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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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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http://www.nosuchjesus.com |
병 주고 약 주는 하나님?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요9:·1-7)
너무나 엉뚱하신 예수님
오래 전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 아주 실력이 있으면서도 가르치는 방법이 완전히 대조적인 수학 선생이 두 분 계셨다. 한 분은 교수법이 기가 막혀 설명을 듣고 있노라면 머리에 쏙쏙 박히는 것 같았다. 다른 한 분은 아무리 어려워도 전혀 막힘이 없이 문제를 잘 풀었는데 설명이 좀 어눌해서 당신의 실력에 비해 학생들의 이해 수준이 따라가지 못했다.
가끔 선생들을 골탕 먹이려 일부러 대학교 수학교재를 구해다 최고 어려운 문제를 질문하곤 했다. 교수법이 좋은 선생은 몇 번 시도해보다 잘 풀리지 않으면 얼굴이 벌개져선 다음 시간에 와서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어눌한 선생은 알아듣지도 못할 혼잣말로 중얼중얼 대고선 곧바로 정확한 해법과 답을 칠판에 적어 놓았다. 그래서 존경 반 놀림 반의 뜻으로 바보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사실은 천재였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 둘 중에 어느 쪽인 것 같은가? 둘 다 아니다. 질문과 상관없는 전혀 엉뚱한 대답을 하셨기 때문이다. 로마에 세금을 바쳐도 옳으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하면 민족배반자로 몰릴 것이요 또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의 반역자로 고발할 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어느 쪽 함정에도 걸리지 않으면서도 너무나 정확한 답변을 하셨다. 또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죽이라고 하면 사랑이 없다고 할 것이며 죽이지 말라고 하면 율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비방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먼저 돌을 들어 치라고 하여 사람들로 스스로 물러가게 만드셨다.
왜 예수님은 질문마다 매번 엉뚱한 대답을 하셨는가? 다른 이유가 없다 오직 하나, 그분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완전하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에게 가르치는 법이 어눌한지 뛰어난지, 실력이 바보인지 천재인지 따진다는 것 자체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다. 그분에게는 단 한 치의 오차, 실수, 허물, 잘못, 죄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 불완전하고 연약하며 무지하며 죄에 찌든 인간의 질문이 오히려 어리석을 뿐이다. 그분의 생각과 길은 우리의 생각과 길과 전혀 다르다. 그러나 무식하면 용감하고 고집도 세다고 무지한 인간들은 아직도 그분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거나 오해하거나 배척하고 있을 뿐이다.
본문의 답변도 엉뚱하긴 마찬가지다. 나면서 봉사인 자가 아비와 본인의 죄 중에 누구 때문이냐고 물었으면 반드시 둘 중의 하나 아니면 다른 제 삼자의 죄라고 답변해야 상식이다. 그런데 그 누구의 죄도 아니고 대신에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무슨 뜻인가? 예수님 당신이 그를 눈을 뜨게 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자 그 본체시라는 것을 보이려는 것이다.
나면서 봉사는 현대 첨단 의술로도 불치병이다. 정말 하나님이 아니고는 고칠 수 없다. 만약 제가 지금 안수하며 기도하여 낫게 했다면 아무도 저를 하나님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였기에 그분의 권능으로 고쳤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예수님이 아직 누구인지 잘 몰랐을 때는 상황이 다르다. 실제로 바울이 헬라 지역인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앉은뱅이를 고쳐주자 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왔다면서 경배하려고 난리를 쳤지 않는가?(행14장)
본문의 봉사도 고침을 받고는 이렇게 실토했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32,33절)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방불한 일을 하셨으니 바로 예수가 하나님께로 온 메시아지 않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은 왜 땅에 침을 뱉어서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는 치료법(6절)을 채택했는가? 먼저 침은 당시 질병치료의 효력이 있는 것으로 봤다. 지금도 벌레에 쏘이면 제일 먼저 침을 바르지 않는가? 따라서 인간들 사이에 통용되는 민간요법의 형태를 취했다. 그러나 미네랄 같이 특수 약효가 있는 흙을 고른 것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듯이 이제 완전히 죽은 눈 대신에 새 눈을 만들어 주시겠다는 상징이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의미다. 한 마디로 그분은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으로 오신 구세주였던 것이다.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다는 것은?
나면서 봉사를 고침으로써 예수님이 구세주임을 드러내려 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었다는 것은 분명히 정답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면 천재 수학 선생이 답을 적어 놓은 것을 참고서로 정답임을 확인하고선 역시 천재임에 틀림없다고 감탄하고 그친 것에 불과하다. 칠판에 잔뜩 적어 놓은 해법은 여전히 전혀 이해되지 않은 채 남아 있기에 스스로 문제를 풀지 못한다. 봉사를 치유하는 예수가 메시아인 것이 나와 아무런 실제적 상관이 없다면 그저 성경적 지식을 쌓은 것일 뿐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봉사를 고쳐주는 일이 예수님에게 무슨 그리 대단한 일이었겠는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였고, 말 한 마디로 폭풍우를 잠재웠고,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살렸고, 본인도 당신께서 미리 예언한 그대로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지 않는가?
거기다 봉사를 고쳐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것은 어떤 면에선 병 주고 약 준 꼴이지 않는가? 제자들이 누구의 죄라고 물었지만 강도, 살인 같은 나쁜 짓을 저지르는 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나면서 봉사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기에 본인과 부모 둘 중 뉘 죄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자들의 질문은 누구에게 원인이 있는지 즉, 누구 탓인지 물은 것이다. 예수님이 부모 탓도, 본인 탓도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려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럼 결국 하나님의 탓이라는 뜻이 된다. 하나님이 봉사로 만드시고는 이제 봉사를 고쳐주겠다고 한다. 그러니 병 주고 약 주는 하나님이지 않는가 말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십계명의 셋 째 계명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이다. 이 계명의 올바른 뜻이 무엇인지 아는가? 질문을 바꿔보자.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어 본 적이 실제로 있는가?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부인해 본 적이 있는가 말이다. 거의 모든 신자가 믿은 이후로는 아예 없을 것이다.
불신자들도 천벌을 받을 짓을 하지 말라고 종종 말한다. 종교 성직자들을 존경은 몰라도 함부로 막 대하지는 않는다. 그들도 구체적인 지식은 없어도 신이 있고 신을 거역하면 벌을 받는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거룩한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혹시 발음이라도 잘못할까 아예 부르지도 않았다. 오늘날의 장로님들이 대표기도 할 때에도 하나님을 얼마나 화려한(?) 미사여구로 수식하며 기도하는가?
신자라면 감히 두려워서라도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못한다. 그럼 실제로 평생에 범하지도 않을 계명을 왜 하나님은 지키라고 명했을까?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제대로 인정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분처럼 취급하거나 조금이라도 부족한 분이라고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제발 하나님을 진짜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으로 정확히 인식하여 믿고 따르며 시인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제가 드리는 질문에 정말 솔직히 한번 대답해보라.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가?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이 지금 당신과 함께 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나님은 당신의 기도를 들으시는가? 듣지 아니 하시는가? 여러분의 어려운 형편을 그분이 알고 계시는가? 모르고 있는가? 그분이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가? 아니면 능력이 없거나 부족한가? 나아가 그분이 그 문제를 해결할 대책을 마련할 것인가 아닌가? 아니 이미 마련해 놓았는가? 아예 손을 놓고 계신가?
둘 중 어느 쪽이 답이라는 것쯤은 어지간한 신자는 다 알고 믿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새벽 기도마다 이런 생각을 하는가? “혹시 하나님은 안 계시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주무시고 계신가? 내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성실하게 봉사하며 심지어 요즘 같이 어려운 형편에 쪼개고 쪼개서 헌금도 하건만 왜 아직 이 모양 이 꼴인가? 하나님은 병 주고 약 주는 분인가? 그것도 약은 거의 안 주고 병만 자주 주는데다 자꾸 더 깊어가니 말이야?”
