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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48:12-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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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내 인생에 복을 주시는 분
창48:12-16
*이 설교 원고는 2008년 8월24일에 할 겁니다.
그러나 설교 내용은 추석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지난 해 형제들과 제사 드리는 문제로 크게 싸워서 상처를 입었던 황재원 교우를
염두에 두고 준비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의미는 [추석 맞이 특별 설교]쯤 됩니다.
지난해 언젠가 황재원 교우가 집안에서 제사 문제 때문에 형제들과 다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비단 기독교인의 제사 문제는 황재원 교우의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비단 제사를 드리지 않는 가정이라도 ‘기독교와 제사’에 대한 명확한 생각을 갖고 있는 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마침 추석이 가까워 옴으로 여러분에게 ‘기독교와 제사 문제’에 대해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지혜롭게 풀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제사에 대한 객관적 이해부터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서 조상 제사의 유래는 13세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려시대 성리학과 함께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이 제사행위는 처음에는 왕가에서만 지내던 특권층의 행사였습니다. 그러다가 차차 전통무속과 결합되어 일반 서민들에게도 옮겨온 것이 바로 조상신을 섬기는 제도로 정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 그들이 행한, 특정한 집단이 하게 되었던 조상 제사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거기엔 크게 네 가지 의미가 깃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근원에 대한 감사의 마음입니다. 뿌리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거기에 깃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유교에서는 만물은 하늘로부터 나왔지만 인간들은 조상들로부터 나왔다고 봅니다. 그러니 삶의 근원이신 부모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가족의 위상과 가치에 대한 자부심입니다. 제사를 통해 흩어졌던 가족 구성원들이 만나 결속력을 다지는 겁니다. 본래 제사는 하늘에 대한 예였습니다. 그런데 점차 자기 가문의 위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조상에게도 제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왕가에서만 행해지던 것이 평민들에게도 확산되면서 자신들의 조상의 업적을 기리며 가족의 위상을 세우려는 목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일이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일종의 가세를 과시하는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 이 제사의 정신 속에는 '삶의 방향을 찾기 위한 노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집안 어른들로부터 전수되어진 전통 속에서 빗나간 삶의 방향을 새롭게 찾는 겁니다. 제사를 지내는 자리나 무덤 앞에서 다시 한 번 가족 구성원들은 집안 어른들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결단하고 회개함으로 거기서 새롭게 삶의 방향을 잡아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자손들에 의해서 영원히 기억되고 싶은 인간본성의 기대감이 이 제사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제사를 통해 계속해서 자손들에게 기억되고 기억함으로 피차가 한 가족 공동체임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조상 제사를 드리지 않게 될 때에 불가피하게 갖게 되는 불안이 가족 공동체의 단절인 것입니다. 제사가 없어지면 가족 간에 더 이상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되고 더 이상 기억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단절에 대한 불안과 염려로 인해 제사가 시행되었던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제사라는 제도의 그 본래적 의미가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뿌리에 대해 감사하고, 가족의 정체성을 찾아 결속을 다지고, 삶의 올바른 방향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오고 오는 세대에 서로를 기억한다는 것,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이런 점에서 제사는 인류 문화의 유산입니다. 조상 제사가 다 나쁘냐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기엔 아주 중요한 의식이 심겨져 있고 전통적인 가족 공동체를 위한 소중한 자산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제사의 참된 얼이 오늘날 시행되는 제사 속에 과연 깃들어 있느냐 하는 겁니다.
몇 년 전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나와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의 저자는 한국사회가 짊어진 문제의 뿌리는 유교에 있다고 역설합니다. 유교가 나라를 망쳐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그는 우리 사회의 엘리트주의, 기득권층의 보수대결집의 배후에는 유교의 사농공상적 신분질서 관념이 있다고 봅니다. 고질적인 파당적 분당은 유교적 영향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논리보다는 힘을 우선하는 토론 부재의 경직된 사회분위기 또한 유교의 가부장 의식에 기인한다는 겁니다. 뿌리깊은 차별대우에 시달리는 여성들, 획일적 교육으로 자유와 창의성을 박탈당하는 아이들은 남성과 성인 중심을 지향하는 유교문화의 최대 피해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혈연, 학연, 지연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과 그로 인한 끼리끼리의 협잡과 폐쇄성, 분파주의는 조상 숭배와 족보 자랑이라는 유교적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겁니다.
