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요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549 추천 수 0 2012.01.08 23:50:12
.........
성경본문 : 요4:16-24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요4:16-24

2008.11.26

   *지난 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A4용지 16매 분량의 글들을 써야했습니다.
     강단과 목회에 [설교와 독서]라는 제목으로,
     감리교 목회자 부인 신학원의 2시간짜리 강의 준비가 그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영혼은 저절로 은혜의 강에 당도해 있었습니다.
     설교의 영감은 거기서 생겨난 선물과도 같다는 뜻입니다.
     제가 정리해놓고도 다시 읽고 읽으니 특별한 은혜가 임합니다.
     아마  교우 여러분들도 모처럼 상쾌한 은혜를 받게 될 것을 확신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평화!

교회와 신앙의 핵심은 예배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곧잘 '예배 회복'또는 '예배 중심'이라는 말을 씁니다. 뿐만 아니라 같은 선상에서 '예배에 성공하는 사람이 승리한다'고도 말합니다. 그만큼 예배의 중요성이 크다는 말입니다. 사실 교우들을 보더라도 예배에 집중하고, 예배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 중에 신실한 이들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배'에 있어서 갖춰야 할 두 가지 필수 사항에 대해서 말씀 하십니다. 다시 말해 [신령]과 [진정 또는 진실]로 드리는 예배 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서는 [예배]라고 할 수 없다는 말씀이기도 하죠. 오늘 설교는 바로 이 문제, 우리가 이 두 가지 사항에 충족된 예배를 하고 있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예배를 가르치기 위해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을 등장시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이 서로 증오한 역사는 뿌리가 깊습니다. 구약 열왕기 하 17장 24절 이하에서 보는 대로, 사마리아에는 다양한 인종이 살았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과거 다섯 남편은 그들이 섬긴 신들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정도로 사마리이아 사람은 다양한 신들을 섬겼습니다. 주전 722년에 북방의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시킨 정복자 앗시리아는 많은 이스라엘인을 그 지역에서 내 쫓았습니다. 그 대신 다양한 인종을 이주시켰지요. 그래서 사마리아인은 혼합주민이 된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이 자기들의 신을 섬기면서도 야웨 예배를 받아 들였지만, 남쪽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의 종교의 순수성에 회의적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 5경 즉 율법서만을 경전으로 인정하고 예언서나 시편 등을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를 거부하고 그림신 산에 따로 성전을 세웠습니다. 주전 120년대에 그 성소마저 유대인과 요하네스 힐카누스가 파괴하였기 때문에 두 백성들 사이의 적대감은 심화되어 갔습니다. 사마리아인이란 말 자체가 욕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빵을 먹는 자는 돼지(유대인에게 금기된)의 살을 먹는 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사마리아인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은 그 유대인의 수치였습니다. 이러니 서로는 상종할 수 없는 사이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보면, 사마리아 여자와 예수가 수가성 우물가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의 전후 문맥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의 대화는 물로 시작해서 예수가 생명수를 주시는 그리스도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마무리됩니다. 이러한 대화 과정에서 우리는 여인의 과거의 삶이 들추어지고 이어서 예배문제가 논쟁점으로 부각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여인은 예수와의 대화에서 귀가 솔깃한 것이 있었습니다. 물 길러 다니는 것이 지겨웠던 여인, 자신의 지난날 부도덕한 사생활을 들추어내는 우물가 여인들을 피하고 싶었던 여인, 그녀는 예수가 주신다는 다시 목마르지 않고 계속 솟아나는 샘물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시어 여기 물 길러 오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간구 한 겁니다. 그러나 아직도 여인은 예수가 하시는 말씀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요한복음 3장에서 이스라엘 선생이요 의회원인 니고데모가 거듭나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겨우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다시 나오는 정도로 생각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본문 16절에서 예수는 갑자기 여인의 아픈 곳을 찌릅니다. 