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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9:57-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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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예수]라는 네비게이션
눅9:57-62
요즘 자동차에 달고 다니는 네비게이션은 참 착하고 신기합니다. 내가 갈 길을 잘 안내하고 내가 혹 잘못된 길로 들어섰어도 한 번도 왜 그랬느냐 이제 어쩌려고 그러느냐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입력된 길과 다른 길로 들어서게 되면 이 기계는 잠시 생각하는 듯 멈췄다가 ‘경로를 재탐색 합니다’ 하고는 다시 파란 색으로 갈 길을 안내합니다. 이 기계의 기준은 언제나 현재 지금의 [나]입니다. 내가 아무리 잘못 왔어도 상관없고 몇 번이나 엉터리로 선택을 했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항상 고분고분합니다.
만일 네비가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무슨 운전을 그렇게 하느냐, 미리 차선을 바꾸어야지, 몇 번이나 방송했는데 그걸 못 듣느냐, 이런 저런 말로 심지어는 너는 항상 그래, 너는 원래 그래 하면서 존재까지도 규정하면서 나를 죄인 취급하려 들 것입니다. 이런 길 안내 기계는 단순한 기계지만 나는 주님의 교육방식을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완벽한 존재는 없습니다. 실수하지 않는 사람도 없습니다.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그렇게 착각하는 사람은 있지요. 대개 그런 사람들은 어릴 때는 부모, 선생님, 나중엔 목사를 롤모델로 설정해 놓습니다. 부모나, 선생님, 목사도 약한 분들이고 잘못할 수 있는 분들임을 깨달으면서도 가상으로 엄격한 감시자로 또는 롤모델로 세워놓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존경하면서 한편으로는 자기를 괴롭힙니다. 늘 자신은 부족하고 잘못이 많다고 여깁니다. 늘 완벽한 기준을 가상으로 세워놓고 그 기준에 맞추어서 나를 못나게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이야기 하다가 내가 학창 시절에 좋지 않은 시험 점수를 받은 것을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아이는 정말이냐고 물으면서 얼굴이 환해졌었습니다. 아마도 아빠는 완벽하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완벽하지 못함에 스트레스를 받다가, 아빠도 실수할 수 있고 잘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해방감을 맛본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늘 과거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지난 잘못에 대해서 그것 때문에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지금 내가 그렇게 생각하여 지금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훈육 선생이나 깐깐한 시어머니가 아닙니다. 김지하는 架浦日記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神은 다반사 안에 시어머니처럼 쪼그리고 있어 잔소리하는 노쇠한 망령이 아니다. 참된 신은 굵고 원대하며 우주와 세계와 미래를 채우는 청춘의 法이다. 그것은 건설하는 망치요 씨뿌리는 거친 손이며 수확하는 낫이다.
죄 속으로 웅크리지 말라! 너는 한 발짝도 못 나간다. 나가라! 그리고 죄를 뛰어넘어라! 죄는 진보의 또 하나의 이름이다. 예수는 이 진보의 대가를 죄로 짊어졌다.
십자가다."
하나님은 자유이시고 바람이시고 원대하십니다. 우리를 키우시되 우리의 의를 통해서도 성공을 통해서도 선물을 주시지만, 때로는 우리의 잘못을 통해서 허물을 통해서도 기회를 주시고 발명을 하시고 새로운 사상을 일으키고 은혜를 일으키십니다. 대부분의 위대한 사상과 신학은 죄를 깊이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주시는 사건 사건에 대해서 모험가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모험하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모세가 도덕적인가요? 그는 살인자요 도피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모험가였습니다. 그가 모험가가 아니었다면 바로의 궁전에서 안전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모험가였기에 그렇게 도피자가 되어 미디안 광야에서 고생하며 살았지만 마침내 출애굽이라는 대모험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속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은 시아버지를 상대로 창녀 짓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폴 투르니에는 이런 것을 “창조적 모험”이라고 불렀습니다(<모험으로 사는 인생>).
우리는 대차대조표를 0으로 만드는 데 익숙합니다. 늘 뭔가를 계산합니다. 내가 잘못을 했으면 한쪽이 마이너스가 됩니다. 그러면 다른 쪽이 플러스가 되어야 대차대조표가 0이 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고가 우리를 지배합니다. 부모에게 잘못했으면 욕을 먹든지 매를 맞든지 해야 속이 시원한 것처럼, 자기 잘못에 대해서도 스스로 정죄하고 회개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자기를 벌해 달라고 합니다.
의사들은 현대인의 병들이 정신신체적(psychosomatic)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엔 병에 걸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지만 가끔 병을 선택하고 그 속에 안주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죄책감은 나는 병에 걸려도 싸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렇게 병에 걸림으로써 자기가 벌을 받음으로써 뭔가 보상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차대조표를 0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우리를 병자로 만들기까지 하는 무서운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런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고 우리의 마이너스를 우리의 아무런 보상의 노력과 상관없이 은혜로 갚아주고 플러스가 아니라 넘치게 하여 대차대조표가 의미 없게 만드셨습니다. 마치 네비게이션처럼 그저 현재만 중요합니다. 지금 현재를 기준으로 경로를 재탐색하게 합니다. 그것은 이제부터는 대차대조표의 빚을 갚기 위해 살지 말고 오직 예수께서 주시는 삶을 향하여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향하여 경로를 재탐색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쟁기를 들고 뒤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또 바울이 오직 온몸을 앞으로 기울여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는 말씀의 뜻이기도 합니다. 대차대조표에 연연하는 사람은 절대로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나는 늘 이런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나는 왜 이런 고질적인 것을 갖고 있는가” 하면서 한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그만큼 주의 사랑을 받을 만한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것이 없다면 당신이 어찌하여 기도할 것이며 주의 도움을 구할 것이며 어떻게 은혜의 세계를 알 것입니까? 오히려 전혀 그런 문제를 못 느끼는 사람이 딱한 사람입니다. “정말 나는 왜 이래!”라고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이제 그 상태로는 살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에게 연결된 네비게이션을 따라 살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인도하시는 길만 보고 늘 현재를 기준으로, 절대로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다시 또 다시 경로를 재탐색하면서 나아가다보면 당신이 너무나 괴로워했던 그 문제가 당신을 주께로 인도하는 가교가 되어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음에 짐이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평화가 가득하시기를!
샬롬!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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