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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전5:1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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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하나님의 선물
전5:10-20
*오늘부터 Swe-25기가 연수원에서 있습니다.
금요일에 집에 돌아와서 말씀을 받으면 달콤함과 고소함이 덜할까 싶었습니다.
9월 감리사 서신을 지방의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보냈습니다.
편지를 쓰다가 자연이 지니는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전도서의 기자가 그토록 말하고 싶어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허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서 전도서는 말하고 있는겁니다.
추석이 가까워서 더욱 '선물'은 친밀감이 있지 않습니까?
감리사 편지요?
설교 원고 뒤에 붙여 놓겠습니다.
전도서가 기록되던 주전 3, 4세기도 오늘날과 같이 경제적 성취가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던 시절이었습니다. 정치 경제적으로는 프톨레미 왕국, 사회 문화적으로는 헬라 문화의 영향권 아래에서 '세계화'에 몰입되어 가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니까 전도자는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비슷한 사회 경제 문화 환경 속에서 그 시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갈등했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급변하는 이 시대를 '세계화의 세대'라고 부릅니다. ‘세계화’란 모든 국가의 국민들이 지리적으로나 경제 , 문화 , 정치 , 이념 등의 틀을 깨버리고 공통된 그 무엇을 통해서 (그것이 어떤 사상일 수도 혹은 문화일 수 도 있습니다.)하나가 되는 것을 세계화라고 합니다. 실제로 세계는 지금 문화, 언어, 삶이 섞여서 하나의 거대한 울타리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전도서가 기록된 당시의 유대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밀려오는 헬라 문화의 우월감과 낙관주의가 팽배해져 가면서 부유한 유대의 상류귀족들은 최고의 것들을 경쟁적으로 더 많이 소유하려 했습니다. 소위 '명품 족'이 탄생한 것입니다. 저들은 헬라적 사고와 관심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였고 부의 축적과 사회 계층의 상승 욕구를 강하게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경제력 획득과 사회적 성공에 대한 욕구는 헬라왕국의 귀족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금력, 권력, 쾌락의 맛을 알았고 그 정점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당시의 '성공인생'이었습니다.
그리고 '헬라화'라는 시대정신에 휩싸여 세계를 향한 진출과 성공의 기회가 많아지면서 유대의 젊은 세대들조차도 거기에 심취해 그 무한한 기회와 가능성에 집중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져 갔습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이 권력과 금력이라는 것을 알고서는 그것을 얻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시절에 신앙과 삶의 문제로 갈등하던 한 현인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전도자입니다. 그는 그러한 현실 속에서 인생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합니다.
'진정한 삶은 어떤 것일까?'
'삶의 참의미는 무엇이고 그 가치는 무엇일까?'
전도서는 바로 그 현인이 모든 인생의 가장 큰 관심인 부의 문제를 어떻게 고민했고 또 그 해결책을 어떻게 찾았는가를 보여주는 자기 경험적 기록입니다.
전도자는 먼저 '인생에 있어 부가 무엇인가'를 사색합니다. 모든 인생들이 혈안이 되어 좇는 저 [부]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는 10-12절에서 부의 속성을 표현하는 속담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 번째 속담은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다"는 겁니다. 부라고 하는 것은 결코 만족될 수 없고 오히려 인간의 욕심을 증가시키는 속성이 있다는 겁니다. 부가 아무리 많이 축적되더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고, 또 돈을 사랑하는 사람 가운데 '충분하다', '이젠 됐어'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즉 전도자는 채워지지 않는 부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지적하면서 그것은 먹으면 먹을수록 갈증을 느끼는 '바닷물 같은 것'임을 증거 합니다.
