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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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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3:1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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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http://www.nosuchjesus.com |
왜 우리에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가?
사도행전강해 (16)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 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 한 줄 아노라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행3:11-18)
앉은뱅이와 우리 믿음의 차이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웠다. 본문은 그런 엄청난 이적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 앞에서 그 근거와 배경을 설명해주는 내용이다. 오순절 성령강림 때 기독교 최초로 한 설교에 이어 사도행전에 기록된 그의 두 번째 설교다.
오순절의 첫 설교에서 천하각국에서 모인 유대인들이 방언의 표적을 보고 경이로워 하자 그는 구약의 선지자 요엘이 예언한대로 말세에 하나님의 신이 임해 일어난 일이니 하나도 놀라울 것 없다고 설명했다. 지금도 같은 맥락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니 우리를 이상하게 쳐다볼 것 하나 없다고 하면서 그 권능의 원천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증거 하기 시작했다.
베드로의 핵심 논지(論旨)는 이렇다. “나면서 앉은뱅이를 감히 어느 인간이 낫게 할 수가 있겠는가? 아무리 경건하고 능력이 있는 자라도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오직 너희들이 알고 경배하고 있는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그 종 예수를 이 땅에 메시아로 보내었는데 그의 이름을 믿는 믿음이 이런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말하자면 너희가 십자가에 매단 예수가 구세주인 것은 오순절 방언사건 때나 지금 이 앉은뱅이가 걷는 것만 봐도 너무나 확실한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가 비록 죽었지만 믿는 자들 가운데서 그 능력이 살아서 너희들이 듣고 본 것처럼 지금도 역사하고 있으니 그가 메시아임을 도저히 부인할 수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한마디로 기적은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있으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자도 예수를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는데도 초대교회 같은 이적이 그리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에는 그 때나 지금이나 어떤 변동도 있을 수 없다. 그럼 우리 믿음과 베드로 또는 앉은뱅이의 믿음을 비교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아봐야만 할 것이다.
먼저 앉은뱅이의 경우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도 유대인으로 태어났고 40년간 그 사회에서 생활했으니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 신앙은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또 성전 문 앞이 자기 일터(?)로 제사장 다음으로 성전 곁에 오래 있었으니 비록 한 번도 직접 그 안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성전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상당히 정통했을 것이다. 예수님과 직접 대면하여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을지라도 성전 안에서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벌이고 복음을 가르치며 기적을 베푸셨던 일들에 대한 여러 소문은 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껏 그 소문은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딴 나라 이야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는 분명 평생을 두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 성전 문턱을 넘어 보는 것을 간절히 소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의 구세주라는 확신과 체험 없이는 그리스도의 이름에 따르는 권능에 대한 믿음이 생길 리는 만무하다. 말하자면 그가 성전 문 앞에서 사도들을 만나기 전에 이런 믿음의 자세는 아예 갖고 있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는 의미다. “비록 제가 구걸은 하고 있지만 이런 가장 좋은 길목에 앉혀주셔서 평생을 편하게 먹고살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원하시면 나를 고쳐서 일어나 걷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도들을 보내어 주셔서 큰 권능을 맛보게 해주시옵소서.”
대신에 그저 한건 크게 보태어 주는 사람 없나하고 있던 차에 베드로와 요한이 자기들을 주목하라고 하니 오늘은 정말 재수 좋은 날인가보다 생각했을 것이다. 예수는 몰라도 베드로와 요한에 대해선 잘 알지도 못하고 떠도는 소문도 접하지 못했을 것이니 일어나 걷는 기적은 꿈에도 바라지 않았던 일이었다. 단지 금화나 최소한 은화는 던져줄 모양이라고 목을 잔뜩 빼고선 기다렸을 것이다. 요컨대 이 앉은뱅이는 자기 믿음과는 아무 상관없이 완전히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그 기적을 체험했다.
사도들의 믿음
이제 따져야 할 것은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들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수준이다. 직접 제자였던 터에다 오순절에 성령까지 받은 그들의 믿음이 대단했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특히 베드로는 믿음의 연단과 훈련을 주님으로부터 직접 단계별로 거쳤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일대일 제자훈련 코스를 전부 마쳤다.
그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가장 먼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16:17)이라는 위대한 고백을 하게 되는 믿음의 승리를 맛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26:74)고 하는 순간 가장 처절한 믿음의 실패를 겪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그를 용서하시면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에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21:17)라고 겸손하게 주님 앞에 엎드림으로써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성령이 강림하신 후에는 무식한 어부였고 천한 게집 종에게조차 주를 부인했던 그가 권능을 입어 신앙상의 도약을 이루었다. 담대히 주님을 증거하는 기독교 최초의 설교를 행하여 그 자리에서 3,000명이나 회개로 인도했다. 지금도 성전으로 예수가 메시아 주님 되심을 유대인들에게 전하러 올라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두 사도들이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 또한 그러한데도 권능은 그들만큼 나타나지 않는다는, 아니 그들에게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예수님이 동행해 주지 않는 신자가 있을 리는 만무하지 않는가? 거기다 신자들도 예수님의 존귀한 이름으로 밤낮없이 기도하고 있지 않는가?
이리 저리 따져 보니 결국 사도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신령했던 것이 틀림없다고 추측한다. 근본적인 내용이 같은 믿음으로 기도하는데 결과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그럼 자신의 믿음을 확실하게 붙드는 힘의 세기나, 그 믿음을 현실에 적용하는 방법에서나,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고 헌신하는 자세 등에서 사도들은 우리가 아직까지 이르지 못한 아주 높은 영적 경지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또한 그렇게 될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열심히 찾아서 따르려 한다.
그렇지 않다. 아는 아주 큰 착각이다. 믿음이 깊어지면 마치 도사나 술사처럼 아무 때나 본인이 원하는 능력을 사용하여 원하는 결과가 일어나는 법은 기독교에선 절대로 없다. 심지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설명한 치유나 능력의 성령 은사를 받아도 그렇지 않다. 말하자면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한 바로 그 순간에 베드로가 미리 간절히 기도하여 치유될 줄을 온전히 확신한 후에 그 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사도들에게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능을 믿는 것과 앉은뱅이가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앉은뱅이가 부지불식간에 일어나져버렸듯이 베드로도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이 입에서 나온 것이다. 그가 이전에 비슷한 기적을 일으킨 적이 없었지 않는가? 설령 예수님이 둘씩 짝지어 전도 훈련을 보냈을 때 비슷한 이적이 일어났다 해도 아직 주님이 함께 계셨던 터라 스승의 능력을 나눠 받았다고 인식했을 것이다. 주님이 승천한 이후로는 방언 외에 즉, 자기 말이나 기도로서 남에게 주님의 능력을 나타나게 한 것은 분명 처음이었다.
사도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성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여느 때도 걸인의 구걸 요청을 많이 들었어도 무심코 지나치다가 이날만은 이상하게 무엇인가에 이끌려 걸인을 주목하고 말을 건네게 된 것이다. 사도들이 사전에 계획하거나 기도한 것 하나 없이 성령의 인도에 따르다보니 방언을 하게 된 경우와 같이 자기도 모르게 앉은뱅이도 일으켜 세운 것이다.
성경은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3절)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들은 별다른 생각 없이 평소 하던 대로 성전 안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는 뜻이지 않는가? 베드로가 자신의 의지를 능동적으로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다. 심지어 성경은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라고 말한다. 사도들이 그런 기적이 일어난 사실을 주위에 알려서 복음전도에 이용할 의도가 없었고 또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기적이 일어나자 다시 성전으로 들어 가버린 것이다.
