다고 착각한다. 비록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의로울지라도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했어도 기독교 신앙의 출발조차 하지 않았을 수 있다. 신앙이 올바르게 자라지 않을뿐더러 달려가는 길이 다르기에 궁극적인 도착지도 엉뚱한 곳이 될 수 있다.
구원 과정에서 신자들이 가장 많이 그것도 치명적으로 착각하는 것은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는 원리다. 하도 익숙하게 듣고 배운 교리인지라 신자라면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당신을 믿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던 것을 예로 들면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롬5:1)이라고 선언했다. 또 로마서 전체의 주제도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이지만 그 의미하는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자가 사실 드물다.
한국말 어법이 거의 그렇긴 하지만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는 논리적으로 정밀한 표현이 아니다. 선행이나 공적으로 구원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초점을 두다 보니 지금껏 그냥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그 이상의 간단하고 좋은 표현도 현실적으로는 딱히 없다.
우선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고 강조하면 믿음이 있는 자는 구원을 받고 믿음이 없는 자는 받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인간의 믿음을 평가한 결과에 의거해 구원을 선별해서 준다는 의미가 된다. 그럼 믿는다는 행위 자체가 구원의 원인 내지 조건이 되어버린다. 이는 잘못이다. 구원을 얻는 데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 외에는 다른 어떤 전제, 조건, 자격, 공적, 기준이 절대 있을 수 없다. 비록 선행을 내세우지 않고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 들였다 해도 믿음 자체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
바울이 이신칭의를 어떻게 부연 설명했는가?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롬5:2) 분명히 이 은혜 즉, 구원을 얻고 난 후의 상태로 들어 간 것은 순전히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고 했지 않는가? 또 구원을 얻고 난 이후의 상태를 어떻게 표현했는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라고 했다.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가서 이미 서있는데 그 일은 믿음으로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드시 주지해야 할 것은 믿음으로 이 은혜를 “얻었다”고 하지 않았다. 대신에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라고 했다. 이미 은혜 안에 서 있는 것을 믿는다는 뜻이다.
이 주제만큼은 영어 표현이 오히려 이해하기 쉽다. 영어로는 대개 믿음을 통해(through faith) 주님의 은혜로(by His grace)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반면에 우리말 어법은 단순히 “믿어서(by faith)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전자는 믿음이 경로가 되었고 후자는 믿음 자체가 구원을 얻는 수단이 되었다.
경로와 수단은 엄연히 다르다. 알기 쉽게 비유하면 옹달샘에서 물을 받는데 샘에 붙어 있는 파이프는 경로이지만 수단은 반드시 수도꼭지를 직접 틀어야 하는 것이다. 파이프의 경우 물은 전적으로 샘에서 나오고 또 그 샘에서 분출하는 힘에 의해 파이프를 통과한다. 파이프가 물을 만들어 내거나 물을 빨아들이는 힘은 전혀 없다. 단순히 샘에 붙어 있기만 했는데도 물을 받고 물이 통과한다. 그러나 수도꼭지를 통해 물을 얻는 자는 꼭지를 틀지 않으면 물이 절대 나오지 않는다. 옹달샘의 물과 그 샘 자체의 힘 외에도 수도꼭지라는 다른 도구가 필수적이다.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가 전자의 뜻이 되어야지 후자가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차이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 진리의 영 ‐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죄에 대하여 심판하시게 되는데 그 죄는 예수를 믿지 않은 것이었다.(요16:7‐9). 요컨대 예수 믿지 않는 죄를 사함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다.(고전12:3).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 있던 죄인이 구원을 얻는 것은 즉, 그전까지 죽도록 부인하고 싫어했던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것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간섭 없이는 불가능하다. 전도 현장에서 보면, 아니 우리 모두가 사실 하나님은 그런대로 인정했어도 예수는 어지간해선 믿지 못했지 않는가?
구원의 핵심은 예수님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 구원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예수님은 반드시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 죄를 지고 죽으셔야 했다. 역으로 말해 골고다 십자가가 없었다면 아직도 인류에게 구원의 길은 오리무중이며 죄의 노예가 되어 있을 것이다. 믿어야 할 대상은 당연히 그분이지만 믿음을 갖게 되는 경로도 오직 그분이라는 뜻이다. .
