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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크리스마스입니다.

마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1812 추천 수 0 2012.01.08 23:50:12
.........
성경본문 : 마1:1-16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이것이 크리스마스입니다.
마태복음 1:1-16

2008.12.9

*'성암교회에서 목회한지 벌써 몇 년인가'이런 생각을 할 일이 생겼습니다.
  오래된 사진첩을 뒤적이다가 십 수 년 전에 다녀온 성지순례 사진 한장을
  발견 했습니다.
  에베소 근방의 [불불산]이라는 곳에서 찍은 [마리아의 집]인데, 기록에
  의하면 마리아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후 [불불산]에서 살았답니다.
  사도 요한이 그녀를 위해 집을 지어 줬기 때문이라는거죠.
  그게 이번 주 설교를 가져왔습니다.
  가능하다면 불불산에 있는 [마리아의 집]사진을 함께 올리겠습니다.
  아울러 교우들도 맨날 하던 그런 크리스마스말고 마태복음이 보여주려는
  크리스마스 정신에 깊이 들어가게 되길 소망합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사람들은 예수 탄생 이야기를 즐겨 극으로 표현합니다. 극의 초점은 언제나 메시아의 탄생을 축하하는 데 있어요. 그런데 예수가 "누구에게서" 태어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 극에서 보면,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기를 잉태하게 되며, 요셉은 꿈속에서 주의 사자의 계시를 받고 나서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사건에 대해서 수동적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기 예수의 탄생에 있어서 엑스트라처럼 느껴집니다. 과연 그럴까요? 적어도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 탄생 이야기를 쓰면서 우리에게 다른 것을 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이러하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마 1:1-2).

유명한 조상들로부터 시작해서 남자들의 이름이 길게 나열됩니다. 그 이름들의 맨 끝에 나타나는 것은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이름입니다.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태어나셨다."
처음에는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았다" 라는 형식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그 형식은 바로 이 구절 전까지 지속됩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 와서 그 형식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낳았다" 라는 형식에서 "낳았다" 라는 동사의 주어는 언제나 아버지입니다. 실제로 아기를 낳은 사람은 어머니이지만 기록상으로는 아버지가 낳은 것입니다. 어머니는 낳아 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머니를 밝힐 필요가 있을 때에는 "......에게서" 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를테면,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라는 표현입니다. 이러한 틀이 끝까지 유지되었다면 맨 끝에는 "요셉은 예수를 낳았다" 또는 "요셉은 마리아에게서 예수를 낳았다" 라는 구절이 나올 법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16절에 나타난 것은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는 것입니다.

16절을, 좀 어색함을 감수하고라도, 헬라어 본문의 순서를 따라서 우리말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낳았다. 그는 마리아의 남편이다.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태어났다. 그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다."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형식은 요셉까지는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그 다음에 바로 "요셉이 누구를 낳고" 대신에 "그는 마리아의 남편이다"가 나왔습니다. 이것은 요셉과 예수 사이에 어떤 단절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요셉 이전까지 열거된 이름들은 예수의 족보가 아니라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의 족보인 셈입니다. 요셉과 예수 사이에 마리아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 때문에 요셉과 예수가 이어집니다. 그리하여 전체는 단순히 어떤 가문의 족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이 되며, 기쁜 소식이 됩니다. 그 소식은 이것입니다.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태어났다."

마태복음 기자는 요셉과 예수 사이에 혈연 관계가 없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고 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다"고 쓸 수도 없는 일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다'고 할 때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다'고 할 때에 '낳다' 라는 동사가 의미하는 바는 다릅니다. 전자는 몸으로 낳는 것을 뜻하지만 후자는 대를 잇는 것을 뜻합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의 족보에서 줄곧 그 말을 후자의 의미로 썼습니다. 그런데 맨 끝에 가서 전자의 의미로 "마리아는 예수를 낳았다"고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낳다" 라는 동사가 전자의 의미인지 또는 후자의 의미인지 혼동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누가 예수를 낳았다'는 틀을 과감하게 깨고 "예수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썼습니다. '예수'를 목적어가 아닌 주어로 사용하였으며, '낳았다' 라는 능동태형을 '태어났다' 라는 수동태형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의 탄생이 그 앞에서 열거된 조상들의 대를 잇는 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임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쟁쟁한 남자들의 이름만 올라 있는 족보에다가 "마리아에게서" 라는 구절을 넣음으로써 예수 탄생의 의미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였습니다. 예수가 "누구의 자손인가" 하는 것 대신에 "누구에게서" 태어났느냐 하는 것을 부각시킨 것입니다.