만약에 베드로가 성전미문의 그 불쌍한 앉은뱅이를 낫게 해야지 하고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한 후에 응답의 확신을 갖고 찾아 갔다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따로 증인이나 전도할 대상자를 미리 데려가지는 않아도 주위 사람들에게 “이 기적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합니까?”라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을 것 아닌가? 아니 최소한 그 앉은뱅이에게라도 예수를 믿으라고 간곡히 권면했을 것 아닌가? 성경은 그런 언급은 전혀 없고 오히려 반대 되는 정황만 설명하고 있다. 요컨대 사도들의 믿음의 수준이 우리보다 나을 것 하나 없고 특별히 신령한 능력을 소지한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감독한 한 편의 드라마
베드로가 계획하지 않고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해서 그에게 앉은뱅이가 일어나리라는 확신조차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바꿔 말해 성령이 본인의 지정의와 무관하게 입술만 빌려서 앵무새처럼 지껄이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왜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되었지 잠깐 의아해 했을 수는 있지만 주저하거나 미심쩍어하며 말한 것은 아니었다. 성령이 강력히 임재 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는 순간에는 그 도구로 쓰임 받는 인간은 도무지 항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 치의 의심 없이 온전히 담대케 되어 그분의 말씀을 대언하고 사역을 대신 행하게 된다.
사도들이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고는 항상 해왔던 대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강론하려고 솔로몬의 행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는 사실은 그들이 그 일을 사전에 계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지만, 또 너무나 당연한 일이 일어났다고 여겼다는 뜻이기도 하다. 조금이라도 미심쩍었거나 의심했다면 기적이 일어난 후에 사도들부터 신기해하고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랐을 것 아닌가?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의 권능에 사로 잡혀있었기에 확신에 차서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능을 선포했고 기적도 필연적으로 따랐던 것이다.
이 기적은 사도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했지만 직접 은혜를 맛본 앉은뱅이로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사도들을 따라 정말 생전 처음으로 성전 안으로 들어갔다. 성전 안에 모인 사람들 또한 그 앉은뱅이를 몰라 볼 리는 만무했다. 성경이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두 사도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미하매 사람들이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랐다고 한다.(8-10절) 또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11절)이라고 한다. 사도들은 먼저 들어가 솔로몬의 행각에서 평소처럼 전도하고 있었는데 성전을 출입할 때마다 봐왔던 앉은뱅이가 멀쩡하게 걸어서 사도들 곁에 와서 서 있으니까 순식간에 사람들이 그 곳으로 많이 모이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결국 이 모든 일을 사도들이 계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각본을 쓰고, 무대와 조명을 마련하고, 배우들을 불러 모으고, 연출하셨던 한 편의 드라마였던 것이다. 사도들에게 예수님을 잘 증거 할 수 있는 절묘한 무대장치와 분위기를 마련해 주신 것이다. 오순절 이후 지금껏 베드로가 그 행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그 열기가 조금 시들해졌는지 모른다. 청중들에게 베드로가 전하는 메시지 즉, 예수가 영원히 살아계신 그리스도임을 확실히 입증하는 증인으로 앉은뱅이를 오늘의 특별게스트로 청빙한 셈이다.
오순절 사도들이 천하각국의 방언을 함으로써 베드로의 설교에 공감하도록 청중의 마음 문을 열었듯이, 지금 하나님은 나면서 앉은뱅이를 소도구로 쓰셔서 성전 안팎에 있던 유대인들로 설교를 경청하게 하고 그 영혼에 찔림이 생기도록 한 것이다. “베드로가 이것(사람들이 기이히 여기고 크게 놀라며 많이 모이는 것)을 보고”(12절) 담대히 주를 증거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오천이나 되었더라.”(4:4)의 결과로 이끄신 것이다. 오순절에 회개한 자가 삼천 명에서 이날은 오천 명으로 늘어났다.
베드로도, 요한도, 앉은뱅이도 이 일을 계획하거나 심지어 꿈조차 꾼 적이 없었다. 극단적으로 말해 그들은 성령의 능력에 이끌려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뿐이다. 베드로의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우리를 주목하느냐”(12절)라는 부연 설명은 당시 자신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표현한 사실이었다. 베드로의 능력과 믿음이 결코 기적의 근거가 아니었으며 특별히 신령한 사람이었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순절 당시의 베드로나 오늘날의 신자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믿음만으로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재차 강조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도사나 술사가 외우는 주문처럼 자동적인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미친 사람이나 술 취한 사람들이 그러듯 신자가 무아몽중(無我夢中)인 상태에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기적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신자의 지정의와 인격과 성정은 온전한 상태로 그대로 두시고 하나님은 기적을 이뤄내신다. 신자는 단지 그분의 일에 쓰임 받는 배우요 도구일 뿐이다.
믿음으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기적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일반적인 역사도 신자의 믿음의 세기에 구애받지 않으신다. 솔직히 우리가 이해하는 식의 믿음은 신자마다 도토리 키 재기로 대동소이하다. 하나님의 일은 성령이 신자를 순종으로 이끌어 낼 때만 일어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다. 독선적이거나 기계적이지 않다. 인격적 순종이라고 해서 신자가 생명을 걸기로 특단의 헌신을 하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분과 항상 인격적 교제를 하고 있으면 자연이 성령이 충만하게 되며 또 그분께 자연히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와 베드로의 믿음의 차이는 그 내용이나 세기보다는 예수님과 평소에 얼마나 교제를 하고 있었느냐는 점에서 아주 크게 달랐던 것이다.
다른 말로 기적은 우리가 예수를 향해서 갖는 우리의 믿음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서 갖게 되는 믿음, 예수님이 우리에게 온전한 심어주시는 믿음으로만 일어난다.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충만하게 역사하셔서 온전히 우리를 주장하시게 되면 신자도 자연히 그 성령의 권능을 한 치의 의심 없이 온전히 믿게 되고 또 아무 주저함 없이 그 권능에 내어 맡길 수 있게 된다.
당연히 하나님의 역사는 분명히 일어나되 기적이 될지 평상적인 방식이 될지는 오직 그분이 정하신다. 요컨대 우리의 믿음의 대상도 주님이지만, 믿음을 갖도록 역사하시는 분도 주님이요, 믿음의 전 과정을 이끄시는 분도 주님이요, 그 결과를 도출해 내시는 분도 주님이시다. 믿음의 모든 원천과 과정과 열매 모두가 예수님이다.
영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목사님이 성경에 나오는 기적에 관해 말씀으로 증거하고 있었다. 청중 속에서 한 무신론자가 일어나서 “기적을 본 사람이 어디 있소? 그런 엉터리 같은 이야기는 그만 하시죠.”라고 조롱했다. 그러자 이전에 술주정뱅이요 깡패였던 그 교회의 한 신자가 벌떡 일어나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 모두가 내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지 않소? 내가 이렇게 변화된 바로 이것이 기적이지 않소?”
무신론자는 다시 “그것이 어떻게 기적이요? 당신이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고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지....”라고 빈정댔다. 그러자 그 신자는 “천만에!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라고 대답했다. 자기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자신만큼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니 남들은 전혀 알지도 못한다. 그 신자로선 술 끊고 방탕한 깡패 생활을 청산할 계획, 시도, 노력을 스스로 한 적이 전혀 없었거나 했어도 번번이 실패했었다는 뜻이다. 어느 날 예수라는 인물을 소개 받아 그분의 십자가 복음을 알게 되자 가슴이 뜨거워졌고 교회에 출석해 성경 말씀을 듣게 되면서 그 놀라운 모든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본문 기사도 시대와 장소와 등장인물만 달랐지 똑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그 앉은뱅이가 일자무식에 예수를 전혀 모르는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익히 알고 있었다. 평소에 걸인이 생활하는 방식도 보아왔기에 마음을 고쳐먹었을 적도 없고 믿음이 성숙된 신령한 자가 아니라는 것 또한 온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당연히 그가 변화된 것을 “심히 기이히”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두 사도들이 아마 특별한 능력을 지닌 자로 여기고 모여들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베드로는 “천만에! 이 일은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님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라고 선포한 것이다.
영국 교회에서나 지금 솔로몬 행각에서 일어난 사건의 배후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계셨고 예수님이 하신 일임이 증거 되었다. 드러난 것은 사도나 목사의 능력은커녕 믿음이 결코 아니었다.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는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님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뿐이다. 그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서 당신의 인류를 향한 완전하신 구속을 이루시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 그 분이 하나님이요, 구세주이자 심판주로 이 땅에 오셨음을 증거 하는 것이 기적의 본질이자 목적이라는 것이다.