바울이 “그로 말미암아” - 믿음의 대상으로서 예수와 믿음의 경로로서의 예수 둘 다 - 은혜를 얻었다고 했다. 예수 그분을 믿지 않고는 절대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믿음의 대상) 또 죄인 쪽에서 그분의 은혜를 구하거나 택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구원을 주시러 그분이 먼저 한 죄인을 택하여 찾아 오셨다는 것이다. 자신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성령의 간섭으로 심령에 찔림이 있어야 한다.(믿음의 경로) 그 후에 본인이 그분의 십자가 은혜를 진심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또 그분의 은혜 안에 자기가 서 있음도 믿게 된다.(믿음의 결과)
구원을 얻는데 믿음이 경로 혹은 수단 어느 쪽으로 동원 되었든 간에 눈에 보이는 외적 결과는 동일한 것처럼 보인다. 일단 교회 안에 들어온 모든 자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경건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을 도구로 사용한 자는 자신의 죄가 사해졌다는 믿음조차 자꾸 흔들린다. 반면에 믿음이란 경로를 통해 성령의 간섭이 자기 심령에 일어난 자는 자신이 구원 받았다는 믿음에 더 이상 흔들림이 없게 된다. 믿음의 결과에도 남들의 눈에는 안 보이지만 이런 분명한 차이가 있다. 최초의 구원 자체가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의 영과 신자의 영의 교통 관계 내에서만 일어났기 때문이다.
전도의 미련함
성경은 구원 과정을 자세히 풀어서 설명하고 있지 않다. 대신에 단순히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만 표현한다. 예수님 말씀대로 성령의 간섭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인간이 잘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성경은 하나님이 선포한 말씀이지 논리체계를 갖춘 과학적 기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절대적 진리를 구태여 미주알고주알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앞뒤 문맥을 검토하여 성경 66권을 관통하는 구속사적 원리에 연계하면 얼마든지 올바른 해석이 가능하다.
교단마다 구원 과정에서 하나님 은혜와 인간 자유의지의 상관관계에 대한 이해는 다르지만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점에는 일치한다. 그러나 행위를 육체가 동원되는 외적 행동으로 한정하는 잘못을 종종 범하고 있다. 즉 스스로 믿기로 한 것은 행위가 아니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지적활동이니 사고활동이라고 표현하지 않는가? 자신이 믿기로 한 것은 겉으로 행동만 안했다 뿐이지 내면의 사고영역 안에서 분명히 어떤 행위가, 그것도 인간이 주도권을 잡고, 일어난 것이다.
자신이 믿는 일을 행위가 아니라고 착각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비록 초자연적인 성령의 간섭으로 구원을 얻게 되지만 신자가 그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여전히 눈에 안 보이는 지정의 활동의 영역 안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도 인간이 외부 사항에 접하든 스스로 생각하던 어떤 확정된 개념으로 마음속에 정리되는 과정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또 어떤 사고가 정리되면 그 정리된 개념만 남아서 인식되지 이전의 정리되는 과정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언어적 표현은 이미 모든 생각이 정리된 후에야 나온다. 요컨대 인간이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자기가 믿었다는 사실 뿐이라는 뜻이다.
성령의 초자연적 간섭은 더더욱 그렇다. 성령이 최초로 자신에게 임재 하는 것은 아예 인식조차 할 수 없다. 뭔가 꼭 집어서 말할 수 없는 찔림이 심령에 생겼다가 점차 주님의 죄 사함의 긍휼 안에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그러다 최종적으로 구원의 확신이 생긴 후에는 자신이 믿었다는 표현밖에 할 수 없다. 정히 문법상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믿었다, 믿기로 했다, 믿게 되었다, 믿어졌다, 믿어지게 된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등등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엄밀히 구분해서 사용하면 자칫 내용이 오히려 불분명하거나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통칭해서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는 이상의 좋은 표현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뭘 그렇게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느냐? 어쨌든 결과적으로 믿음을 갖게 되었고 구원을 얻었으면 그만이지 않느냐? 쉽게 반박할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었던 한 영혼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일을 두루 뭉실 넘어갈 수는 없다. 신앙을 갖는 궁극적 목적지는 영생을 얻는 구원이다. 그러나 목적지가 같다고 도착지도 같으리라는 보장은 절대 할 수 없다. 우선 출발지가 다르고 가는 방향이 다르면 도착지는 자연히 달라질 것 아닌가? 어쨌든 믿었으면 되었지 하고 넘어갈 문제가 결코 아니다.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심판 둘 중 하나로만 나눠지는 치명적인 과제다.
