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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가 아니라 회심이다.

사도행전 최용우............... 조회 수 2292 추천 수 0 2012.01.14 22:5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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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3:19‐26 
설교자 : 박신 목사 
참고 : http://www.nosuchjesus.com 
회개가 아니라 회심이다.
사도행전강해 (17)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저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에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서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행3:19‐26)

설교의 영원한 주제

사도들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나면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 기적은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솔로몬 행각에서 전도하고 있던 사도들 앞으로 몰려들게 만들었다. 베드로로선 그 연유를 설명해주어야 했는데 본문은 그 설교의 후반부다. 전반부 내용은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은 사도인 자기들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이니 기이히 여기지 말라. 왜냐하면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바로 그 분이 메시야이기 때문이다.”는 것이었다. 이제 후반부는 한 마디로 “그러니 회개하고 그 분을 영접하라.”는 것이다. 예수가 메시아임이 입증되었으니 당연히 그를 통해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그는 예수님이 메시아인 까닭이 단순히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기 보다는 모세로부터 사무엘과 구약 모든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로 그 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요컨대 하나님이 예언하신 그대로 오셨고 또 행하셨다는 것이다. 메시아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러 오시는 분이다. 당연히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도 오순절의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더러 회개하기를 촉구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초대교회의 설교 내용은 아주 단순했다. 너희가 못 박은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므로 너희 죄를 회개하여 그분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내용은 이천년이 지난 지금도 기독교 특별히 개신교가 지속적으로 설교해야 할 메시지의 핵심이다. 말하자면 모든 설교는 예수로 시작해 예수로 끝나야 한다. 설교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인데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교회에서 예수님이 아닌 다른 이야기, 예컨대 윤리적인 훈계나 철학적인 사상이나 종교적인 성찰을 가르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기독교가 다른 모든 종교나 철학의 사상과 대동소이하다고 인식시키는 결과가 된다. 예수님이 실종되면 유사 기독교도 되지 않고 비기독교를 소개하는 꼴이다. 아무리 고매한 가르침과 심오한 사상이라도 예수님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의 진리가 될 수 없다. 그런 내용들은 대학의 철학이나 종교학 강의에서 다룰 문제이지 교회 강단에서 하나님 말씀으로 선포될 성질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신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기에 그의 이름으로만 구원 얻을 수 있다는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고유 주장일 뿐이라고 반발한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도 가설적 명제에 불과하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껏 전도자들한테 그런 말을 누차 들어 왔지만 제발 믿기지도 않는 이야기를 그만하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본문 설교처럼 성경에 이미 예언된 대로 성취 되었으니 메시아가 틀림없다는 논증도 성경의 진위와 그 예언의 확실성부터 먼저 따져봐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요컨대 예수가 메시아인 것은 기독교인들만의 문제라는 것이다.

작금 세상이 돌아가는 형편이 너무 정신이 없어서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더 절대적 진리나 절대자의 인도를 붙들기 원한다. 사람들이 온갖 죄악으로 타락으로 치닫고, 지구의 자연환경도 날로 오염되어 생존마저 위협하며, 만사를 형통케 해주리라 믿었던 과학의 발달도 해결책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새롭고 골치 아픈 문제만 산출하므로, 극적인 탈출구의 필요성은 절실히 느낀다.

말하자면 예수님 오시기 직전의 유대인들이 구세주를 절실히 소망했던 것 같이 모든 주위 여건은  절망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아니 하나님이 보내신 참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오히려 갈수록 그 빛이 바래져 가며 심지어 교인들 사이에도 힘을 잃어 가고 있다.

그 원인은 하나뿐이다. 신자들이 믿고 전하는 예수가 힘을 잃었거나 다른 예수이기 때문이다. 참 예수가 아닌 엉터리 혹은 힘이 약한 예수만 만연하고 있다. 그에 따른 부작용은 신자도 신자지만 불신자들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갖게 만든다. 전도할 때 즉, 신앙의 첫 단계부터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하게 된다. 출발이 잘못되면 당연히 올바른 신앙자체가 형성될 수 없다. 그렇게 신자가 되면 예수님에 대해 온전한 믿음을 갖지 못하게 됨으로 예수님이 갈수록 빛을 잃는 악순환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  

진정한 회개는?