앉은뱅이가 “하나님 왜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나요?”라며 평생을 한탄하고 있는 그 애끓는 심령에 예수님이 먼저 찾아 오셨다.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시고, 지금 너를 구원하셔서, 너를 통해 영광 받기를 원하신다.”라는 사실을 그에게 보여주셨다. 또 그를 도구로 사용하여 오천 명이나 주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셨다. 단순히 그를 앉은뱅이의 고통에서 해방시켜주고 낫게만 하는 것이 기적의 목적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나,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기적이, 단순히 배불리 먹고 마시게 하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빵 공장이나 포도주 양조장의 세일즈맨으로 오신 것이 아니다. 오직 메시야로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인류 구속을 실천하러 오셨던 것이다.
다른 종교에서도 기적은 일어나는가?
하나님의 영광이, 특별히 십자가의 예수님이 증거 되지 않는 기적은 절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신기하게 다른 종교에서도 간혹 신령한 종교적 체험을 할 수 있고 기적 같은 일도 일어난다. 심지어 종교적 신앙과 상관없이 불신자들 사이에서도 인간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도 왕왕 발생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보면 기적이 아닌 일을 기적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다. 이성으로 이해가 잘 안 되거나 설명이 불가능하면 일단 기적으로 치부해 버린다. 상상을 초월하는 힘이 동원되어도 기적으로 친다.
예를 들어 지금부터 200 여년 전만해도 T.V.나 Computer는 상상도 못했던 물건이었다. 만약 그 때 사람이 타임머신을 타고 지금 와서 보면 당연히 그런 전자기계가 신인 줄 알고 그 앞에 절할 것이다. 역으로 따져서 고대 사람들은 엄청난 소리와 힘을 발휘하는 천둥 번개를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초등학생도 가적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과학이 발달되어 그 이치와 원리가 규명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기적이라고 여기는 것들 가운데는 기적이 아닌 것이 상당 부분 차지한다는 것이다.
기적은 당신께서 정해 놓으신 법칙을 당신께서 깨트리는 것이기에 그 본질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일 수밖에 없다. T.V.나 Computer가 아무리 고차원의 신기한 능력을 발휘함에도 기적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단지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기적은 오직 신앙의 눈으로 보아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아무리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나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할 수는 없다. 그저 아주 신비한 일이 우연히 일어난 것일 뿐이다.
하나님의 일상적인 역사에도 당신만의 분명한 목적은 있다.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역사했다면 즉, 기적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며 또 당연히 당신의 영광이 더 크게 드러나게 마련이다. 비록 다른 종교에서 유사한 일이 일어날지라도 기적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신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모세에 대항한 애굽 술사들도 사술(邪術)로 여러 이적을 보였다. 그러나 모세가 나타내는 이적과 다른 차이는 무엇이었는가? 그들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을 계속 노예로 삼아 착취하려는 사단의 목적이, 모세의 것에는 당신의 백성을 고난에서 구원해내려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다. 인간의 눈에는 그저 신비한 현상으로 동일하게 비췰지 몰라도 사단의 죽음과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엄청난 차이가 그 안에 있었지 않는가?
나아가 초자연적인 일에 선한 뜻이 있다고 다 기적이 될 수는 없다. 대학교 영어 교수를 하는 분의 부인이 도무지 이름 모를 병에 걸렸다. 아무리 병원에 가도 시름시름 앓기만 했다. 그런데 한국에 나와 있는 몰몬교 선교사가 전도하러 왔다가 마침 영어를 잘하는 남편과 오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선교사들이 그 부인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기도해 주었는데 놀랍게도 병이 나아버렸다. 그 뒤로는 아무리 몰몬교의 생성과정과 교리까지 그 모순과 거짓됨을 가르쳐 주어도 끝까지 이단에 넘어갔다. 자기가 병이 나은 체험이 있어서다.
때로는 애굽 술사도 이적을 일으켰듯이 무당도 병을 잘 고친다. 하나님은 초자연적 존재인 사단과 그 졸개들을 한시적으로 이 땅에서 활동하도록 허락해 놓았다. 흑암의 영적 존재도 신비한 능력으로 사람을 홀리고 훼방하고 선동한다. 심지어 광명한 천사로 위장도 한다. 하나님이 사단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신 이유는 사람들로 거짓과 진리를 스스로 분별토록 하기 위해서다. 똑 같이 병을 고치는 선한 이적을 보였을지라도 한 쪽은 사단으로, 다른 한 쪽은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인도함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요컨대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 되지 않으면 참 기적이 아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기적 중에 가장 큰 기적이 무엇인가? 하나님 본체시나 그 동등 됨을 취하지 않고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 아닌가? 그래서 아무 죄와 허물도 없으시고 인간에게 이적으로 질병을 치유하고 먹을 것을 주시고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고 천국 복음으로 인도하셨음에도 온갖 비방과 멸시와 핍박을 감내하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 아닌가? 나아가 기적의 절정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 아닌가?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 당국자를 종으로 삼아서 유대인들을 선동시켜서 구세주를 십자가에 죽게끔 한 것인 사단의 놀라운 능력이었다. 가히 사단이 벌린 최고의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단의 기적이 얼마나 거짓투성이인지를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하심으로 만천하에 폭로했다. 이야말로 사단의 최고의 기적과 맞서서 승리한 하나님의 기적 중의 기적이다.
당연히 참 된 기적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서만 일어날 수밖에 없다. 아니 하나님은 오직 그 목적으로만 기적을 베푸신다. 영국 교회의 깡패가 새사람으로 변화된 것과 지금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가 일어서게 된 것이 분명히 참 기적인 까닭이다. 신령한 능력으로 술, 마약을 끊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것만으로 그치면 반 토막의 기적 즉, 사단도 일으킬 수 있는 기적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증거 했기에 참 기적, 온전한 기적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가 예수님의 새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을 풍성히 더 받아 누려서 주위에 나누는 것만이 기적이다. 당신의 독생자를 죽여서라도 사단의 노예가 되어 있는 죄인들을 흑암 속에서 빛으로, 거짓에서 진리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져주신 것만이 기적이다. 이외의 초자연적인 일은 여전히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이거나 사단의 농간이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다.
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가?
그럼 이제 우리가 사도들과는 달리 아무리 굳건한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해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명백히 밝혀졌다. 우리가 바라는 기적은 단순히 우리의 능력이 못 미치거나, 우리가 노력을 안 해도 도깨비 방망이 식으로 뚝딱하고 되는 것들뿐이다. 공부 열심히 안하는 자기 아들을 부모가 열심히 기도하면 신비하게도 평소 잘 아는 문제만 나와 대학입시에 거뜬히 합격하는 것이 기적이 아니다.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또 그것을 간증이랍시고 나누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다.
대학에 가고 못 가고는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달린 것이지, 얼마나 기도를 뜨겁게 해서 기적 같은 일이 나타나게 하느냐에 달린 문제가 결코 아니지 않는가? 축복이나 능력을 인간이 바라고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수치로 현실화 시키는 것이, 그것도 인간은 수고도 하나 하지 않고서, 기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정말 죽기 살기로 신앙의 힘을 동원해 그렇게 맞아떨어지게 만들었다 해도 예수가 없으면 기적이 아니다. 대학입시는 신앙에 관계없이 열심히 공부한 자가 붙는 법이며 그렇게 되어야만 정당하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진정한 공의가 드러나는 길이지 않는가?