구원은 “믿어서 얻는 것”이 아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믿게 된 것”이다.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 남들은 믿지 못했지만 나는 믿었다는 뜻이다. 또 아무리 믿기 힘들더라도 일단 믿고 보라고 권유하게 된다. 그런 권유를 받은 사람도 진정한 믿음과는 거리가 먼 채 예수 믿는 믿음을 가진 체 가장할 수도, 실제로는 잘 몰라서 믿음을 가진 양 착각하는 자가 대부분이지만, 있다.
전도할 때에 주로 어떤 이야기를 건네는가? “당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십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셨고 그 예수님이 여러분의 죄를 사해 주려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당신은 그 분을 구세주로 영접만하시면 모든 죄를 용서 받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이제 믿음으로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입술로 시인하십시오.” 가장 기본적인 복음전파 방식을 가만히 살펴보면 어떤 뉘앙스를 지니는가? 일단 믿어보시라니까요 혹은 무조건 교회에 출석하셔서 믿음을 가지도록 노력하라는 이미지가 다분하지 않는가?
불신자들도 자기가 죄인임은 어느 정도 인정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구세주임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복음을 그렇게 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구원의 구체적 과정이 어떠하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표현해야 하듯 전도 또한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리라.”(롬10:13-15)
그래서 성경은 전도는 미련한 것이라고 표현하면서도 그런 미련한 전도를 받아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다고 말한다.(고전1:18‐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
이신칭의에 대한 치명적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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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차 강조하지만 자기가 전해들은 교리를 능동적으로 비교 분석하여 따져 본 후에 믿음을 갖기로 결심한 것이라면 어디까지나 행위가 된다. 그렇다고 그런 분별도 없이 무조건 믿기로 했다면 맹신(盲信)이다. 또 혹시 지옥에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예수 믿는 자들에게 이적도 많이 일어나니까 열심히 믿다보면 나에게도 복을 주고 천국에 보내 주리라 기대하고 믿기로 했다면 미신(迷信)이다. 맹신과 미신이야말로 신자가 능동적으로 믿는 대표적 경우다. 앞으로 따져 보겠지만 자기가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는 자는 자칫 맹신과 미신으로 흐를 소지가 다분히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일일이 분석한 후에 동의하여 믿어 보기로 하는 결단이 믿음의 출발이 되어선 안 된다. 예수님은 구세주이지 철학적인 스승에 불과할 수는 없지 않는가? 오직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분의 보혈의 공로에 의거해 도무지 자격이 없는 죄인을 하나님이 의롭다고 선언해주는 것이 믿음의 유일한 근거이자 출발점이다. 또 그런 은혜가 자신에게 이미 베풀어졌다는 사실을 성령님이 간섭하여 깨우치게 해주셔야 진정한 믿음이 생긴다.
반드시 자신의 영혼에 찔림이 먼저 있고, 점진적인 과정이든 순간적 회심이던 간에, 이어서 전인적인 회개가 따라 온다. 즉 영혼의 눈이 열려 그때까지 알지 못하던 영적 세계를 보게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그분이 다스리는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자연스레 믿어지게 된다. 무엇보다 그분이 나 자신을 일대일로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진정한 실체가 너무도 더럽고 추하고 흉악한 죄인임을 발견하고 오직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도무지 깨끗케 될 수 없음을 철저하게 깨닫는다. 죄에 빠져 그분과 원수 상태에 있었음에도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시고 내 대신 피 흘려 죽으심으로 모든 죄 값을 갚았다는 사실 앞에 심령 깊숙한 곳에서부터 눈물이 저절로 솟구치며 감사하게 된다.