그러나 부에 관한 그 당시의 전통적인 가치는 ‘부’란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선물로 간주되었습니다. 부는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복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건 틀림없는 말입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그러한 부의 개념에 새로운 관점을 하나 더 부연합니다. 그것은 ‘부’가 하나님의 선물이되 그러나 만족되지 않는 부는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만족할 줄 알 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것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그건 결코 하나님의 선물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부와 관계된 속담을 이어갑니다.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나니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전도자는 재산이 늘어나면 느는 것만큼 그것을 소비하는 주변 인물들이 함께 증가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부를 자신이 누리는 게 아니라 주변 인물들이 그 부를 소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획득한 부의 영광을 누리지 못하는 그 부의 축적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결국 부의 축적이 많으면 많을수록 소비도 증가하고, 부가 쌓이는 만큼 나가는 곳도 많으니 그 애씀이 다 헛수고가 아니냐는 겁니다. 정작 부의 주인은 그 열매를 즐길 기회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부를 소유한 사람이 맛보는 이익이라고 하는 것은 기껏 그의 눈으로 자신의 재산을 볼 수 있는 것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그것이 무슨 유익이냐며 '그게 다 헛된 일'이라고 사람들이 대단하게 여기는 부의 의미를 축소시킵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부가 결코 축복일 수 없는 셋째 이유를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 노동자는 숙면을 취할 수 있지만 부자는 불면에 시달린다는 것입니다. 부자라 하더라도 그 어떤 이유에서건 잠조차 못 들고 불면으로 고생한다면 그는 인간에게 부여된 행복의 기본권조차 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전도자는 이러한 부와 관련된 세 가지 속담을 통해서 부와 만족의 관계는 결코 비례하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부가 행복한 인생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반드시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부를 왜 그렇게 죽기 살기로 혈안이 되어 다른 것에 다 눈멀어가면서 찾고 있느냐는 안타까움을 그는 토로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삶의 목적이 무엇이고 목표가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겁니까? 어떻게 하든지 부를 모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사는 우리들 아닙니까? 그게 뭔지도 모르고, 그게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끼쳐줄지도 모르면서 그저 그것을 목표로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 아닙니까?
전도자는 이제 13-17절에서 앞의 속담 속에 담겨진 그러한 부의 부정적 속성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열거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재물이 인생에게 끼치는 부정적 영향이 무엇인지, 그 병폐가 무엇인지를 하나하나 짚어갑니다.
부의 첫 번째 병폐는 '재물이 오히려 그 소유주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7절에서 전도자는 부를 좇는 자의 한평생이 근심과 병과 분노로 특징지어진다고 말합니다. "일평생을 어두운 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 불면에 시달리고 불안 해 하고 근심케 하는 삶을 바로 그 부가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숙면과 평안과 안식을 주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의 것들을 인간들에게 제공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 병폐는 15절에서 보듯이 자신이 수고해서 얻은 재물을 필요한 때 사용하지 못하고 또 죽을 때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 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이것도 폐단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그렇게 아둥바둥 긁어모아봤자 결국은 풀린 손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고 돌아가는 게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많은 재물을 수고하여 얻었음에도 죽을 때는 정작 빈손일 수밖에 없는 인생의 허무를 알라고 전도자는 외칩니다.
힘들여 얻은 부를 모두 뒤에 남겨야 하는 일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것을 고스란히 놓고 가는 인생이 얼마나 아쉬움이 크겠습니까? 그걸 가져가겠다고 금고 열쇠를 꿀꺽 삼킨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만은 결국은 고스란히 다 놓고 가는 게 인생인 겁니다. 그러니 부를 모으기 위한 수고와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지닌 재산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계속 쌓는 일에만 집중하는 인생들이 많더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의 속성을 재빨리 깨닫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전도자는 부를 좇는 인생이 겪는 좌절과 의문을 깨닫고 그 문제를 풀려고 애썼던 사람입니다. 그 또한 큰 사업을 벌여보기도 하고 재물이 주는 쾌감을 만끽하기도 했던 자입니다. 그러나 그게 다 바람잡는 일이요 헛된 일이더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거기에 진정한 인생의 행복이 있는 게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경험해 본 전도자는 부의 한계와 부정적 속성을 지적한 후 진정 행복한 삶을 위한 그 대안을 18-20절에서 제시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인생의 참의미는 지극히 단순한 곳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어진 것을 먹고 마시며 자신의 일을 즐거워하며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주어진 일상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갖고 사느냐에 행불행의 갈림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18절 말씀을 보면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고 선포합니다.
이것은 현재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그것을 충분히 누리는 생이 복된 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현재 나에게 주신 것들을 한껏 즐거워하며 만끽하며 사는 겁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알고 이에 만족하고 즐거워하고 누리는 삶이 진정 행복한 삶을 사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19절에서 바로 그것이 인생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보십시오. 18절과 1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바.',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은 인간이 지닌 모든 소유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많든 적든 하나님이 주신 현재의 소유에 만족하고 즐길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선물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즉 '생이 하나님의 선물인 것'은 현재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그것을 즐길 수 있을 때 맛보는 은총인 것입니다.