남편을 데려 오라고 하십니다. 여인에게는 남편 다섯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여인은 한 사내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마리아 여인이 남편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진실이었습니다.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편은 합법적인 남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다섯이라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여인은 놀랐습니다. 얼굴은 화끈거렸으며 당황하지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인은 낯선 예수 앞에서 뜻 밖에도 자기 실존을 돌이켜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자 앞에서 자기의 허물이 폭로 되는 것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사람은 때로 진리를 대면하는 순간, 진리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순수 그 자체 혹은 순수한 마음을 마주 할 때, 순수 그 자체와 동떨어지고 심히 오염된 자기정체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삶의 차원을 생각합니다. 흠모하게 됩니다. 여인은 자기의 정체를 하나씩 들추어내는 것을 보고 예수를 선지자라고 인식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아직은 예수가 바로 메시아임을 깨닫지는 못했어요.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의 수치가 폭로되자 재빨리 말머리를 다른 주제로 돌리는 기민함을 가졌습니다. 그녀는 도덕적인 주제를 이제 종교적 주제로 바꿔서 예배 처소를 쟁점화 합니다. “우리 사마리아인 조상들은 그림신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당신네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더이다.” 사마리아인들이 오랫동안 예배드린 곳이 그림신 산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성서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진입하여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 바로 이 산이었습니다(신 27:4절은 에발산이라 하지만).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친 산이었으며,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곳도 거기였습니다. 사마리아인들에게 그림산 산은 성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그림신 산이 예배 처소라는 것을 부정합니다. 예수도 유대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본문 22절에서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나온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옳은 판단입니다. 왜냐면 바울이 말했듯이 인류 구원사에서 보면 첫째는 유대인이고, 그 다음이 이방인 순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림신 산과 마찬가지로 이 예루살렘도 예배처소 일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말하자면 그림신 산이냐 아니면 예루살렘이냐는 논쟁에 개입하지 않으시는 거죠. 예수님의 생전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지만, 요한복음이 기록될 때는 그 성전은 없어졌습니다. 돌 위에 돌 하나 첩 놓이지 않고 파괴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요한 공동체에게는 예루살렘 성전은 의미가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예루살렘은 다윗 왕조 이래 정치 종교의 중심지였으며 초대교회의 발전은 예루살렘을 기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누가 기자는 예루살렘 지향적인 복음서를 쓰고 사도행전을 기록했습니다. 예루살렘을 거점으로 사마리아, 유대와 땅 끝까지(행 1: 8) 이르는 초대교회사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최초의 복음서 마가복음은 예루살렘을 비하했습니다. 마가에게는 예수를 처형한 곳이 예루살렘이오, 예수를 죽일 음모세력의 집결지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마가에게서 갈릴리는 예수의 활동무대였으며 민중은 그를 따르고 환호한 땅이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땅 갈릴리를 복음의 전진기지로 삼아 갈릴리 지향적 복음서를 쓴 것입니다. 4복음서 중에서 제일 늦게 기록된 요한복음은 유대인과 집요하게 맞서시는 예수 상을 전해 줍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유대인과 적대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공관복음서는 예수의 공생애가 끝나는 수난 주간 벽두에 성전 정화사건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예수의 공생애 초반에 성전 정화를 하신 것으로 쓰고 있습니다. 요한의 예수에게는 예루살렘 성전은 일찍부터 정화대상이었다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본문에서 예수가 예배처소로서 예루살렘을 거부하는 것은 쉽게 이해될 수 있죠?  