말로는 간단히 설명했지만 이런 인간 내면의, 특별히 영혼에 일어나는 변화가 과연 스스로의 능동적인 사고 활동으로 일어날 수 있겠는가? 아니 그 변화를 시작해볼 엄두라도 내겠는가? 그것도 하나님은 몰라도 예수님은 로마 사형수에 불과하거나 한 명의 위인 정도로만 취급하던 사람이 말이다. 불신자에게 말로서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설득한다고 해서 그 진리가 그들로서 과연 쉽게 믿어질 내용인가 말이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그렇게 전하는 것은 듣지 않고는 복음의 내용을 전혀 알 수 없고 또 그렇게 신자가 미련하게 전하는 현장에는 성령이 역사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절대 기계나 짐승처럼 만들지 않았다. 전도자가 복음을 전혀 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이 단독으로 한 죄인의 영혼에 역사하여 복음의 내용을 강제 주입시킬 수는 없지 않는가?
우리 모두 믿기 전에는 완전히 캄캄한 방에서 칠흑같이 새카만 옷을 입고 있었던 자였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우리 모습을 스스로 분석해 자신의 상태가 시커멓고 또 캄캄한 방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빛이 들어 와야만 우리가 시커멓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 방에 전구가 되어 빛을 비추는 것은 예수님이요, 전구를 설치하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요, 그 빛에 전력을 보내고 스위치를 켜는 것은 성령님이다.
그럼에도 참으로 기막힌 사실은 우리는 어두운데 너무 익숙해지다 보니 빛이 비춰도 여전히 어두운 것을 더 사랑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두움에 익숙해진 우리 눈을 빛에 감응할 수 있도록 조절해 주는 역할을 성령님이 반드시 해주셔야만 했던 것이다. 나면서부터 봉사인 자로선 도저히 벗길 수 없었던 영혼의 눈가리개를 성령님이 벗겨주셨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요3:19‐21).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온다고 한다. 성령의 능력으로 만이 우리 모습이 시커멓고 또 캄캄한 방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구원이란 하나님께 죄의 용서를 받아 영생을 얻는 것인데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도무지 아니지 않는가?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실 수 있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오시라고, 죽으시라고, 부활하시라고, 성령을 보내달라고 하지 않았다. 예수님 그 분이 우리가 철두철미 죄에 빠져 있음을 지적했고, 회개를 촉구했으며, 하나님 앞에 나오라고 초청하셨다. 그러는 그를 우리는 싫고 미워서 죽여 버렸다.
인간은 그분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조차 십자가 구원의 의미를 사역과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구원이 인간 스스로의 지정의 활동으로 취득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다. 우리의 체질이 진토임을 아시는 그분으로선 성령의 보내심을 미리 계획하실 수밖에 없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나니.”(롬8:14,16).
비록 성경이 혹은 전도할 때에 단순히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이미 구원의 은혜 가운데 든 사람은 자신이 구원에서 한 역할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에서 열까지 자기가 계획하고 예상치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을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증거한다”고 했지 않는가? 그래서 예수를 믿게 된 믿음, 심지어 교회에 출석하기로 결단한 것조차도 하나님이 죄인인 자기를 너무나 긍휼히 여겨서 그분께서 생기게 해주신 은혜였음을 겸허하게 인정한다.
만약 그분의 예정과 선택의 은혜가 없었더라면 성령이 자신의 영에 간섭하지 않았을 것이며 여전히 사망의 진노와 흑암의 세력에 묶인 채 죄를 즐기고 있었을 것임을 절감한다. 그리고 그 상태로 멸망으로 달음질 하지, 자신의 자발적 깨우침과 노력으로 죄에서 벗어날 길이라고는 전혀 없음을 절대 부인하지 못한다. 한마디로 죽을 죄인이었던 자기를 예수님이 살려주셨다는 것이다. 제삼자가 아무리 다른 심오한 교리나 논리적 변증을 갖다 대어도 또 스스로는 구체적으로 자신의 구원 과정을 설명하지 못해도 아무 상관과 의심 없이 그렇다.
