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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2:16-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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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혜자 자매 |
참고 : |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선악과
(창세기 2:16-17, 3:1-14)
2012년 12월 11일 주일예배 말씀증거
조혜자 자매
이 자리가 어렵고 떨리는 것은, 과연 제가 이 자리에 서서 말씀을 증거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하는 물음을 묻게 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피해 왔지만,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부족함을 깨닫고 회개하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선악과 이야기였습니다. 선악과는 인간이 들은 최초의 금지 명령입니다. 그러나 저는 선악을 아는 것을 왜 금지하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모상으로 하여 인간을 만드시고, 자유의지까지 허락하셨으면서도, 선악을 아는 것을 원치 않으신 이유가 뭘까요? 왜 이런 내용이 성경의 제일 처음을 장식하고 있어서, 우리를 혼동스럽게 하는 걸까요? 묵은 질문이지만, 한 해를 정리하면서, 한번 저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아보고자 했습니다.
선악과의 의미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이 그것들을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보았다고 합니다. 아담은 집짐승과 공중의 새와 들의 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으며, 여자라는 이름도 아담이 지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창세기 3:7 에서는 선악과를 먹고서, 아담과 하와는 눈이 밝아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2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보아라. 이 사람이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선악과가 상징하는 것은 인간이 추상적인 선과 악, 또는 옳고 그름이라는 언어, 개념, 범주를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언어나 개념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틀을 만들어 줍니다. 우리가 대학을 다닐 때만해도 ‘성희롱’이라는 단어는 없었습니다. 그땐 남자 교수가 여학생들 어깨를 감싸 안아도 그건 선생님의 제자사랑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성희롱’이라는 단어가 생긴 이후로는 그런 행동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선악’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옳은 것과 그른 것의 차이를 나누게 하고, 옳고 선한 행동은 장려하되, 옳지 않은 행동, 악한 것은 자제하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그른 것인가요? 선한 것은 무엇이고, 악한 것은 또 무엇인가요? 절대적인 선과 악이 무엇인지를 제 수준에서는 규정하기 어렵습니다. 분명히 선과 악은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고, 우리는 선을 추구하고 악에 빠지지 않아야하는 것이지만, 선악의 구분은 그렇게 선명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그래서 선과 악에 대해서도 우리는 자유롭게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아담이 혼자였을 때에는 도덕성, 선악개념은 필요가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살면서, 도덕성과 선악개념이 필요하게 되었다고 보입니다. 함께 살기 위해서는 질서가 필요하고, 협동이 필요한 것이지요. 사회가 바로 인간에게 도덕성을 부여해 주는 원천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인간사회가 잘 유지되기 위해서는 공동으로 추구해야 하는 선이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선이 무엇이냐는 그 공동체가 무엇을 가치 있는 것으로 믿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것, 이웃사랑이 선이지요. 불교에서는 아마도 마음을 비우는 것일까요? 희랍에서는 인간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수월성이 최고의 선이기도 했습니다. 공리주의자들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선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선한 의지가 중요하다고 보는 철학자도 있습니다. 모두 참 좋고, 아름다운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선에 속하는 것은 믿음과 사랑과 비움, 수월성, 행복 같은 것인가요?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실천하고, 공동체가 함께 추구해 나가야겠지요? 그러나 이를 강요하다 보면, 하나님 믿음에는 독선이 끼어들 수 있고, 사랑에는 질투, 속박이 끼어듭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 비움에는 무관심이 들어올 수 있지요. 공리주의자들이 말하는 다수의 행복에는 소수자의 불행이 숨어들어 있습니다. 자연을 정복하여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게 되어, 그것이 선인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환경의 파괴는 지구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수월성에는 교만과 무시, 차별이 끼어들기 쉽습니다. 선한 의지로 한 말이 남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평범한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사회가 편의에 의해 만든 질서나 규칙을 선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안 지키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손자는 밥 먹다가 바닥에 떨어트린 음식을 주워 먹곤 했습니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고, 어쩌면, 생태학적 측면에서는 덕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유아원에서는 절대로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먹지 못하도록 금지합니다. 아이들을 돌보는 입장에서는 아이들을 질병에서 예방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그 규칙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아이에게 집에서도 바닥에 떨어진 것을 못 먹게 교육을 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더러워, 먹지 마”. 그러면 3살짜리 아이는 왜 그런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이, “나는 더러운게 좋아요”라고 반항하고, 그러다 야단을 맞곤 했습니다. 떨어진 걸 안먹는 것이 훈련될 즈음에 아이는 방학이 되어 한국에 왔습니다. 아이는 동네에서 할머니가 땅바닥 좌판에 먹을 것들을 놓고 파는 걸 보고 잘난체 하면서, “저건 더러워요”라고 말합니다. 우리 얼굴이 뜨거워집니다.