바로 이런 생각이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다. 진짜의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가짜의 하나님이다. 우리 머리 안에 스스로 그리는 하나님은 거의 다 가짜 하나님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침 삼키는 순간에도 놓지 않으시며 머리카락까지 세고 계시는 분이다.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가?(히11:1) 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요3:16)이 구원의 유일한 진리임을 믿는 것인가? 물론 그야말로 정답이다. 그러나 그렇게 알고 있는 믿음이 실제 삶에서 아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정답만 확인한 것이지 칠판에 잔뜩 펼쳐 놓은 해법에 대해선 여전히 감감한 상태다. 믿음의 능력이 가장 필요한 때가 바로 지금 같은 가장 어려울 때이지 않는가? 경기 좋은 호경기일 때에 감사하지 못 하고 잘 믿지 못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대부분의 신자들이 믿음의 내용을 알고는 있는데 그 믿음이 실제로 출발할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다. 믿음이 힘을 발휘하는 출발점은 바로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우리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언제 어디서나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이 아무리 엉뚱해 보여도 완전한 정답임을 제대로 깨달아 아는 실력이다.
이런 인식이 없으니 환난을 그저 의지적인 믿음으로 즉, 기도나 찬양 같은 종교적 행위 내지 실력으로 이겨내려고만 발버둥 친다. 그러나 정말 솔직한 실상은 거의 모두가 현실에 아주 작은 문제만 하나 생겨도 그저 요동치는 믿음을 벗어날 수 없다. 믿음으로 현실의 파고를 넘어서지도 못하고 주저앉고 만다. 실질적인 믿음의 출발조차 못했으니 그렇다.
제자들 질문의 진의는?
제자들의 예수님께 던진 질문의 내용은 너무나 어리석은 인간적 수준에 불과했다. 마치 고등학생이 어쩌다 자기 딴엔 어려운 문제를 하나 찾아서 천재 수학선생에게 풀어보라고 내민 꼴이다. 만약 예수님이 그들의 수준에 맞추어 인간적 대답을 했다면 둘 중에 한 사람은 반드시 죄인이 되어야만 했다.
그런데 당시의 죄인이라는 표현은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그 의미가 달랐다. 강도 폭행 같이 법을 어겨서 감옥에 가있거나 혹은 윤리 도덕을 어긴 죄인이 아니었다. 유대 율법과는 아무 상관없이 살아서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자를 의미했다. 영원히 구원받을 가망 없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자다. 부정한 상태의 불구자도 그런 부류에 속했다.
그래서 율법대로 사는 경건한 자는 교제는커녕 상종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죄인들과 식사 교제하는 것을 두고 바리새인들이 계속 시비 거는 내용이 나온다. 그 뜻은 바로 제자들을 거느리며 랍비 행세를 하는 자가 왜 지옥 갈 자와 함께 노느냐는 것이다. 유유상종이라고 그런 자와 어울리면 함께 지옥 갈 것인데 어떻게 천국에 관해 가르치느냐는 것이다.
물론 제자들의 이 질문에는 바리새인처럼 예수님에게 올가미를 씌울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나면서 봉사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질문이었다. 다른 말로 “저 봉사는 지옥가야 마땅한 자이지요?”라고 물은 꼴이다.
단순히 예수님이 봉사를 낫게 하는 능력을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일의 전부도 본질도 아니었다. 나면서 봉사가 된 것이 본인 탓도, 부모 탓도, 그렇다고 하나님 탓도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알라는 것이다. 대신에 아무리 나면서 봉사인 불구자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상의 포악한 강도 죄인이라도 하나님께 진정으로 겸비하게 무릎 꿇으면 그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나면서 봉사 같은 불구자가 태어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현대 의학이 치료법은 개발하지 못했어도 그 원인은 이제 알아내었다. 대대로 내려오는 유전자 DNA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인류가 수천 년간 죄악으로 타락하여 온갖 쾌락에 탐닉한 결과다. 하나님께 받은 영혼과 정신을, 특별히 육체를 아름답고도 거룩하게 가꾸기는커녕 정반대로 술, 담배, 마약, 섹스, 질병, 폭행, 전쟁 등으로 아주 추하게 더럽혔다. 결국 그 유전자들이 비뚤어져 변종이 생기다가 원래 형상이 파괴되면서 장님 같은 불구자가 태어나게 된 것이다. 봉사가 된 것이 본인과 부모 나아가 하나님 탓도 아니라는 대답은 말하자면 “너희 모두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죄와 사단과 사망의 노예가 되어서 추하고 더러워졌기 때문”이라는 뜻이었다.
지난주 한국 TV 뉴스에, 아마 보신 분도 많겠지만, 정부에서 보조금을 받는 장애인 보호시설의 비리를 고발하는 내용이 나왔다. 관리가 귀찮고 힘들다고 전부 쇠사슬에 묶어 놓고는 밤에는 수십 명되는 원생들을 동네 아줌마 한 사람이 돌보게 했다. 또 사십 여명 밖에 안 되는 원생 숫자를 육십 여명으로 불려 보조금을 더 타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 원장이 누구인지 아는가? 바로 목사였다. 그러고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관리가 안 된다. 또 그렇게 관리하는 것이 그들에게도 가장 유익하다. 나는 정부 보조비를 받아서 교회에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린다.”고 도리어 큰 소리쳤다.
여러분이 그 뉴스를 접했을 때에 어떤 생각이 먼저 들었는가? 틀림없이 “저런 천 벌을 받을 목사가 어디 있나?”였을 것이다. 그리고는 “도대체 저 장애아들은 팔자가 왜 저 모양인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으면 저런 비참한 모습으로 태어나야 하는가?”는 생각도 스쳐지나갔을 것이다. 신자가 환생설을 믿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까지는 생각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이 저런 아이를 태어나게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아예 태어나지 않게 해주실 수는 없는가? 또 왜 저런 말도 안 되는 나쁜 짓을 그대로 두고 보시는가? 저 못된 목사를 왜 당장 벌을 주지 않는가?”라는 의아심은 분명 들었을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우리도 바로 제자들이 예수님께 건넸던 것과 똑 같은 질문을 스스로 하고 있는 셈이다. 나아가 그 목사를 판단하고 정죄하기 이전에 장애인 시설을 한 번이라도 찾아간 적이 없지 않는가? 과연 그 목사만 비방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가? 비록 장애아들을 불쌍하다고 안타까이 여기기는 했어도 스스로 나서서 도와주지는 않았지 않는가? 아니 단순히 그들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울까 그 아픔과 슬픔을 헤아려 보기라도 했는가? 평소 진정한 관심이라도 가져 보았는가 말이다.
소경을 도와주라고 해서 예수님처럼 눈을 뜨게 해줄 수는 없다. 개안 수술 하라고 집을 팔아서라도 수천만 원 기부하라는 뜻도 물론 아니다. 최소한 봉사를 만나면 손이라도 잡아 주었는가 말이다. 또 장애인은 사실 자주 만날 수 없지만, 주위에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에게 현실적으로 도와주지는 못해도 따뜻한 위로라도 해주었는가?
제자들은 봉사를 만나면 어떻게 도와주는 것이 좋을지, 최소한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려는 데는 전혀 관심을 쏟지 않았다. 누구 죄로 지옥 가게 되는지 그 원인만 알려 했다. 구원과 심판의 궁극적 권한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데 따지고 보면 왜 저런 장애자를 세상에 보내었는지 즉, 왜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느냐고 하나님께 책임 추궁을 한 셈이다. 나아가 저들은 지옥가지만 사지가 멀쩡하고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자기들은 천국 가기에 마땅한 자들임을 예수님이 직접 말로서 보증해 달라는 뜻이기도 했다.
정작 회개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나게 하겠다고 대답한 뜻은 이것이다. “너희는 장애인이 아니라고 자부하기에 장애인을 보고 그 죄를 따지지만 너희 또한 저들보다 하나 나을 것 없는 장애인임을 아느냐? 저들은 아는 것이 적고 사지가 불편하기 때문에라도 너희보다는 죄를 훨씬 적게 짓지 않느냐? 너희는 정신과 사지가 멀쩡하고도 기껏 하는 짓이 무엇이냐? 살인, 간음, 강도, 폭행, 간음, 마약, 도박 같은 짓거리이지 않느냐?”
