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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1:2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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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긴급한 소환(召還)
마11:28-30
길가의 코스모스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나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
선득하니,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그림자가 한층 길어졌다.
-정현종, '가을 날'전문-
10월 19일 설교 준비를 하면서
떨어져 내린 가슴이 다시 붙지 않는다.
주석을 아무리 뒤적여도
내 상상력을 뒷받침 하는 응원군은 없다.
‘말씀의 완성’이라는 문장을 쓰고 마당가에 나갔더니
수요일
오전 1120분의 가을 햇살이
코스모스를 툭툭 치며 놀고 있다가 불쑥
‘정현종’이가 되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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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우리가 많이 듣고 또 좋아하는 본문입니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뒤숭숭한 시절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누구나 힘들어 하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이 수고하는 자들과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초청함에 있어서는 ‘누구나’해당 되는 거 같진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에 온 이유를 직접 말하셨는데, 그것은 의인을 위해 온 게 아니라 죄인을 위해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뒷받침이나 하듯 예수님은 세상에 살아 계신 동안 그렇게 하셨습니다. 스스로 당당하고 스스로 의롭다 여겨 누구의 도움이나 이해가 불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다가서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돈이 없어 죄인(無錢有罪)되었거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밥벌이 하다 율법조항을 지키지 못해서 죄인 된 사람들을 찾아 나섰지요. 예수님이 사람을 질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대상은 이상스럽게도 앞에 말한 그런 ‘죄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종교 지도자들 곧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자기는 의롭다 여기며 남을 죄인이라고 낙인찍는 사람들 즉,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마 23: 13). 대신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밥도 같이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의 옹호자요 위로자며 격려자였습니다. 그러니 오늘처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을 초청했을 때 그 초청의 대상은 세상의 ‘누구나’가 아니라 경제적인 하층을 벗어나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율법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찍혀서 사는 소외당한 사람들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오늘 말씀은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시는 겁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대에 살았던 이런 사람들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높은 사람은 높은 사람대로, 낮은 사람은 낮은 사람대로, 주식이나 증권으로 사는 사람은 그들대로,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은 그 형편대로 또는 자기 입장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명백하게 구분하여 생각지 않고는 ‘누구에게나’ 생명의 말씀이자 복음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난하고 소외당해서 근심에 짓눌린 사람들과, 부귀영화를 누리면서도 불안을 떨칠 수 없는 사람들의 수고와 짐은 분명 달리 구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양자를 그대로 인정하고 위로하고 안심케 하고 평안을 주고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이 말씀을 차별하지 않고 받아 들이려고 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껏 이 말씀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축복의 말씀이고, 부자에게는 영혼의 평안을 담은 메시지라고 여겼습니다. 지치고 가난하거나 여유로운 사람이거나 위로와 격려와 축복과 약속의 말씀을 마다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설교가 달콤하고 위로와 축복이 넘칩니다. 듣는 처지가 달라서 같은 설교의 해석이 달라져야 하는데도 설교자는 딱 부러지게 말을 하는 대신 이렇게 저렇게 해석할 여지를 주었습니다. 그런 설교자의 설교가 은혜롭다고들 합니다. 말씀을 따라서 구체적으로 살아야 하는 메시지보다는 추상적이고 막연한 말씀일수록 은혜가 넘치는 것이 일반적인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벗어나서 설교 말씀 속에 구체적인 신앙생활의 지표를 담으면 옳다고는 여기지만 그런 말씀이 계속되면 좋아 하지 않습니다. 세상살이, 직장 살이, 사회생활이 버겁고 힘겨운데, 일주일 내내 그렇게 살았는데 설교마저 과제(課題)를 안겨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편히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였는데 짐을 지우니 싫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짐은 가볍다고 했는데 ‘말씀’이 듣기에 무겁고 ‘신앙생활’ 하기가 힘드니 매력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본문에 쓰인 수고한 사람들이란 말은 희랍어 동사 콥토(kopto)의 분사 복수(kopiotes)입니다. ‘분사分詞’란 어떤 시제와 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다른 어떤 걸 보여주는 구실을 한다는 말입니다. 뜻은 ‘지루하고 지치게 하는 노동(labour)’을 말합니다. 무거운 짐 진 자들 역시 희랍어 동사 포르티조(phortizo)의 완료 분사 수동인데 그 뜻은 ‘지기 어려운 짐’을 말합니다. 이 말이 다른 곳에서는 강요된 계율의 짐으로 쓰입니다. “그들은(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남의 어깨에 메우고……"(마 23:4, 눅 11: 46). 또한 이 낱말의 명사는 세금(phoron)의 뜻으로 쓰이고(눅 20: 22), 조공(phorous)(롬 13: 6-7)의 의미를 갖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금이나 남의 나라에 바치는 조공은 결코 심적으로 물질적으로 가벼운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본문의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pepsortismenoi)은 수동 분사 복수인데, 이 말은 무거운 짐을 지우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좋아서 즐거워서 무겁고 힘겨운 짐을 지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고역을 하게 된 상황을 짐작하게 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 쓰인 원문의 낱말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지루하고 지친 노동에 수고하는 사람들이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억지로 강제로 고역을 하게 된 사람들인 것을 알게 되죠. 수고하는 사람들은 힘겨운 노동을 해서 먹고 연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눌린 사람들입니다. 