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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입니까?

마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1824 추천 수 0 2012.01.08 23:5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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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4:22-33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그리스도인입니까?
마14:22-33

몇 주 전의 일입니다. 원주에서 감독 선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시내에서 목회를 하는 김 목사님이 방문했습니다. 김 목사님은 목회를 하면서 글쓰기도 부지런히 하여 책도 내고 신문과 잡지에 수년 동안 희극과 산문을 싣고 있습니다. 가까운 곳에 살지만 아주 오랜만에 만나 집에서 라면도 같이 끓여먹고 이야기도 많이 나눴습니다. 그러다가 김 목사님이 그동안 생각해 왔던 성서의 창조적인 생각에 대해서 듣게 되었습니다. 아주 기발한, 아이스러운, 글 쓰는 사람다운 신선한 이야기가 많아서 크게 웃고 감동도 많이 했습니다. 그 중에 한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김 목사님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걷기 이전 장면에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들판에서 오천 명을 떡으로 배불리 먹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도 남 밥 먹는 일을 시중들어 보지만 얼마나 피곤하고 힘든 일입니까?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 뒷정리를 혼자 다 하셨다는 겁니다. 22절에 보면 ‘재촉해서 제자들을 보냈다’는 말씀을 보면 그렇다는 거죠. 그렇게 혼자 뒷정리를 다 하신 다음에 쉬기도 할 겸 기도하러 산에 올라 가셨어요(23). 그런데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이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끼셨다는 겁니다. 그 때 예수님은 디베랴 바다를 건너는 제자들이 당황하고 놀랄 것을 알아챘다는 겁니다(24). 그렇게 걱정이 되니 휴식이고 뭐고 멈추고 그만 제자들이 있는 호수로 가신 거죠(25). 그리고는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갔는데, 가는 동안 물방울이 튀어서 머리털과 얼굴과 옷을 적시게 되었습니다. 그 때 시간이 새벽 3시부터 6시 사이입니다. 이 시간은 사실 사람을 분간하기 어려운 시간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게 가까이 지내왔던 예수님인데 모를 리 없다는 겁니다. 다만 제자들이 걱정되어 바삐 풍랑 이는 물위를 걷다보니 물이 얼굴과 머리털과 옷에 튀어서 그만 평소의 모습을 알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귀신이다’고 소리쳤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말하길, 이 사건은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랍니다. 글 쓰는 사람다운 안목입니다. 그 나름대로 은혜가 되더군요.

그런데 지난주엔 이은철 목사님이 지방 부흥회 강사로 오셔서 아주 담백하게 은혜를 깊이 부어 주고 가셨습니다. 말씀의 주제는 ‘나는 정말 그리스도인인가?’였지요. 그러는 중에 이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사는 사람이다.”
이 말씀이 다시 오늘 본문 말씀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이 본문으로는 이미 한 번 설교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만, 다시 한 번 우리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을 한다는 의미로 설교 하려고 합니다. 나는 정말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러면 그걸 무엇으로 나타낼 수 있을까요? 교회에서 직분을 가졌기 때문에요? 교회를 다니면 무조건 그리스도인일까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내가 항상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사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사물의 이름이거나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사는지 아는 것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아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물위를 걷는 이 사건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 것일까요? 김 목사님의 말대로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로 베드로의 믿음 없음을 말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처음에는 ‘나도 당신처럼 걷게 해 주세요’하고 용기 있게 믿고 물위를 몇 발자국 걸었지만 곧 의심이 생겨서 물에 빠졌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것은 베드로의 믿음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겁니다. 예수님도 베드로더러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느냐”하셨기 때문에 틀림없이 그렇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본문을 대할 때 우리 자신의 믿음 없음도 자꾸 들춰 보게 됩니다. 나도 과연 지금 물 위를 걸어 보라면 걸을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목사인 저도 그러니 여러분은 또 어떻겠어요.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고 확증 하려면 약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29절과 30절의 문장이 그런 생각을 갖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29).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 가게 되자 ‘주님 살려 주세요’하고 외쳤다(30).