“심지어 신자이면서도 미국까지 데리고 와 엉뚱한 고생을 시키는 마누라를 왜 자기가 밖에서 스트레스 받았다고 술만 먹으면 두들겨 패느냐? 하나님께서 당신을 찬미하라고 준 입술로 주위 성도들, 배우자, 자식들의 가슴에마저 못을 박는 말을 너무 쉽게 하지 않느냐? 오히려 더 핸디캡인 주제에 훨씬 덜 핸디캡더러 누구 죄로 지옥 가는지 묻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느냐? 장애자를 보면 조금 안쓰럽고 불쌍하게 여기기는 해도 진정으로 그들에게 다가간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느냐? 기껏 해야 동전 몇 푼, 그것도 실컷 쓰고 남은 것을 던져 주고는 인간으로서 도리와 신자로서 의무를 다한 양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지 않느냐?”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신자가 정작 가슴을 치며 회개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장애자를 진정으로 돕지 못하는 회개는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해야 한다. 또 불신자 가운데도 남을 위해 희생적 사랑을 베푸는 자도 많이 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의 목적이 단순히 구제와 선행에 열심을 내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약 하나님이 정말로 본인이나 부모의 죄 때문에 나면서부터 봉사로 태어나게 했다면 하나님께 잘못이 있는가? 없는가? 당연히 없다. 오히려 아주 공평하게 처리한 셈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만약에 그렇게 했다면 벌써 저를 필두로 여러분 모두가 절대로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다. 모두가 심판을 받아 죽어 없어져야 했다.
또 그 반대로 하나님이 정말 아무 죄도 없는데 장애아를 태어나게 했다 해도 그분에게 하자가 있는가? 없는가? 절대로 없다. 그분의 영광이 한 치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왜 그런가? 우선 몽땅 죽어야만 할 우리를 그 잘못대로 처리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살려 놓으신 것만 봐도 그분의 생각과 길은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완전하신 분이다. 절대로 하자가 없는 분이시다. 절대적 진리이자 절대적 선이자 절대적 아름다움 그 자체다.
하나님은 장애자를 비록 사지가 불편하고 지성적 능력이 뒤떨어지게 만들었어도 그 영혼은 순수하게 지으셨다. 장애자들이 우리보다 예수님께 훨씬 더 가까이 있다. 실제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도 그런 자들은 절대로 물리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항상 당신의 가까이에 두셨지 않는가? 나면서 봉사라면 최소한 진짜 죄인들, 바로 우리의 추하고 더러운 꼴을 볼 수 없기 때문이라도 그 정신이 깨끗이 보존될 것 아닌가?
하나님이 장애자를 세상에 둔 이유는 많지만, 그중에 가장 중요한 뜻은 그들을 볼 때에 오히려 사지와 정신이 멀쩡한 우리가 더 장애자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알게 하려고 그야말로 죄도 없는 장애자들은 이 땅에선 온갖 불편함, 고통, 무관심, 멸시, 소외 때로는 핍박까지 당하게 만드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뜻을 자기들의 비뚤어진 몸으로 일생에 걸쳐서 드러내고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즉, 예수님께 일대일 제자 훈련을 받은 자들마저 자신들을 돌아보기는커녕 장애자의 죄만 따지고 있다. 예를 든 그 천벌 받을 목사를 당장에 심판하지 않는다고 의아해 하는 우리와 똑 같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 목사를 당장 벌주기로 했다면 어쩌면 우리 중에 그보다 훨씬 더 빨리 죽을 자가, 저를 비롯해 얼마나 많이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하나님은 절대로 병을 주거나 만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에게 약을 주셨다.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 즉 부모마저 버리고 사단에게 넘어간 인간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다. 여자의 후손이 사단의 머리를 밟을 것이라고 그때부터 약속하셨다. 마누라를 두 번이나 팔아먹은 사기꾼을 우리 믿음의 조상으로 삼았고, 살인자를 당신의 백성의 구원자로 세웠고, 충직한 부하의 아내와 간음하고는 그 부하를 죽여 버린 자를 가장 위대한 왕이 되게 하셨다. 또 기를 쓰고 당신을 반대하며 당신을 따르는 자마저 눈에 불을 켜고 죽이려 다녔든 자로 오히려 당신을 가장 열렬하게 옹호하며 전하는 자로 바꾸어주었지 않는가? 아무리 따져 봐도 병은 인간이 만들었고 약을 주신 분이 하나님일 뿐이다.
신자가 정작 회개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 어디서 어떤 사건에서나 무조건 옳다는 것을 모르거나 잊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 그분의 생각과 길이 나와 다르다는 것조차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현재 나에게 잘 이해되지 않는 참으로 이상하고 위급한 일이 생겼어도 하나님은 완벽한 분이시며 그 가운데 당신의 영광이 반드시 드러나리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아예 그런 사실조차 모르는 것이다.
해법을 터득한 유일한 자
본문의 사건에서 예수님의 대답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먹은 자는 딱 한 사람뿐이었다. 정답 뿐만 아니라 그 해법까지 터득한 자다. 바로 눈이 떤 봉사다. 왜 그런가? 그는 예수님을 직접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분께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나면서 봉사는 지옥으로 떨어질 자였다. 그래서 그 사회에서 인간 취급도 못 받는 부정한 자로 소외 격리 되었다. 성전 예배는 평생을 두고 참여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 자를 하나님 당신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그 눈에 손을 대고서 고쳐 주었다. 가장 치명적인 약점과 아픔이었던 곳을 낫게 해주셨다.
그의 아픔의 실체는 무엇이었겠는가? 단순히 앞을 못 보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보지 못하는 것이 고통스럽기는 했겠지만 나면서 봉사이므로 보지 못한다는 의미를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그보다는 사람이면서도 사람들 사이에 사람 취급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평생을 두고 성전 문 안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기에, 아니 처음부터 지옥으로 떨어질 자였기에 과연 이렇게 인생을 마쳐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정말로 자신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인지, 자기 같은 자는 절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지, 이 인생을 이렇게만 끝내면 너무나 헛되고 헛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에 피멍을 들게 했던 것이다. 그런 갈등이 당장에 먹고 사는 데 지장을 주거나 항상 괴롭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 영혼에 도무지 지울 수 없는 상처요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계속 남아 있었다.
그런 자에게 예수님은 먼저 찾아오셔서 눈을 뜨게 해주었다. 평생을 두고 자기를 묶고 있던 모든 상처, 갈등, 눌림, 죄책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흑암에서 빛으로, 심판에서 구원으로 옮겨졌다. 그의 인생이 뒤집어졌고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다.
어떤 식의 새사람이 되었는가? 죄 덜 짓고 착해지는 정도가 아니었다. 바리새인들이 거짓인 줄 알았다. 율법을 따르며 선행을 많이 하여 세상의 칭송을 받지만 성전에서 하늘을 향해 머리를 세우고 “저는 선행과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열심이며 십일조도 성실히 합니다. 저 세리와 죄인들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저를 특별 취급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따지는 것이 오히려 사단에 놀아나는 것임을 깨달았다. 오늘날로 치면 신자들이 저는 교회 봉사 열심히 하고 헌금도 많이 내는데 왜 아직 이 모양 이 꼴이냐고 의아해 하는 것이다.
대신에 그는 오히려 성전 구석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는 세리의 자리를 택했다. “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저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없이는 단 한 시도 살 수 없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세상 속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가 되었다. 완전히 그의 생각 즉, 인생관 가치관 등이 삼백육십 도 뒤바뀌었다.
당시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자는 유대교에서 출교 즉, 그 사회에서 추방했다. 장님은 눈을 뜨게 되자 바로 성전으로 들어갔다. 생전 처음으로 유대 사회의 일원이 되겠다고, 온당한 사람 취급을 받아 보려고 갔다. 그런데 그들은 창조주 내지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하신 바로 그 예수를 부인하라고 요구했다. 아무리 유대 사회에 속하고 싶어도 자기가 겪고 본 사실을 속일 수는 없었다.
다른 말로 육신의 봉사가 되더라도 다시는 영적인 봉사는 되기 싫었다. 하나님의 구원을 얻은 자가 다시 지옥으로 떨어질 자가 되기 싫었던 것이다. 거짓의 아비 사단의 자식이 되어 있는 바리새인들이 주관하는 곳으로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비방, 멸시, 핍박을 받더라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세상에선 다시 비참한 삶으로 떨어져 실패해도 하나님 안에서만은 성공하고 싶었던 것이다.