흥미롭게도 선교지에선 초대 교회 같은 이적이 수시로 일어나는데 그 이유는 너무나 명백하다. 오직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사신 예수님의 복음만 전하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지 않는가? 온갖 우상들만 섬기던 이방인들에게, 또 율법적 하나님만 섬기던 유대인들에게 가장 먼저 구세주 예수를 믿게 하여 구원으로 인도해야 했다. 성령의 역사가 충만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사도들 모두가 예수가 죽었다 부활한 그 복음에 자기의 생명까지 바치고 헌신했기에 가는 곳마다 하는 일마다 하나님의 역사가 크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동일한 맥락에서 오늘날의 신자에게 일어난 가장 큰 기적이 무엇인가?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연합하였고 그 부활에 동참한 것이다. 하나님과 원수 된 죄인으로 사단의 노예로 묶여 있었던 우리로선 계획은커녕 꿈도 꾸지 못한 일이었다.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이자 일방적 역사였다. 그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그분이 소유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에 의지할 수 있게 된 것이 기적 중의 기적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혈통으로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생물학적 유전으로 하나님이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대민족이 선민이라고 해서 그 후손이 다 구원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육정으로도 즉, 사람의 뜻으로도 그럴 수 없다. 우리가 믿고 싶어서 이성과 논리로 분석 이해하여 믿었다고 구원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 다. 당연히 그 육정 안에는 종교적인 열성도 포함된다.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성령의 감화를 허락하시어 예수를 알게 하신 자다.
그렇다면 신자는 사실상 매 순간 기적을 누리고 있고 아니 일으키고 있는 셈이다. 신자는 혼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세가 함께 작동하기 때문이다. 일용할 양식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공급 받는 것이야말로 기적의 첫 단계이자 가장 중요한 기적이다. 쉽게 말해 먹고, 마시고, 입는 것들 모두도 기적이다. 나아가 예수 믿은 후의 신자의 삶 모두가 다 기적이다. 정말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 확실하다면 기적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러나 절대 간과해선 안 될 것은 범사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서 행한다고 다 기적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앉은뱅이나 술주정꾼이 치유 된 것만으로는 반 토막의 기적이자 기적의 시발점일 뿐이라고 했듯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신비한 일이 일어난 것으로 그쳐선 기적이 아니다. 반드시 예수가 증거 되어야 참 기적이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가 드러나야 한다.
예수를 증거하라고 해서 단순히 간증하라는 뜻이 아니다. 흔히들 하는 간증은 어떤 신비한 사실이 일어났다는 것을 보고만 한 것이지 예수님 그분을 실제로 증거 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예컨대 기도해서 받은 일용할 양식을 통해 예수가 증거 되는 길도 단순히 기도해서 얻었다고 나누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신자가 정말로 힘든 환난 가운데도 소망을 잃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평강하고 기뻐하는 가운데 양식이 신기하게도 끊이지 않게 채워지는 모습을 주위에서 자연적으로 보아 알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로 “어찌 저리 힘든데도 저리 평온할 수 있을까? 아무 문제없는 우리보다 오히려 더 즐겁게 살고 있네. 도대체 저들이 믿는 예수는 어떤 분인가? 저 사람들이 믿는 예수라면 나도 믿고 싶다.”는 마음부터 먼저 들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말도 종교적 형식을 갖추라는 것이 아니다. 범사에 오직 예수님의 거룩한 통치만 받고 있는 모습을 즉, 세상 앞에 빛과 소금의 모습을 자신이 썩어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드러내라는 것이다.
기적을 일으키는 법
재삼재사 강조하지만 우리의 기대치를 최대한으로 잡고선 기도하여 달성해내는 것이 기적의 시초가 될 수는 결코 없다. 지금 솔로몬 행각의 유대인들이 “심히 기이하게 여기며 놀라는” 기적 즉, 나면서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가? 그야말로 불신자들이 심히 기이하게 여기며 놀라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자 모이게, 다른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시선을 집중시키게 만든 것이었지 않는가? 그런데 그런 기적은 사실상 신자들 모두에게 이미 일어났지 않는가? 어떤 경로가 되었든 신자는 예수께로 관심을 갖고 복음을 듣게 되었고 그래서 구원을 얻었다. 일단 신자가 되었다면 심히 기이하여 놀랄만한 기적은 이미 다 거쳤다는 말이다.
신자가 된 후에는 그 대신에 침을 삼키는 것도, 머리카락이 빠지고 새로 나는 것도, 아침마다 침상에서 일어나는 것도, 숨을 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기에 모두가 기적이다. 신자의 주위에 기적이 아닌 것들은 단 하나도 없다. 한 순간도 하나님의 사랑의 장중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 분이 나를 온전히 인도하시고 간섭하고 계신다. 모든 순간순간들을 기적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 신자의 삶이다. 그 모든 기적의 원천은 예수님이었다. 그분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신자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살고 있는 일 년 365일 일분일초 가운데 기적이 아닌 순간은 없다. 또 그 구원은 취소되지 않기에 천국가는 그 순간까지 평생토록 놀라운 기적이 이어지고 있다.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고 앉은뱅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자 기적이 시작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앉은뱅이를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시려고 그를 성전 미문에 앉히신 것, 아니 그를 택하신 것부터 기적은 출발되었다. 신자들 모두가 그와 단 한치도 부족하지 않고 동일한 하나님의 크나큰 기적 가운데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엄마의 태에 짓기 전부터 택하시고 사랑하셔서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씻기셨다. 성령으로 인치시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게 했다. 온전히 새로운 생명으로 이미 거듭나게 하셨지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의 이름으로 간구해도 기적을 맛볼 수 없다고, 그것도 신앙생활을 이렇게 오래 했음에도, 절대 실망할 필요가 없다. 신자란 지금도 하나님의 셀 수도 없는 기적을 누리고 사는 자다. 예수 믿은 지 오래일수록 그만큼 더 많은 기적을 맛보고 누린 것이다. 여전히 아무리 기도해도 기적을 맛볼 수 없다는 실망과 의아심을 떨칠 수 없는가? 바로 그러는 순간에 가장 귀한 기적을 놓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떤 기적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지 않는가?
신자란 하나님께로 난 자가 되었고 범사에 그분의 권세에만 온전히 의지하게 된 자다. 그럼 하나님이 신자의 모든 기도에 응답해주실 것이며 그 응답 자체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또 그 응답 모두에 당신의 영광은 반드시 드러난다. 언제 어디서나 순간순간마다 쉽게 누릴 수 있는 기적을 코앞에 두고도 엉뚱한 기적만 찾고 있다. 역설적으로 말해 예수 믿는 신자가, 그분의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도무지행할 수 없는 기적 중의 기적을 범하고 있는 꼴이다.
진정으로 기적을 맛보고 싶은가? 예수님을 간절히 소원하라. 바울처럼 살든지 죽든지 자기에게서 오직 그리스도만 증거 되기를 진정으로 열망하라. 그래서 죽임을 당할 자처럼 미말에 세어지는 멸시와 박해도 기꺼이 감당해라. 세상에서 귀한 것들 모두를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을 보배로 삼아라. 그러기 위해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며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정말로 그분이 가신 길을 따라 가라. 설령 머리 둘 곳이 없더라도 말이다.
그렇지 않고는 참된 기적을 맛 볼 길은 절대로 없다. 혹시라도 사단이 미끼로 던져주는 광명한 천사로 위장한 기적을 원한다면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어쩌면 사단이 가장 좋아하는 종교적 열성과 치성을 최대한도로만 바치면 얼마든지 그런 기적을 누릴 수 있다.
다른 말로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을 통해 예수를 진정으로 증거하고 싶은 신자라면 놀랍고도 기이한 기적은 구태여 바라지도 않는다. 그렇게 헌신 되어 있는 신자에게는 하나님이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시선을 십자가로 향하게 만든 불신자들을 붙여 주시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기적을 소원하고 기도해서 기적이 일어난 것이 결코 아니다. 오직 예수만 증거 하겠다는 열정에 가득 차 있으니까, 심지어 지하 감옥에서조차 그것도 한 밤 중에, 기적이 자연히 따라 왔지 않는가?
요컨대 신자는 기적을 일으키는 법을 찾을 것이 아니라 기적을 누리는 법부터 먼저 배워야 한다. 아니 이미 기적 가운데 살고 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의 이름의 권능만 확실히 믿고 있다면 날마다 순간마다 정말로 놀랍고도 풍성한 기적 가운데 서있기 때문이다.