미국의 학교에서는 신발을 벗지 못하게 하지만, 한국에 와서는 신발을 신고 실내에 들어가는 것은 잘못된 행동입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아이에게 매일, 문화에 따라 각기 다른 선악과를 먹이고 있습니다.
자기애와 수치심
창세기에서는 선악과를 먹고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선악과 금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이 부분을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지혜가 생기고 도덕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해석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들에게 지혜가 생겼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선악과를 먹었는지, 그리고 선악을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 무엇을 선악이라고 알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3:5-6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선악과를 먹은 이유는 선악과가 ‘하나님처럼 슬기롭게 해 줄 것 같아서’ 였던것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들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아이들에게는 엄마나 아빠는 전지전능한 하나님 같은 존재입니다. 아이들은 생각이 어려 자기밖에 모르지만, 엄마 아빠처럼 되고 싶습니다. 엄마의 립스틱도 발라보고, 아빠의 넥타이도 차보면서, 그리고 엄마처럼 인형에게 야단을 쳐 보면서 아빠, 엄마가 된 듯이 동일시합니다. 아마도 아담과 하와도 자기들을 만들어준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하나님이 그들의 ‘자아이상(ego ideal)’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기애에 빠져,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밝아진 눈으로 보게 된 것은 무엇인가요? 그들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되는줄 알았는데, 자신들이 벗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눈이란 나를 들여다보는 기관이 아니라, 나 밖의 것들을 보는 기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눈이 밝아졌다'고 하는 것은 여태는 보지 못했던 것, 즉 다른 이의 눈에 비친 나를 보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여태 벗었어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지만, 이제는 자기의 벗은 몸을 보는 타인의 눈을 보게 된 것입니다. 벗은 몸은 자신의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내 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처럼 되어 자기를 과시하고 싶었었는데, 하나님을 닮지 않은 욕망덩어리인 자신의 몸을, 타인의 눈을 통해 발견하고, 자신을 가리려 합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 사실 역시, 하나님 말씀을 거역한 죄를 알고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 숨었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알게 된 것은 죄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라, 수치심이었지요.수치심은 죄책감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죄책감은 다른 사람이 없어도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생기는 것이지만, 수치심은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죄책감은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잘못된 행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수치심은 자기가 보여주기를 원하는 이미지가 손상되었을 때 느끼는 감정으로, ‘결함이 있는 자신’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수치심은 자기 힘으로는 통제하기 힘든 결함이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존재 자체에 대한 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느냐?”고 추궁하시는데도,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인정하지 않고, 핑계를 댑니다. 아직도 자기애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죄를 가리기 위해 전전긍긍합니다. 그 나무의 열매를 먹게 한 이유는 자기들의 눈에 보이는 타인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행위를 하와에게 전가하고, 하와는 뱀에게 전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수치심을 가려주시기 위해 가죽옷을 입혀주시고, 그들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라고 하시면서 벌을 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악한 사람이니”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선악판단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의 후예인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우리도 남의 눈을 의식하면서,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외모를 꾸미고, 우리의 약점, 단점들을 가리지는 않았나요? 특히 우리가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선한 행동은 드러내고 싶지만, 잘못이나 부끄러운 점은 숨기고 싶은 게 우리의 마음 아닌가요? 그리고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그랬듯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핑계를 대지는 않나요?