불신자들이 전도를 통해 접할 수 있는 기독교 신앙의 첫 단계는 무엇인가? 베드로가 본문에서 맨 먼저 회개하라고 촉구한 것처럼 우리도 “당신은 죄인입니다. 회개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십시오. 그 분이 당신의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라고 권한다. 주님이 사역을 시작하실 때 가장 먼저 선포하신 말씀도 바로 그 내용이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마4:17).

그러나 불신자들이 보이는 첫 반응은 대개가 “아니 왜 내가 죄인이야? 간혹 실수로 죄를 지었겠지만 꼭 하나님께 회개해야 할 만큼 죄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일 것이다. 그럼 예수님의 권면이 잘못되었다는 뜻인가? 그럴 리는 없다. 이런 반응이 생기는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 둘 다 죄에 대해, 더 정확하게는 회개를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회개를 이전에 범했던 윤리적 잘못들을 뉘우치는 차원으로만 제한해 버린다. 그래서 “내가 감옥에 갈만한 죄를 지은 적도 없고, 남한테 돈을 떼였으면 떼였지 떼먹은 적도 없고, 심지어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데 나더러 회개하라니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내가 보니 예수 믿는 자들이 잘못을 더 많이 저지르던데, 허구한 날 목사와 장로가 싸우고 교회장로라고 해서 믿고 돈 빌려 줬더니 떼먹기나 하고, 겉으로 고상한 척하면서 뒤로는 호박씨나 까는 주제에 남보고 회개하라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라는 반발을 듣게 마련이다. 그러면서 꼭 한마디 더 보태는 말이 있다. “말이나 잘못하면 밉지나 않지. 에이 밥 맛 없는 예수쟁이들 같으니...”

간혹 따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왜 예수 믿는 너희들만 옳다고 하느냐?”라고 오히려 기회는 이 때다 하고 거꾸로 물고 늘어진다. “왜 내 죄를 하필 예수한테 가서 빌어야 한다는 말인가? 나도 양심의 가책을 느낄만한 일이 있으면 집에서 혼자 반성하며 잘 고치고 있는데 꼭 예배당에 가서 빌어야한다는 법이 어디 있어? 회개를 받아 주는 곳이 절간, 성당, 회교사원 등 얼마든지 많은데 왜 교회가 아니면 안 된다고 우기는가?"라고 따진다. 한 마디로 예수만 옳다는 기독교 교리가 싫고 논리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을 향해 처음으로 선포하셨고 기독교에서 구원으로 초대하는 말씀인 “회개하라”(마4:17)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니다. 불신자들은 그 말을 “뉘우칠 회(悔)”에 “고칠 개(改)”의 의미로만 이해한다. 평소 거짓말을 잘한다던지, 술이나 마약에 중독되었다든지, 불효하고, 간음하고, 사기 치는 것 같은 나쁜 습관과 잘못된 행동들을 반성하고 고치는정도가 회개다. 그러니 인격을 도야하여 의로운 사람이 되는 데 구태여 예수만 믿을 이유가 전혀 없다.  

회개(悔改)라는 우리말 번역은 원어의 정확한 의미를 나타내기에는 조금 부족하다. 그보다는 ‘돌아올 회(回)’와 ‘마음 심(心)’을 사용한 ‘회심’이 더 적절하다. 헬라어 ‘메타노이테’가 단순히 “어떤 일을 후회한다.”라는 뜻으로도 쓰이지만 더 근본적인 뜻은 “마음을 바꾸다.”이다. 말하자면 윤리적 잘못을 범한 죄들을 낱낱이 고해서 고치는 것이 구원의 첫걸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도자는 이 차이를 정확히 구별하여 전해야 한다. 만약 전도자부터 회심 대신에 회개로만 이해하고 있다면 불신자들의 반발에 정당한 해명을 못하고 우물쭈물할 수밖에 없다.

