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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 -두 개의 서로 다른 나를 교통 정리하는 시간

누가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1864 추천 수 0 2012.01.08 23:5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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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4:42-44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쉼 -두 개의 서로 다른 나를 교통 정리하는 시간

눅4:42-44

          *8월의 뙤약볕에 몸과 마음을 놀리고 있을 교우들에게
            보내는 2008년 8월 10일 주일 2부의 [그리스도의 편지]

내년이 우리교회 창립 50년이 되는 해라서, 우선적으로 교회의 역사를 사람들이 읽기 쉽게 정리해야겠다 싶어서 이것저것 자료를 모으고 있습니다. 해마다 모아 두는 주보 중에 96년도 주보 묶음이 없기에 이사람 저 사람 부탁을 했더니 박명자 권사님이 엉뚱한 자료 하나를 가져다 주셨습니다. 1995년 8월 26일에 강원일보 [마음의 창]이라는 란에 실었던 고정 칼럼인데, 십 수 년도 더 지난 오래된 글인 데도 ‘내가 이렇게 잘 썼나? 이런 생각을 하고 살았구나’하고 새삼 감동이 되는 거였어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름은 [感覺의 플러스 地帶]이다. 몸의 감각으로만 살기 때문이다. 여름은 몸이 재산이고 몸이 자랑이다. 도시의 한 복판에서부터 원시의 바다에 이르기까지 몸이 넘친다. 어디서나 몸만 있으면 즐겁다. 아니 몸으로만 즐거움을 느낀다. 향기니 그리움 같은 인간 내면의 감각은 사라지고 오로지 몸의 감각만 있다. 그래서 [감각의 플러스 지대]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몸이 떠나서 몸을 즐겁게 하는 것을 피서라 한다. 그렇다고 몸의 즐거움을 비난하자는 것은 아니다. 나는 사람이고, 나는 몸이고, 몸은 감각의 총체를 뜻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명은 몸의 감각을 통해서 탄생하지 않는가. 피로와 감동을 넘어가는 쾌감의 동산도 몸에 있다. 그러니 어찌 몸의 즐거움을 탓할 수 있으랴. 여름은 그저 몸에 봉사하는 계절이다.
그러나 몸의 즐거움을 만끽할 때는 찬찬히 느껴야 한다. 그래서 생리학을 지나가는 미학을 더듬고, 미학을 바탕 삼아 존재가 얼마나 거룩한가를 느껴야 한다. 즐거움을 높이기 위해 자극이 지나치면 되레 해롭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미식가가 입안에 설탕을 한 입 물지 않듯이, 발레리나가 발끝으로만 춤을 추는 것처럼 해야 한다. 몸으로 살되 몸 안에 또 다른 즐거움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되지 않는가! 가을은 몸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계절이다. 이것을 [감각의 마이너스 지대]라 부르자. 감각의 마이너스 지대에 사는 사람은 누군가? 새로 사온 신발의 고무냄새가 좋아 신발을 벗어들고 다니는 사람이다. 그러다가 맨발로 모래 위를 걸을 때 발가락 사이를 간질이는 감촉에 웃음 짓는 사람이다. 늦은 여름 밤 마당에 깔아 놓은 멍석에 누워 쑥 타는 냄새와 귀뜨라미 소리며 별똥별 흐르는 순간을 포착하는 사람이다. 어쩌면 다시 만나지 못할 내 맞은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다. 조무래기적, 알몸으로 개울가의 뜨거운 바위에 엎드려 잠들었던 시간이나, 여학생의 가방에서 흘러나오던 아릿한 향수 냄새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감각의 마이너스 지대]에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매인데 없이 자유로워서, 사람도 사랑하고 만물도 사랑하고, 하늘도 공경할 줄 아는 사람이다. 또한 그는 그것들과 더불어 사랑하고 즐거워한다. 이것이 하늘이 내리는 평안이며, 온전한 피서다. 여름이 끝나고 있다.  
                                -1995년 8월 26일에 강원일보 [마음의 창]-      
             
출애굽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규칙 10개를 하나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그 중에 세 번째로 말씀 하신 것이 [쉼]즉 [안식일]입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 진 듯싶은 이 [쉼]이 어째서 그렇게 중요한 걸까요? 쉴지 말지는 자기가 알아서 할 선택의 문제 같은데 이렇게 규칙이나 계명으로 까지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요?

‘휴식’ 또는 '안식(사바트)'이라는 말은 성서에서 매우 핵심적인 말입니다. ‘일하다가 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더러 엿새 일하고 하루 쉬고, 6년을 경작한 땅을 한해 쉬게 하고, 7년씩 일곱 번이 지난 다음 해, 그러니까 50년이 되는 해에는 모든 것을 원상태로 되돌리는 제도가 바로 안식일, 안식년, 희년이라는 제도입니다. 이렇게 성서는 '쉼'을 매우 강조합니다.

주목할 것은 피조물들에게 주어진 '쉼'이라는 제도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필요에 따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이미 인간과 세계를 위해 베푸신 하나님의 축복 중의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창조 이야기'에서 안식은 창조의 절정(絶頂)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심으로, 쉼으로써 모든 창조는 완성됩니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안식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잘 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요, 왜 쉬느냐가 인생에 있어 중요한 과제라는 말도 되는 것입니다.

출 20:10절에 보면 법적 권리를 가진 자유인만이 아니라 자녀나, 남종이나 여종, 나그네 등 법적인 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소, 말 등 사람에게 부림을 받는 육축 그리고 사람에게 필요한 재화를 생산 공급하는 토지에게까지 축복으로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피조물,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에 쉼 없이 동참하는 모든 피조물들은 안식을 누릴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의무이기도 합니다.

