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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51:9-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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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
축복을 부르는 5가지의 ‘기’ (이사야 51장 9-16절)
사람이 가까웠던 사람을 떠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의 더욱 큰 뜻을 위해 그런 아픔도 감수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어부 안드레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저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라고 하자 안드레는 과감히 세례 요한을 떠나 예수님께 갔습니다. 그래도 세례 요한은 결코 배반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언제나 예수님을 위해 누군가를 떠나보낼 준비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잘 따르려면 때로는 인간관계도 기쁘게 버리고 더 복되고 찬란한 길을 위해 좁은 문을 선택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안드레는 수많은 군중을 몰고 다니며 당시의 메시아로 착각될 정도의 파워를 가진 세례 요한을 떠나 아직 제자가 한 명도 없을 때 예수님을 따라나섬으로 예수님의 최초의 제자가 되는 좁은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자기 존재를 건 엄청난 모험이었지만 그 모험은 결국 지상 최대의 축복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이제 안드레처럼 많은 군중에서 탈피해 120문도의 이너써클 안으로 들어서고, 더 나아가 70명의 헌신써클로 들어서고, 더 나아가 12명의 제자써클로 들어서십시오. 그처럼 큰 공동체에서 군중으로 지내는 삶을 떠나 소수의 공동체에서 개척의 길을 걷는 영적인 모험을 감행함으로 하나님이 원래 계획하신 자신의 최상의 축복된 운명을 향해 담대하게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으십시오.
물론 떠날 때는 최대한 축복 받고 떠나십시오. 세례 요한은 안드레가 자신을 떠나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 배반감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축복해 주었을 것입니다. 만약 한국 교계에서 수만 명의 담임목사가 제자가 하나도 없는 무명의 목사에게 성도를 떠나보내면서 좁은 길을 선택한 것을 대견하게 보고 “집사님! 하나님이 그 길을 축복하실 것입니다.”라고 축복해주며 보내면 얼마나 신선한 충격이 되겠습니까?
결국 떠난 안드레도 훌륭하지만 떠나보낸 세례 요한은 더욱 훌륭합니다. 목회자는 세례 요한처럼 잘 떠나보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모습을 한국 교계에서 기대한다는 것은 요원한 일일까요? 많은 큰 교회들은 작은 교회로 사람을 보내는 그 복된 길을 외면하고 오히려 거꾸로 합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장면입니까?
한국 교회의 가장 타락된 모습 중의 하나가 목회자가 세례 요한의 위치에 서지 않고 메시아의 위치에 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끌어 모을 생각’만 하고 도대체 ‘떠나보낼 생각’을 안 합니다. 결국 그런 태도로 인해 불신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는 교회의 대부분의 타락한 모습들이 생깁니다. 결국 끌어 모으기만 하는 것은 장기적으로는 망하는 길이고, 또한 끌어 모으기만 하는 사람을 따르는 것도 결국은 망하는 길입니다.
목회자는 세례 요한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위해 제자를 개척자의 길로 잘 떠나보낼 줄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도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은 어느 길을 원하실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늘 기억하며 인간적인 뜻과 안락함을 외면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 축복을 부르는 5가지의 ‘기’ >
본문은 어떻게 살아야 자신에게 예정된 축복을 얻어 누릴 수 있는지 축복을 부르는 5가지의 ‘기’로 시작되는 덕목을 도전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 기도하십시오
본문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이 구절에서 라합은 이사야 30장 7절 말씀을 보면 ‘애굽’을 뜻합니다. 즉 출애굽하게 해주신 하나님이 능력을 베풀어주셔서 현재의 어려움을 벗어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구절에서 바다는 ‘홍해’를 뜻합니다. 홍해에 길을 내어 구원해주신 하나님이 어떻게 기도를 들어주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말은 기도는 곧 응답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진실한 성도에게 기도시간은 가장 설레고, 가장 기대되고, 가장 기쁜 시간입니다. 삶이 편하면 기도가 그저 의무가 되어버립니다. 물론 기도를 의무로 해도 안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성도는 기도를 하나님과의 대화나 데이트로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결혼 전 데이트를 할 때 얼마나 하루가 짧게 느껴집니까? 어제 말씀 준비하는데 그때가 생각났습니다. 의정부에 사는 아내를 집에 데려다주고 졸면서 집에 돌아오면 거의 자정을 넘었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그때가 새록새록 생각나서 어제 말씀 준비하다 말고 집으로 전화했습니다. 그리고 무드를 잡으려는데 아내가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왜 전화했어요?” 할 말이 없어서 그냥 했다고 하니까 아내가 말했습니다. “그럼 끊어요.” 그래서 10초 만에 그냥 끊었습니다. 너무 무드가 없습니다.
