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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눅1:26-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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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한인철 목사 |
| 참고 : |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오실 그 분이 당신인가요?
(누가복음 1:26-36)
2011년 12월 18일 주일예배 말씀증거
한인철 목사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교수, 교목)
I. 들어가는 말
어느 덧 12월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기독교에서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이 때부터 우리는 예수의 오심을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됩니다. 오늘 저는 대림절 첫 주를 맞아, 오실 그 분에 대해 함께 명상해 보고자 합니다.
II. 당신들의 천국
여러분이 오래 전에 즐겨 읽은 소설 중에 이청준이 쓴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기억하시는 것처럼, 이 소설은 나병환자들의 집단 거주지인 소록도를 배경으로, 병원장 조백헌 대령이 “나병환자들의 천국”을 만들어나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조백헌 대령이 소록도의 새 병원장으로 부임하기 전, 주정수라는 병원장이 있었습니다. 주정수 병원장은 처음에 소록도를 나병환자들의 천국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인 병원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정수 병원장은 시간이 지나 나병환자들의 신뢰가 쌓이자, 이들을 위한 일이라는 명분 하에 무리한 요구를 가하고, 소록도 한 가운데 자기의 동상을 세우고는, 나병환자들로 하여금 한달에 한번 자기에게 보은의 예를 갖추도록 종용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기 동상 앞에서 한 나병환자의 칼에 찔려 죽게 됩니다.
조백헌 대령이 부임했을 때, 나병환자들은 주정수 병원장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을 갖고 그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조백헌 대령의 마음 속에는 자기의 동상을 세우고자 하는 욕구가 없었고, 오로지 나병환자들의 살림터인 소록도를 나병환자들이 살만한 천국으로 만드는 일에만 전념했습니다.
조백헌 대령을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던 나병환자들이 마침내 마음을 열고 그를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신뢰의 분위기가 조성되자, 조백헌 대령은 소록도를 나병환자들의 실질적인 천국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획기적인 프로젝트를 이들 앞에 내놓습니다. 그것은 넓은 바다를 막아 330만평짜리 대단위 농토를 조성하는 계획이었습니다. 조백헌 대령은 이 농토를 나병환자들이 직접 조성하여, 자기들의 생존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함으로써, 소록도를 나병환자들의 진정한 낙원이 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가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을 때, 그는 전임발령을 받게 됩니다. 조백헌 대령은 이임 전에 공사의 마지막 매듭을 짓고 떠나고 싶어 했지만, 주변에서 이임날짜 이전에 떠날 것을 권유합니다. 조백헌 대령에게 있을지 모를, 동상에의 마지막 욕구조차 철저히 차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조백헌 대령은 마침내 이임 날짜보다 이틀 전 조용히 소록도를 떠납니다. 그리고 7년 뒤 평범한 소록도 주민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이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이 소록도에 만들었어야 할 참다운 천국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 소설을 보게 되면, 소록도의 나병환자들도 나름대로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야와 천국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인물이 주정수 원장이었습니다. 주정수 원장은 소록도를 나병환자들의 천국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 메시야적 인물이었지만, 나병환자들 위에 자기 동상을 세움으로써, 나병환자들 손에 버림을 받습니다.
조백헌 대령은 동상에 대한 욕구 없이, 소록도를 나병환자들의 실질적인 천국이 되도록 최선을 다한, 보다 완벽한 메시야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들은 그를 신뢰했고, 조백헌 대령은 나병환자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나병환자들의 천국은 무리 없이 만들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나병환자들과 조백헌 대령이 뜻을 합해 만들어나갔던 그 천국에는 중대한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조백헌 대령이나 나병환자들이나 다같이, 나병환자들의 천국을 나병환자들만의 천국으로 울타리를 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조백헌 대령은 나병환자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병환자들은 건강한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병환자들만의 천국에 합의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양자의 마음 속에 도사렸던 두려움의 실체였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병환자들의 천국은 조백헌 대령에게나 나병환자들에게나 자기 안의 장벽을 뛰어넘지 못한 ‘당신들의 천국’이었습니다. 조백헌 대령은 나병환자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지만, 사실은 나병환자들과 하나가 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나병환자들은 조백헌 대령을 신뢰했지만, 그와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했던 것입니다. 나병환자들의 천국은 이러한 양자 사이의 적절한 타협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것은, 조백헌 대령이 아무런 직함도 없이 한 사람의 평범한 소록도 주민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해야 했던 일은, 거대한 프로젝트를 통해 나병환자들끼리 따로 모여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당신들의 천국’을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나병환자와 건강한 사람이 똑같은 인간으로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우리들의 천국’을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그가 소록도 나병환자들 사이에 들어와 평범한 소록도 주민이 된 것은 ‘우리들의 천국’을 만드는 그 첫 발걸음이었고, 음성 나병환자 남성(윤해원)과 건강한 여성(서미연)이 소록도 역사상 처음으로 결혼하여, 나환자촌과 건강인촌의 중간 지점에 이들의 살림집을 마련하는 일은 ‘우리들의 천국’을 만드는 그 첫 열매가 되었던 것입니다. 조백헌 대령은 비로소 소록도에 진정한 천국을 만들어 나갈 메시야적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III. 유대인의 메시야와 기독교인의 메시야
유대인들 사이에는 예수가 오기 오래 전, 아마도 유대인들에 대한 그리스 제국의 박해가 가장 극심했던 BC 180여 년 이래, 메시야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가 점점 커져갔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의 정체성이 유린되고 파괴되어가는 세상 속에서, 이를 바로 잡을 인간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면서, 메시야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는 그만큼 더 커졌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 여러 메시야들이 등장했습니다. 예수가 오기 전에도 등장했고, 예수 당시에도 등장했고, 예수가 떠난 이후에도 메시야는 시시때때로 출현했습니다. 어떤 유대인들은 특정 메시야를 메시야로 인정하여 따랐지만, 대개의 유대인들은 아직까지도 메시야가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은 유대교 지도층이 십자가에 처형했던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였습니다.