그는 이러한 유교 이데올로기를 가리켜 '논리를 따지지 않으며 절대적 권위에 복종케 하는 수직윤리로서 일단 받아들이게 하는 만사 편안한 지배 이데올로기'라고 말합니다. 즉 그것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니라 '정치'를 위한 도덕으로 여성이 무시된 남성을 위한 도덕, 아이가 무시된 '어른'을 위한 도덕, 아웃사이더들이 무시된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으로 '살림'을 위한 도덕이 아니라 '주검'을 위한 도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공자의 도덕을 받아들인 유교문화는 정치적 기만과 위선, 남성 우월 의식과 여성 착취, 젊음과 창의성의 말살 그리고 주검 숭배가 낳은 우울함이 가득할 수밖에 없으니 이런 공자로 대변되는 유교 문화와 유교 이데올로기가 죽어야 이 나라가 살 수 있다는 겁니다. 즉 사람이 살아 숨 쉬는 삶의 공간에 꼭 필요한 투명성과 평등, 창의력, 생명력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이러한 부정적 가치들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중에 한 부분으로 언급되고 있는 조상 숭배 사상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문제는 조상 제사에 샤마니즘인 무교가 합쳐지면서 변질된 조상 숭배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유교와 무교가 습합된 제사 문화를 교회 안에 그대로 허용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조상 제사의 정신은 좋지만 거기에 너무도 안 좋은 옷들이 많이 입혀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대안이 있는 것일까? 이게 바로 이 땅의 목회자들 그리고 성도들의 고민인 것이지요. 제가 말씀과 기도로 정리해 본 것은 이렇습니다.
조상 제사의 첫 번째 의미가 뿌리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뿌리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유교에서는 조상이 인간의 뿌리라고 해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다 하지만 눅3장에 나타난 족보처럼 그 이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족보는 아담에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제사가 드려져야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제사가 기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시된 제사는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두 번째, 제사는 가족의 위상과 가치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하고 가족 구성원들간의 결속력을 다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족이기주의를 목적으로 자기 가족의 위상을 세우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족을 중시하는 유교에서는 그 가문의 우두머리에게 정치적 권한을 위임했습니다. 그러니 그 가문의 범죄자가 나올 경우 어찌 되었겠습니까?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공정한 판결을 기대하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자연히 가문이기주의로 흘러가고 말았을 겁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지연, 학연, 혈연, 이게 문제 아닙니까? 이 바람직하지 못한 문화를 만드는 배후에 제사 제도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외침이 나오는 겁니다. 그저 내 가족, 내 새끼 밖에 모르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는 것도 제사 문화의 보이지 않은 역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며 누가 내 형제자매인가. 나와 피를 나눈 자, 나와 같은 지역에 사는 자, 나와 같은 학교 다닌 자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좀 더 넓은 가족 개념과 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제사는 삶의 올바른 방향을 새롭게 찾는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삶의 올바른 방향을 어디서 찾아야 하겠습니까? 돌아가신 그분들의 행동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그분들의 삶을 그대로 따라 살면 성공적 인생, 온전한 인생이 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인생은 부끄러운 것뿐입니다. 저는 장례찬송 중에 292장을 좋아합니다. '내 본향 가는 길 보이도다 인생의 갈 길을 다 달리고 땅위의 수고를 그치라 하시니 내 앞에 남은 일 오직 저길.' 그 3절 가사가 이렇습니다. '평생에 행한 일 돌아보니 못다 한 일 많아 부끄럽네 아버지 사랑이 날 용납하시고 생명의 면류관 주시리라.' '평생에 행한 일 돌아보니 못한 일 많아 부끄럽더라.' 이게 모든 인생의 고백이 아닐까요? 죄인인 인간들이 걸어가는 삶의 궤적에서 들려오는 진솔한 고백 아닐까요? 그러니 어떻게 사람에게서 그 방향성을 물을 수 있겠어요? 그러므로 삶의 올바른 방향은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주님이 곧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 제사에는 자손들에 의해서 영원히 기억되고 싶은 인간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기대감이 표현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조상제사가 주는 긍정성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정체성을 확인해주고 이 양자의 관계를 보존해주는 가족 공동체 의식을 함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 핵가족 시대에 그러한 관계 보전이 잘 이루어질까요? 제사가 그런 가족 공동체의 결속력을 응집시키는 장이 될 수 있을까요? 아마 앞으로는 할머니 할아버지 제사조차도 제대로 지내는 시대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들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조부모는 고사하고 부모들조차 제사대행업체에 맡겨지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벌초도 직접 안갑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의뢰하고 그 결과를 사진으로 보고 돈 지불하면 끝납니다. 제사가 점점 겉치레가 되어갑니다. 제사의 참정신은 이미 다 희석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들을 그냥 반복하며 갈 것이냐 하는 겁니다.
