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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일4:7-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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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왜 [사랑]인가?
요1서 4:7-12
2009.3.8
지난주에 우리는 고전 13장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바울에게서 체득되고 고백되는 예수 십자가의 [사랑]이 세상이 말하는 '사랑'과 어떻게 다른지를 알았습니다. 오늘 저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리스도 이후로부터 앞으로 오는 세대에 이르기까지 왜 삶과 신앙의 유일한 가치인지를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요한을 [사랑]의 사도라고 합니다. 이 말은 단지 그가 [사랑]을 부르짖으며 살았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가 이해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현존을 의미하며,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가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가치이기도 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그의 글들은 온통 [사랑]이라는 말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읽은 요한1서 4장은 '어떤 영(靈)이 진짜냐 가짜냐'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속해 있으면 진짜고 속해 있지 않으면 가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아는 방법으로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구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군가 예수님이 육체로 오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들은 누구이며 왜 그렇게 주장하는 것입니까? 영지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구원자이신 것만은 분명하지만, 예수님의 영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지 그의 몸과 삶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몸과 영이 함께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영만이 구원을 받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도 기도나 고행을 통해 육체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론이 초대교회 안에, 요한 공동체 안에 들어왔던(3절)것입니다.
요한은 이들의 이론과 주장을 배격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영지주의자들처럼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사랑할 때'라고 합니다(4:7-8). '사랑'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이지 영지주의자들처럼 무슨 신령한 방법이 있어야 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12절). 이 말은 당시에 기상천외한 발언이었습니다. 그런데 2천년이 지난 지금도 당혹스러워들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여태 이 영지주의적인 신앙관과 유대교적 신앙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그동안 교리와 형이상학의 우매함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요한의 이 선언 즉,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으로 하나님께 속한다'는 말은 신비주의적인 신앙 태도 즉 형이상학적인 신앙을 부정하려는 의도에서 하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사람이 기도나 고행과 같은 것을 통해 그 영이 하늘로 올라가야 -육체나 이성적인 의식의 밖에서 생기는- 하나님과 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당시의 영지주의적 신앙관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을 해석하는 일에 있어서도 혁명적인 발언입니다. 구약에는 여러 자료들이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자료에는 하나님이 직접 사람들과 접촉 합니다. 그 다음은 간접으로 꿈, 환상, 또는 천사 같은 것을 통해서 사람에게 자신을 내 보입니다. 그리고 좀 더 후기로 내려와서는 제사를 지내는 그 순간에만 사람은 하나님을 경험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마지막 계열이 성전 중심의 종교, 즉 의식 종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저들은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럼 아브라함과 같은 많은 족장들이 하나님과 대화했다는 것을 일체 부정하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난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이 몸 밖으로 나가는 어떤 신령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본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일상적인 상태에서의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상 구약 족장들의 신앙은 어떤 신비주의도 아니었고 이론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삶에서 나타난 일입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요한의 선언은 영지주의가 말하는 방식으로 보는 하나님, 유대교적인 제사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난다고 말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창조 역사 이래 개별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한 여러 경우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다의 율법주의는 사람과 하나님이 만날 틈이 없었습니다. 계명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은 저 멀리 어딘가에 있는 피안적인 하나의 힘으로 여겨졌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삶속에 함께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상이 되는 거죠.
요한은 신비한 행위를 통해서 영적으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영지주를 배격합니다. 또 유대교의 율법처럼 형식과 절차 속에서 행해지는 예배에서만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도 거부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이론을 선언합니다. '사랑하라 하나님은 사랑이다'는 것입니다. 사실 초기 교회 이후 교회의 가르침과 실천은 여기에 집중되고, 모든 교리와 실천은 이 '사랑'에 있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 중요한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진보 발전시키지 않았습니다. 2천년 동안 수없는 사랑 법이 나와야 했습니다. 사랑에 실패한 이야기들을 가르쳤어야 했고, 사랑에 성공한 이들에게 배웠어야 했습니다. 요한은 당시 다시 제도화 되고 신비화 되는 예수 십자가의 사건에 대해서 경계하기 위해 오늘 본문으로 읽은 말씀들을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려고 다시 신비를 사모하고 주장합니다. 예배와 같은 예전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시대에서 도태하는 원인입니다. 초기 기독교회 공동체의 신앙관은, 하나님 관은, 영에 대한 이해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떠나서는 하나님도 믿음도 구원도 없습니다. 사랑을 떠나서는 십자가도 예수도 없습니다.