왜 유대인들은 예수가 메시야가 아니라고 하고, 왜 기독교인은 예수가 메시야라고 믿는 것일까?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유대인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제국주의 치하에서 자기 정체성을 잃을 만큼 극심한 고통을 받아왔고, 이러한 고통의 역사 속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 줄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만약 유대인의 이러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인물이 출현하여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가져다 주었다면, 그는 곧 유대인의 메시야가 될 수 있을 것이고, 그 세상은 유대인들의 천국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는 적어도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기독교는 유대인이 사용한 메시야라는 말을 지금도 원용하고는 있지만, 기독교인이 기대하는 메시야는 유대인이 기대하는 메시야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유대인의 문제를 해결해 줄 유대인의 메시야를 기다리지만, 기독교인은 인류의 문제를 해결해 줄 인류의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문제는 모든 인류가 기다리는 오실 그 분, 그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은 유대인의 문제를 해결할 유대교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완전한 일치 속에서 참 사람다움을 실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 앞에 앞서 가시면서 우리를 같은 길로 부르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 분을 바로 예수에게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 분은 우리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지만, 우리 위에 자기의 동상을 세우지는 않습니다. 그 분은 우리를 위해 천국을 만들려고 하시지만, 우리들만의 천국을 세우지는 않습니다. 그 분은 우리 중의 한 사람으로, 우리와 함께, 우리 모두의 천국을 만들어나갈 것입니다.
IV. 큰 바위 얼굴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는 어떤 메시야일까요? 혹 부유해지고 싶은 우리의 욕망을 부채질하여, 우리를 부유하게 해줄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은 아닌지요? 혹 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우리의 욕망을 부채질하여, 우리를 힘 있는 권력자가 되게 해 줄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은 아닌지요? 혹은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고, 높은 사람이 되고 싶고, 편안하게 살고 싶은 우리의 욕망을 부채질하여, 우리를 유명하게 하고, 높은 사람이 되게 하고, 편안하게 살게 해 줄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은 아닌지요? 그래서 우리의 욕망을 실현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메시야를 위한 동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만약 우리 마음 속에 조금이라도 그러한 메시야에 대한 향수가 있다면, 우리는 예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가 지금 우리 가까이 와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 속에, 혹은 우리의 삶 속에 예수가 자리 잡을 수 있는 공간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진심으로 메시야로 맞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세상에 대한 집착의 고리들을 모두 끊어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살 수 있도록, 나를 열어 두어야 할 것입니다.
나다니엘 호돈의 『큰 바위 얼굴』에 나오는 어니스트는 산 위의 큰 바위 얼굴을 보며, 큰 바위 얼굴을 가진 인물을 기다렸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모은 Gather Gold가 큰 바위 얼굴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니스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또 Old Blood and Thunder 장군이 큰 바위 얼굴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니스트의 눈에는 그 역시 큰 바위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마침내 어니스트는 한 시인의 시를 읽으며, 이 시인이 큰 바위 얼굴을 닮았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다가온 시인도 큰 바위 얼굴을 닮지는 않았습니다. 그 누구도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이 아니었습니다. 큰 바위 얼굴의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어니스트 자신이었습니다.
V. 오실 그 분이 당신이십니까?
2000년 전 사람들은 예수를 향해 물었습니다. 오실 그 분이 당신이십니까? 저는 오늘 대림절 아침, 여러분과 저를 향해 같은 물음을 던집니다. 오실 그 분이 당신이십니까? 아니 오실 그 분이 당신일 수는 없겠습니까? 이제는 여러분이 메시야가 되어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 주역이 될 수는 없겠습니까? 그럴 수 있다면, 예수는 우리와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고, 예수의 천국은 곧 우리들의 천국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대림절에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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