로마제국의 압력을 받았던 유대종교 당국자들의 강요로 짐을 지었든, 권력자와 부자들에 의해서 강제 노역을 당했든 간에 그들의 처지는 딱하고 불행하고 또 억울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오라고 초청한 것은 단순히 그들의 처지가 불쌍해서 우선 밥이나 먹고 쉬라고 하신 것일까요? 육신은 고생스럽지만 마음만이라도 편히 쉬라고 부른 것인가요? 아니면 진짜로 예수님이 그들이 짊어진 사회경제적인 고통을 일순간에 해결해 주실 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 대한민국에 있는 ‘집 없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그대로 믿고 예수에게로 간다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겠어요? 세상의 사람 숫자만큼 그 ‘수고’라는 것과 ‘짐’이라는 게 다양할 텐데 그걸 모두 해결 하신다는 말입니까? 미국 발 금융위기 때문에 낮은 사람도 높은 사람도,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살기 힘들다는데 그 상극의 양자를 예수님이 해결하시겠다는 건가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기에는 상황은 심각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의 의중은 그런 처지에 있는 그 당사자들 에게 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을 만든 사회 또는 개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수고하고....’. 이 말씀은 바로 그들이 대상이 아니라 그들을 만들어낸 다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진 짐은 스스로 진 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자연발생적으로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짊어져야 하는 그런 당위적인 짐과 수고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저들이 저렇게 고통스럽게 짐을 지고 사는 데는 그렇게 한 원인 즉 짐을 지운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들에게 짐을 지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비록 직접 그 제도나 그 세력에 대해서 직접적인 말씀은 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학대하고 착취하는 자들의 편에서 그들을 편들어 초청 또는 소환(召還)함으로써 그 피압박자들을 생산한 자들과 제도를 향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외국에 파송된 대사를 소환하는 것은 상대국에 대한 강한 메시지가 있지 않습니까? 일본하고 우리가 외교 문제가 발생하면 대사를 소환하지 않습니까? 동생의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형을 야단치거나 매를 들지 않습니까? 아들이 동네 아이와 싸우고 있는데 맞고 있는 걸 아버지가 보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합니다. “빨리 애비에게로 와!” 그 때 아버지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아들인가요? 아니면 아들을 때리고 있는 상대편 아이인가요? 오늘 말씀은 예로 들은 것들 이상입니다. 예수님의 의중은 억압과 착취를 일삼는 사회와 그 세력에 대한 강한 저항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불러 살랑살랑 위로나 하시겠다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짐을 지우는 사람들을 향하여 멈추라는 것이고, 좀 더 적극적으로 네가 저 사람들의 짐을 덜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힘들게 짐을 진 그들에게 잘못했다고 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본문을 단순히 위로와 초청의 말씀만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양되어야 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초청하고 그들의 삶의 현실을 당면 과제로 삼는 것이 중요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비참한 상황을 야기한 제도와 세력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저항 역시 중요하지 않겠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오늘 초청하는 것은 그들의 현실을 제공한 사람들 또는 구조와 제도의 회개와 상황의 개혁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 그는 동안 짊어지는 짐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본문에서처럼 사람이 사람에게 지우는 짐입니다. 이건 누가 해결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짐을 지운 사람이 덜어 주어야 합니다. 용서도 빌어야 합니다. 이 말씀 앞에 우리는 누구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나 때문에 누군가 짐에 눌려 있거나 수고가 더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 째 짐은 자연 발생적이거나 당위적인 짐입니다. 내가 칠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해야 하는 수고와 짐은 자연발생적입니다. 내가 큰 사업을 하다가 빚을 져서 겪는 고초는 당위적입니다. 이런 짐은 받아들이거나 덜어야 됩니다. 다시 말해 제 몸에 맞게 짐을 지면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 까지를 포함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고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다음과 같은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편애를 받고 있는 약자라는 것입니다. 뭐가 뭔지 알지도 못하면서 허덕이며 살지만 ‘하나님이 내편’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이 사회의 기득권층이라서, 내가 인지하고 했던 그렇지 못했던지 누군가 나로 인해 짐을 짊어지고 힘들게 허덕인다면 내가 그들의 한숨을 닦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거룩한 일의 위임자라는 것입니다.
미국 발 금융 위기 때문에 국가와 백성들이 야단입니다. 환율과는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도, 주식이나 증권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도 ‘폭등’과 ‘폭락’에 예민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근원은 돈인데 사람이 고통을 당합니다. 사람이 고통을 당한다는 말은 그 사람을 구성하는 정신이나 영혼이나 가치와 목숨까지도 적극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와 같은 경제적인 원인으로 인한 삶의 고통과 국가적인 문제에 대해서 식견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리고 돈 이야기는 너무 많은 전문가들이 각기 한 입씩 쏟아 놓기 때문에 그것들을 소화해 낼 능력이 저에게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말씀에 비추어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몸이 견딜 만큼 짐을 진다면 엎어져도 자빠져도 문제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 몸이 견딜 만큼 짐을 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로 인해서 짐을 지고 있거나, 나로 인해 누군가가 수고를 면치 못하고 있다면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고 회개함으로 그 짐을 덜어 주어야 합니다. 그게 물질적이라면 덜어 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이 세상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생활의 실제에서 또 심리적이고 영적인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 때 비로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이 내 안에 성취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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