예수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의미를 밝히려면 그 앞에 나오는 네 여자의 이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입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이들을 언급하는 데는 깊은 뜻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단순히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여자들의 이름을 몇 개 넣기로 했다면 사라, 리브가, 라헬 등의 이름을 넣었으면 될 것입니다. 그런 유명한 여자들의 이름을 적지 않으면서 이 네 여자의 이름을 적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말은 누구입니까? 그는 남편이 자식이 없이 죽자 대를 이을 자식을 낳으려고 당시의 관습에 따라 시동생과 결혼을 한 사람입니다. 그 역시 자식이 없이 죽자 시아버지인 유다는 다말을 친정으로 보냅니다. 막내아들이 아직 어리다는 것이 이유이지만 실제로는 남은 막내아들마저 형들처럼 죽을까 봐 걱정스러웠던 것입니다. 막내아들이 장성한 다음에도 그는 다말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다말은 남편을 두 번이나 잃고 자식도 없이 쫓겨난 기구한 신세가 된 것입니다. 다말은 그런 처지를 숙명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독특한 방식으로 행동하였습니다. 그는 거짓으로 창녀 행세를 하여 시아버지 유다의 아기를 갖게 됩니다. 다말이 창녀 짓을 하여 아기까지 가졌다는 말을 전해들은 유다는 그것이 자신의 아기인 줄도 모르고 크게 노하여서 그를 끌어내어 화형에 처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말의 기지로 그 아기가 유다의 자식임이 밝혀지자 유다는 크게 뉘우치면서 자신이 막내아들을 다말에게 주지 않은 것이 잘못임을 시인합니다. 대역전극입니다. 유다는 필요할 때는 다말을 며느리로 맞이하였다가도 필요가 없어지자 그를 매정하게 쫓아 보냈습니다. 자신은 창녀를 찾으면서도 다말이 창녀 짓을 하여 아기를 가졌다 하니 화형에 처하라고 하는 이율배반의 모습을 보입니다. 당시의 남성 중심의 문화가 만들어 낸, 도덕으로 위장한 부도덕에 다말은 온몸으로 저항하여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잘못을 시인하게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하여 베레스와 세라를 낳음으로써 가문을 위기에서 구하였습니다. 예수의 족보에는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유다가 능동적으로 한 일은 없습니다. 다말이 과감하고도 용기 있게 행동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기록에서는 "다말은 유다에게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대상 2:4).

라합은 누구입니까? 그는 여리고의 창녀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정탐꾼이 여리고에 잠입했을 때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과 용기를 가지고 그들을 도와서 마침내 이스라엘이 그 성을 차지하도록 결정적으로 도운 사람입니다. 수천의 남자도 할 수 없는 일을 혼자서 해낸 사람입니다.

룻은 누구입니까? 그는 남편을 여의고 두 아들마저 잃은 처지에서도 낙망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면서 시어머니 나오미를 떠나지 않은 사람입니다. 룻의 이런 모습이 보아스를 감동시켰지만, 보아스는 처음에는 선뜻 그를 아내로 맞이할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나오미가 지혜롭게 권하여서 룻이 용기 있게 밤중에 보아스를 찾아갔을 때에 보아스는 그를 아내로 맞이할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룻이 아들을 낳았을 때에 이웃 여인들은 나오미에게 "일곱 아들보다 더 나은 며느리가 아기를 낳아 주었다" 하면서 축하하였고,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면서 환호하였습니다(룻 4:13-17). 기록에는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다" 라고 되어 있지만(룻 4:21; 대상 2:11), 그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웃 여인들은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또는 "룻이 아들을 낳았다" 하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역사를 아는 마태복음 기자는 이미 있던 기록에다가 "룻에게서"를 첨가하여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라고 쓴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짧은 구절에서 그 길이를 능가하는 의미를 읽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야의 아내'는 절대 권력자인 다윗 왕의 횡포 앞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강제로 왕의 침실로 끌려간 여자입니다. 그것은 분명한 강간입니다. 그 일로 그가 임신하게 되자 왕은 책임을 회피하려고 우리야를 급히 전장에서 돌아오게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이미 눈치챈 우리야는 그의 아내에게로 가지 않고 밖에서 잠을 잡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안 왕은 야비한 방법으로 우리야를 죽여 버립니다. 강간을 당하여 임신을 한 것도 분하고 수치스러운데, 그 일로 하여 남편이 죽임을 당하고, 더욱이 강제로 그 원수를 새 남편으로 맞이해야 했으니, '우리야의 아내'가 겪었을 죄책감과 고통을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어쨌든 그는 왕비가 되지 않았는가' 하면서 그가 겪었을 고통을 과소평가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강제와 체념 속에서 얻은 '다윗의 아내' 자리가 어찌 자유롭게 사랑하는 '우리야의 아내' 자리만 하겠습니까. 마태복음 기자가 '밧세바' 라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으면서도 '밧세바에게서' 라고 쓰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라고 쓴 것은 행복한 '다윗의 아내'가 아니라 그런 기구한 운명의 여인에게서 사람들이 칭송하는 솔로몬이 태어났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다말, 라합, 룻 그리고 '우리야의 아내' 이 네 사람은 모두 험한 인생을 살면서도 낙망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서 가문의 대를 잇고 그 가문을 일으킨 사람들이며, 진정한 용기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그 유명한 선조 어머니들의 이름을 적지 않으면서도 이 네 사람의 이름을 적은 것은 그들의 그러한 삶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가 예수의 족보 맨 끝에다가 "마리아에게서" 라고 쓴 이유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지요?