그림신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 성소도 아니라면 사마리아 여인은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인가요?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인가요? 예수는 예배드릴 장소로서 그림산 성소도 예루살렘 성전도 거부하십니다. 그 대신에 예배를 드릴 때를 언급하십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를 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릴 때가 오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라는 겁니다.  메시아인 예수가 현존하는 지금이 바로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때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첫째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둘째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차례로 언급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는 어머님 하나님이시던 아버지 하나님이시던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예수가 말씀 하셨듯이 우리의 기도는 골방에서 은밀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금식을 하되 마치 금식하지 않는 자처럼 해야 합니다. 구제를 하되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 보다 사람들을 더 의식하고 기도합니다. 사람들을 의식하고 종교적 몸짓을 합니다. 마틴 루터는 진노하는 하나님 앞에서 번민하고 전율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진노하는 하나님을 잘 모릅니다.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우리를 왜소하게 만들기에 찾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진노하는 하나님을 멀리 하고 자비로운 하나님에 다가섭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활활 타는 불길 속에서 야웨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가 선 땅은 거룩한 땅이니 신발을 벗어라“는 말씀이었지요. 그 종교적 경험으로 모세는 이집트의 바로와 맞섰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쫓기는 신세가 되어 동굴에 숨었다가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호렙산의 경험을 흠모하거나 세미한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 속에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고 그 전능한 행위에 대한 놀라움과 감사와 함께 떨리는 감격이 정녕 있습니까? 우리는 얼만큼 우리가 실존적으로 하나님의 존재 그리고 그의 임재를 의식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 안에 계시며 만유를 통해서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참으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에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예배처소가 쟁점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에 전통적인 의전절차를 따라서, 말하자면 외형적이고 의식적인 절차에 따라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바로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들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인간의 지성과 감성을 충족시키고도 남을 의식적 절차로 세련된 예배가 진행된다고 해도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종교적 유희에 불과할 것입니다. 미가 예언자의 말씀대로 물량적 제사만 있고 정의 실천이 없는 예배(미가 6:7-8)가 참 예배가 아니듯이, 하나님이 자비하듯이 너희도 자비하라는 말씀을 살아내지 못하는 예배도 참 예배는 아닙니다.

영으로 혹은 신령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니고데모는 영생을 소망했습니다. 그는 진리의 탐구자였습니다. 그래서 야밤에 랍비 예수를 찾았습니다. 그는 예수가 하나님이 보낸 분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분이라고도 했습니다. 그 때 그가 들은 예수의 말씀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중생한다는 것(born again)은 새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희랍어 아노센(anothen)은 위로부터 나야 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5절에서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고 했습니다. 매우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아래의 차원으로부터 신령한 차원으로 옮겨가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영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중생의 차원으로 우리를 불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이 매우 소유적 존재요, 탐욕의 존재로서 살아 왔음을 참회하는 때, 참으로 그러할 때 우리는 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근원에서 다시 보고 하찮은 일에 매달렸던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할 수 있지만 실상 죄 많은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고, 자기존재를 순화하려는 몸짓이 영으로 예배드리는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이 다섯씩이나 있는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너의 삶이나 가치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네 자신의 근원을 다시 보고 좀 더 큰 것에 생의 뜻을 두라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신령으로 예배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해 보면 어떻게 됩니까? 