12/18/2008
(1996/6/9 유타대학촌교회 주일 설교)-->
사도행전강해 (16)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 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 한 줄 아노라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행3:11-18)
앉은뱅이와 우리 믿음의 차이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웠다. 본문은 그런 엄청난 이적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 앞에서 그 근거와 배경을 설명해주는 내용이다. 오순절 성령강림 때 기독교 최초로 한 설교에 이어 사도행전에 기록된 그의 두 번째 설교다.
오순절의 첫 설교에서 천하각국에서 모인 유대인들이 방언의 표적을 보고 경이로워 하자 그는 구약의 선지자 요엘이 예언한대로 말세에 하나님의 신이 임해 일어난 일이니 하나도 놀라울 것 없다고 설명했다. 지금도 같은 맥락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니 우리를 이상하게 쳐다볼 것 하나 없다고 하면서 그 권능의 원천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증거 하기 시작했다.
베드로의 핵심 논지(論旨)는 이렇다. “나면서 앉은뱅이를 감히 어느 인간이 낫게 할 수가 있겠는가? 아무리 경건하고 능력이 있는 자라도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오직 너희들이 알고 경배하고 있는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그 종 예수를 이 땅에 메시아로 보내었는데 그의 이름을 믿는 믿음이 이런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말하자면 너희가 십자가에 매단 예수가 구세주인 것은 오순절 방언사건 때나 지금 이 앉은뱅이가 걷는 것만 봐도 너무나 확실한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가 비록 죽었지만 믿는 자들 가운데서 그 능력이 살아서 너희들이 듣고 본 것처럼 지금도 역사하고 있으니 그가 메시아임을 도저히 부인할 수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한마디로 기적은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있으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자도 예수를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는데도 초대교회 같은 이적이 그리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에는 그 때나 지금이나 어떤 변동도 있을 수 없다. 그럼 우리 믿음과 베드로 또는 앉은뱅이의 믿음을 비교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아봐야만 할 것이다.
먼저 앉은뱅이의 경우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도 유대인으로 태어났고 40년간 그 사회에서 생활했으니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 신앙은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또 성전 문 앞이 자기 일터(?)로 제사장 다음으로 성전 곁에 오래 있었으니 비록 한 번도 직접 그 안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성전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상당히 정통했을 것이다. 예수님과 직접 대면하여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을지라도 성전 안에서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벌이고 복음을 가르치며 기적을 베푸셨던 일들에 대한 여러 소문은 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껏 그 소문은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딴 나라 이야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는 분명 평생을 두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 성전 문턱을 넘어 보는 것을 간절히 소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의 구세주라는 확신과 체험 없이는 그리스도의 이름에 따르는 권능에 대한 믿음이 생길 리는 만무하다. 말하자면 그가 성전 문 앞에서 사도들을 만나기 전에 이런 믿음의 자세는 아예 갖고 있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는 의미다. “비록 제가 구걸은 하고 있지만 이런 가장 좋은 길목에 앉혀주셔서 평생을 편하게 먹고살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원하시면 나를 고쳐서 일어나 걷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도들을 보내어 주셔서 큰 권능을 맛보게 해주시옵소서.”
대신에 그저 한건 크게 보태어 주는 사람 없나하고 있던 차에 베드로와 요한이 자기들을 주목하라고 하니 오늘은 정말 재수 좋은 날인가보다 생각했을 것이다. 예수는 몰라도 베드로와 요한에 대해선 잘 알지도 못하고 떠도는 소문도 접하지 못했을 것이니 일어나 걷는 기적은 꿈에도 바라지 않았던 일이었다. 단지 금화나 최소한 은화는 던져줄 모양이라고 목을 잔뜩 빼고선 기다렸을 것이다. 요컨대 이 앉은뱅이는 자기 믿음과는 아무 상관없이 완전히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그 기적을 체험했다.
사도들의 믿음
이제 따져야 할 것은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들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수준이다. 직접 제자였던 터에다 오순절에 성령까지 받은 그들의 믿음이 대단했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특히 베드로는 믿음의 연단과 훈련을 주님으로부터 직접 단계별로 거쳤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일대일 제자훈련 코스를 전부 마쳤다.
그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가장 먼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16:17)이라는 위대한 고백을 하게 되는 믿음의 승리를 맛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26:74)고 하는 순간 가장 처절한 믿음의 실패를 겪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그를 용서하시면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에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21:17)라고 겸손하게 주님 앞에 엎드림으로써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성령이 강림하신 후에는 무식한 어부였고 천한 게집 종에게조차 주를 부인했던 그가 권능을 입어 신앙상의 도약을 이루었다. 담대히 주님을 증거하는 기독교 최초의 설교를 행하여 그 자리에서 3,000명이나 회개로 인도했다. 지금도 성전으로 예수가 메시아 주님 되심을 유대인들에게 전하러 올라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두 사도들이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 또한 그러한데도 권능은 그들만큼 나타나지 않는다는, 아니 그들에게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예수님이 동행해 주지 않는 신자가 있을 리는 만무하지 않는가? 거기다 신자들도 예수님의 존귀한 이름으로 밤낮없이 기도하고 있지 않는가?
이리 저리 따져 보니 결국 사도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신령했던 것이 틀림없다고 추측한다. 근본적인 내용이 같은 믿음으로 기도하는데 결과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그럼 자신의 믿음을 확실하게 붙드는 힘의 세기나, 그 믿음을 현실에 적용하는 방법에서나,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고 헌신하는 자세 등에서 사도들은 우리가 아직까지 이르지 못한 아주 높은 영적 경지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또한 그렇게 될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열심히 찾아서 따르려 한다.
그렇지 않다. 아는 아주 큰 착각이다. 믿음이 깊어지면 마치 도사나 술사처럼 아무 때나 본인이 원하는 능력을 사용하여 원하는 결과가 일어나는 법은 기독교에선 절대로 없다. 심지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설명한 치유나 능력의 성령 은사를 받아도 그렇지 않다. 말하자면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한 바로 그 순간에 베드로가 미리 간절히 기도하여 치유될 줄을 온전히 확신한 후에 그 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사도들에게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능을 믿는 것과 앉은뱅이가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앉은뱅이가 부지불식간에 일어나져버렸듯이 베드로도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이 입에서 나온 것이다. 그가 이전에 비슷한 기적을 일으킨 적이 없었지 않는가? 설령 예수님이 둘씩 짝지어 전도 훈련을 보냈을 때 비슷한 이적이 일어났다 해도 아직 주님이 함께 계셨던 터라 스승의 능력을 나눠 받았다고 인식했을 것이다. 주님이 승천한 이후로는 방언 외에 즉, 자기 말이나 기도로서 남에게 주님의 능력을 나타나게 한 것은 분명 처음이었다.
사도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성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여느 때도 걸인의 구걸 요청을 많이 들었어도 무심코 지나치다가 이날만은 이상하게 무엇인가에 이끌려 걸인을 주목하고 말을 건네게 된 것이다. 사도들이 사전에 계획하거나 기도한 것 하나 없이 성령의 인도에 따르다보니 방언을 하게 된 경우와 같이 자기도 모르게 앉은뱅이도 일으켜 세운 것이다.
성경은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3절)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들은 별다른 생각 없이 평소 하던 대로 성전 안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는 뜻이지 않는가? 베드로가 자신의 의지를 능동적으로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다. 심지어 성경은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라고 말한다. 사도들이 그런 기적이 일어난 사실을 주위에 알려서 복음전도에 이용할 의도가 없었고 또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기적이 일어나자 다시 성전으로 들어 가버린 것이다.
