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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마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104 추천 수 0 2012.01.08 23:5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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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6:25-32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엄마를 부탁해  
마 6:25-32  
2009.1.25


지난주에 저는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읽었습니다. 어떤 영적인 기대감이 그 소설 속에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엄마를 부탁해’는 인간관계의 붕괴를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엄마’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세상이 변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필연성을 주장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고의성이 짙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우리는 지금 엄마를 누군가에게 또는 무엇에게 ‘부탁’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왔습니다. 가끔 대중기도를 하거나 개인 기도를 할 때 ‘당신’이라는 호칭을 듣게 되면 불쾌감이거나 불경스러운 어감을 갖는 것도 이런 하나님에 대한 이름의 익숙함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세례를 할 때도, 복을 빌 때도 아버지-아들-성령의 이름으로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버지’ 할 때 그것에 대한 인상은 근엄하고 권위주의적인 것입니다. 특히 우리 동양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게 느껴집니다. 대부분의 자녀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에 하나가 있다면 “너 그렇게 하면 아버지한테 이른다.”일 것입니다. 그래서 ‘엄부자모’라는 말도 생긴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서 하나님의 종인 성직자들도 아버지 적인 권위를 행사해 왔습니다. 구교에서는 성직자를 아예 신부(Father)라고 부르면서 절대권을 행사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름으로 인해서 ‘하나님’ 하면 권좌에 앉아 심판하시는 엄한 분이 머리에 떠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무서운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아버지 종교가 되어 버린 거죠. 그래서 아버지처럼 호령하고, 가르치려고 하고, 급기야는 싸우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가부장적인 종교가 된 것입니다.

오랫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전능하신 주, 창조의 主/ 영존하시는 분/ 싸움에 능하신 분 등 전지전능하신 초월자로 불렀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본격적으로 부른 예언자는 예레미야가 처음입니다.

“나는 너를 아들로 삼아 기름진 땅을 주고 싶었다. 뭇 민족 가운데서 너에게 가장 아름다운 유산을 주고 싶었다.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행여 나를 떠나지 않기를 바랬다. 그런데 애인을 배신하는 여인처럼 너 이스라엘 백성은 나를 배신했다. 배신한 자식들아 돌아오너라.” (렘 3:19-22)

바벨론에 잡혀갔을 때 이사야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의 죄에 깔려 쓰러져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야훼여 당신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흙, 당신은 우리를 빚으신 이 우리는 모두 당신의 作品입니다. 야훼여,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죄를 영원히 기억하지 마십시오.(사 64:7-8)

왜 저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을까요? 성서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이들이 어떤 심정으로 그렇게 불렀겠는가 말입니다.

먼저 이스라엘을 아들이라고 부르신 하나님의 심정을 예레미야의 시를 통해 음미해봅시다.

“나는 너를 아들로 삼아 기름진 땅을 주고 싶었다. 뭇 민족 가운데서 너에게 가장 아름다운 유산을 주고 싶었다. 나를 아비라고 부르며 행여 나를 떠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애인을 배신하는 여인처럼 너 이스라엘 백성은 나를 배신했다. 배반한 자식들아 돌아오너라." (렘 3:19-22)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심정이 무엇이었을까요? 이사야의 표현을 다시 보십시다.

“우리는 모두 자기의 죄에 깔려 쓰러져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야훼여 당신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흙, 당신은 우리를 빚으신 이 우리는 모두 당신의 작품입니다. 야훼여,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죄를 영원히 기억하지 마십시오.”(사 63: 8-9)

자기들의 죄로 말미암아 형벌을 받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자비심이 많으신 아버지와 같은 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가부장적인 전통에서는 용서란 아버지가 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하는 용서는 효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그의 자비심에 호소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어떨까요?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을 아주 가까이 계시는 아버지로 모셨습니다. 주기도문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을 때도 “하늘 아버지는 너희들에게 더욱 좋은 것으로 주시는 인자하신 분”이라고 깨우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하셨을 때에도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그의 옆에라도 계시는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때를 쓰는 모습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의 사고의 한계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인들을 인간 취급을 하지 않았었습니다. 여자들은 셈에 들지 않았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5천 명을 먹이셨을 때도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하고 5천 명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런 문화 속에서 하나님을 어머니와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생각이라고는 머리에 떠오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엄한 심판자로 여기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만 해도 혁명적인 것이었지요.

사실 예수님은 권위주의적인 [아버지]신관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막3:34-35). 아버지 보다는 어머니의 역할에 더 무게를 두셨습니다. 초대교회는 여성 지도자들이 복음 전파에 앞장서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못 마땅하게 여긴 아버지들이 늘 문제를 삼았습니다. 눅10:41-42의 마르다 와 마리아 자매의 이야기는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생긴 갈등을 보여줍니다. 오죽하면 바울은 ‘여자들은 집에 가서 궁금한 것을 남편 에게 묻고 교회에서는 입을 닫아라’고 합니다. 이런 가부장적인 전통사회에 생겨난 초대교회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바로 [사랑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당시 가부장적인 사회가 만들어낸 절충점이었습니다.

약자들을 향한 예수님은 정말 어머니와도 같은 인자한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악의 세력에 대항하실 때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까지 악을 생명을 사랑하는 선으로 대항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보세요. 그를 위해 우는 여인들을 보면서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의 후손들을 위해서 울라”고 말씀하셨지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보시면서 “하나님.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이 그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중재의 기도를 올리셨지요? 숨을 거두기 전에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하는 사형수에 “네가 오늘 나와 같이 낙원에 있으리라.” 속삭였지요? 그는 끝까지 따듯한 어머니의 심정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인류의 소망인 것은 이렇게 끝까지 사랑으로 일관하셨기 때문입니다. 불의에 대해서 자기 고난에 대해서는 아버지처럼 사셨고,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서는 어머니처럼 사셨습니다.  

설날입니다.
부모님을 찾아서 절을 하면서 [아버지] [어머니]하고 부르는 날입니다. 그 부름 속에 모든 게 다 들어 있지요. 그러면서 우리는 지금 점점 내 어머니 아버지를 뭣엔 가에 맡기려는 이 풍조를 경계해야 합니다. 자칫 하다간 [하나님 아버지] 또는 [하나님 어머니]조차 그 뭣에 맡겨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번 명절에 ‘엄마를 맡아줘’그 말 하려는 건 아니시지요? 그런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시지요? 그러다가는 [하나님도 맡아 줘]하게 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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