회개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새 행실로 돌아온다.”는 히브리어 ‘슈브’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 새 행실이 선행을 강조하는 내용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와 맺은 언약 아래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회개하라고 촉구하신 뒤에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했다. 지구의 종말이 가까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온전한 통치자가 되시고 우리 또한 그분의 온전한 사랑을 받는 백성이 되는 관계가 이제 곧 형성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미 구약성경에서 일관되게 강조되었든 주제로 예레미야 선지자에 의해 새삼 확인된 내용이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렘31:33)는 언약을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이 땅에 실현시키겠다는 뜻이다.
  
그럼 마음이 어떠했기에 다시 어떤 상태로 바꾼다는 뜻인가? 아주 간단하다. 문자 그대로 불신자의 마음에서 신자의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다. 지금껏 하나님을 고의로 외면하고 부인하고 심지어 저주까지 했던 마음을 그분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분 앞으로 겸손하게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윤리적 죄에 대한 회개를 너그럽게 받아들여서 용서해 주는 인자한 종교지도자가 아니다. 지금껏 하나님과 불화하였던 모든 인류를 하나님과 화해시키려고 십자가에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분의 독생자다. 어떤 위대한 선각자나 종교창시자라도 감히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는 담대히 선포하지 못했다. 단지 인격적 도야나 훈련으로 선하게 사는 법만 가르쳤다. 그들의 지성이나 영성의 수준이 인간의 한계를 도무지 넘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원수 된 인간을 그분과 인격적이며 체험적으로 만나게 해 줄 수는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극적인 변화

회개란 다시 말하지만 불신자들의 모든 사고체계를 신자의 사고체계 로 바꾸는 것이다. 이제껏 모든 사물을 하나님과는 무관하게 인간중심으로 판단했던 것에서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모든 것을 그분의 관점에서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관념의 영역 안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사고체계가 바뀌었기에 당연히 말하고 행동하는 것도 그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변화를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직접 역사하지 않고 본인 스스로 일으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불신자 가운데도 조물주 같은 절대자의 존재가 있을 것이라고 인정하는 자는 많다. 그러나 그 단계에 머물면 단지 하나의 사실(fact)을 확인했음에 불과하다. 마치 물의 부력보다 가벼운 물체는 물에 뜬다는 원리는 학교에서 배워 알고 있지만 본인은 한 번도 배를 타보거나 심지어 수영을 해본 적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있으리라 가정 내지 동의하는 것과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본인이 진정으로 엎드린 것과는 천지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정말로 직접 만난 자는 그의 모든 사고 체계가 바뀔 수밖에 없다. 인생관, 역사관, 우주관, 신관, 등 모든 가치관에서 일순간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 변화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꾼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 정도에 비길 바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과학적 논리만 바뀌었지 우주 질서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발상의 전환만 일어난 것이지 우주는 항상 그 상태였다. 그러나 회심은 관념의 개조가 아니다. 실제로 사람 자체가 완전히 새롭게 바뀌는 것이다.

사고체계란 공부 같은 지성적인 활동이나 간헐적인 사고활동을 뜻하지 않는다. 본인의 사고의 흐름 즉, 분별과 판단과 결단뿐 아니라 말과 행동 나아가 습관, 생활 방식, 삶, 인생까지 주관하는 자기 고유의 가치관이자 존재의 중심이다. 회심은 바로 그 중심이 바뀌는 것이기에 자연히 그 주변의 모든 것도 함께 바뀔 수밖에 없다.

이제껏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의 주인으로 삼았던 자신을 쫓아내고 하나님을 그 자리에 모시는 것이다. 자기의 두 손 두 발을 완전히 묶는 것이다. 자신의 전적인 무력과 무지를 절감할 뿐 아니라 너무나 더럽고 추한 존재임을 처절하게 고백하는 것이다. 자기 기분과 뜻대로 살아왔던 인생을 완전히 포기하고 오직 그분의 인도에만 내어 맡기는 것이다. 이런 일을 인간이 스스로, 그것도 단 번에 할 수는 결코 없지 않겠는가?  