만약에 베드로가 성전미문의 그 불쌍한 앉은뱅이를 낫게 해야지 하고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한 후에 응답의 확신을 갖고 찾아 갔다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따로 증인이나 전도할 대상자를 미리 데려가지는 않아도 주위 사람들에게 “이 기적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합니까?”라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을 것 아닌가? 아니 최소한 그 앉은뱅이에게라도 예수를 믿으라고 간곡히 권면했을 것 아닌가? 성경은 그런 언급은 전혀 없고 오히려 반대 되는 정황만 설명하고 있다. 요컨대 사도들의 믿음의 수준이 우리보다 나을 것 하나 없고 특별히 신령한 능력을 소지한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감독한 한 편의 드라마
베드로가 계획하지 않고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해서 그에게 앉은뱅이가 일어나리라는 확신조차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바꿔 말해 성령이 본인의 지정의와 무관하게 입술만 빌려서 앵무새처럼 지껄이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왜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되었지 잠깐 의아해 했을 수는 있지만 주저하거나 미심쩍어하며 말한 것은 아니었다. 성령이 강력히 임재 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는 순간에는 그 도구로 쓰임 받는 인간은 도무지 항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 치의 의심 없이 온전히 담대케 되어 그분의 말씀을 대언하고 사역을 대신 행하게 된다.
사도들이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고는 항상 해왔던 대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강론하려고 솔로몬의 행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는 사실은 그들이 그 일을 사전에 계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지만, 또 너무나 당연한 일이 일어났다고 여겼다는 뜻이기도 하다. 조금이라도 미심쩍었거나 의심했다면 기적이 일어난 후에 사도들부터 신기해하고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랐을 것 아닌가?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의 권능에 사로 잡혀있었기에 확신에 차서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능을 선포했고 기적도 필연적으로 따랐던 것이다.
이 기적은 사도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했지만 직접 은혜를 맛본 앉은뱅이로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사도들을 따라 정말 생전 처음으로 성전 안으로 들어갔다. 성전 안에 모인 사람들 또한 그 앉은뱅이를 몰라 볼 리는 만무했다. 성경이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두 사도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미하매 사람들이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랐다고 한다.(8-10절) 또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11절)이라고 한다. 사도들은 먼저 들어가 솔로몬의 행각에서 평소처럼 전도하고 있었는데 성전을 출입할 때마다 봐왔던 앉은뱅이가 멀쩡하게 걸어서 사도들 곁에 와서 서 있으니까 순식간에 사람들이 그 곳으로 많이 모이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결국 이 모든 일을 사도들이 계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각본을 쓰고, 무대와 조명을 마련하고, 배우들을 불러 모으고, 연출하셨던 한 편의 드라마였던 것이다. 사도들에게 예수님을 잘 증거 할 수 있는 절묘한 무대장치와 분위기를 마련해 주신 것이다. 오순절 이후 지금껏 베드로가 그 행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그 열기가 조금 시들해졌는지 모른다. 청중들에게 베드로가 전하는 메시지 즉, 예수가 영원히 살아계신 그리스도임을 확실히 입증하는 증인으로 앉은뱅이를 오늘의 특별게스트로 청빙한 셈이다.
오순절 사도들이 천하각국의 방언을 함으로써 베드로의 설교에 공감하도록 청중의 마음 문을 열었듯이, 지금 하나님은 나면서 앉은뱅이를 소도구로 쓰셔서 성전 안팎에 있던 유대인들로 설교를 경청하게 하고 그 영혼에 찔림이 생기도록 한 것이다. “베드로가 이것(사람들이 기이히 여기고 크게 놀라며 많이 모이는 것)을 보고”(12절) 담대히 주를 증거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오천이나 되었더라.”(4:4)의 결과로 이끄신 것이다. 오순절에 회개한 자가 삼천 명에서 이날은 오천 명으로 늘어났다.
베드로도, 요한도, 앉은뱅이도 이 일을 계획하거나 심지어 꿈조차 꾼 적이 없었다. 극단적으로 말해 그들은 성령의 능력에 이끌려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뿐이다. 베드로의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우리를 주목하느냐”(12절)라는 부연 설명은 당시 자신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표현한 사실이었다. 베드로의 능력과 믿음이 결코 기적의 근거가 아니었으며 특별히 신령한 사람이었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순절 당시의 베드로나 오늘날의 신자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믿음만으로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재차 강조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도사나 술사가 외우는 주문처럼 자동적인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미친 사람이나 술 취한 사람들이 그러듯 신자가 무아몽중(無我夢中)인 상태에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기적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신자의 지정의와 인격과 성정은 온전한 상태로 그대로 두시고 하나님은 기적을 이뤄내신다. 신자는 단지 그분의 일에 쓰임 받는 배우요 도구일 뿐이다.
믿음으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기적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일반적인 역사도 신자의 믿음의 세기에 구애받지 않으신다. 솔직히 우리가 이해하는 식의 믿음은 신자마다 도토리 키 재기로 대동소이하다. 하나님의 일은 성령이 신자를 순종으로 이끌어 낼 때만 일어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다. 독선적이거나 기계적이지 않다. 인격적 순종이라고 해서 신자가 생명을 걸기로 특단의 헌신을 하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분과 항상 인격적 교제를 하고 있으면 자연이 성령이 충만하게 되며 또 그분께 자연히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와 베드로의 믿음의 차이는 그 내용이나 세기보다는 예수님과 평소에 얼마나 교제를 하고 있었느냐는 점에서 아주 크게 달랐던 것이다.
다른 말로 기적은 우리가 예수를 향해서 갖는 우리의 믿음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서 갖게 되는 믿음, 예수님이 우리에게 온전한 심어주시는 믿음으로만 일어난다.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충만하게 역사하셔서 온전히 우리를 주장하시게 되면 신자도 자연히 그 성령의 권능을 한 치의 의심 없이 온전히 믿게 되고 또 아무 주저함 없이 그 권능에 내어 맡길 수 있게 된다.
당연히 하나님의 역사는 분명히 일어나되 기적이 될지 평상적인 방식이 될지는 오직 그분이 정하신다. 요컨대 우리의 믿음의 대상도 주님이지만, 믿음을 갖도록 역사하시는 분도 주님이요, 믿음의 전 과정을 이끄시는 분도 주님이요, 그 결과를 도출해 내시는 분도 주님이시다. 믿음의 모든 원천과 과정과 열매 모두가 예수님이다.
영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목사님이 성경에 나오는 기적에 관해 말씀으로 증거하고 있었다. 청중 속에서 한 무신론자가 일어나서 “기적을 본 사람이 어디 있소? 그런 엉터리 같은 이야기는 그만 하시죠.”라고 조롱했다. 그러자 이전에 술주정뱅이요 깡패였던 그 교회의 한 신자가 벌떡 일어나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 모두가 내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지 않소? 내가 이렇게 변화된 바로 이것이 기적이지 않소?”
무신론자는 다시 “그것이 어떻게 기적이요? 당신이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고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지....”라고 빈정댔다. 그러자 그 신자는 “천만에!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라고 대답했다. 자기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자신만큼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니 남들은 전혀 알지도 못한다. 그 신자로선 술 끊고 방탕한 깡패 생활을 청산할 계획, 시도, 노력을 스스로 한 적이 전혀 없었거나 했어도 번번이 실패했었다는 뜻이다. 어느 날 예수라는 인물을 소개 받아 그분의 십자가 복음을 알게 되자 가슴이 뜨거워졌고 교회에 출석해 성경 말씀을 듣게 되면서 그 놀라운 모든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본문 기사도 시대와 장소와 등장인물만 달랐지 똑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그 앉은뱅이가 일자무식에 예수를 전혀 모르는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익히 알고 있었다. 평소에 걸인이 생활하는 방식도 보아왔기에 마음을 고쳐먹었을 적도 없고 믿음이 성숙된 신령한 자가 아니라는 것 또한 온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당연히 그가 변화된 것을 “심히 기이히”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두 사도들이 아마 특별한 능력을 지닌 자로 여기고 모여들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베드로는 “천만에! 이 일은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님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라고 선포한 것이다.
영국 교회에서나 지금 솔로몬 행각에서 일어난 사건의 배후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계셨고 예수님이 하신 일임이 증거 되었다. 드러난 것은 사도나 목사의 능력은커녕 믿음이 결코 아니었다.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는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님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뿐이다. 그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서 당신의 인류를 향한 완전하신 구속을 이루시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 그 분이 하나님이요, 구세주이자 심판주로 이 땅에 오셨음을 증거 하는 것이 기적의 본질이자 목적이라는 것이다.