그럼 이제 사회공동체는 어디를 통해 이루어져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진정한 공동체의 결속은 이제 교회를 통해 이루어져 가야할 것입니다. 교우들 간의 사랑과 정이 그러한 결속력 있는 신앙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형제보다 교우가 나은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산 자들만이 아니라 죽은 자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앞으로 우리 교우들이 돌아가신 날도 좀 다 파악해서 주보에 싣고 싶습니다. 생일만 싣는 게 아니라 소천일도 싣고 싶습니다. '오늘은 아무개 성도가 이 세상을 떠난 날입니다. 몇 주기를 맞았군요' 그렇게 소개하고 함께 잠시라도 주님 안에서 추모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가 죽은 게 아니라 살아있음을 깨우쳐 주고 우리를 떠나 있는 게 아니라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싶습니다. 히12장의 말씀처럼 '우리의 믿음의 경주를 스탠드에서 성원하며 관람하는 관중'임을 기억하게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공동체의 결속과 하나 됨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십시다. 요셉을 만난 야곱은 이제 요셉을 축복하기 위해 그의 양손을 요셉의 두 아들이며 자신의 손자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머리 위에 얹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축복합니다. '내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청하게 하시오며 이들로 세상에서 번식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는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지 않습니다. 아버지 이삭에게 복을 빌지 않습니다. 그는 그들의 하나님께 복을 빕니다.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나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이 살아가는 것을 지켜보아 주신 하나님, 태어날 때부터 이 날까지 나의 목자가 되어 주신 하나님, 온갖 어려움에서 나를 건져 내 준 하나님의 천사가 이 아이들에게 복을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나의 이름과 조상들의 이름 아브라함과 이삭이 이 아이들에게 살아있기를 이 세상 한복판에서 왕성하게 불어나기를 빕니다.'
얼마나 멋진 축복입니까? 얼마나 멋진 제사입니까? 여기에 제사의 참 정신이 다 깃들어 있지 않습니까? 그의 경배의 초점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부모를 드높입니다. 그는 진정한 뿌리를 아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 가문의 결속의 근원이 무엇인지도 압니다. '나의 이름과 조상들의 이름 아브라함과 이삭이 이 아이들에게 살아있기를, 이 세상 한복판에서 왕성하게 불어나기를 빕니다.' 얼마나 멋진 기도입니까? 하나님이 그 이름을 저들을 기억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삶의 올바른 방향을 주님 안에서 찾는 것임을 고백합니다.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소서.' 조상들이 다 잘 살았습니까? 조상들을 온전한 삶의 모범 삼을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도 실수했고 이삭도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런 조상들의 삶을 절대화하고 답습할 때 자칫 조상숭배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삶의 방향을 찾아야할 자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조상 자체를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의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만이 그 가문은 지속성을 갖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12지파는 하나님 안에서 그 정체성이 확인되고 지속되어 가는 겁니다. 죽은 자든 산 자든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분 안에서 우리 또한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조상들의 삶이 아니라 그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는 게 중요한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미래적인 사역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또 바른 소망을 갖지 못하게 하는 '조상 제사', 기복적으로 전락하여 제사를 지냄으로 복을 받는다고 하는 이 잘못된 행위는 이제 올바른 것으로 대체되고 새로워져야할 당위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인생의 황혼기에 '내 인생에 복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고 있습니다. 이 8월 한가위에 우리는 생명을 주시고 키워주신 부모님들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상이 복주는 거 아닙니다. 복 받겠다는 기복적인 자세로는 결코 절하지 마십시오.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겁니다. 우리가 가야할 바른 길도 '주 안에서' 보이는 겁니다. 우리 가문을 빛내고 복되게 하실 분도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높이며, 부모의 사랑에 감사하며, 형제간에 우애 있는 추석 명절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족의 틀 안에만 갇히지 마시고 하나님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한 형제임을 기억하고 어려움 당하는 이웃들과 함께 하는 8월 한가위가 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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