반면에 단지 자신의 의지적 결심으로 믿기로 한 사람은 구원 교리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그친다. 말하자면 자신은 분명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 들였고 또 그러면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 또한 잘 믿고 있다고 스스로는 생각한다. 또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고 있으니 자신의 구원에 대해 새삼스레 따지거나 의심해볼 여지도 없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십자가 구원의 깊은 의미를 모르기에 그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교인과 신자
물론 내가 믿기로 결심하여 교회에 출석했다고 해서 구원이 전혀 이뤄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택하신 자에게는 올바른 복음이 전해지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 예수 아니고는 자기에게 오직 사망뿐임을 절감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 출석을 오래 했어도 예수를 자신의 주로 모시고 오직 그분을 위해 살고 죽는 전적인 헌신이, 실천하고 있는 정도는 아직 미진할지라도, 없다면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 다른 말로 여전히 믿으려 하고 있다면 교인일지언정 신자가 된 것조차 아니다.
내가 믿기로 했다, 내가 믿었다는 것은 인간 쪽의 행위에 불과할 뿐 아니라 내 쪽에 뭔가 선한 구석이 있었다는 뜻도 된다. 스스로 양심적 회개를 했다는 공적이 생긴다. 남들은 기독교교리를 잘 이해하지 못했고 심지어 회개할 생각도 하지 못한 뻔뻔한 죄인이지만 나는 영적으로 깨어서 이해했고 양심도 비교적 깨끗해서 자발적으로 뉘우쳤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든지 더 나쁜 방향으로 비약할 수 있다. 예컨대 내가 믿어주었다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이 답답해하고 손해를 보는 것 같아 믿어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교회에도 내가 나가 주었다가 된다. 그래서 우리 가족과 일가 전부를 합치면 몇 명이고 그들이 내는 헌금 합계가 얼마인데 교회가 우리 의견을 듣지 않으면 안 된다로 가버린다. 목사나 장로가 조금만 마음에 안 들거나 요구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심심찮게 삐지고 심하면 더 이상 교회 나오지 않는다고 협박까지 한다.
교회에 안 나오면 솔직히 누가 손해인가? 교인이 줄면 복음만 바로 전하면 하나님이 다시 채워주실 것이며 그 사이에 사례비가 줄어도 목회자는 자동적으로 금식하면 그만이다. 교회를 안 나오면 안 나오는 만큼 그 사람만 손해다. 교회 안 나와서 좋은 일은 한두 시간 낮잠을 더 자고 헌금할 만큼 돈이 굳을 수 있지만 그 앞에는 영원한 죽음만 기다린다.
스스로 결단하여 믿은 교인들로선 교회 안에 다른 성도들도 다 자기 같은 줄 착각한다. 교리를 분석해 믿음을 갖게 된 것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자기처럼 잘 분석한 교인과 잘못 분석하거나 아직 분석조차 못한 교인이 있다고 판단한다. 필연적으로 믿음이 더 좋다, 약하다는 식으로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기 쉽다.
엄밀히 따지면 자신을 포함한 교인들 모두가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취득하고 있는 중이라고 보는 셈이다. 자기가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고 믿으니까 그렇다. 그럼 구원 과정에서조차 우열이 발생한다는 뜻이며 그것은 또 구원 이전의 영적 상태에도 우열이 있다는 뜻도 된다. 죄인도 더 심한 죄인이 있고 덜한 죄인이 있게 된다. 저 사람은 아직 못 깨닫고 있어, 이해력이 약해, 영적으로 미숙해, 더 깨어져야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성화단계에서는 성숙되고 덜 성숙된 믿음의 구분이 있을 수 있지만 구원을 얻는 믿음에서 만은 좋고 나쁜 믿음이 절대로 없다. 다 같이 죽은 시체였던 자들을 오직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에 의거해 하나님이 의롭다고 칭해 주는 것뿐이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조건 없이 당신의 주권으로 나눠주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구원 이전의 영적 상태의 우열이란 일절 없다. 따라서 구원 이후로도 즉, 교회 내 성도 간에는 오직 온전한 십자가 믿음이 생겼는지 아닌지만 문제될 뿐이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대분의 교인들에게 이런 구별이 없다. 그만큼 성령으로 거듭난 진정한 신앙인보다는 스스로 믿으려 노력하는 교회 멤버가 더 많다는 뜻이다. 이는 너무나 중차대한 문제다. 교회가 별 문제없이 잘 운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영원히 죽고 사는 문제를 아직도 해결 받지 못한 자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나아가 내가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교인은 불신자를 꾸짖거나 가르쳐야할 대상으로만 생각한다. 영적으로 열등한 존재요 도덕적으로 더 악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그들을 전도하기 보다는 교회 안의 권력 다툼에 더 열을 올린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음을 믿게 된 신자만이 불신자를 믿기 전의 자기와 똑같이 예수님 사랑 없이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존재로 대할 수 있다.