유대인이었든 그로선 하나님을 몰랐던 자에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아니다. 예수를 몰랐던 자에서 예수를 만나 완전히 인생이 뒤집어졌던 것이다. 생전 처음으로 자기보다 자기를 더 잘 알고 자기 부모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자기 인생의 가장 어둡고 괴로운 부분을 완전히 고침을 받았다. 하나님 안에서 의인으로 깨끗케 된 것이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아직도 단지 스승일 뿐이었지만 이 장님에게는 구세주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너무나 엉뚱한 성경 말씀
성경에는 너무나 엉뚱한 말씀들이 많다. 대표적인 예로, 환난 중에 즐거워하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간구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등을 들 수 있다. 과연 이런 권면이 말이 되는가? 어떻게 환난 중에 즐거워 할 수 있는가? 항상 기뻐하는 것은 바보나 정신병자뿐이지 않는가? 당장 다음 달 아파트 월세 낼 돈도 없고, 집은 언제 은행경매로 넘어갈지 모르며, 사업마저 곧 부도를 내어야 할 형편인데 엉뚱해도 너무 엉뚱한 말이다.
여러분에게 다시 질문을 드려보자. 정말 솔직히 속으로 대답해 보시기 바란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얼마만큼 사랑하는가?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는 만큼 그분을 사랑하는가? 비율로 따지면 일대일이 되는가? 십분의 일인가? 백분의 일, 천분의 일, 만분의 일인가? 사업이 부도가 나도, 집이 은행 경매로 넘어가도, 아파트 다음 달 월세가 없어도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사랑할 수 있는가? 만약 당신의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저부터도 제가 대신 죽을 테니까 아들만은 살려달라고 매달릴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당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주셨지 않는가? 비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온갖 멸시와 비방을 당했지 않는가? 역사상 최고로 억울하며 수치스럽고 고통스럽게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지 않는가? 나면서 봉사인 자도 누구의 죄 탓이 아니며, 아니 당신이 그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단 한 시도 없었음을 만 천하에 보이기 위해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껏 기도 응답을 받아야, 그것도 받은 만큼만 그분을 사랑한다. 주위에 장애자들이 어떤 아픔과 슬픔을 지니고 사는지는 관심도 없다. 이웃이나 성도들에게조차, 아니 자기 배우자나 자녀가 이 미국 땅에서 어떤 아픔과 눌림을 가슴에 지니고 있는지 전혀 알아보려고 하지 않은 채 말이다. 심지어 자신부터 얼마나 심한 장애자인지 알지 못하거나 잊고 있으면서 오직 바라는 것이라고는 애굽의 고기 가마 곁일 뿐이다.
짐 케리가 나오는 “All Mighty”라는 코미디 영화가 있다. 주인공이 하나님의 권한을 대신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이 기도하는 내용을 다 들을 수 있고 그 기도에 일일이 응답을 해주어야 했다. 너무 쉴 새 없이 기도가 들리자 아예 컴퓨터를 통해 이메일로 다 받아서 단번에 “Yes.”라고 클릭해 해결해 주기로 했다. 어느 날은 로토에 수십만 명이 당첨되어 상금이 기껏 십 불도 안 되어 항의하고 난리가 일어났다.
그 수십만 명이 다 기도하는 자였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지금 같은 세계적 금융위기를 로토로 이겨낼 수는 없다. 우리가 기도하고 소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다 들어주면 오직 세 가지 결과만 낳는다. 모두 라스베가스에서 몸과 마음이 썩어가는 줄도 모르고 흥청망청 거리며 놀고 있든지, 모두 감옥에 가 있던지, 아예 모두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든지 셋뿐이다.
물론 신자도 힘들고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환난 중에 쉽게 즐거워하지 못하며 작은 염려가 생겨도 그저 불안해지지지 쉽게 감사함으로 간구하지 못한다. 새벽 기도에 나와 불안, 초조에 휩싸여 눈물이 앞을 가리며 하나님에 대한 의심, 불만, 불신앙까지 들고 나올 수 있다.
실제로 다윗의 시편들을 보라. 앞부분은 우리와 똑 같은 심정을 토로한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시편이 중간을 넘어서 끝으로 향해 가면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나아가고 승리의 환희로 마친다. 그가 기도 중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도가 응답되어서 문제가 해결되기도 전에 말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다. 단순히 선행과 구제를 열심히 하고 종교적 임무를 성실히 다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려면 자신과 하나님의 마음이 일치되어야 한다. 그럼 하나님이 다윗의 마음에 맞출 수는 없고 그가 맞춰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는 기도 중에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떨지 가만히 헤아려 본 것이다. 특별히 지난 세월 동안에 자기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말이다. 골리앗과 싸움에서 이기게 해준 것, 사울에게 피신당하며 겪은 은혜, 블레셋 등 온갖 외적과의 싸움과 압살롬의 배반 사건에서 자신을 떠나지 않고 동행하신 모든 일들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비록 지금은 자신이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고 있을지라도 그분의 막대기가 자신의 안위를 지켜주며 반드시 언젠가는 당신만의 방식으로 자기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아직은 대적의 목전에서 위험이 끝나지 않았지만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앎으로써 평강을 넘어 감사하고 기뻐하기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자는 환난 중에 의지적으로 감사하고 즐거워할 수도 있다. 염려 불안이 겹쳐도 마음을 바꿔 먹으며 믿음의 힘으로 기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적인 평강의 효과가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일시적일 뿐이다. 인생에서 염려 불안은 그치지 않는 법인데 평생을 의지력으로 계속 즐거워할 수 있는가? 정말로 그럴 자신이 있는가?
너무나 힘든 데도 감사와 기쁨으로 기도했더니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구원해주시는 것은, 때로는 순전히 그런 이유만으로 그럴 때도 있지만, 아니다. 예수를 인격적으로 일대일로 만나서 인생이 뒤집어진 자는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살고 있기 때문에, 최소한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노력하기에 환난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기도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을 어떻게 하나님이 대하셨는지 확인할 수 있기에 소망을 키우며 환난 가운데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외에 자신의 진정한 관심과 수고를 쏟을 곳이라고는 단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작금 기독교가 왜 개독교라고 욕을 들어먹고 있는가? 그 원인이 도대체 무엇인가? 교회 마다 예배를 뜨겁게 드리고 찬양은 우렁차며 기도도 간절히 하며 각종 성경 공부 프로그램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데도 왜 그런가? 솔직히 신자들이 무엇을 믿는지, 왜 믿는지, 신앙의 의미와 내용과 가치와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아니 제대로 안 가르친다.
심지어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는지조차 모른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말이 갖는 엄청난 권세와 풍성한 은혜를 전혀 알지 못한다. 신자가 되었다는 특권과 신분과 위치를 확신하지 못한다. 다른 말로 하늘과 땅위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땅 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동행해 주심에도 도무지 세상과 죄악과 사단 앞에 자신감과 담대함이 없는 것이다.
신자가 갖는 힘은 오직 하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 세상의 어느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신자를 끊을 것이 없다는 그 사실이다. 그 안에는 당연히 지금 같은 극심한 불경기도 포함된다. 하나님은 절대로 내 편이라는 것이다. 시쳇말로 때려 죽어도 신자의 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뜻이 바로 그것이지 않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길과 생각과 다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무리 헬라인에게는 미련하고 유대인에게는 거치는 것처럼 엉뚱해 보였어도 하나님의 가장 완전한 구원의 길이었지 않는가?