앉은뱅이가 “하나님 왜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나요?”라며 평생을 한탄하고 있는 그 애끓는 심령에 예수님이 먼저 찾아 오셨다.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시고, 지금 너를 구원하셔서, 너를 통해 영광 받기를 원하신다.”라는 사실을 그에게 보여주셨다. 또 그를 도구로 사용하여 오천 명이나 주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셨다. 단순히 그를 앉은뱅이의 고통에서 해방시켜주고 낫게만 하는 것이 기적의 목적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나,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기적이, 단순히 배불리 먹고 마시게 하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빵 공장이나 포도주 양조장의 세일즈맨으로 오신 것이 아니다. 오직 메시야로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인류 구속을 실천하러 오셨던 것이다.
다른 종교에서도 기적은 일어나는가?
하나님의 영광이, 특별히 십자가의 예수님이 증거 되지 않는 기적은 절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신기하게 다른 종교에서도 간혹 신령한 종교적 체험을 할 수 있고 기적 같은 일도 일어난다. 심지어 종교적 신앙과 상관없이 불신자들 사이에서도 인간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도 왕왕 발생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보면 기적이 아닌 일을 기적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다. 이성으로 이해가 잘 안 되거나 설명이 불가능하면 일단 기적으로 치부해 버린다. 상상을 초월하는 힘이 동원되어도 기적으로 친다.
예를 들어 지금부터 200 여년 전만해도 T.V.나 Computer는 상상도 못했던 물건이었다. 만약 그 때 사람이 타임머신을 타고 지금 와서 보면 당연히 그런 전자기계가 신인 줄 알고 그 앞에 절할 것이다. 역으로 따져서 고대 사람들은 엄청난 소리와 힘을 발휘하는 천둥 번개를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초등학생도 가적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과학이 발달되어 그 이치와 원리가 규명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기적이라고 여기는 것들 가운데는 기적이 아닌 것이 상당 부분 차지한다는 것이다.
기적은 당신께서 정해 놓으신 법칙을 당신께서 깨트리는 것이기에 그 본질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일 수밖에 없다. T.V.나 Computer가 아무리 고차원의 신기한 능력을 발휘함에도 기적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단지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기적은 오직 신앙의 눈으로 보아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아무리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나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할 수는 없다. 그저 아주 신비한 일이 우연히 일어난 것일 뿐이다.
하나님의 일상적인 역사에도 당신만의 분명한 목적은 있다.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역사했다면 즉, 기적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며 또 당연히 당신의 영광이 더 크게 드러나게 마련이다. 비록 다른 종교에서 유사한 일이 일어날지라도 기적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신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모세에 대항한 애굽 술사들도 사술(邪術)로 여러 이적을 보였다. 그러나 모세가 나타내는 이적과 다른 차이는 무엇이었는가? 그들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을 계속 노예로 삼아 착취하려는 사단의 목적이, 모세의 것에는 당신의 백성을 고난에서 구원해내려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다. 인간의 눈에는 그저 신비한 현상으로 동일하게 비췰지 몰라도 사단의 죽음과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엄청난 차이가 그 안에 있었지 않는가?
나아가 초자연적인 일에 선한 뜻이 있다고 다 기적이 될 수는 없다. 대학교 영어 교수를 하는 분의 부인이 도무지 이름 모를 병에 걸렸다. 아무리 병원에 가도 시름시름 앓기만 했다. 그런데 한국에 나와 있는 몰몬교 선교사가 전도하러 왔다가 마침 영어를 잘하는 남편과 오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선교사들이 그 부인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기도해 주었는데 놀랍게도 병이 나아버렸다. 그 뒤로는 아무리 몰몬교의 생성과정과 교리까지 그 모순과 거짓됨을 가르쳐 주어도 끝까지 이단에 넘어갔다. 자기가 병이 나은 체험이 있어서다.
때로는 애굽 술사도 이적을 일으켰듯이 무당도 병을 잘 고친다. 하나님은 초자연적 존재인 사단과 그 졸개들을 한시적으로 이 땅에서 활동하도록 허락해 놓았다. 흑암의 영적 존재도 신비한 능력으로 사람을 홀리고 훼방하고 선동한다. 심지어 광명한 천사로 위장도 한다. 하나님이 사단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신 이유는 사람들로 거짓과 진리를 스스로 분별토록 하기 위해서다. 똑 같이 병을 고치는 선한 이적을 보였을지라도 한 쪽은 사단으로, 다른 한 쪽은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인도함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요컨대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 되지 않으면 참 기적이 아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기적 중에 가장 큰 기적이 무엇인가? 하나님 본체시나 그 동등 됨을 취하지 않고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 아닌가? 그래서 아무 죄와 허물도 없으시고 인간에게 이적으로 질병을 치유하고 먹을 것을 주시고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고 천국 복음으로 인도하셨음에도 온갖 비방과 멸시와 핍박을 감내하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 아닌가? 나아가 기적의 절정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 아닌가?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 당국자를 종으로 삼아서 유대인들을 선동시켜서 구세주를 십자가에 죽게끔 한 것인 사단의 놀라운 능력이었다. 가히 사단이 벌린 최고의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단의 기적이 얼마나 거짓투성이인지를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하심으로 만천하에 폭로했다. 이야말로 사단의 최고의 기적과 맞서서 승리한 하나님의 기적 중의 기적이다.
당연히 참 된 기적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서만 일어날 수밖에 없다. 아니 하나님은 오직 그 목적으로만 기적을 베푸신다. 영국 교회의 깡패가 새사람으로 변화된 것과 지금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가 일어서게 된 것이 분명히 참 기적인 까닭이다. 신령한 능력으로 술, 마약을 끊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것만으로 그치면 반 토막의 기적 즉, 사단도 일으킬 수 있는 기적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증거 했기에 참 기적, 온전한 기적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가 예수님의 새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을 풍성히 더 받아 누려서 주위에 나누는 것만이 기적이다. 당신의 독생자를 죽여서라도 사단의 노예가 되어 있는 죄인들을 흑암 속에서 빛으로, 거짓에서 진리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져주신 것만이 기적이다. 이외의 초자연적인 일은 여전히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이거나 사단의 농간이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다.
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가?
그럼 이제 우리가 사도들과는 달리 아무리 굳건한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해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명백히 밝혀졌다. 우리가 바라는 기적은 단순히 우리의 능력이 못 미치거나, 우리가 노력을 안 해도 도깨비 방망이 식으로 뚝딱하고 되는 것들뿐이다. 공부 열심히 안하는 자기 아들을 부모가 열심히 기도하면 신비하게도 평소 잘 아는 문제만 나와 대학입시에 거뜬히 합격하는 것이 기적이 아니다.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또 그것을 간증이랍시고 나누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다.
대학에 가고 못 가고는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달린 것이지, 얼마나 기도를 뜨겁게 해서 기적 같은 일이 나타나게 하느냐에 달린 문제가 결코 아니지 않는가? 축복이나 능력을 인간이 바라고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수치로 현실화 시키는 것이, 그것도 인간은 수고도 하나 하지 않고서, 기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정말 죽기 살기로 신앙의 힘을 동원해 그렇게 맞아떨어지게 만들었다 해도 예수가 없으면 기적이 아니다. 대학입시는 신앙에 관계없이 열심히 공부한 자가 붙는 법이며 그렇게 되어야만 정당하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진정한 공의가 드러나는 길이지 않는가?