내가 믿었다고 생각하는 교인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과 거래하려 든다. “내가 믿었지 않습니까? 목사가 권하는 대로 세례 받고 집사가 되어 헌금 많이 하고 봉사도 성실히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지금의 내 형편은 왜 이 모양 이 꼴입니까? 하나님이 나더러 하라는 것 다 했으니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해주어야 할 차례 아닙니까?” Give and Take의 신앙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 주는 것으로는 “믿어 주었다”는 것 하나로 다 해결된 줄 안다. 그 후로는 항상 이것 달라 저것 달라만 외쳐 된다.
그러다 구한 것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자기 쪽에서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일쑤다. 어디선가 정성과 열심히 모자라는가보다 여기기 때문이다. 나아가 평소에도 교회에서 맡고 있는 직분이 없거나 종교적으로 거룩한 행위를 하고 있지 않으면 괜히 불안해한다. 말하자면 하나님께 확실히 받는 것이 없으면 바로 내가 드린 것이 적은가보다 불안해진다. 따져 볼수록 앞에서 말한 대로 맹신과 미신의 냄새를 풍기지 않는가?
간혹 교회에서 행사나 프로그램을 꾸미기를 유난히 좋아하는 분들이 있다. 성도들이 일상적으로 예배드리고 성경공부만 하고 있으면 교회가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렇지 않다. 교회의 일차적인 사명은 어디까지나 영적인 전투를 수행하여 영혼을 구하는 것이지 특정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모든 행사는 영혼 구원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말씀과 기도에만 전무하려 해도 사실 시간이 모자란다. 역으로 영적 전투를 잘하기 위해서라도 말씀과 기도가 주가 되어야 한다.
물론 교회가 구제, 봉사, 친교에 등한히 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친교는 말씀과 기도 안에서 이뤄져야 하므로 그 둘에 성실히 하면 자연히 이뤄진다. 구제와 봉사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며 교회 본연의 임무는 아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선행을 하지 않고 있으면 마치 바로 된 교회가 아닌 양 생각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주로 자기가 믿었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그런 불만을 가진다. 즉 자기가 회개라는 선한 행위를 통해 교회 멤버가 되었듯이 교회도 항상 선한 행사를 하고 있어야 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런 자들의 또 다른 심각한 잘못은 하나님도 자기가 편리한 때에 언제든 만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성도들이 만나길 소원하여 기도하면 언제든지 만나 주신다. 그런 뜻이 아니라 처음 구원 받았을 때도 내가 믿었으니까 이제는 무엇이든 내가 믿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 이뤄진다고 믿는 것이다.
여전히 자신 쪽에선 의지적으로 믿으려는 노력만 경주하면 된다는 것이다. 믿음은 오직 자신의 사고활동에 달려 있기에 결국 내가 믿고 싶을 때 믿고 또 필요할 때 믿으면 된다. 믿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능동적으로 행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결국 자기 종교적 열심과 판단 여하에 따라 하나님마저 언제든지 조종할 수 있다고 여기는 엄청난 착각에 빠진다.
그 반사작용으로 평소 때는 도리어 “하나님 가만히 계십시오. 이런 일에는 하나님 눈 좀 감고 계시죠. 이 일만 끝나면 제가 다시 또 잘 믿겠습니다.”라고 생각한다. 자기 삶의 범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자기 편의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 하나님이 되어버린다. 자신의 인격과, 품성과, 영적인 성숙과는 아예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 거룩한 영향력을 전혀 끼치지 못하는 하나님이다. 자신이 필요로 할 때만 자신의 때와 방법으로 하나님마저 이용하려 든다. 그분의 일에 자신이 쓰임 받는 종이라는 인식은 아예 없다. 정기적으로 하는 종교적 경건행위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내는 일에 도움이 될 용도 안에서만 이뤄진다.