인생은 생각보다 너무 짧다. 그것도 한번 지나버리면 물릴 수도 없고 수정이 되지 않는다.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위로하며 보내려 해도 너무 짧으며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내 주위부터 진정으로 사랑하며 이 땅에 천국을 실현할 수 있다. 그 길은 오직 하나, 날마다 십자가를 지며 자신을 죽이고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을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에 채우는 것이다. 또 그래야만 이 극심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엉뚱하지만 절대로 완전하신 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12/17/2008
LA 아름다운 교회 수요예배에서 설교한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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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요9:·1-7)
너무나 엉뚱하신 예수님
오래 전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 아주 실력이 있으면서도 가르치는 방법이 완전히 대조적인 수학 선생이 두 분 계셨다. 한 분은 교수법이 기가 막혀 설명을 듣고 있노라면 머리에 쏙쏙 박히는 것 같았다. 다른 한 분은 아무리 어려워도 전혀 막힘이 없이 문제를 잘 풀었는데 설명이 좀 어눌해서 당신의 실력에 비해 학생들의 이해 수준이 따라가지 못했다.
가끔 선생들을 골탕 먹이려 일부러 대학교 수학교재를 구해다 최고 어려운 문제를 질문하곤 했다. 교수법이 좋은 선생은 몇 번 시도해보다 잘 풀리지 않으면 얼굴이 벌개져선 다음 시간에 와서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어눌한 선생은 알아듣지도 못할 혼잣말로 중얼중얼 대고선 곧바로 정확한 해법과 답을 칠판에 적어 놓았다. 그래서 존경 반 놀림 반의 뜻으로 바보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사실은 천재였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 둘 중에 어느 쪽인 것 같은가? 둘 다 아니다. 질문과 상관없는 전혀 엉뚱한 대답을 하셨기 때문이다. 로마에 세금을 바쳐도 옳으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하면 민족배반자로 몰릴 것이요 또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의 반역자로 고발할 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어느 쪽 함정에도 걸리지 않으면서도 너무나 정확한 답변을 하셨다. 또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죽이라고 하면 사랑이 없다고 할 것이며 죽이지 말라고 하면 율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비방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먼저 돌을 들어 치라고 하여 사람들로 스스로 물러가게 만드셨다.
왜 예수님은 질문마다 매번 엉뚱한 대답을 하셨는가? 다른 이유가 없다 오직 하나, 그분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완전하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에게 가르치는 법이 어눌한지 뛰어난지, 실력이 바보인지 천재인지 따진다는 것 자체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다. 그분에게는 단 한 치의 오차, 실수, 허물, 잘못, 죄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 불완전하고 연약하며 무지하며 죄에 찌든 인간의 질문이 오히려 어리석을 뿐이다. 그분의 생각과 길은 우리의 생각과 길과 전혀 다르다. 그러나 무식하면 용감하고 고집도 세다고 무지한 인간들은 아직도 그분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거나 오해하거나 배척하고 있을 뿐이다.
본문의 답변도 엉뚱하긴 마찬가지다. 나면서 봉사인 자가 아비와 본인의 죄 중에 누구 때문이냐고 물었으면 반드시 둘 중의 하나 아니면 다른 제 삼자의 죄라고 답변해야 상식이다. 그런데 그 누구의 죄도 아니고 대신에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무슨 뜻인가? 예수님 당신이 그를 눈을 뜨게 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자 그 본체시라는 것을 보이려는 것이다.
나면서 봉사는 현대 첨단 의술로도 불치병이다. 정말 하나님이 아니고는 고칠 수 없다. 만약 제가 지금 안수하며 기도하여 낫게 했다면 아무도 저를 하나님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였기에 그분의 권능으로 고쳤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예수님이 아직 누구인지 잘 몰랐을 때는 상황이 다르다. 실제로 바울이 헬라 지역인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앉은뱅이를 고쳐주자 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왔다면서 경배하려고 난리를 쳤지 않는가?(행14장)
본문의 봉사도 고침을 받고는 이렇게 실토했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32,33절)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방불한 일을 하셨으니 바로 예수가 하나님께로 온 메시아지 않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은 왜 땅에 침을 뱉어서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는 치료법(6절)을 채택했는가? 먼저 침은 당시 질병치료의 효력이 있는 것으로 봤다. 지금도 벌레에 쏘이면 제일 먼저 침을 바르지 않는가? 따라서 인간들 사이에 통용되는 민간요법의 형태를 취했다. 그러나 미네랄 같이 특수 약효가 있는 흙을 고른 것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듯이 이제 완전히 죽은 눈 대신에 새 눈을 만들어 주시겠다는 상징이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의미다. 한 마디로 그분은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으로 오신 구세주였던 것이다.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다는 것은?
나면서 봉사를 고침으로써 예수님이 구세주임을 드러내려 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었다는 것은 분명히 정답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면 천재 수학 선생이 답을 적어 놓은 것을 참고서로 정답임을 확인하고선 역시 천재임에 틀림없다고 감탄하고 그친 것에 불과하다. 칠판에 잔뜩 적어 놓은 해법은 여전히 전혀 이해되지 않은 채 남아 있기에 스스로 문제를 풀지 못한다. 봉사를 치유하는 예수가 메시아인 것이 나와 아무런 실제적 상관이 없다면 그저 성경적 지식을 쌓은 것일 뿐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봉사를 고쳐주는 일이 예수님에게 무슨 그리 대단한 일이었겠는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였고, 말 한 마디로 폭풍우를 잠재웠고,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살렸고, 본인도 당신께서 미리 예언한 그대로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지 않는가?
거기다 봉사를 고쳐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것은 어떤 면에선 병 주고 약 준 꼴이지 않는가? 제자들이 누구의 죄라고 물었지만 강도, 살인 같은 나쁜 짓을 저지르는 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나면서 봉사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기에 본인과 부모 둘 중 뉘 죄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자들의 질문은 누구에게 원인이 있는지 즉, 누구 탓인지 물은 것이다. 예수님이 부모 탓도, 본인 탓도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려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럼 결국 하나님의 탓이라는 뜻이 된다. 하나님이 봉사로 만드시고는 이제 봉사를 고쳐주겠다고 한다. 그러니 병 주고 약 주는 하나님이지 않는가 말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십계명의 셋 째 계명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이다. 이 계명의 올바른 뜻이 무엇인지 아는가? 질문을 바꿔보자.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어 본 적이 실제로 있는가?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부인해 본 적이 있는가 말이다. 거의 모든 신자가 믿은 이후로는 아예 없을 것이다.
불신자들도 천벌을 받을 짓을 하지 말라고 종종 말한다. 종교 성직자들을 존경은 몰라도 함부로 막 대하지는 않는다. 그들도 구체적인 지식은 없어도 신이 있고 신을 거역하면 벌을 받는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거룩한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혹시 발음이라도 잘못할까 아예 부르지도 않았다. 오늘날의 장로님들이 대표기도 할 때에도 하나님을 얼마나 화려한(?) 미사여구로 수식하며 기도하는가?
신자라면 감히 두려워서라도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못한다. 그럼 실제로 평생에 범하지도 않을 계명을 왜 하나님은 지키라고 명했을까?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제대로 인정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분처럼 취급하거나 조금이라도 부족한 분이라고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제발 하나님을 진짜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으로 정확히 인식하여 믿고 따르며 시인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제가 드리는 질문에 정말 솔직히 한번 대답해보라.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가?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이 지금 당신과 함께 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나님은 당신의 기도를 들으시는가? 듣지 아니 하시는가? 여러분의 어려운 형편을 그분이 알고 계시는가? 모르고 있는가? 그분이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가? 아니면 능력이 없거나 부족한가? 나아가 그분이 그 문제를 해결할 대책을 마련할 것인가 아닌가? 아니 이미 마련해 놓았는가? 아예 손을 놓고 계신가?
둘 중 어느 쪽이 답이라는 것쯤은 어지간한 신자는 다 알고 믿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새벽 기도마다 이런 생각을 하는가? “혹시 하나님은 안 계시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주무시고 계신가? 내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성실하게 봉사하며 심지어 요즘 같이 어려운 형편에 쪼개고 쪼개서 헌금도 하건만 왜 아직 이 모양 이 꼴인가? 하나님은 병 주고 약 주는 분인가? 그것도 약은 거의 안 주고 병만 자주 주는데다 자꾸 더 깊어가니 말이야?”