저도 32살에 결혼해서 내년이 결혼 20주년이라 이제는 별로 불꽃도 없고 감흥이 없습니다. 결혼 전에는 ‘상대’가 목적이기에 어디를 가도 좋았는데 지금은 ‘목적지’가 목적이기에 어디를 가야 할지 한참 고민합니다. 전화해도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그처럼 세월의 흐름을 어쩔 수 없지만 기도생활은 그렇게 건조해지면 안 됩니다. 그러면 가장 효율적인 축복의 통로가 막힙니다. 하나님은 계속 데이트하고 싶으셔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처럼 기도 생활이 의무가 아닌 하나님과 깊은 대화와 친밀한 교제가 되게 하십시오.
2. 기뻐하십시오
본문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해방될 때의 기쁨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 기쁨은 사실상 모든 성도가 누려야 할 기쁨입니다. 사실 구원받고 영생을 얻은 것을 정말 확신하면 그 다음부터는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과 감사와 감격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에 나타나는 가장 뚜렷한 특징이 무엇입니까? 삶 자체에 대한 감격과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것입니다. 그때는 환경도 아름답게 느껴지면서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이란 찬송이 정말 실감나게 불러집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의 신비는 내가 살아있는 신비이고 최고의 축복은 내가 살아있는 축복입니다. 그처럼 순간순간 지금 살아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감격하며 어려운 현실 중에서도 감사를 잃지 마십시오.
꽤 오래 전에 살인마 지존파 무리들에게 희생된 한 사업가가 납치된 후 사정했습니다. “저를 살려만 주십시오. 돈은 다시 벌 수 있으니까 원하는 대로 신고하지 않고 주겠습니다. 지금 회사가 부도 직전인데 다시 회사에 돌아가 회사를 살릴 기회를 주십시오.” 얼마나 절실한 말입니까? 적어도 살아있어야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현재 살아있기만 하면 기회는 있고, 기회가 있다면 기뻐할만한 이유도 충분합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아침에 기쁜 얼굴로 등산을 떠났습니다. 그러다가 사고를 만나 저녁에 시신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런 사별의 아픔으로 절망적인 상처를 입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우리와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이 그저 잘 살아있다는 사실만 생각해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제 아무리 큰 문제가 있어도 그 문제 때문에 삶에 대한 감격과 감사를 잃지 말고 항상 기뻐하며 사십시오.
3. 기운 내십시오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 이 말씀은 사람의 위로를 너무 바라지도 말고 사람을 너무 두려워하지도 말라는 말씀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운을 내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은 자신은 남들처럼 인맥도 없고 물질도 없고 학력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바로 그 생각이 문제입니다. 가진 것이 없으면 가진 것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면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적은 것이 많은 것이고 작은 것이 큰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에게는 자신만이 가진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문제가 무엇입니까? 화려한 달란트만 달란트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안드레를 보십시오. 그에게는 베드로나 요한처럼 특별한 달란트가 없었지만 남을 세워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도자인 베드로를 전도할 수 있었습니다. 안드레는 흔히 베드로의 동생으로 알고 있지만 성경은 ‘베드로의 형제’라고만 말합니다.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누가복음 6장 14절에서만 유독 ‘그의 동생 안드레’라고 표현하지만 그 구절도 사실은 이전의 개역한글 성경처럼 ‘그 형제 안드레’라고 번역해야 맞습니다.
보통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로 여겨지기에 안드레를 동생으로 여기지만 실제로 안드레가 형이면서 베드로를 앞세웠을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요새도 동생이 담임목사인 교회에서 목사의 형이 성도로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든지 간에 안드레는 질투가 없었고 남을 높여주는데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어린이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도 있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든 안드레의 손을 거치면 작은 것이 큰 것이 되었습니다.