소유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거, 탐욕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신령한 차원으로 옮겨 가라는 거 아닙니까? 그게 진짜 예배다 그거 아닙니까? 하나님은 이처럼 참회하는 예배 자, 성령의 감화로써 신령한 차원에 이르는 예배 자를 찾고 계십니다. 참회의 찬양, 참회의 기도, 참회의 말씀, 참회의 예배를 드리는 자들을 오늘도 찾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예배는 진리로 드려야 합니다. 진리는 일반적으로 사실에 일치하는 것, 거짓이 아닌 것을 의미하지만 여기 성서의 진리는 그리스도교적 계시를 말합니다. 이 계시는 하나님이 신실하며 당신의 언약에 충실하다는 것에서 말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고 진실로 예배드리기에 앞서 하나님의 신실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입니다. 그가 길이요 빛이요 생명이며 진리입니다. 우리가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예수 안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진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진리이신 예수에게 소급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림신 산이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림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우리가 지금 진실로 예수 안에 있습니까? 자기 취향과 사상과 희망에 부응하는 예수만을 찾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진리로 진리 안에서 그리고 예수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영이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예배가 성공과 실패를 좌우한다'고 할 때 바로 이런 예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6282 민수기 우리의 구속자 민9:1-14  이정원 목사  2012-01-10 1675
6281 민수기 레위인의 봉헌 민8:1-26  이정원 목사  2012-01-10 2017
6280 민수기 봉헌과 열납 민7:1-17  이정원 목사  2012-01-10 1951
6279 요한일서 왜 사랑인가? 요일4:7-12  허태수 목사  2012-01-08 1857
6278 고린도전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까? 고전13장  허태수 목사  2012-01-08 2277
6277 마가복음 하나님을 믿어라 막11:22-24  허태수 목사  2012-01-08 1964
6276 마가복음 십자가를 되찾는 회개 막1:14-15  허태수 목사  2012-01-08 1109
6275 마가복음 그때 그 사람 막14:3-9  허태수 목사  2012-01-08 1888
6274 고린도후 그릇/인간 됨됨이로써의 고후4:5-7  허태수 목사  2012-01-08 1798
6273 마태복음 엄마를 부탁해 마6:25-32  허태수 목사  2012-01-08 2104
6272 출애굽기 출애굽 그리고 出 성암 출1:1-14  허태수 목사  2012-01-08 1722
6271 마태복음 이런 믿음의 사람들로 마15:21-28  허태수 목사  2012-01-08 1668
6270 사도행전 바로 우리, 나입니다. 행3:1-10  허태수 목사  2012-01-08 2234
6269 누가복음 예수 탄신 2008주년 눅2:1-7  허태수 목사  2012-01-08 1040
6268 요한복음 이 사람들처럼 요2:1-11  허태수 목사  2012-01-08 1594
6267 마태복음 이것이 크리스마스입니다. 마1:1-16  허태수 목사  2012-01-08 1812
6266 마가복음 이맘 때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 막4:26-29  허태수 목사  2012-01-08 1793
» 요한복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요4:16-24  허태수 목사  2012-01-08 2549
6264 요한복음 나도 그들처럼 요13:21-30  허태수 목사  2012-01-08 1888
6263 마가복음 벽 허물기 막5:33-34  허태수 목사  2012-01-08 1933
6262 시편 남과 다른 生을 사는 사람 시103:3-9  허태수 목사  2012-01-08 1887
6261 마가복음 세 마디 가르침, 다다다 막6:30-44  허태수 목사  2012-01-08 2116
6260 마태복음 긴급한 소환(召還) 마11:28-30  허태수 목사  2012-01-08 1682
6259 마태복음 그런 예수는 없다 마8:18-22  허태수 목사  2012-01-08 2073
6258 마태복음 그리스도인입니까? 마14:22-33  허태수 목사  2012-01-08 1824
6257 누가복음 예수라는 네비게이션 눅9:57-62  허태수 목사  2012-01-08 2364
6256 요한복음 그 세 번 째 이야기, 사랑 요21:15-17  허태수 목사  2012-01-08 2137
6255 요한일서 그 두 번째 이야기, 사랑 요일4:7-12  허태수 목사  2012-01-08 1503
6254 요한일서 사랑, 알지만 모른 척 하기 요일4:7-12  허태수 목사  2012-01-08 2019
6253 전도서 하나님의 선물 전5:10-20  허태수 목사  2012-01-08 2093
6252 창세기 내 인생에 복을 주시는 분 창48:12-16  허태수 목사  2012-01-08 1972
6251 요한복음 갈증 渴症 요4:7-14  허태수 목사  2012-01-08 2095
6250 누가복음 쉼 -두 개의 서로 다른 나를 교통 정리하는 시간 눅4:42-44  허태수 목사  2012-01-08 1864
6249 고린도후 은혜 받으셨어요? 고후8:1-9  허태수 목사  2012-01-08 1616
6248 갈라디아 자유하신가요? 갈5:1  허태수 목사  2012-01-08 1492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