한 마디로 만나기 싫으면 안 만나도 그만인 하나님이다. 언제든지 자신이 열심을 내어 믿으면 된다. 그래서 일주일 내내 하나님을 냉장고에 모셔두었다가 주일날 교회 나올 때만 꺼낸다. 또 이왕이면 최고 좋은 옷을 입고 가슴에 거룩하게 모시어야 그분으로부터 받을 것도 많아지리라 기대한다. 평소에는 별로 읽지도 않는 최고급 가죽 성경을 꼭 가슴에 붙이고 얼굴에는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아주 경건하게 교회에 나타나지 않는가 말이다.
내가 믿은 자의 치명적 부작용
상기의 설명은 자기가 믿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의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상의, 정확히는 교회 생활상의 부작용일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가장 치명적인 결함은 그렇게 해선 진정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옳다면 역으로 가정해 볼 때 신자들 가운데 자기가 안 믿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는 뜻이 된다. 또 인간 쪽에서 안 믿었다면 그에게 예정된 구원은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결과가 된다.
물론 외형적으로는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모습이 분명 있다. 그러나 잘 따져 보기 바란다. 인간 스스로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면 하나님 쪽에서 그를 택한 것이 아니라 자기 쪽에서 하나님을 택한 셈이다. 신자가 되는 것이 오직 인간이성에 의한 합리적 판단과 결심의 결과일 뿐이다. 역으로 따지면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할 여지가 하나 없어도 구원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한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연유가 그분의 영원하신 계획과 섭리 가운데 택하심을 입지 않아도 가능하다.
도대체 그럼 하나님이 한 개인의 구원에서 하시는 역할이 무엇인가? 전혀 없지 않는가? 예수를 십자가에 죽으시게 해서 모든 죄책을 탕감해 주었으니 믿으려면 믿고 말라면 말라는 꼴이지 않는가 말이다. 그러나 연약하고 불완전한 데다 죄에 찌들고 사단에게 미혹까지 당한 인간이 스스로 믿는 믿음이 과연 온전하고도 진정한 믿음이 되겠는가? 당연히 그렇게 믿은 후에도 제 기분이나 생각대로 믿고 싶으면 믿고 믿기 싫으면 믿지 않는 일이 벌어질 것 아닌가?
그러니까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자들이 한 번 얻은 구원도 취소될 수 있다고 함께 주장하지 않는가? 논리적으로 따지면 당연한 귀결이다. 믿음이라는 행위로 구원을 얻었으니 믿음이라는 행위의 약발(?)이 떨어져 악을 행하게 되면 하나님이 구원을 취소시킬 것은 합당하게 보인다. 그러나 당신의 독생자를 인류 역사상 단 한번 그런 비참한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에 죽여 버린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효력을 그렇게 쉽게 부인할 수 있을까? 아무리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주장 아닌가?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되지 않고 하나님의 택하심이 없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비록 하나님의 존재자체는 부인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택하심이 없이는 하나님 쪽에서 신자 개인을 알고 계시지 않다는 뜻이 된다. 십자가로 길을 열어 놓았으니 알아서 믿고 오라는 말인데 죄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구태여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이지 않는가? 마치 만물을 만들어 놓고 그 통치와 구원에는 전혀 관심 없이 손을 놓고 있는 조물자와 같다.
기독교 신앙은, 특별히 구원을 받는 것은, 절대로 철학적 도덕적 종교적 개념 내지 계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신자 간의 일대일의 인격적인 만남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자신의 실체를 완전히 벌거벗겨서 엎드린 체험 없이는 하나님을 그저 절대자로 인정하는 정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신앙의 궁극적인 도착지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사실은 교회생활을 하고 있어도 전혀 엉뚱한 곳으로 달려가고 있는 꼴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믿어 보려고 꿈도 못 꾸었을 때에,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 전혀 알지 못했을 때에, 죄의 고통 아래에 신음하고 있었을 때에,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는지 모르고 있었을 때에, 예수님이 먼저 나를 찾아오신 것이다. 나에게는 전혀 구원 받을 만한 자격이나 조건이나 공로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구원 받고자 하는 마음조차 안 먹었을 때에 그 분은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해 죽으셨다.