베드로가 회개하라고 촉구하면서 무엇을 강조했는가?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살인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라고 했는가? 아니다. 법적으로 따져도 살인죄의 일차적 책임은 로마총독 빌라도가 져야 한다. 유대제사장들은 살인모의 및 선동죄를, 예수님의 제자 유다는 밀고 죄를 저질렀다. 지금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는 유대 청중들은 굳이 따지자면 부화뇌동한 잘못을 범했을 뿐이다.

그의 설교 전반부 13,14절에선 유대인더러 예수님을 부인한 것 즉, 메시아임을 몰라 본 것을 깨우쳐 주려는데 초점을 두었다. 이어지는 17절에서는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 하였으며”라고 그 부화뇌동한 잘못마저 양해해주려 하지 않는가? 그리고 후반의 결론부에서는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인지  선지자들을 인용하여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결국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살인한 죄를 회개하라는 것이 아니요, 부화뇌동했던 잘못마저 용서해줄 테니 이제는 제발 그분을 구주로 영접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바로 그것이 “회개하라”는 정확한 의미였던 것이다.

인간이 죄를 안 짓는 방법을 몰라 안 짓는 것도 아니요, 착한 일을 할 줄 몰라 안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선해지려면 초등학교 1학년 도덕교과서 한권만 제대로 지켜도 된다. 그럼 단 번에 이 세상에 성자들이 차고도 넘칠 것이다. 항상 문제는 그대로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자가 한 명이라도 있는 지였지 도덕적 계명을 몰라서 나아가 회개를 하지 않아서 세상이 이처럼 악해진 것은 결코 아니다.

도덕적 회개는 불신자들이 반발하듯이 혼자 집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인간의 윤리적 죄를 용서해주는 일을 위해서라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없고 또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실 필요도 없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 본체로 오셔서 인간에게 하나님의 실체를 보여주어 알게 해주기 위해서 온 것이다.

스스로 의로워질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인간을 구원할 방도는 하나님 당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길 외에는  전혀 없다. 죄와 사망과 사단의 권세에 눌려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을 구해내려면 인간을 붙들고 있는 힘보다 더 센 자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여 죄와 사망과 사단의 권세를 온전히 깨뜨렸지 않는가? 또 당신의 약속대로 성령을 보내어 죄인으로 거듭나게 했지 않는가?

이제 주님의 이 십자가에 동참하는 자는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도 그 분의 부활하심에도 동참하게 된다. 하나님의 통치를 방해하는 모든 악한 세력들로부터 훼방을 받지 않게 되며 나아가 그 분의 거룩하고도 완전하신 은혜와 인도하심 가운데 거할 수 있게 된다. 죄인 쪽에서 이루거나 행해야 할 어떠한 선행(先行) 요구조건 없이 하나님 당신께서 먼저 사랑으로 다스려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겠다는 일방적인 초대장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회개란 바로 이 주님의 초대장을 받아서 그대로 따를 것이냐 마느냐의 문제이지 우리가 착해지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앉은뱅이가, 아니 베드로나 요한 같은 사도들도 착한 일이나 종교적 행사를 했거나, 심지어 도덕적 잘못조차 뉘우치지 않았다. 그저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을 사랑해주셨고 또 그들은 그분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뿐이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그분의 십자가 복음에 드러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의 통치를 받겠다고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당연히 예수님이 자신의 구원주요 심판주임을 먼저 받아 들여야 한다.   자신의 영원한 운명과 이 땅에서의 모든 삶이 오직 그분에 의해 좌우됨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온전히 그분께 바쳐져야 한다. 그분이 위대한 스승이면 그냥 그 가르침대로 따르고 훈련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인격을 변화시키는 정도밖에 하지 못한다. 자신의 전 존재를 완전히 새롭게는 바꿀 수 없다.

요컨대 구원은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성(正體性/ True Identity)를 확인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유대인들더러 그분을 십자가에 매단 죄보다는 오히려 그분을 몰랐던 잘못을 뉘우치고 이제는 분명히 깨달으라고 강조한 까닭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수 있다.