바로 이런 생각이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다. 진짜의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가짜의 하나님이다. 우리 머리 안에 스스로 그리는 하나님은 거의 다 가짜 하나님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침 삼키는 순간에도 놓지 않으시며 머리카락까지 세고 계시는 분이다.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가?(히11:1) 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요3:16)이 구원의 유일한 진리임을 믿는 것인가? 물론 그야말로 정답이다. 그러나 그렇게 알고 있는 믿음이 실제 삶에서 아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정답만 확인한 것이지 칠판에 잔뜩 펼쳐 놓은 해법에 대해선 여전히 감감한 상태다. 믿음의 능력이 가장 필요한 때가 바로 지금 같은 가장 어려울 때이지 않는가? 경기 좋은 호경기일 때에 감사하지 못 하고 잘 믿지 못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대부분의 신자들이 믿음의 내용을 알고는 있는데 그 믿음이 실제로 출발할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다. 믿음이 힘을 발휘하는 출발점은 바로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우리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언제 어디서나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이 아무리 엉뚱해 보여도 완전한 정답임을 제대로 깨달아 아는 실력이다.
이런 인식이 없으니 환난을 그저 의지적인 믿음으로 즉, 기도나 찬양 같은 종교적 행위 내지 실력으로 이겨내려고만 발버둥 친다. 그러나 정말 솔직한 실상은 거의 모두가 현실에 아주 작은 문제만 하나 생겨도 그저 요동치는 믿음을 벗어날 수 없다. 믿음으로 현실의 파고를 넘어서지도 못하고 주저앉고 만다. 실질적인 믿음의 출발조차 못했으니 그렇다.
제자들 질문의 진의는?
제자들의 예수님께 던진 질문의 내용은 너무나 어리석은 인간적 수준에 불과했다. 마치 고등학생이 어쩌다 자기 딴엔 어려운 문제를 하나 찾아서 천재 수학선생에게 풀어보라고 내민 꼴이다. 만약 예수님이 그들의 수준에 맞추어 인간적 대답을 했다면 둘 중에 한 사람은 반드시 죄인이 되어야만 했다.
그런데 당시의 죄인이라는 표현은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그 의미가 달랐다. 강도 폭행 같이 법을 어겨서 감옥에 가있거나 혹은 윤리 도덕을 어긴 죄인이 아니었다. 유대 율법과는 아무 상관없이 살아서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자를 의미했다. 영원히 구원받을 가망 없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자다. 부정한 상태의 불구자도 그런 부류에 속했다.
그래서 율법대로 사는 경건한 자는 교제는커녕 상종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죄인들과 식사 교제하는 것을 두고 바리새인들이 계속 시비 거는 내용이 나온다. 그 뜻은 바로 제자들을 거느리며 랍비 행세를 하는 자가 왜 지옥 갈 자와 함께 노느냐는 것이다. 유유상종이라고 그런 자와 어울리면 함께 지옥 갈 것인데 어떻게 천국에 관해 가르치느냐는 것이다.
물론 제자들의 이 질문에는 바리새인처럼 예수님에게 올가미를 씌울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나면서 봉사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질문이었다. 다른 말로 “저 봉사는 지옥가야 마땅한 자이지요?”라고 물은 꼴이다.
단순히 예수님이 봉사를 낫게 하는 능력을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일의 전부도 본질도 아니었다. 나면서 봉사가 된 것이 본인 탓도, 부모 탓도, 그렇다고 하나님 탓도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알라는 것이다. 대신에 아무리 나면서 봉사인 불구자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상의 포악한 강도 죄인이라도 하나님께 진정으로 겸비하게 무릎 꿇으면 그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나면서 봉사 같은 불구자가 태어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현대 의학이 치료법은 개발하지 못했어도 그 원인은 이제 알아내었다. 대대로 내려오는 유전자 DNA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인류가 수천 년간 죄악으로 타락하여 온갖 쾌락에 탐닉한 결과다. 하나님께 받은 영혼과 정신을, 특별히 육체를 아름답고도 거룩하게 가꾸기는커녕 정반대로 술, 담배, 마약, 섹스, 질병, 폭행, 전쟁 등으로 아주 추하게 더럽혔다. 결국 그 유전자들이 비뚤어져 변종이 생기다가 원래 형상이 파괴되면서 장님 같은 불구자가 태어나게 된 것이다. 봉사가 된 것이 본인과 부모 나아가 하나님 탓도 아니라는 대답은 말하자면 “너희 모두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죄와 사단과 사망의 노예가 되어서 추하고 더러워졌기 때문”이라는 뜻이었다.
지난주 한국 TV 뉴스에, 아마 보신 분도 많겠지만, 정부에서 보조금을 받는 장애인 보호시설의 비리를 고발하는 내용이 나왔다. 관리가 귀찮고 힘들다고 전부 쇠사슬에 묶어 놓고는 밤에는 수십 명되는 원생들을 동네 아줌마 한 사람이 돌보게 했다. 또 사십 여명 밖에 안 되는 원생 숫자를 육십 여명으로 불려 보조금을 더 타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 원장이 누구인지 아는가? 바로 목사였다. 그러고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관리가 안 된다. 또 그렇게 관리하는 것이 그들에게도 가장 유익하다. 나는 정부 보조비를 받아서 교회에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린다.”고 도리어 큰 소리쳤다.
여러분이 그 뉴스를 접했을 때에 어떤 생각이 먼저 들었는가? 틀림없이 “저런 천 벌을 받을 목사가 어디 있나?”였을 것이다. 그리고는 “도대체 저 장애아들은 팔자가 왜 저 모양인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으면 저런 비참한 모습으로 태어나야 하는가?”는 생각도 스쳐지나갔을 것이다. 신자가 환생설을 믿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까지는 생각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이 저런 아이를 태어나게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아예 태어나지 않게 해주실 수는 없는가? 또 왜 저런 말도 안 되는 나쁜 짓을 그대로 두고 보시는가? 저 못된 목사를 왜 당장 벌을 주지 않는가?”라는 의아심은 분명 들었을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우리도 바로 제자들이 예수님께 건넸던 것과 똑 같은 질문을 스스로 하고 있는 셈이다. 나아가 그 목사를 판단하고 정죄하기 이전에 장애인 시설을 한 번이라도 찾아간 적이 없지 않는가? 과연 그 목사만 비방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가? 비록 장애아들을 불쌍하다고 안타까이 여기기는 했어도 스스로 나서서 도와주지는 않았지 않는가? 아니 단순히 그들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울까 그 아픔과 슬픔을 헤아려 보기라도 했는가? 평소 진정한 관심이라도 가져 보았는가 말이다.
소경을 도와주라고 해서 예수님처럼 눈을 뜨게 해줄 수는 없다. 개안 수술 하라고 집을 팔아서라도 수천만 원 기부하라는 뜻도 물론 아니다. 최소한 봉사를 만나면 손이라도 잡아 주었는가 말이다. 또 장애인은 사실 자주 만날 수 없지만, 주위에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에게 현실적으로 도와주지는 못해도 따뜻한 위로라도 해주었는가?
제자들은 봉사를 만나면 어떻게 도와주는 것이 좋을지, 최소한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려는 데는 전혀 관심을 쏟지 않았다. 누구 죄로 지옥 가게 되는지 그 원인만 알려 했다. 구원과 심판의 궁극적 권한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데 따지고 보면 왜 저런 장애자를 세상에 보내었는지 즉, 왜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느냐고 하나님께 책임 추궁을 한 셈이다. 나아가 저들은 지옥가지만 사지가 멀쩡하고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자기들은 천국 가기에 마땅한 자들임을 예수님이 직접 말로서 보증해 달라는 뜻이기도 했다.
정작 회개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나게 하겠다고 대답한 뜻은 이것이다. “너희는 장애인이 아니라고 자부하기에 장애인을 보고 그 죄를 따지지만 너희 또한 저들보다 하나 나을 것 없는 장애인임을 아느냐? 저들은 아는 것이 적고 사지가 불편하기 때문에라도 너희보다는 죄를 훨씬 적게 짓지 않느냐? 너희는 정신과 사지가 멀쩡하고도 기껏 하는 짓이 무엇이냐? 살인, 간음, 강도, 폭행, 간음, 마약, 도박 같은 짓거리이지 않느냐?”