29절에 보면 이렇지요.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서 물위로 걸어 예수께로 갔다.” 우리가 생각  하기에 이 문장의 중요성이 ‘물 위로 걸어갔다’는 것에 있을 것 같지만 사실 ‘걸어서’와 ‘갔다’는 단어는 동사입니다. 그런데 이 두 단어는 그저 ‘단순한 과거’의 일을 알려 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어떤 일이 생겼다는 뜻을 가진 정도입니다. 정작 중요한 건 ‘누구에게 갔느냐’입니다. 거기에 맞추어서 그의 발이 어디를 향했느냐, 어떻게 갔느냐 입니다. 그리고 단순한 과거 동사이니까 ‘걸었다’는 것에 자세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겁니다. ‘누구를 향해 어떤 자세를 가졌느냐’만 중요한 겁니다. 흔히 백일 지나고 돌을 향해 가는 손자 손녀들이 어느 날 아침 일어나서 걷는 시늉을 했다고 합시다. 그 때 중요한 의미는 몇 발자국이 아니라 그냥 ‘걸었다’는 거 아닙니까? 다른 것들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이 문장에 있어서 중요한 건 ‘물위를 걸었다’가 아니라 ‘누구를 향했다’입니다.

30절에는 그렇게 예수를 향한 베드로가 물에 빠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흔한 생각대로라면 ‘물에 빠졌다’는 말이 중요하게 여겨져야 하겠지요. 그러나 여기서는 물에 빠지는데 관점이 있는 게 아니라 ‘외쳤다’는 겁니다. 물에 빠질 때 뭐라고 소리쳤느냐는 게 주요 관점이라는 겁니다. 그걸 주동사라고 하는데 바로 ‘외치다’가 주동사입니다. 이 문장에서 기둥처럼 여기는 단어라는 거죠. 그러면 뭐라고 외쳤느냐고 하는 직접화법이 궁금해지죠. 물 위를 걸어가려고 하면서 까지, 물에 빠지면서까지 그토록 베드로가 소리쳤던 말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주님 또는 예수님!”이라는 외침입니다.
초대교회 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또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주간 지방 부흥회에서 이은철 목사님도 강조하셨지요. 어디서나 언제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저는 그 말씀이 새삼 큰 은혜가 되는 거였어요.  달리 무엇을 할 필요가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만 부르면 됩니다. 그 행위 속에는 ‘구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 질병도 치유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회심하기 이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던 일을 두고 성서는 “그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박해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행9:14). 바울은 [교회]라는 말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의 다른 이름은 바로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 인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머리로 끄덕이고 수긍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베드로인 것은 물위를 걸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만약 물위를 걷지 못한 것이 사건의 본질이어서 ‘믿음 없는 사람’으로 낙인 찍혔다면 그 이후 베드로는 물위로 걷는 연습을 많이 해서 마침내 물위를 걸으므로 그 오명을 벗어야 했겠지요.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어디에도 베드로가 물위를 걸어서 마침내 ‘믿음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찾아 볼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누가 ‘예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나요? 예수가 나의 전부임을 느끼고 고백하는 사람만이 '예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임을 알 때입니다. 바울도 ‘나는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 이상 더 적절한 예수 신앙의 표현이 있지 않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사는 사람’으로 불리워 지면, 스스로  그렇게 고백할 수 있으면 나는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성공한 인생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을 이 이상 적절하게 밝혀줄 단어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베드로는 신앙의 모범입니다. 마찬가지로 초대교회 교우들에게 있어서도 베드로는 신앙의 모범이었습니다.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어떤 게 우리의 모범이 되는가? 그랬을 때 그들의 눈에는 물위를 걸었던 베드로가 아니라, 그런 지경에 처했을 때 ‘예수님!’하고 외쳤던 사실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아, 저거구나! 저렇게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게 우리의 사표가 되는구나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물에 빠져 들어가면서 “주님, 살려 주세요!”라고 외치는 베드로를 그들은 높이 여기고 사모했던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란 물 위를 걸을 수 있거나, 아무 병이나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능력이 있어야 예수를 잘 믿는 게 아닙니다. 죽는 순간에도, 다 잃어버린 순간에도, 깊은 절망의 순간에도, 죽고 싶은 순간에도 그 어느 경우든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믿음 있음을 확신하기도 하고, 또는 내 믿음이 부족하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 이전에 자신에게 먼저 물어 볼 일입니다. 가장 위급할 때, 또는 가장 기쁠 때, 아니 삶의 순간순간마다, 나는 내가 믿는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살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이것이 지난 주간 은혜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참고로 후안까를로스 신부의 [제자입니까?]란 오래된 책을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이은철 목사님의 말씀 7개가 담긴 테이프도 원하는 분들에게 제공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진정 그리스도인 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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