신약 성경의 반을 저술하고 로마서에서 기독교 구원의 진리를 설파한 사도 바울마저 내가 죄인 중의 괴수였다고 고백했다. 하나님과 완전 반대편에서 예수를 핍박하고 있었을 때에 예수님이 먼저 화해의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독단적이고 무조건적인 용서와 화해와 사랑의 선언이자 그 사랑으로의 초대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구원 문제를 이미 종결시켰었다고 말이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없게 하시려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1:4‐7).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에 덧입지 않고는 구원도 기독교 신앙도 절대 있을 수 없다.
“회개하고 죄 사함을 얻고 그래서 세례를 받으면 성령을 선물을 받는다.”라는 베드로의 권유가 그 순서대로 인간이 따라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내 영혼에 찔림이 있고난 후에 십자가에 내 대신 죽으신 예수를 주라 시인하게 되었고 그래서 구원을 받게 된 사실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최초의 구원 즉, 칭의 과정에서만은 모든 과정이 수동태로 표현되어야 맞다. 행동의 주체는 전적으로 하나님 그분이시고 인간은 그분의 행동의 수혜자일 뿐이다.
베드로는 또 하나님은 얼마든지 먼데 사람을 부르신다고 했다. 먼 데 사람이 누구인가? 지역적으로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에 있는 이방족속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 하나님의 대적이 되어 우상을 숭배했던 바로 우리다. “얼마든지 부르신다.”고 했다. 성령의 능력으로 아무리 지역적 인종적으로 멀고 또 어떤 흉악한 죄수라도 사랑하고 용서하여 당신의 자녀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교회 나올 때에 어떤 마음가짐으로 나오는가? 열심과 정성을 최고로 바쳤사오니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또 이런 저런 복을 주시옵소서인가? 우리 식구가 전부 몇이고 헌금액수가 얼마인데 왜 목사가 굽실거리지 않는가인가? 혹은 누가 교회 일을 잘하고 많이 하나 감시하러 나오는가? 내가 믿어 주었으니 뭔가 반대급부를 주셔야 한다인가?
내가 죄인 중의 괴수였는데도 예수님이 먼저 오셔서 용서하시고 사랑하셨다는 확신이 있다면 어찌 감히 그런 마음으로 교회에 나올 수 있겠는가? 그저 감사의 눈물이 앞을 가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교회의 중요한 직책을 맡고 오래 신앙생활을 했어도 인간이 하나님 앞에 들고 나올 수 있는 것은 오직 경배와 감사와 찬양뿐이다. 기도는 우리가 아직 연약하고 불완전하여 그분 앞에 자꾸만 다른 것을 들고 나오려는 습성을 없애는 데에 일차적으로 동원되어야 한다.
요컨대 신자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취해야 할 태도는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뿐이다. 남들 앞에, 아니 하나님 앞에서는 더더욱 이래도 "예" 저래도 "예" 그저 "예, 예" 해야 한다. 어찌 보면 쓸개 빠진 바보 멍청이가 되어야 한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했지 않는가? 우리가 잘난 구석 하나 없었던 자들이었는데, 심지어 믿음도 선물로 받았는데 교회 안에서조차 어찌 눈에 힘이 들어가고 목이 빳빳해지고 어깨를 치켜세울 수 있다는 말인가?
구원 이후에도 평생을 두고 가장 먼저 점검해야 할 사항도 마찬가지다. 혹시 그분께 바쳐서, 특별히 좋은 믿음의 대가로 그분께 받아내려는 욕심 내지 소원이 있는지 여부다. 만약 그렇다면 아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거나 잊고 있다는 반증일 뿐이다. 진정한 신자는 교회 벽에 걸린 십자가만 봐도 눈물이 흐르고 감사가 넘쳐야 한다. 성령의 은혜로 믿음을 선물로 받게 된 신자가 바랄 것이라고는 첫째도 하나님의 긍휼이요, 둘째도 하나님의 긍휼이요, 셋째도 하나님의 긍휼뿐이다. 또 긍휼을 원하면 자연 겸손해질 수밖에 없지 않는가?
11/20/2008
(1996/5/19 유타대학촌교회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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