그런데, 우리는 자신은 이렇게 보호하려고 하면서도 우리의 이웃들에게는 가혹한 선악 판단을 해온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잘못을 했을 때, 그 행동의 잘못을 탓하기 보다는 그 사람 자체에 결함이 있다고 판단하지는 않았는지요? 특히 우리보다 약한 자들에 대해서는 함부로 판단하고 무시하지는 않았나요? 수치심을 알게 된 우리는 자신의 수치심은 드러내지 않으려고 감추기에 급급하면서도, 우리아이들이 우리 기준에 못미칠 때 ‘동네 챙피하다’, ‘낯을 들기 어렵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구박하고 수치심을 주지는 않았나요?
게다가 우리는 우리의 맡은 역할 때문에, 또는 손해보지 않기 위해서 잘못된 선악판단에 동조한 적은 없습니까?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잘못된 일에 휘말려 있다는 걸 알게 된 적은 없습니까? 최악의 유대인 학살자인 아이히만도 자신은 히틀러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자신의 의무와 책임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신분석학자인 스캇 팩은 죄와 악을 구분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분석하면서, 그들의 핵심적인 결함은 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남에게 죄를 덮어 씌우는 책임전가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악은 영적인 특권층에 의해 저질러지기 쉽다고 분석합니다. 겉으로는 사회적 규범을 잘 지키고 흠잡을데 없는 삶을 살고, 선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을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오만함, 교만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자기 의에 빠져 자기 성찰을 눈꼽만큼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서만 악을 찾아내어, 악을 퇴치하려고 하는 사람이 오히려 악을 저지르기 쉽다고 경고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을 책망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늘 나라의 문을 닫기 때문이다. 너희는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너희는 개종자 한 사람을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라고 하시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게 보낸 예언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는구나” 라고 한탄하십니다(마태 23장).
우리의 선악 판단이 위험한 것은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려 했던 전쟁과 폭력들 배후에는 잘못된 선악판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기 처형,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유태인 학살, 이라크 전쟁 등은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면서 일어난 일이지요.
내 안의 선악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하루를 산 어린아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말도 못하는 어린아이가 자기는 배가 부른데도, 제 젖을 다른 아이가 먹을 때 새파랗게 질리는 것은, 우리 인간이 아기 때부터 순결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욕망이 악의 근원이라면, 우리는 선악 모두를 가지고 태어났겠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사회가 요구하는 것에 맞춰가면서, 그리고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면서, 우리의 개인적인 욕망들, 어두운 측면들을 숨기고, 선한척하고, 또 선한줄 알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의 어두운 측면들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그림자를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그림자를 갖고 있는데, 그것을 의식생활에서 덜 드러낼수록 그것은 더 어둡고 깊다고 합니다. 개인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에게는 지킬박사와 하이드 같은 양면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바울사도는 로마서 7:21에서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 라고 쓰고 있습니다. 마더 테레사 역시 자신의 고해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치 모든 게 죽은 것처럼, 내 안에 너무나 끔찍한 어둠이 있다”고 했고, “내 영혼에 왜 이렇게 많은 고통과 어둠이 있는지 얘기해 달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바울사도나 마더 테레사처럼 우리 자신을 깊이 성찰해 보면, 약점 투성이인 자신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악과를 먹어버린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적 수행은 자신의 약점이나 그림자를 발견하고 수용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우리의 약점과 그림자를 수용할 때, 쉽게 악에 빠질 수 있는 약한 우리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 가르치신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그리고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악에 빠지지 않고, 살 수 있는건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 윤리적일 수 있다면, 그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환경과 여건들이 좋았음을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나가며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가장 낮은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우리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을 나누고 심판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잡혀온 여자를 끌고 온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여자에게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질서는 작은 자 하나도 업신여겨지지 않고,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 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며, 길잃은 영혼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이 아침, 우리의 가장 어두운 모습까지도 품어 안으시고, 죄용서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님의 생일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저희로 하여금 우리의 잣대로 만든 선악의 기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기준으로 세상을 보게 하옵소서. 우리로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고, 심판보다는 용서를 배우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땅에서 평화를 이루며 살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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