결코 사람뿐만 아닙니다. 산과 바다, 강과 땅,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안식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지극히 당연한 순리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람들의 발길에 더럽혀지고, 한없이 수탈만 당해서 이제는 창조의 질서마저도 유지할 능력을 잃어 가고 있는 우리의 산과 바다, 강과 땅의 안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더불어 쉬는 것이지 인간만이 쉬는 것은 아닙니다. 나만의 쉼을 위해 다른 것의 쉼이 훼방 받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쉼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당시 주님의 일상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 바로 막6:31절입니다.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쌔 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인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밥 먹을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삐 사심이 주님의 일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럴수록 주님은 '한적한 곳'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눅4장 말씀만이 아니라 5:16절에도 똑같은 말씀이 기록되고 있는 것을 보면 주님이 그 바쁜 삶 중에서도 한적한 곳을 찾아가는 일은 좋은 습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기도 하시면서, 어떤 때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등과 치열한 논쟁을 하면서도 늘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쉼은 아무 것도 아닌 '삶의 진공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왤까요? 왜 주님은 한적한 곳을 찾아 가셨을까요? 좋은 공기 마시기 위해서? 장관인 경치를 감상하시려고? 우리가 '쉼터가 있는 주님의 삶'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처해있던 주변과 상황을 좀 더 세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앞부분을 보면 주님은 갈릴리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에서 여러가지 치유의 기적들을 일으키십니다. 베드로의 장모를 위시해서 각색 병자들이 주님에 의해 병고침을 받습니다. 그것은 실로 가버나움이라는 도시 역사 이래 길이 기념될만한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주님의 심기는 긴장을 풀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을 흔들어놓은 것들이 귀에 들려왔고 눈에 보였기 때문입니다. 40절 말씀을 보면 치유의 과정에서 귀신들이 주님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고백처럼 들립니까? 그런데 정작 주님은 그러한 저들의 발언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바로 뒤의 말씀을 보면 그 이유가 나오는데 그것은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병고치는 자로서의 하나님의 아들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치유의 은사가 신앙의 전부인양 떠버리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주님의 이 말씀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십자가에 달려 온 인류의 죄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각인되기를 원했지 '육신의 병을 고쳐주는 의사로서의 그리스도'로 새겨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게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요 사명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귀신들이 쫓겨나가며 초를 치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한낱 육신의 병이나 고쳐주는 자로 의미축소를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에 주님이 그 마을로부터 나와서 한적한 곳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16절에 의하면 그 한적한 곳에서의 주님의 쉼의 형태는 '기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쉼은 명상과 기도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의 쉼은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는 말입니다. 즉 그 쉼은 아버지와의 영적 교통의 자리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수평적 전망'에서 '수직적 전망'으로 전이되는 자리였습니다. 그래야 다시 수평적 전망을 올바로 볼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그 쉼의 자리에서의 주님의 기도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욕망의 연장을 구하는 것이었을까? 아니었습니다. 사실 주님도 인간인데 왜 마음의 흔들림이 없었겠습니까? 그야말로 세상 적으로 볼 때 '주님 생애의 전성기'였습니다. 곳곳에 찬사와 감탄이 끊이질 않았고 환대가 넘쳐났습니다. 다음 날 이른 새벽인데도 벌써 무리들이 주님을 찾아 나설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저들에게 인기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에 '무리들이 주님을 임금 삼으려 했다'는 말도 있는 걸 보면 당시 주님의 인기가 어떠했는지 가히 짐작할 수가 있는 대목입니다. 본문 42절에도 보면 '무리가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했다'고 했습니다. 그런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마음도 약간씩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삶이 헝클어질 수 있는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편안함에 대한 유혹도 왔고, 피곤한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여기 그냥 눌러앉고픈 마음도 생겼습니다. 사명의 유기, 사역의 축소, 삶의 고형화 현상, 안락으로의 기울어짐이 없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런 현실로부터 자기를 객관화시킨 자리가 바로 이 '한적한 곳'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42절의 '나오사'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무게를 갖고 있습니다. 누가는 그냥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 가셨다'고 기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오사'라는 말을 궂이 첨언하고 있습니다. 그 유혹의 자리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주님의 쉼이 갖는 의미를 더욱 분명히 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쉼은 '두 개의 서로 다른 나를 교통 정리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인생의 방향을 정하고 자기 삶을 더욱 사명에 튼튼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참으로 지녀야할 마음을 다잡는 그런 결단의 자리, 다시금 새로운 영적인 힘을 충전하는 더함의 자리였습니다. 결코 아무 일 없었던 자리가 아니라 엄청난 일이 시도되던 자리였습니다. 이게 바로 주님의 생에 있어 쉼이 갖는 의미입니다. 만약 이 한적한 쉼이 없었다면 과연 주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을 온전히 완수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휴가에는 마음껏 떠들고 부담 없이 노는 것도 있어야 합니다. 일상의 갇힌 생활에서 열려진 생활로 나아가는 데 노래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오락도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정말 스트레스가 확 풀리도록 즐거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휴가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휴가의 진정한 목적은 내일을 위한 준비요, 그것을 위해 자신을 객관화시키고, 수직적 차원을 넓혀 영적으로 재충전하는 기회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재충전된 사람은 자기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되고 자기 일에 사명감을 가지게 됨으로써 교회나 사회나 사람들에게 비난의 빌미를 주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 무엇을 하며, 함께 어울릴 때 어떻게 노느냐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장소에서 어떤 자세로 휴식을 취하며 안식하느냐를 보면 그 사람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번민하고 피곤할 때 기껏 쾌락의 자리를 찾아 쉼을 얻겠다고 한다면 그게 무슨 안식이 되겠습니까? 주님은 보다 적극적으로 안식하는 법을 가르켜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한적한 곳', '현실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객관화시켜볼 수 있게 하는 자리'를 찾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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