회개의 핵심 두 단계

전도에서 회개의 의미를 잘못 혹은 부족하게 전함에 따라 또 다른 문제가 파생한다. 어떤 선행조건 없이도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하니까 정말 그렇게만 하고 치운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니까 문자 그대로 믿기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모든 인간의 죄 값을 다 치렀다는 사실을 단순히 하나의 교리적 진리로만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서 가르치고 시키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구원은 보장된 것처럼 착각한다.  

수차 회개가 아니라 회심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그 회심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제대로 앎으로서만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정체성을 안다는 것이 그분이 하나님 본체로서 이 땅에 오신 메시아였다는 사실의 확인에 그쳐선 안 된다. 그것은 마치 불신자가 조물주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과 방불하다. 그분을 아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정체성을 아는 것이며 그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은 반드시 두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한다.

먼저 예수님 영접 이전의 자신의 영적 실체를 똑똑히 확인해야 한다. 아니 성령의 간섭이 일어나면 필연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한 마디로 내가 정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절감하는 것이다. 도덕적 죄를 지은 것도 많긴 하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 존재가 더럽고 추하다는 것을 시인하게 된다. 정말 자신의 내면 전부가 썩을 대로 썩었고 하나님을 외면하고 부인한 사고체계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거짓과 교만과 탐욕과 죄악뿐이었음을 확인한다.

도덕적 죄악조차 이미 더러워진 자신으로부터 산출된 결과이지 그런 범죄로 인해 자신이 더러워진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런 허물과 범죄들을 회개하고 고치려고 아무리 노력했어도 실패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너무나 잘 알기에 문제는 자기에게 있지 잠간의 방심, 실수나 외부 환경 탓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한 마디로 회개란 예수를 몰랐던 지난 삶이 전부 헛되고 헛되었음을 진정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전혀 잘못된 방향을 향해 아무런 기쁨과 보람과 의미와 가치가 없이 허둥거리며 치달았음을 깨닫는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 하나님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함을 알게 된다. 자신에게서 발견한 것이라고는 악과 더러움뿐이다. 예수님 말씀대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전부 추했다. 자기도 모르게 “저는 곤고한 몸이요 사망의 길로 치닫는 죄인입니다.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오직 절망뿐입니다.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라는 절규가 튀어나온다.

말하자면 스스로도 자기라는 존재부터 가장 불쌍하게 여겨진다. 구체적인 사건이나 자신의 특별한 측면을 두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다. 딱 꼬집어 원인을 알 수 없는 울음이 터져 나오면서 자기의 전부가 그 통곡 속에 함몰되어버린다. 그야말로 완전히 낮아지고 낮아져서 그 동안 붙들었던 모든 것을 전부 놓아 버린다. 진짜로 자신이 뒤집어지는 것이다. 자기의 실체가 휴지조각이나 벌레만도 못한 것임을 깨닫는다.  

그런데 놀랍고도 신비하게 자신이 철저하게 부서지고 깨어진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이 자기 곁에 서계심을 발견하게 된다.  단순히 감정적 흥분이나, 관념상의 추론이나, 의지적 결단으로 그분을 믿는 것이 아니다. 정말 그분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이뤄지는 실제적 체험이다. 예수님의 모습을 보거나 음성을 듣는 것 같은 초자연적 대면은 아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나를 알고 계시고 이 세상에는 없는 인자와 긍휼로 추하디 추한 자신을 용서하시고 따뜻한 사랑으로 그 품에 안아주셨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성령의 간섭으로 죄인으로 하여금 어떤 방식으로든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고 받아들이게 해준다.

그 결과 자신이 예전과는 전혀 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는 이전의 삶으로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단이 저절로 생긴다. 의지로 반성 결심하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하나님이 자신을 붙들고 계시는 힘을 느낀다. 이제는 정말 인간답게 살 수 있겠다는 자신감마저 생긴다. 예수님과 더불어 남은 인생을 그분의 뜻을 따라 살며 그분만 증거하고 싶어진다.

