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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후4: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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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그릇/인간 됨됨이로써의
고후4:5-7
2009.2.1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7절).
제가 잘 아는 장로님이 있습니다. 그가 섬기는 교회는 집에서 멀기 때문에 새벽 기도회는 집 가까운 교회에 나갑니다. 그런데 그(새벽 기도회 나가는)목사님은 설교말씀도 아주 은혜롭지만 얼굴이 어찌나 환한지, 가끔 그의 아내는 남편에게 귓속말로 “목사님 얼굴에 불을 켠 거 같지요?”한다는 겁니다. 만날 때마다 그 이야기를 듣습니다. 지난주 예배 후에 만났을 때 또 얼굴 환한 목사님 이야기를 하시는 거였습니다.
오늘 설교는 믿는 사람을 질그릇에 비유 했던 바울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람의 인물됨을 말할 때 ‘그릇이 크다’ 또는 ‘그릇이 작다’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그릇의 크기로 사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릇의 질 즉, 무엇으로 만들었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빚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창조자시니까 그릇을 만든 장인으로 그리고 사람은 피조물이니까 질그릇으로 비유되곤 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처럼 사람됨을 그릇에 크기에 비유하여 ‘크다’ 또는 ‘작다’는 것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종류의 그릇이냐를 묻는 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은 ‘질 그릇 같은 사람이야’ 하거나, ‘금 그릇이야’ 또는 ‘청자 같은 사람이야’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성서는 부득불 사람을 질그릇에 비유합니다. 왜 일까요? 질그릇은 말 그대로 진흙으로 만든 그릇입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든 것 가운데서도 가장 평범하고 값싼 것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재료의 그릇에 비해 볼품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견고한 것도 아닙니다.
질그릇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가 갖고 있는 질그릇에 대한 생각부터 바꿔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유약을 바르고 구워서 겉에 윤기가 흐르는 사기나 옹기그릇을 연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고 있는 질그릇은, 그런 것이 아니라, 고분 발굴 현장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유약을 바르지 않은 황토 빛 토기입니다. 그런 그릇은 물을 담으면 꼭 물이 그 안에 스며들거나 흙의 성분이 물에 녹아 나올 것만 같지요. 물론 실제로는 질그릇을 그렇게까지 약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적어도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질그릇은 그 안에 담긴 것이 조금이라도 스며들 수 있는 그릇이라는 통념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질그릇에 부정한 것이 담기거나 부정한 사람이 질그릇을 만지면 그 그릇이 부정해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레11:33; 15:12).
이와 같이, 질그릇의 특성은 그 안에 뭘 담느냐에 따라서 그릇 자체가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독 많은 그릇 중에 성서는 사람을 질그릇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이걸 염두에 두고 말씀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지위고하, 소유의 빈부, 지식의 유무를 막론하고 모두 다 질그릇과 같다고 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것을 전제로 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은 어떤 종류의 그릇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안에 뭘 담느냐 하는 게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이해되십니까? 바울은 담긴 그것이 그 사람의 ‘보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에게 있어서 질그릇 같은 그 속에 담긴 보물은 무엇이라고 하나요? 그렇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보물은 ‘예수그리스도’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그 자신은 질그릇 같은 존재이지만 그는 예수를 담고 있기 때문에 결코 하찮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은 성문으로 올라가다가 태어날 때부터 앉아서 생활하는 사람을 만났던 베드로의 고백에서도 볼 수 있었죠? 어떤 의미에서 이 고백은 과거와 미래의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고백요건입니다. 질그릇은 어떤 게 담기느냐에 따라 그릇의 질이 변합니다. 이게 당시대 사람들의 이해이고, 이 이해를 따라 오늘 말씀의 비유가 가능합니다. 맞나요? 그릇의 종류가 지닌 우월성이 아니라 그릇에 담기는 내용이로 인해 일어나는 용기의 변화가 중심입니다. 대부분의 그릇은 그릇과 용기가 결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래야 좋은 그릇입니다. 금 쟁반에 김치 국물이 스며들어 그릇에서 김치 냄새가 난다고 하면, 그걸 좋아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질그릇은 아닙니다. 음식의 내용물과 그릇이 융해합니다. 하나가 됩니다. 아니, 그릇이 내용물의 질로 옮겨 갑니다.
