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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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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564408 |
말씀이 육신이 되다
요한복음 1:1-14, 성탄절, 2011년 12월25일
요한복음은 특이한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태초(아르케)라는 단어는 창 1:1절을 연상시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게 요한 사도의 신학적인 특징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우주론적인 차원으로 높였습니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예수의 가족사나 이스라엘의 민족사를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요 1:3절에서 요한은 만물이 말씀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도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창 1장의 진술과 맥을 같이 합니다. 더구나 이 로고스 안에 있는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는 4절의 진술은 첫 창조가 빛이라는 창 1:3절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말씀’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 1:1절의 ‘말씀’을 예수로 바꿔서 읽어보십시오. “태초에 예수가 계시니라. 이 예수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예수는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의 이런 진술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될 겁니다. 예수는 분명히 2천 년 전에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유대인 남자입니다. 그가 어떻게 태초에 존재하셨다는 건가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으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이미 성숙한 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당연히 태초부터 존재하셨다고 대답하는 건 틀린 대답은 아니지만 정확한 대답도 아닙니다. 그런 대답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해야 합니다. 오늘 저의 설교는 바로 그 과정에 대한 설명입니다.
로고스
본문에 ‘말씀’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를 번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영어성경은 그걸 word로, 독일어 성경은 Wort로 번역했습니다. 말, 낱말, 단어라는 뜻입니다. 로고스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2천 년 전 근동과 유럽의 정신세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헬라의 스토아철학에서 로고스는 만물을 조화롭게 하는 신적 능력이었습니다. 로고스에 의해서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스토아철학의 로고스 개념을 받아들였습니다. 구약 헬라어 번역본에도 로고스는 자주 나오는 단어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창 1장, 시편 33편 등에 나옵니다. 선지자들이 받은 하나님의 말씀도 역시 로고스였습니다. 요한복음 이외의 신약성서에도 로고스는 자주 등장합니다. 요한복음의 로고스는 교회 안팎의 여러 철학 및 사상과의 관계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공관복음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그대로 말하면 충분하지 왜 로고스를 끌어들였는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런 작업이 전도이고 선교이며, 바로 변증이자 신학입니다. 요한복음은 복음서 중에서 가장 늦게,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아무리 빨리 잡아도 1세기 말, 좀 늦게 잡으면 2세기 초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케리그마를 무조건 원초적으로만 전할 단계는 지났습니다. 주변 세계에 복음을 변증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진 개념을 통해서 기독교의 진리를 선포하려면 로고스 개념을 차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로고스는 신학(theo-logy, 神學)과 직결됩니다. 기독교 신학은 지난 2천년 동안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로고스로 해명했습니다.
요한 사도가 언급하는 로고스 개념에는 몇 가지 핵심 단어가 나옵니다. 태초, 창조, 생명, 빛이 그것입니다. 이걸 종합해서 정리하면 ‘생명의 빛’입니다. 요한이 설명하는 로고스 개념은 바로 생명의 빛입니다. 예수를 로고스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예수가 생명의 빛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예수가 생명의 빛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예수는 분명히 스토아철학이 만물을 가능하게 하고 조화롭게 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로고스임에 틀림없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이제 문제는 예수가 생명의 빛이라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일입니다.