“심지어 신자이면서도 미국까지 데리고 와 엉뚱한 고생을 시키는 마누라를 왜 자기가 밖에서 스트레스 받았다고 술만 먹으면 두들겨 패느냐? 하나님께서 당신을 찬미하라고 준 입술로 주위 성도들, 배우자, 자식들의 가슴에마저 못을 박는 말을 너무 쉽게 하지 않느냐? 오히려 더 핸디캡인 주제에 훨씬 덜 핸디캡더러 누구 죄로 지옥 가는지 묻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느냐? 장애자를 보면 조금 안쓰럽고 불쌍하게 여기기는 해도 진정으로 그들에게 다가간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느냐? 기껏 해야 동전 몇 푼, 그것도 실컷 쓰고 남은 것을 던져 주고는 인간으로서 도리와 신자로서 의무를 다한 양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지 않느냐?”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신자가 정작 가슴을 치며 회개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장애자를 진정으로 돕지 못하는 회개는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해야 한다. 또 불신자 가운데도 남을 위해 희생적 사랑을 베푸는 자도 많이 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의 목적이 단순히 구제와 선행에 열심을 내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약 하나님이 정말로 본인이나 부모의 죄 때문에 나면서부터 봉사로 태어나게 했다면 하나님께 잘못이 있는가? 없는가? 당연히 없다. 오히려 아주 공평하게 처리한 셈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만약에 그렇게 했다면 벌써 저를 필두로 여러분 모두가 절대로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다. 모두가 심판을 받아 죽어 없어져야 했다.
또 그 반대로 하나님이 정말 아무 죄도 없는데 장애아를 태어나게 했다 해도 그분에게 하자가 있는가? 없는가? 절대로 없다. 그분의 영광이 한 치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왜 그런가? 우선 몽땅 죽어야만 할 우리를 그 잘못대로 처리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살려 놓으신 것만 봐도 그분의 생각과 길은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완전하신 분이다. 절대로 하자가 없는 분이시다. 절대적 진리이자 절대적 선이자 절대적 아름다움 그 자체다.
하나님은 장애자를 비록 사지가 불편하고 지성적 능력이 뒤떨어지게 만들었어도 그 영혼은 순수하게 지으셨다. 장애자들이 우리보다 예수님께 훨씬 더 가까이 있다. 실제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도 그런 자들은 절대로 물리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항상 당신의 가까이에 두셨지 않는가? 나면서 봉사라면 최소한 진짜 죄인들, 바로 우리의 추하고 더러운 꼴을 볼 수 없기 때문이라도 그 정신이 깨끗이 보존될 것 아닌가?
하나님이 장애자를 세상에 둔 이유는 많지만, 그중에 가장 중요한 뜻은 그들을 볼 때에 오히려 사지와 정신이 멀쩡한 우리가 더 장애자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알게 하려고 그야말로 죄도 없는 장애자들은 이 땅에선 온갖 불편함, 고통, 무관심, 멸시, 소외 때로는 핍박까지 당하게 만드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뜻을 자기들의 비뚤어진 몸으로 일생에 걸쳐서 드러내고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즉, 예수님께 일대일 제자 훈련을 받은 자들마저 자신들을 돌아보기는커녕 장애자의 죄만 따지고 있다. 예를 든 그 천벌 받을 목사를 당장에 심판하지 않는다고 의아해 하는 우리와 똑 같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 목사를 당장 벌주기로 했다면 어쩌면 우리 중에 그보다 훨씬 더 빨리 죽을 자가, 저를 비롯해 얼마나 많이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하나님은 절대로 병을 주거나 만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에게 약을 주셨다.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 즉 부모마저 버리고 사단에게 넘어간 인간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다. 여자의 후손이 사단의 머리를 밟을 것이라고 그때부터 약속하셨다. 마누라를 두 번이나 팔아먹은 사기꾼을 우리 믿음의 조상으로 삼았고, 살인자를 당신의 백성의 구원자로 세웠고, 충직한 부하의 아내와 간음하고는 그 부하를 죽여 버린 자를 가장 위대한 왕이 되게 하셨다. 또 기를 쓰고 당신을 반대하며 당신을 따르는 자마저 눈에 불을 켜고 죽이려 다녔든 자로 오히려 당신을 가장 열렬하게 옹호하며 전하는 자로 바꾸어주었지 않는가? 아무리 따져 봐도 병은 인간이 만들었고 약을 주신 분이 하나님일 뿐이다.
신자가 정작 회개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 어디서 어떤 사건에서나 무조건 옳다는 것을 모르거나 잊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 그분의 생각과 길이 나와 다르다는 것조차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현재 나에게 잘 이해되지 않는 참으로 이상하고 위급한 일이 생겼어도 하나님은 완벽한 분이시며 그 가운데 당신의 영광이 반드시 드러나리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아예 그런 사실조차 모르는 것이다.
해법을 터득한 유일한 자
본문의 사건에서 예수님의 대답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먹은 자는 딱 한 사람뿐이었다. 정답 뿐만 아니라 그 해법까지 터득한 자다. 바로 눈이 떤 봉사다. 왜 그런가? 그는 예수님을 직접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분께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나면서 봉사는 지옥으로 떨어질 자였다. 그래서 그 사회에서 인간 취급도 못 받는 부정한 자로 소외 격리 되었다. 성전 예배는 평생을 두고 참여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 자를 하나님 당신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그 눈에 손을 대고서 고쳐 주었다. 가장 치명적인 약점과 아픔이었던 곳을 낫게 해주셨다.
그의 아픔의 실체는 무엇이었겠는가? 단순히 앞을 못 보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보지 못하는 것이 고통스럽기는 했겠지만 나면서 봉사이므로 보지 못한다는 의미를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그보다는 사람이면서도 사람들 사이에 사람 취급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평생을 두고 성전 문 안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기에, 아니 처음부터 지옥으로 떨어질 자였기에 과연 이렇게 인생을 마쳐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정말로 자신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인지, 자기 같은 자는 절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지, 이 인생을 이렇게만 끝내면 너무나 헛되고 헛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에 피멍을 들게 했던 것이다. 그런 갈등이 당장에 먹고 사는 데 지장을 주거나 항상 괴롭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 영혼에 도무지 지울 수 없는 상처요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계속 남아 있었다.
그런 자에게 예수님은 먼저 찾아오셔서 눈을 뜨게 해주었다. 평생을 두고 자기를 묶고 있던 모든 상처, 갈등, 눌림, 죄책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흑암에서 빛으로, 심판에서 구원으로 옮겨졌다. 그의 인생이 뒤집어졌고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다.
어떤 식의 새사람이 되었는가? 죄 덜 짓고 착해지는 정도가 아니었다. 바리새인들이 거짓인 줄 알았다. 율법을 따르며 선행을 많이 하여 세상의 칭송을 받지만 성전에서 하늘을 향해 머리를 세우고 “저는 선행과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열심이며 십일조도 성실히 합니다. 저 세리와 죄인들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저를 특별 취급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따지는 것이 오히려 사단에 놀아나는 것임을 깨달았다. 오늘날로 치면 신자들이 저는 교회 봉사 열심히 하고 헌금도 많이 내는데 왜 아직 이 모양 이 꼴이냐고 의아해 하는 것이다.
대신에 그는 오히려 성전 구석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는 세리의 자리를 택했다. “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저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없이는 단 한 시도 살 수 없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세상 속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가 되었다. 완전히 그의 생각 즉, 인생관 가치관 등이 삼백육십 도 뒤바뀌었다.
당시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자는 유대교에서 출교 즉, 그 사회에서 추방했다. 장님은 눈을 뜨게 되자 바로 성전으로 들어갔다. 생전 처음으로 유대 사회의 일원이 되겠다고, 온당한 사람 취급을 받아 보려고 갔다. 그런데 그들은 창조주 내지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하신 바로 그 예수를 부인하라고 요구했다. 아무리 유대 사회에 속하고 싶어도 자기가 겪고 본 사실을 속일 수는 없었다.
다른 말로 육신의 봉사가 되더라도 다시는 영적인 봉사는 되기 싫었다. 하나님의 구원을 얻은 자가 다시 지옥으로 떨어질 자가 되기 싫었던 것이다. 거짓의 아비 사단의 자식이 되어 있는 바리새인들이 주관하는 곳으로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비방, 멸시, 핍박을 받더라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세상에선 다시 비참한 삶으로 떨어져 실패해도 하나님 안에서만은 성공하고 싶었던 것이다.