예수를 처음 만난 그 구원의 감격은 도무지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자기가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다는 확인을 남들은 몰라도 자신 만은 할 수 있다. 시간적으로는 순간적 혹은 점진적일 수 있어도 어느 순간엔가 분명히 새 사람으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난다. 극적으로 완전히 뒤집어지는 일이다.  사고체계의 완전한 변화가 일어나 본인 중심에서 예수 중심으로 모든 것이 바뀐다.    

앉은뱅이가 성전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을 때에 그 영혼 속에 갖고 있던 평생의 한이 무엇이었는가? “어머니 왜 나를 나으셨나요? 왜 나는 이 모양인가요? 나는 도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요? 평생을 성전 문턱도 넘지 못할 바에야 아무리 먹고사는 것이 부족함이 없어도 무슨 의미가 있나요?”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올바른 정체성을 한 번도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는 순간, 물론 육신적 불구가 고쳐진 것도 더 없이 기뻤겠지만, 40 평생 동안 고민해왔던 문제가 일시에 해결되었다. 그렇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자기를 알고 또 사랑하고 계심을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을 통해 분명히 확인했다. 자기가 세상과 하나님 앞에서 버림 받은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세상에서 따로 구별하여서 사랑해주는 귀한 존재임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자신의 소망 없었던 영적 실체를 확인하는 것이 참 회개의 첫 단계다. 그리고나서 혹은 동시에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 들여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 두 번째 단계다. 성경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동참하고 그분의 부활에 연합하라고 말하는 뜻이다. 요컨대 예수님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순간 자신의 정체성도 반드시 확인되어야 함 회개라는 것이다. 만약 전자만 확인하면 기독교 교리를 인정한 것뿐이요, 후자만 시인하면 도덕적 반성에 그친 것뿐이다.  

전도를 올바르게 하라.

하나님이 이뤄주시는 영적인 거듭남이 없이는 그분의 통치 아래 절대 들어가지 못한다. 예수님과 인격적 대면을 하지 않고는 그분과 아무 직접적 관계가 생기지 않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는가? 불신자가 술 먹고 실수하고, 도박하고, 성적인 부도덕을 저질렀고, 거짓말하고 사기 친 일들을 반성한다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마르틴 루터가 수도승의 시절에 어떻게 하던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았다는 확신 즉, 구원의 확신을 얻고자 노력할 때의 일이다. 과거에 지은 모든  죄를 다 회개해야만 구원 얻는다고 배웠기에 정말 모든 죄를 빠짐없이 자백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죄를 회개했으면 고해성사를 받아 주던 수도원장마저 지쳐서 “이제 됐다. 너의 어머니를 죽인 정도의 죄가 아닌 이상 하나님이 다 용서해 주실 테니까  더 이상 고백하지 않아도 된다.”고까지 말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도무지 영혼의 평강이 없고 용서 받았다는 확신과도 여전히 거리가 멀었다.

어느 날은 정말 꼼짝 않고 6시간 동안이나 아주 어렸을 때 지은 죄부터 기억나는 대로 회개했다. 말하자면 초등학교 때 여학생들 놀려 준 것까지 반성했던 셈이다. 그러고 나니 그때까지 자기 마음을 억누르고 있던 온갖 죄책감에서 해방이 되었고 깨끗함을 얻은 것 같았다. 그래서 이제 구원을 얻었나보다 하고 시원해진 마음으로 일어서려는데, 바로 그 순간 또 다시 회개 하지 못했던 큰 죄가 불현 듯 생각이 났고 영혼의 갈등과 곤혹함은 더 심해졌다.

인간은 절대 회개로 깨끗해지지 않는다. 우선 어떤 종파처럼 자기가 지은 업보만큼 선행으로 갚는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알게 모르게 지은 죄가 하루에도 수십 개는 족히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온전한 회개조차 결코 하지 못한다. 루터처럼 지은 죄 전부를 다 떠올리는 일조차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미 더렵혀진 영혼 자체는 아무리 회개한들 깨끗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회개로 구원을 얻는다면 그 회개하는 자체도 인간의 공적이 되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사역의 은혜가 참된 은혜가 되지 못한다. 말하자면 최소한 회개라도 인간 스스로 충분하고도 완전하게 할 수 있다면 구태여 예수님이 오셔서 죽으실 이유나 필요가 없었지 않겠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절대로 몇 가지 도덕적 죄와, 그것도 인간 스스로 고백하며 회개한 죄와 맞바꿀 정도로 값싸지 않다. 그 분의 피는 한 죄인의 전 존재에 새 생명을 심어 준다. 당신의 생명과 맞바꾸어서 구원을 주시기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 그 분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신다. 옛 사람이 죽었다가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영육간 전 인격체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아 의롭다고 인 쳐 주신다.