전도자는 인생의 즐거움을 자신의 수고와 주어진 몫 안에서 찾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자신의 노동과 수고 속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는 것, 즉 일상을 통해 삶의 즐거움을 한껏 누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이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너무 염려함으로써 현재 있는 것조차 즐기지를 못합니다. 만족함으로 현재 누릴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왜 그것들을 다 놓치고 사는지요. 자신의 일에 기쁨을 가지지 못하고 짜증과 불평과 원망 속에 살므로서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선물을 놓치며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금에 주어진 것을 감사하며 그것을 먹고 마시며 자신의 일에 기쁨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야 할 것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빵 한 조각을 앞에 놓고 감사하는 노인의 그림을 보셨습니까? 누가 그 노인의 그 기쁨과 만족을 빼앗을 것입니까? 현재에 만족하고 즐겁게 살 수 있을 때 그 인생은 진정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현재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이미 하나님에 의해 충분히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느 순간도 부족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우리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심이란 것이 무한대라서 만족하며 산다는 것이 어렵겠지만 그래도 현재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이를 즐거워하고 사는 것이 생을 하나님의 선물로 누리는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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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남지방 목회자들에게 드리는 가을 편지
열매들이 익어 단물을 간직하고 곡식들이 양분을 부지런히 응축해 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자연현상들을 보면서 완성은 곧 [죽음]이라는 아름다운 통찰을 얻곤 합니다. 그렇게 가지를 떠나는 열매는 아름답고, 뿌리와 이별하는 나뭇잎은 미덥습니다.
9월은 이런저런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1.9월7일 주일은 감리교 공동체가 일시에 시행하는 교역자 보건주일입니다.
저희 지방은 지난해와 동일하게 교회별로 형편에 맞춰 하겠습니다.
그러나 9월 말에 있을 지방연합부흥회에서 헌금을 다시 한 번 하려고 합니다.
이번에는 교역자들의 아내들을 위한 건강검진에 쓸 것입니다.
넉넉한 교회는 아예 ‘보건주일’이라는 말조차 꺼낼 수 없는 동역자들을 위한
애정을 갖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2.9월9일은 9월 목회자 모임을 갖으려고 합니다.
이날은 특히,
25일에 있을 감독회장 선거와, 동부연회 감독 선거에 즈음한 동역자들과 평
신도들의 생각과 의견들을 청취하고 나누려고 합니다.
기억하실 것은 선거 운동이나,
특정후보자를 지지하기위한 集談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대화의 장이라는 걸 염두에 두시고,
감리교 공동체의 현실적인 부조리며,
또 희망을 위한 기대를 나눌 수 있게 되길 소망합니다.
3.9월25일은 아시는 대로 새로운 감독과 감독 회장을 뽑는 선거일입니다.
정 11년급 이상의 정회원 목사들과 그 수에 준하는 평신도들이 선거를 합니다.
우리지방은 모두 30명의 총대가 참여하게 되는데,
아시는 대로 지금 우리 현실은 혼란스럽습니다.
권위도 진성성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십자가의 도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4.9월28일부터 10월 1일 수요일 까지는 지방 연합부흥사경회가
석사교회에서 있습니다.
하와이의 성자로 불리는 이은철 목사께서 강사입니다.
동역자들도 마음에 품으시고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부사와 형용사로 여름처럼 목사의 삶을 살고 있는 저는, 명사와 동사로 삶의 자리를 옮겨 가는 자연 앞에 숙연해 하면서,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하늘에 올립니다.
“익지도 않고 떨어져 버리는 落果에게도 가을이란 게 있기는 하지만, 제발 저에게 믿음을 주소서. 落果가 아니라 하나의 성숙으로 가는 길로 인도 하소서. 욕심 많은 사람들이 씨를 버리고 열매의 단맛만을 빨 때에, 썩어가는 과일 속에 숨어 있는 싱싱한 씨를 영원의 대지에 파묻게 하소서.”
교역자 모임 때 뵙기로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춘천남지방 감리사 허태수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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