흥미롭게도 선교지에선 초대 교회 같은 이적이 수시로 일어나는데 그 이유는 너무나 명백하다. 오직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사신 예수님의 복음만 전하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지 않는가? 온갖 우상들만 섬기던 이방인들에게, 또 율법적 하나님만 섬기던 유대인들에게 가장 먼저 구세주 예수를 믿게 하여 구원으로 인도해야 했다. 성령의 역사가 충만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사도들 모두가 예수가 죽었다 부활한 그 복음에 자기의 생명까지 바치고 헌신했기에 가는 곳마다 하는 일마다 하나님의 역사가 크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동일한 맥락에서 오늘날의 신자에게 일어난 가장 큰 기적이 무엇인가?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연합하였고 그 부활에 동참한 것이다. 하나님과 원수 된 죄인으로 사단의 노예로 묶여 있었던 우리로선 계획은커녕 꿈도 꾸지 못한 일이었다.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이자 일방적 역사였다. 그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그분이 소유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에 의지할 수 있게 된 것이 기적 중의 기적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혈통으로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생물학적 유전으로 하나님이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대민족이 선민이라고 해서 그 후손이 다 구원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육정으로도 즉, 사람의 뜻으로도 그럴 수 없다. 우리가 믿고 싶어서 이성과 논리로 분석 이해하여 믿었다고 구원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 다. 당연히 그 육정 안에는 종교적인 열성도 포함된다.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성령의 감화를 허락하시어 예수를 알게 하신 자다.
그렇다면 신자는 사실상 매 순간 기적을 누리고 있고 아니 일으키고 있는 셈이다. 신자는 혼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세가 함께 작동하기 때문이다. 일용할 양식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공급 받는 것이야말로 기적의 첫 단계이자 가장 중요한 기적이다. 쉽게 말해 먹고, 마시고, 입는 것들 모두도 기적이다. 나아가 예수 믿은 후의 신자의 삶 모두가 다 기적이다. 정말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 확실하다면 기적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러나 절대 간과해선 안 될 것은 범사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서 행한다고 다 기적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앉은뱅이나 술주정꾼이 치유 된 것만으로는 반 토막의 기적이자 기적의 시발점일 뿐이라고 했듯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신비한 일이 일어난 것으로 그쳐선 기적이 아니다. 반드시 예수가 증거 되어야 참 기적이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가 드러나야 한다.
예수를 증거하라고 해서 단순히 간증하라는 뜻이 아니다. 흔히들 하는 간증은 어떤 신비한 사실이 일어났다는 것을 보고만 한 것이지 예수님 그분을 실제로 증거 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예컨대 기도해서 받은 일용할 양식을 통해 예수가 증거 되는 길도 단순히 기도해서 얻었다고 나누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신자가 정말로 힘든 환난 가운데도 소망을 잃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평강하고 기뻐하는 가운데 양식이 신기하게도 끊이지 않게 채워지는 모습을 주위에서 자연적으로 보아 알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로 “어찌 저리 힘든데도 저리 평온할 수 있을까? 아무 문제없는 우리보다 오히려 더 즐겁게 살고 있네. 도대체 저들이 믿는 예수는 어떤 분인가? 저 사람들이 믿는 예수라면 나도 믿고 싶다.”는 마음부터 먼저 들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말도 종교적 형식을 갖추라는 것이 아니다. 범사에 오직 예수님의 거룩한 통치만 받고 있는 모습을 즉, 세상 앞에 빛과 소금의 모습을 자신이 썩어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드러내라는 것이다.
기적을 일으키는 법
재삼재사 강조하지만 우리의 기대치를 최대한으로 잡고선 기도하여 달성해내는 것이 기적의 시초가 될 수는 결코 없다. 지금 솔로몬 행각의 유대인들이 “심히 기이하게 여기며 놀라는” 기적 즉, 나면서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가? 그야말로 불신자들이 심히 기이하게 여기며 놀라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자 모이게, 다른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시선을 집중시키게 만든 것이었지 않는가? 그런데 그런 기적은 사실상 신자들 모두에게 이미 일어났지 않는가? 어떤 경로가 되었든 신자는 예수께로 관심을 갖고 복음을 듣게 되었고 그래서 구원을 얻었다. 일단 신자가 되었다면 심히 기이하여 놀랄만한 기적은 이미 다 거쳤다는 말이다.
신자가 된 후에는 그 대신에 침을 삼키는 것도, 머리카락이 빠지고 새로 나는 것도, 아침마다 침상에서 일어나는 것도, 숨을 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기에 모두가 기적이다. 신자의 주위에 기적이 아닌 것들은 단 하나도 없다. 한 순간도 하나님의 사랑의 장중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 분이 나를 온전히 인도하시고 간섭하고 계신다. 모든 순간순간들을 기적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 신자의 삶이다. 그 모든 기적의 원천은 예수님이었다. 그분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신자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살고 있는 일 년 365일 일분일초 가운데 기적이 아닌 순간은 없다. 또 그 구원은 취소되지 않기에 천국가는 그 순간까지 평생토록 놀라운 기적이 이어지고 있다.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고 앉은뱅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자 기적이 시작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앉은뱅이를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시려고 그를 성전 미문에 앉히신 것, 아니 그를 택하신 것부터 기적은 출발되었다. 신자들 모두가 그와 단 한치도 부족하지 않고 동일한 하나님의 크나큰 기적 가운데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엄마의 태에 짓기 전부터 택하시고 사랑하셔서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씻기셨다. 성령으로 인치시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게 했다. 온전히 새로운 생명으로 이미 거듭나게 하셨지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의 이름으로 간구해도 기적을 맛볼 수 없다고, 그것도 신앙생활을 이렇게 오래 했음에도, 절대 실망할 필요가 없다. 신자란 지금도 하나님의 셀 수도 없는 기적을 누리고 사는 자다. 예수 믿은 지 오래일수록 그만큼 더 많은 기적을 맛보고 누린 것이다. 여전히 아무리 기도해도 기적을 맛볼 수 없다는 실망과 의아심을 떨칠 수 없는가? 바로 그러는 순간에 가장 귀한 기적을 놓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떤 기적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지 않는가?
신자란 하나님께로 난 자가 되었고 범사에 그분의 권세에만 온전히 의지하게 된 자다. 그럼 하나님이 신자의 모든 기도에 응답해주실 것이며 그 응답 자체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또 그 응답 모두에 당신의 영광은 반드시 드러난다. 언제 어디서나 순간순간마다 쉽게 누릴 수 있는 기적을 코앞에 두고도 엉뚱한 기적만 찾고 있다. 역설적으로 말해 예수 믿는 신자가, 그분의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도무지행할 수 없는 기적 중의 기적을 범하고 있는 꼴이다.
진정으로 기적을 맛보고 싶은가? 예수님을 간절히 소원하라. 바울처럼 살든지 죽든지 자기에게서 오직 그리스도만 증거 되기를 진정으로 열망하라. 그래서 죽임을 당할 자처럼 미말에 세어지는 멸시와 박해도 기꺼이 감당해라. 세상에서 귀한 것들 모두를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을 보배로 삼아라. 그러기 위해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며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정말로 그분이 가신 길을 따라 가라. 설령 머리 둘 곳이 없더라도 말이다.
그렇지 않고는 참된 기적을 맛 볼 길은 절대로 없다. 혹시라도 사단이 미끼로 던져주는 광명한 천사로 위장한 기적을 원한다면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어쩌면 사단이 가장 좋아하는 종교적 열성과 치성을 최대한도로만 바치면 얼마든지 그런 기적을 누릴 수 있다.
다른 말로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을 통해 예수를 진정으로 증거하고 싶은 신자라면 놀랍고도 기이한 기적은 구태여 바라지도 않는다. 그렇게 헌신 되어 있는 신자에게는 하나님이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시선을 십자가로 향하게 만든 불신자들을 붙여 주시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기적을 소원하고 기도해서 기적이 일어난 것이 결코 아니다. 오직 예수만 증거 하겠다는 열정에 가득 차 있으니까, 심지어 지하 감옥에서조차 그것도 한 밤 중에, 기적이 자연히 따라 왔지 않는가?
요컨대 신자는 기적을 일으키는 법을 찾을 것이 아니라 기적을 누리는 법부터 먼저 배워야 한다. 아니 이미 기적 가운데 살고 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의 이름의 권능만 확실히 믿고 있다면 날마다 순간마다 정말로 놀랍고도 풍성한 기적 가운데 서있기 때문이다.
12/18/2008
(1996/6/9 유타대학촌교회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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