또한 안드레는 ‘접근이 용이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2절 말씀을 보면 헬라인 몇 명이 빌립을 만나 예수님을 뵙고자 청할 때 빌립이 그 문제를 가지고 제일 먼저 상의했던 사람도 바로 안드레였습니다. 안드레는 제자들의 상담역을 했던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처럼 그에게는 화려한 달란트는 없었지만 그는 음지에서 남을 섬겨주는 음지의 고수였습니다. 지금처럼 각박한 때에 그런 음지의 고수들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자신에게 달란트가 없다고 탄식하지 마십시오. 자신에게도 있습니다. 다만 그 달란트가 대중적인 화려한 달란트가 아닐 뿐입니다. 그 달란트도 주님 안에서 잘 사용되면 엄청난 역사를 만드는 원천이 됩니다. 그러므로 현재 자신이 잘하는 것을 스스로 작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작품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제 기운을 내십시오. 그리고 축복된 세계를 향해 멋지게 전진하십시오.
4. 기억하십시오
본문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두려울 때마다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해방의 축복뿐만 아니라 풍성한 삶의 축복도 주시는 분입니다(14절). 그 하나님을 늘 기억하면서 두려울 때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힘차게 부르십시오(15절).
요새 치매를 많이 두려워하지만 더욱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영적인 치매입니다. 그러므로 늘 하나님의 은혜를 늘 기억하며 사십시오. 그러면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잃지 않게 되고 어려운 순간에는 과거에 자신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또 다시 있을 것을 확신하며 어려움도 잘 이기게 됩니다.
현재 저의 온새기(온라인 새벽기도) 메일을 받는 회원은 5799명입니다. 수신거부를 할 사람은 하고, 메일 소통이 잘 되지 않으면 시스템이 저절로 메일을 리스트에서 삭제하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알곡 회원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우리 교인만큼 저희 선교 사역에 애정을 가지고 기도해주시는 분들도 꽤 있습니다. 저는 그분들을 준 교인처럼 생각하고 기도하며 언젠가는 큰 길을 돌아 거룩한 꿈과 비전 안에서 뜻을 합칠 날이 올 때가 있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분들로부터 명절이나 연말이나 기도제목이 있을 때나 선교사님들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생각지 못한 큰 선물을 받습니다. 그러면 선물을 받아서도 기쁘지만 수고를 알아주고 기억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더 기쁩니다. 또한 그런 손길을 대할 때마다 은혜를 기억하는 삶이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인지를 새삼 깨닫습니다. 살면서 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사십시오. 그러면 누구보다 하나님의 주목 받는 복된 존재가 될 것입니다.
5. 기다리십시오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구절에서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끝까지 돌보고 지켜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어떤 선한 목적 때문에 성도를 징계하실 때도 있지만 죽도록 징계하지는 않습니다. 밤이 아무리 깊어도 깊은 밤은 오히려 새벽의 여명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고 조금 더 기다리십시오. 그러면 고통의 밤이 지나 찬란한 은총의 새 아침이 열릴 것입니다.
시편 37편 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시편 기자는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고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불평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처럼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져도 힘들게 생각하지 말고 그때 입술을 잘 지켜서 불평 대신에 감사가 나오게 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이 축복의 문을 열어주실 때가 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까지 기다리게 하시지만 그때가 너무 늦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시련을 당한다고 더 이상 보지 않으면 주인공이 최후에 승리하는 장면을 놓칩니다. 그처럼 인생 드라마도 너무 속단하면 승리를 놓칩니다. 그러므로 조금 더 기다리고 불신자들이 형통한 것에 대해 너무 상처 받지 마십시오.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지 마십시오. 성급함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위험에 빠지게 만듭니다.
가끔 악인이 외형과 숫자 면에서 형통하는 모습이 보여도 주님의 공의에 의문을 품지 마십시오. 악인이 성공하고 의인이 실패해도 그것은 최후의 결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성공한 악인에게 있지 않고 오히려 실패한 의인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역사와 하나님의 공의를 믿고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그런 선한 결말이 주어질 때를 기다리며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축복의 때가 올 것입니다.
요새 은퇴를 앞둔 목사님들을 가끔 만납니다. 교회는 개인의 것이 아니기에 아무리 크게 교회를 성장시켜도 은퇴할 때는 대개 쓸쓸하게 그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비록 쓸쓸한 일이지만 그것을 숙명으로 알고 아름답게 떠나는 것은 한 사람의 목회의 진실성을 나타내는 최고의 바로미터입니다. 저도 그런 은퇴를 지켜보면서 궁극적인 성공과 영향력은 외형이나 숫자와 큰 상관이 없음을 다시 한 번 실감합니다.