요한에 의해서 기독교 공동체의 주제로 설정된 '사랑하라 하나님은 사랑이다'는 말은 세밀하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첫째, 하나님은 율법을 내세워 사람들을 협박하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무서운 분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사람들의 삶에 내 놓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과 관계되어 있다는 뜻이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그게 9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한다는 실증으로 자신의 아들을(즉 그 자신)사람들에게 내 맡겼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육체를 지닌 사람들의 삶에 육체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의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 행위가 사랑이고 그 실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우리들 생활과 현실에서 멀리 떨어진 세계에 계신 어떤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다시 유대교화 하거나 신비하게 하려는 당시의 교조적인 사조들을 물리치는 말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고 어떤 분이시냐? 우리들의 삶속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사는 3차원의 세계가 아니라 4차원쯤에 있으면서 홍길동처럼 불쑥불쑥 나타나는 신비한(이상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너와의 관계에 있어서 존재하는 분이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나와 너, 즉 [우리]라는 범주 안에서 성립되는 분이지 유아독존적이지 않다는 말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라는 말이 아들, 딸과의 관계를 벌써 전제하고 그 앞에서만 성립되듯이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하는 말에는 벌써 사랑을 나눌 자가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피안에 도사리고 있다가 가끔 경우에 따라 내려와서 사람들의 삶에 간섭하는 이가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과 관계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나를 떠난 그, 또는 그를 떠난 나를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말하는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들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뵈오려면 부지런히 사랑하고 사랑해야 했습니다. 자꾸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시편 42편에서는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며 그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원수들의 힐난에 대답할 길이 없어 호소합니다. 요한복음에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여줄 수 있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예수는 그래서 그 빌립의 요구가 부당한 것을 지적하면서 '네가 나와 그렇게 오래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보여 달라느냐? 나를 보았으면 하느님을 보았을 텐데'라고 말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길은 단지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밤이고 낮이고, 억울하고 원통해도, 밉도록 죽이고 싶어도, 사랑 하는 한 가지 밖에는 없습니다. 그게 기독교 신앙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방식이나 유대교에서 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것은 거짓이라고 하면서, 진짜는 12절에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는' 그것이야 말로 진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라는 겁니다. 이게 요한 공동체가 가르치는 십자가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 공동체의 생명이기도 합니다. 미래에 교회가 존재해야 한다면,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 가운데 있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이것입니다. '사랑' 말입니다.
현대는 테크놀로지의 시대입니다. 우리는 과거와 비교해 보면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하나님은 필요 없는가요? 아니, 바로 이 시대가 매스컴의 시대, 테크놀로지의 시대이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고독합니다. 그것은 내가 늘 제3인칭인 '그것(es)'으로 취급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문명은 테크놀로지지만 사랑에 대한 갈구만은 여전히 팽창해 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되레 하나님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말은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그런 하나님, 이상한 기독교 공동체가 가르치는 4차원에 계신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유대교의 예전처럼 예배에서나 부르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사랑하는 삶 속에서 어디서나 언제나 만날 수 있는 하나님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은 사랑으로서 언제나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이유입니다.
그러니 인류 역사가 계속 되는 한 예수도 십자가도 그의 삶과 그의 희망도 유효한 겁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오직 이 [사랑]에 집중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신비'를 찾거나 '의례'를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산업사회 이후 기독교를 지탱하는 원천이 될 것입니다. 기독교가 앞으로도 있어야 한다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사랑]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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