마리아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단편적인 것밖에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그는 결혼하기 전에 임신을 하게 되어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와 정혼한 요셉마저도 조용히 파혼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때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마리아가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했음을 알려주었는데 이는 파혼을 하지 말도록 설득하려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성극에서는 으레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누가복음을 따른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주의 사자가 마리아가 아니라 요셉에게, 그것도 꿈속에서 나타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요셉이 그 꿈을 한낱 백일몽이 아닌 진정한 천사의 계시인 줄 믿었다 하더라도, 또 그러한 것을 마리아에게 아무리 잘 설명했다 하더라도, 마리아가 어찌 불안에서 아주 벗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를 키우는 동안, 그가 앞으로 사람들을 구원할 그리스도임을 마리아가 믿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비밀로 지킬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헤롯이 그를 죽이려고 광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예수가 장성하여 활동을 할 때에도 예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긴 것을 보면 마리아 주변의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마 13:57).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면서 "머리 둘 곳이 없이" 살았으며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공적인 활동을 시작한 다음부터 마리아는 그를 잘 만날 수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다가 그를 찾아갔을 때에 그는 "누가 나의 어머니며, 누가 나의 형제들이냐?" 하고 말하였으니(마 12:48) 이미 품안의 자식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어머니로서 마리아가 겪었을 외로움이나 아픔은 어떠했겠어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에 마리아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형수의 어머니라는 치욕스런 오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리아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부활했으며, 그의 이름으로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고 그분이 하던 일을 계속해서 한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을 보면서, 평생 동안 속으로 맺혔던 한은 풀어졌을 것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다음에 마리아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복음서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알려 주지 않습니다. 에베소에 가면 [불불산]이라는 곳에 사도 요한이 마리아를 위해 지어 줬다는 집이 있지만 그렇게 전해 질 뿐 아무도 여인의 최후를 알지 못합니다.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태어났다"는 구절 바로 다음에 "사람들이 그리스도라고 하는"이라는 수식구가 따라 나오는데 이는 마태복음 기자가 그 글을 쓰고 있는 당시의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며 그를 높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많은 삶을 산 나이든 마리아는 별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의 어머니로 기억할 뿐입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본 예수의 족보에는 마리아의 이름조차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룻기에 나오는 다른 족보에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등의 이름이 없는 것 같이 말입니다(룻 4:21). 이런 상황에서 마태복음 기자는 "마리아에게서 사람들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태어났다"고 파격적으로 적었습니다. "그는 다말, 라합, 룻 그리고 '우리야의 아내'와 같이 한 많은 삶을 살면서도 꿋꿋하게 살아서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운 어머니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로 높이는 예수는 바로 그 마리아에게서 태어났습니다" 하고 쓴 것입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거리거리마다 "예수가 태어났다" 하고 외치면서 축하하는 사람들로 가득할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성극을 준비하고 새벽송을 돌고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기뻐할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행복을 확인하면서 감사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시간에 오늘의 마리아, 이 사회로부터 하찮게 여겨짐을 당하는 ‘이 시대의 마리아’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젊고 행복한 사람들의 환호성과 축제의 불빛에 가려 존재도 없이 쓸쓸히 지내고 있지는 않는가요? 그렇다면 "예수가 태어났다"는 외침은 공허한 것이며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도 자기도취에 지나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는 그런 반쪽 짜리 외침으로는 오지 않습니다.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태어났다"는 온전한 외침이 우렁차게 울려 퍼질 때 옵니다. 이 땅의 마리아들, 존재도 없이 살아온 어머니들의 삶을 온전히 축하하고, 지금 우리가 누리는 좋은 것들이 모두 그들의 품에서 나왔음을 고백할 때에, 크리스마스는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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