바울이 말하는 ‘보물을 담은 질그릇’도 이런 의미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빛이 이 세상을 비추었고, 우리는 이 빛을 담고 있는 질그릇이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질그릇의 의미는, 그저 값싸고 깨어지기 쉬운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가장 소중하고 값진 것으로의 변화가 가능한 재료라는 뜻입니다. 그럼 바울이 말하는 질그릇 속에 담긴 것은 무엇인가요?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고후 4:6).
바울은 대조법을 잘 사용합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첫 사람 아담과 대조하여 마지막 아담이라고 하였지요(고전 15:45).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처음 비춘 환한 빛을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환한 빛과 대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빛이 이 세상을 비추는 빛이라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빛은 우리 마음속을 비추는 빛이요 우리 존재를 밝히는 빛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질그릇 같은 존재이지만 바로 이 빛을 담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빛을 간직한 존재이기에 속에서부터 우러나는 환함, ‘존재의 환함’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햇빛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나오는 환함으로 사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렇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나 세상에서 우리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사회적인 지위나 권세 소유 또는 교회에서의 직분 따위가 아니라는 겁니다. '존재를 환하게 밝히는 빛' 즉 ‘예수’ 로 만 우리 자신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자랑이요 힘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라는 겁니다.
우리 민족은 본래 환한 것을 좋아했다고 하죠. 환한 해를 찾아 해 뜨는 곳을 찾아서 이곳 한반도까지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새 해 첫날 떠오르는 해를 보려고 동쪽으로 몰려가는 것도 우리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는 습속입니다. 환한 달이 뜨면 쳐다보고 춤추는 것을 좋아해서 정월대보름 팔월한가위 같은 명절이 생겼지요. 단군신화에 나오는 환인(桓因)은 ‘환한 분’이라는 뜻이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성도 ‘밝’ 자에서 나온 것이지요. 백두산, 태백산, 소백산, 장백산 등 신령한 산에는 백(白) 자가 들어가는데 그것도 ‘밝’ 자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밝은 것을 좋아해서 그런지, 우리 민족에게는 존재 속에서 드러나는 환함이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수난을 겪었지만, 사람들의 표정이 참 밝습니다. 한국 사람의 얼굴 하면 대개,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의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 하회탈의 함박웃음, 신라 흥륜사지 수막새 기와에 나타난 은은한 미소, 신라 토우들의 수더분한 웃음 같은 것들을 떠올릴 것입니다. 이런 문화재들이 참으로 귀한 것은, 그 예술적인 면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 민족의 존재의 환함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문화재들을 볼 때마다 그 얼굴이 꼭 어릴 적 시골에서 만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웃는 얼굴과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어릴 때 아버지께 천자문을 깨친 다음에 계몽편이라는 다음 단계의 한문을 잠시 배운 적이 있습니다. 거기 ‘구용(九容)’ 즉 ‘아홉 가지 올바른 몸가짐’에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다 말 할 수는 없고요, 맨 마지막에 ‘색용장(色容莊)’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게 뭔고 하니, 얼굴을 환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신변이나 영혼에 유익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덕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 얼굴을 환하게 하지 않는 것은 올바른 몸가짐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병들고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병을 고쳐주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항상 그 병든 사람이 기를 펴고 밝게 살도록 해 주셨습니다. 병을 고쳐 주고 나서 항상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고쳤다”, “병에서 놓여서 평안하거라”, “네 죄가 사함을 받았다” 하고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병을 고쳐 주는 것뿐 아니라 병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죄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어서, 그 사람의 존재의 환함을 찾아 주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단지 타인의 질병에 대해서만은 아닙니다. 자기와 같지 않은 상황의 사람을 받아들이는 일에 있어서 그는 언제나 환한 존재였습니다. 예수의 이런 존재 방식은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해 주지 않습니까?
바울 사도는 질그릇 같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을, 이 보물을 간직하고 산다고 했습니다.
이 시간 우리도 한 번 이 말씀을 확인 해 보았으면 합니다. 정말 내 속에 그리스도의 환한 빛이 스며들어 있는가! 그것으로 나를 말하고 드러내는가! 그리고 그것만이 나의 자랑인가! 그리고 그 빛이 두루 밖으로 퍼져 나가고 있는가! 얼굴도 마음 씀씀이도 내 속에 담겨진 그분의 인격이 드러나는가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질그릇 같은 우리가 예수를 온전히 담았다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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