십자가 복음은 바울 사도의 진술대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단순히 예수를 믿으라고 교리를 소개하는 것만으로 올바른 전도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에 십자가 진리는 풀어서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구원이 기독교 사상이나 계명을 받아 들여서 그대로 따르는 것이 결코 아니다. 정말로 예수님의 영이 한 죄인에게 먼저 찾아와 죄로 더럽혀진 그 영으로 파고 들어와 깨끗케 만드는 실제적 사건이자 체험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구원이 성립된다. 말하자면 전도할 때에는 십지가 진리를 말로서 전하는 것의 수십 수백 배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그 영혼을 붙들고 주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뜻이다.  

베드로도 본문의 결론에 해당하는 19절에서 “돌이키라”고 말했다. 하나님 앞으로 돌이켜서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라는 것이다. 지금껏 가졌던 모든 사고체계와 가치관을 완전히 버리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라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하다가 완전히 망했다. 주위에 부모, 형제, 친척, 친구, 친지를 비롯해 도움의 손길이 다 끊겨버렸다. 완전히 망연자실(茫然自失)해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데 한 크리스천 친구가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자네, 이제야 말로 하늘을 쳐다 볼 때가 되었지 않은가? 주위가 다 막혔으니 위를 바라 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인간의 도움이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더구나 영혼의 갈급함과 공허함을 동일한 죄인끼리 도와줄 수 없다. 죄에 찌든 자신 또한 스스로 해결할 수는 없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끝까지 책임을 져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인간이 할 일은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던 그분의 독생자의 십자가 앞으로 진정으로 겸비해져 나가기만 하면 된다.  

기독교에서 회개는 하나님께 되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부인하면서 태어났기에 되돌아간다는 말은 조금 어폐가 있다. 정확히 말해 아담의 원죄로 부패했던 영혼이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셨던 그 상태로 되돌아가를 소원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에서 참 평강과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소망이라곤 전혀 없음을 확신하기에 그 전부를 완전히 포기한 채 하나님만 찾게 되는 것이다.

뒤로 호박씨 까는 신자

신자들을 두고 세상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평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아마도 “예수쟁이들, 뒷구멍에서 호박씨 까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 앞에 “저는 그래도 내 죄를 회개했습니다. 당신은 아직 당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그래서 죄인입니다. 지은 죄를 회개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십시오. 어떤 죄도 그 분이 용서해 주십니다.”라는 내용으로 전도하면 과연 감동을 줄 수 있겠는가? 아니 최소한의 설득력이라도 있게 들리겠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도덕적인 면에서 신자나 불신자나 서로 오십보백보다. 세상 사람들이 신자더러 호박씨 깐다고 비난할 때에 신자가 대답할 말은 이래야 한다. “맞습니다. 저희들은 뒷구멍에서 호박씨 깐다는 말을 들어도 싼 존재입니다. 신자라고 당신들보다 절대 선하고 의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신자가 되어서도 호박씨 깔 정도로 죄가 많은 우리를 예수님은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뒷구멍으로 호박씨 깐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인가? 바로 다윗이다. 궁중에 편안하게 남아서 전쟁에 나가 있는 충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통죄를 저질렀다. 남편 우리야마저 일부러 전쟁의 최 일선에 보내어 죽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가 자기 죄를 어떻게 고백했는가?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51:4) 우리야나 밧세바 또 간음으로 태어난 아이가 곧바로 죽은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를 그 큰 죄에서 건져주실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회개마저 하나님의 구원에 전혀 보탬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가 항상 했던 고백 그대로였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오직 여호와께로라.”  