이제 곧 2달 안에 이사야 설교파일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면 35번째 설교파일이 완성되면서 성경 66권 중 시편 다음으로 어려운 파일이 끝나게 됩니다. 그렇게 성경 전권파일을 완성하면 그 파일은 천년 영향력을 가진 문서가 될 것입니다. 현재 약 6-7천 명의 목사님이 매주 저의 설교를 참고해 설교를 준비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체 한국 현직 목회자의 10% 정도입니다. 그 보람 때문에 저는 숫자나 외형을 초월해서 내일의 찬란한 축복의 때를 넉넉한 마음으로 준비하며 기다릴 수 있습니다.
저도 30대 때에는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를 자주 참고해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참고하지 않습니다. 인터넷 시대에 저작자가 금방 드러나는데 저작권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 준비가 힘듭니다. 매일 새벽설교 준비에는 평균 6시간 걸립니다. 요즘의 이사야 강해는 더 어려워서 평균 8시간 걸립니다. 주일설교 준비에는 최소한 20시간 걸립니다. 그래도 앞으로 펼쳐질 찬란한 축복의 때를 생각하면 얼마든지 그 힘든 시간들을 감수할 수 있고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이제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선한 영향력을 확대시키십시오. 그래서 인생 역전승의 역사를 이루고 영적인 음지의 고수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의 눈물을 은밀하게 닦아주십시오. 그런 선한 꿈을 품고 나가면 하나님은 반드시 창조적인 아이디어도 주시고 거룩한 커넥션도 이뤄지게 하셔서 조만간 독수리처럼 높이 비상할 날이 오게 하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꾹 참고 기다리며 열심히 매진하십시오.
<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
자녀교육의 승리의 요체가 무엇입니까? 기다림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기다려주면 어느 순간에 자녀가 정신을 차리고 공부도 하고 재능도 발휘하면서 멋지게 사명을 따라 살 것입니다. 부부관계의 행복의 요체도 역시 기다림입니다. 배우자의 성공 문제로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조금 성공이 늦으면 어떻습니까? 배우자가 아직 맘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도 넉넉한 모습으로 기다려주십시오. 그렇게 기쁘게 기다려주는 모습을 보면 배우자가 얼마나 힘이 납니까? 그때 배우자가 일어설 힘과 변화를 추구할 용기를 얻습니다.
목회 축복의 요체도 결국 기다림입니다. 교인들이 전도를 못한다고 화를 내고 닦달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나 양떼의 행복보다는 자기 성공에 집착하는 태도입니다. 물론 그렇게 달달 볶아서 교회가 커질 수는 있지만 그런 모습으로 한국 사회에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서 장기적으로는 더 전도를 막게 됩니다. 그러나 조금만 기다려주면 부족해 보이는 성도도 때가 되면 누구보다 멋지고 영향력 있는 전도자가 될 것입니다.
자기 행복의 요체도 역시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이 지속되면 가끔 평안이 흔들리지만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자신의 고통과 좌절과 고독과 아픔과 상처를 다 토로하십시오. 그와 더불어 무엇인가 자신에게도 성찰할 것이 있으면 성찰하십시오. “왜 하나님은 이 고통을 허용하셨을까? 무엇을 반성하고 어떻게 새로워져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떻게 나눔의 삶을 지혜롭게 실천하며 살까?”
삶의 고통이 때로는 자신의 무감각과 게으름과 방종과 사명의 외면과 교회 사랑의 부족 때문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채찍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때는 기도 중에 새로운 다짐을 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실천해 나가면 됩니다. 그처럼 고통 중에 자기 성찰의 기도를 드리면서 고통이 주는 의미와 메시지를 발견하면 고통을 통해 오히려 큰 거목이 될 수 있고 결국 새 날이 올 때 새 날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고통을 하나님과 더욱 가까이지는 계기로 삼고 그때 더욱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집중하십시오. 베드로가 바람과 물결을 바라볼 때는 더 깊이 물속으로 빠졌지만 예수님을 바라보자 물 위를 걷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처럼 고통에 집중하고 고통 속에 빠지면 그 고통이 더 크게 보이고 느껴지면서 “이제 끝장났다!”하고 절망하게 되지만 고통 중에도 예수님이 크게 보이면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은혜가 어렸을 때 한번은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골방에 들어가니까 하늘이 내려와요.” 이제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도의 ‘골방’에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은밀한 헌신의 ‘사랑방’도 찾고,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글방’도 찾으십시오. 그러면 하늘이 내려오는 신령한 역사를 체험할 것이고 동시에 풍성한 축복도 얻어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주신 말씀처럼 기도하고, 기뻐하고, 기운 내고, 기억하고, 기다림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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