우선 생명의 빛을 인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식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게 저절로 믿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고도의 영성에 들어갔든지, 아니면 속된 표현으로 날나리 신자든지 말입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알지 못하고 뭔가를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복음의 내용을 알지 못하면서도 무조건 믿기만 잘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사이비 이단들이 발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그것을 믿고 있다는 자기 자신에게 열광하는 겁니다. 본문을 잘 보십시오. 생명의 빛을 인식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요한복음 기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사람들이 예수를 로고스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요한은 11절에서 다시 반복합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지난 주일의 설교에서도 이 대목과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낳은 아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기 힘들었습니다. 마리아 스스로도 믿기 힘들었겠지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와 똑같았던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가 어떻게 전능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겁니까? 그들의 인격이 왜곡되거나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아예 없기 때문에 믿지 못한 게 아닙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를 둘러싼 사건들이 평범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능력은 비밀한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가 생명의 빛이라는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뒤에나 제자들에게 인식되었습니다. 그 이전에 이미 그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면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오합지졸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제자들의 대표 격이었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고 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뒤에 모두 자기 살 길을 찾아서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런저런 기억을 안고 흩어졌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뒤에 180도로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생명의 빛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은 빛 자체였습니다. 그에게서 창조 때의 그 빛을 경험한 것입니다. 창조의 그 빛이 로고스입니다. 만물을 가능하게 하고, 만물을 조화롭게 하는 궁극적인 힘입니다. 그 예수님은 창조자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 자체이며, 우주의 완성자이십니다.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분이십니다. 초월적인 존재가 역사 내재적인 존재가 되셨습니다. 하늘이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영원한 존재가 유한한 세계로 들어오셨습니다. 요한복음을 비롯한 모든 신약성서가 말하고 있는 복음의 실체가 그것입니다.
죽음을 넘어 생명으로
이런 설명이 막연하게 들리시나요? 너무 관념적인가요?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들리시나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아무리 치열하다고 하더라도 신앙적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생명의 빛’에 대해서 생각해야만 합니다. 위의 설명이 막연하게 들린다는 것은 평소에 생명의 빛에 대해서 막연하게 생각했다는 증거입니다. 아주 거칠게 말해서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사는 걸 생명의 빛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한이 북한보다 생명의 빛에 더 가까이 이르렀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의 소득이 늘면 생명의 질도 늘어나는 걸까요? 그게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아무도 그런 방식으로 생명의 빛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생명의 빛에 가까이 갈 수 있다면 굳이 예수를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는 여러분의 복지생활을 약속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연봉 1억 원으로 우리의 생명을 완성시킬 수만 있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만, 그건 아예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복지가 아무리 향상되어도 모두 죽습니다. 죽음 앞에서 경제적으로 풍부하게 살았는지의 여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생명의 빛이라는 논의에서 핵심은 죽음의 극복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생명의 빛으로 경험했다는 것은 예수를 통해서, 즉 앞에서 말씀드린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죽음을 극복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소,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영생도 사람들이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오해하면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영생은 그저 오래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존재방식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확장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고유한 생명방식이 바로 영생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여러분이 실망할지도 모릅니다. 실망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생명에 대한 고정관념을 하나씩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걸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구원 통치에만 의존하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 죽을 준비를 마치는 것입니다. 그때가 되어야 우리는 세상의 모든 미련을 내려놓고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죽음 너머에 있는 영생의 약속에 우리 자신의 운명과 미래를 맡길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에 이르는 유일한 토대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궁극적인 생명의 빛입니다. 어둠에서 환히 드러난 빛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 소식만이 그야말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역사에서 구체적으로 개입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 사실을 14절에서 요약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로고스인 예수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태어나서 인간과 더불어 인간과 똑같이 살았습니다. 그에게 아버지의 영광이 나타났고, 은혜와 진리가 가득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궁극적인 생명이 빛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요한복음 기자의 진술대로 예수님이 이 세상의 만물을 가능하게 하는 로고스이며, 생명의 빛이며, 하나님의 영광이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라고 믿습니다. 그분이 세상에 오신 날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하고 경험하는 날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생명의 빛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니 말입니다. 모세가 호렙 산에서 듣고 싶었으나 듣지 못했던 하나님의 이름을, 시내 산에서 보고 싶었으나 볼 수 없었던, 단지 하나님의 등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봅니다. 그 예수는 성육신의 하나님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생명을 얻기 위해서 더 이상 다른 데서 서성거리거나 기웃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 자기를 학대하거나 자기 열망에 빠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수고를 거두십시오. 이제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오신, 말구유에 태어나신,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여러분의 운명을 맡기십시오. 그리고 지금 그분에게 집중하십시오. 구원은, 생명은, 영생은, 영원한 안식은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를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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