우리가 다윗보다 도덕적으로 나을 수 있겠는가? 그와 동일한 죄를 짓지 않았다 뿐이지 수시로 죄를 짓기는 마찬가지다. 아니 틀림없이 더할 것이다. 잘못을 범할 때마다 반성하고 고치려 노력해 본다.  그러나 그런 회개라면 교회 안 다니시는 분보다 신자가 결코 나을 것은 없다.

설교자인 제가 지금 자신 있게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말씀도,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셔서 다윗보다 더한 저 같은 자도 사랑해주셨습니다. 오직 그 분만이 저를 구원하고 책임지실 수 있음을 확신했기에 그 분 앞에 저는 항복했습니다.”는 것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야 제가  얼마나 더럽고 추하며 뒤로 호박씨 까는데 최고 선수인 줄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설교하고 있다고 해서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분이나, 아니 교회 밖의 어떤 사람보다 저는 절대로 더 의롭거나 선하지 않다.  단지 제가 앞발 뒷발 다 들고 주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고 나니까 모든 것이 달라졌고 참 자유와 평강을 얻었던 것뿐이다. 베드로처럼 저도 지금 도덕적으로 회개하라고 명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하나님께 항복하기를 권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완전히 바꾸라는 것이다.

루터는 기독교 신앙을 이렇게 표현했다. “신앙이란 우리를 우리 자신에서 빼내어서 우리의 지성, 감정, 의지, 인격, 행동, 심지어 양심을 포함해서 자신의 어떠한 것에도 의지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바보 멍텅구리가 되는 것이다. 자신을 100% 무능력자로 인정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하나도 없다. 어거스틴이 “신앙이란 하나님이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다는 확신”이라고 말했듯이,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신바 되시며 우리의 침 삼키는 순간까지 놓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우리 곁에서 단 한순간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 사실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기에 이제 다르게 사는 것이 바로 참 회개다.

“저는 못합니다. 저는 바보천치입니다. 저의 자존심은 알고 보니 빈껍데기였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그 죄를 도저히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피조물입니다. 저는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이런 고백들이 지구가 무너지는 듯한 한숨소리와 함께 입에서 줄줄이 이어져 나와야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러니까 더욱 감사해야 한다. “이런 확신을 거쳐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또 의지하게 되었으니 더더욱 감사합니다. 이 일을 가능케 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라는 고백이 자동적으로 따라 나와야 한다.

몇 가지 잘못된 행위를 반성하고 고쳐나가는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면 세상의 일반적 종교를 임의로 택하거나, 아니 그냥 불신자 상태로 남아 있어도 된다. 구원은 한 죄인을 하나님이 살리는 능력이다. 당신의 보혈로 우리 영혼을 씻기는 예수님의 작업이다. 우리를 회심시켜서 완전히 다른 가치관, 인생관의 사람으로 순식간에 바꿔 놓는 성령님의 역사다.

전도하면서 단순히 “죄를 회개하라”고만 전해선 안 된다. 그러려면 죄가 무엇인지부터 정확히 설명해야 한다. 전도에는 오히려 신자 자신의 체험담을 그것도 오직 두 마디로  그들에게 전파해야 한다. 우선 예수님의 정체성을 저들에게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나의 주님 되십니다. 저는 그 분이 제가 어떤 상태에 있던 진정으로 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당신도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밝혀 드러내어야 한다. “저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외면했던 정말 더럽고 추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런 저를 주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주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회개하기를 명령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분 앞으로 진정으로 항복하고 나오기를 기다리고 계실 뿐입니다.”

지금 전도의 일반적인 잘못만 탓하려는 뜻이 아니다. 지금 여러분이 정말 참 신자 되었는지 점검해보라는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진정으로 겸비한 마음으로 섰던 체험이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래서 사고의 체계가 완전히 뒤집어졌는지 또 그렇게 살고 있는지 따져 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동참하고 그 부활에 연합하지 않는 한 불신자에서 신자로 변화될 수 있는 법은 결코 없음을 확신하고 또 체험했는지 묻는 것이다.

12/31/2008
(1996/6/16 유타 대학촌 교회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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