유대인이었든 그로선 하나님을 몰랐던 자에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아니다. 예수를 몰랐던 자에서 예수를 만나 완전히 인생이 뒤집어졌던 것이다. 생전 처음으로 자기보다 자기를 더 잘 알고 자기 부모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자기 인생의 가장 어둡고 괴로운 부분을 완전히 고침을 받았다. 하나님 안에서 의인으로 깨끗케 된 것이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아직도 단지 스승일 뿐이었지만 이 장님에게는 구세주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너무나 엉뚱한 성경 말씀
성경에는 너무나 엉뚱한 말씀들이 많다. 대표적인 예로, 환난 중에 즐거워하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간구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등을 들 수 있다. 과연 이런 권면이 말이 되는가? 어떻게 환난 중에 즐거워 할 수 있는가? 항상 기뻐하는 것은 바보나 정신병자뿐이지 않는가? 당장 다음 달 아파트 월세 낼 돈도 없고, 집은 언제 은행경매로 넘어갈지 모르며, 사업마저 곧 부도를 내어야 할 형편인데 엉뚱해도 너무 엉뚱한 말이다.
여러분에게 다시 질문을 드려보자. 정말 솔직히 속으로 대답해 보시기 바란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얼마만큼 사랑하는가?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는 만큼 그분을 사랑하는가? 비율로 따지면 일대일이 되는가? 십분의 일인가? 백분의 일, 천분의 일, 만분의 일인가? 사업이 부도가 나도, 집이 은행 경매로 넘어가도, 아파트 다음 달 월세가 없어도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사랑할 수 있는가? 만약 당신의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저부터도 제가 대신 죽을 테니까 아들만은 살려달라고 매달릴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당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주셨지 않는가? 비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온갖 멸시와 비방을 당했지 않는가? 역사상 최고로 억울하며 수치스럽고 고통스럽게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지 않는가? 나면서 봉사인 자도 누구의 죄 탓이 아니며, 아니 당신이 그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단 한 시도 없었음을 만 천하에 보이기 위해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껏 기도 응답을 받아야, 그것도 받은 만큼만 그분을 사랑한다. 주위에 장애자들이 어떤 아픔과 슬픔을 지니고 사는지는 관심도 없다. 이웃이나 성도들에게조차, 아니 자기 배우자나 자녀가 이 미국 땅에서 어떤 아픔과 눌림을 가슴에 지니고 있는지 전혀 알아보려고 하지 않은 채 말이다. 심지어 자신부터 얼마나 심한 장애자인지 알지 못하거나 잊고 있으면서 오직 바라는 것이라고는 애굽의 고기 가마 곁일 뿐이다.
짐 케리가 나오는 “All Mighty”라는 코미디 영화가 있다. 주인공이 하나님의 권한을 대신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이 기도하는 내용을 다 들을 수 있고 그 기도에 일일이 응답을 해주어야 했다. 너무 쉴 새 없이 기도가 들리자 아예 컴퓨터를 통해 이메일로 다 받아서 단번에 “Yes.”라고 클릭해 해결해 주기로 했다. 어느 날은 로토에 수십만 명이 당첨되어 상금이 기껏 십 불도 안 되어 항의하고 난리가 일어났다.
그 수십만 명이 다 기도하는 자였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지금 같은 세계적 금융위기를 로토로 이겨낼 수는 없다. 우리가 기도하고 소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다 들어주면 오직 세 가지 결과만 낳는다. 모두 라스베가스에서 몸과 마음이 썩어가는 줄도 모르고 흥청망청 거리며 놀고 있든지, 모두 감옥에 가 있던지, 아예 모두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든지 셋뿐이다.
물론 신자도 힘들고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환난 중에 쉽게 즐거워하지 못하며 작은 염려가 생겨도 그저 불안해지지지 쉽게 감사함으로 간구하지 못한다. 새벽 기도에 나와 불안, 초조에 휩싸여 눈물이 앞을 가리며 하나님에 대한 의심, 불만, 불신앙까지 들고 나올 수 있다.
실제로 다윗의 시편들을 보라. 앞부분은 우리와 똑 같은 심정을 토로한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시편이 중간을 넘어서 끝으로 향해 가면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나아가고 승리의 환희로 마친다. 그가 기도 중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도가 응답되어서 문제가 해결되기도 전에 말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다. 단순히 선행과 구제를 열심히 하고 종교적 임무를 성실히 다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려면 자신과 하나님의 마음이 일치되어야 한다. 그럼 하나님이 다윗의 마음에 맞출 수는 없고 그가 맞춰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는 기도 중에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떨지 가만히 헤아려 본 것이다. 특별히 지난 세월 동안에 자기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말이다. 골리앗과 싸움에서 이기게 해준 것, 사울에게 피신당하며 겪은 은혜, 블레셋 등 온갖 외적과의 싸움과 압살롬의 배반 사건에서 자신을 떠나지 않고 동행하신 모든 일들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비록 지금은 자신이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고 있을지라도 그분의 막대기가 자신의 안위를 지켜주며 반드시 언젠가는 당신만의 방식으로 자기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아직은 대적의 목전에서 위험이 끝나지 않았지만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앎으로써 평강을 넘어 감사하고 기뻐하기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자는 환난 중에 의지적으로 감사하고 즐거워할 수도 있다. 염려 불안이 겹쳐도 마음을 바꿔 먹으며 믿음의 힘으로 기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적인 평강의 효과가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일시적일 뿐이다. 인생에서 염려 불안은 그치지 않는 법인데 평생을 의지력으로 계속 즐거워할 수 있는가? 정말로 그럴 자신이 있는가?
너무나 힘든 데도 감사와 기쁨으로 기도했더니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구원해주시는 것은, 때로는 순전히 그런 이유만으로 그럴 때도 있지만, 아니다. 예수를 인격적으로 일대일로 만나서 인생이 뒤집어진 자는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살고 있기 때문에, 최소한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노력하기에 환난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기도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을 어떻게 하나님이 대하셨는지 확인할 수 있기에 소망을 키우며 환난 가운데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외에 자신의 진정한 관심과 수고를 쏟을 곳이라고는 단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작금 기독교가 왜 개독교라고 욕을 들어먹고 있는가? 그 원인이 도대체 무엇인가? 교회 마다 예배를 뜨겁게 드리고 찬양은 우렁차며 기도도 간절히 하며 각종 성경 공부 프로그램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데도 왜 그런가? 솔직히 신자들이 무엇을 믿는지, 왜 믿는지, 신앙의 의미와 내용과 가치와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아니 제대로 안 가르친다.
심지어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는지조차 모른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말이 갖는 엄청난 권세와 풍성한 은혜를 전혀 알지 못한다. 신자가 되었다는 특권과 신분과 위치를 확신하지 못한다. 다른 말로 하늘과 땅위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땅 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동행해 주심에도 도무지 세상과 죄악과 사단 앞에 자신감과 담대함이 없는 것이다.
신자가 갖는 힘은 오직 하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 세상의 어느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신자를 끊을 것이 없다는 그 사실이다. 그 안에는 당연히 지금 같은 극심한 불경기도 포함된다. 하나님은 절대로 내 편이라는 것이다. 시쳇말로 때려 죽어도 신자의 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뜻이 바로 그것이지 않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길과 생각과 다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무리 헬라인에게는 미련하고 유대인에게는 거치는 것처럼 엉뚱해 보였어도 하나님의 가장 완전한 구원의 길이었지 않는가?
인생은 생각보다 너무 짧다. 그것도 한번 지나버리면 물릴 수도 없고 수정이 되지 않는다.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위로하며 보내려 해도 너무 짧으며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내 주위부터 진정으로 사랑하며 이 땅에 천국을 실현할 수 있다. 그 길은 오직 하나, 날마다 십자가를 지며 자신을 죽이고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을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에 채우는 것이다. 또 그래야만 이 극심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엉뚱하지만 절대로 완전하신 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12/17/2008
LA 아름다운 교회 수요예배에서 설교한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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