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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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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4:13‐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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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http://www.nosuchjesus.com |
하늘에서 내려오는 금 동아줄은 없다.
사도행전강해 (20)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 여세나 되었더라.” (행4:13‐22)
죽은 사람에게 겁먹는 제사장들
본문은 법정최후진술을 마친 베드로에게 대제사장이 판결을 내리는 장면이다.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는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다. 전후사정을 살펴보면 도저히 사도들에게서 죄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갖다 댈 법규조차 없어서 나온 궁여지책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는 절대 설교하지 말라는 판결은 사도 자신들을 포함해 다른 누구의 명의로는 해도 된다는 것이다. 유대 사회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라는 이름에 얼마나 과민한 반응을 보였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자기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던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던 안 느꼈던, 굉장히 민감해 있었다는 뜻이다. 예수라는 인물과 생전의 행적과 십자가 사건이 당시 유대사회에서 지녔던 폭발력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지 않는가?
바꿔 말해 예수님이 생전에 베푸신 모든 이적과 부활 승천하셨다는 성경 기록이 역사적 진실임을 입증해 준다. 단순히 종교적으로 심오한 가르침을 베풀면서 도덕적으로 선한 본을 보인 인물 즉, 랍비나 선지자였다면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할 이유는 없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데 영향을 끼쳐봐야 얼마나 심각하고 오래 가겠는가?
예컨대 베드로가 기적을 베풀어도 그의 생전에는 추종자들이 어느 정도 생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정말 큰 기적을 일으켰지만 관원들이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아주 평범한 인물에 불과하며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서 기적이 일어난 줄 알았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해 예수는 관원들이 보기에도 범인과는 완전히 달랐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행적이 인간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들도 인정했다는 뜻이다. 외면의 이상할 정도로 강한 부정은 오히려 내면의 강한 긍정을 의미하지 않는가? 유대 지도층들이 그 분이 메시야였음을 부인하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 사실을 더 확증 짓는데 도움 될 뿐이었다.
말도 안 되는 그 억지 판결을 베드로는 일언지하에 거부해버렸다. 하나님 말을 듣지 않고 어떻게 너희들 말을 따르겠느냐고 했다. 사람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은 정말 당당하고도 올바른 믿음이다. 지금 재판장이 단순히 판결만 내린 것이 아니라 겁을 주며 위협했다. 그럼에도 즉각 반발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유대 대법정은 지금으로 치면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 세 부서의 권한을 다 가졌다. 헤롯이 로마 앞잡이 왕이라면 대제사장은 유대의 실질적 통치자였다. 그런 자의 명령을 바로 대놓고 거절한다는 것은 생명을 건 모험으로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신자들이 이런 성경 기사를 볼 때마다 예수 믿는 자라면 당연히 이 정도는 되어야지라고 큰 도전을 받고 또 그렇게 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솔직히 매번 실패하는 것도 사실이다. 자꾸만 자기 믿음에 대해 실망하고 좌절한다. 정말 마음의 소원은 있으되 육신이 따르지 않음을 절감한다.
심지어 목숨을 걸만큼 거창한 일이 아닌데도 그렇다. 교회 행사에 열심을 내자니 남편이 화를 내고, 주님의 일을 하자니 돈을 못 버는 처량한 신세로 떨어진 것 같다. 언제쯤이면 베드로처럼 정말 강하고 담대한 신앙의 용사가 될 수 있을지 항상 죄책감에 사로 잡혀 있다. 중도에 포기할 수도 없어 어정쩡하게 의무감으로만 형식적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부담감을 도무지 지울 수 없다. 그럼 베드로의 그런 담대함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이며 우리는 왜 그렇게 되지 못할까?
담대함의 근거
신자들이 크게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자기 믿음이 아주 약하다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다. 믿음의 가장 큰 특성은 안 믿어지면 끝까지 못 믿는 것이고, 어떤 연유가 되었든 일단 믿어지면 계속해서 믿게 되는 것이다. 믿음이란 그저 그냥 믿는 것일 뿐, 강하게 믿거나 약하게 믿는다는 표현 자체에 어폐가 있다. 예컨대 사장이 자기 차를 모는 운전수의 실력을 믿지 못하면 당장 해고할 것이다. 일단 믿으면 고용해서 안심하고 타고 다니지 계속 불안해하면서 탈 리는 없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선 더 그렇다. 그분이 우주 만물의 주인으로 살아계시며 인간 만사를 주관하시고 특별히 자기 인생을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 이끄시고 있다는 것은 모든 신자가 믿는다. 이 부분에서 의심, 불신, 불만을 가진다면 신자가 아니다. 비유컨대 의처증에 걸린 남편이 아내를 감시하듯이 하나님을 항상 의심의 눈초리를 갖고 예의 주시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런 맥락에서 베드로의 믿음이 우리보다 월등히 나은 것은 결코 아니다. 믿음의 수준에서 대동소이하다면 믿음에는 또 다른 요소가 있다는 뜻이다. 믿음의 위인을 본받자, 우리의 믿음을 키우자고 초등학생도 해석 적용할 수 있는 방식은 아무 효력이 없다. 솔직히 더 키워야할 믿음도 따로 없다. 성적 나쁜 학생이 일등 하는 학생의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본받자고 아무리 구호로 외쳐봐야 본인이 죽기 살기로 공부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것과 같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슈퍼맨들이 절대 아니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범인들이다. 베드로도 무식한 어부였지 않는가? 그럼에도 그들은 “기도한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는”(약4:17,18)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냈다. 현대의 신자들은 누구나가 최소한 베드로보다는 더 똑똑하고 믿음에서도 뒤지지 않는다. 그럼 오히려 우리 가운데 그보다 더 뛰어난 신앙 영웅이 나을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사도들을 무조건 믿음의 영웅 혹은 거룩한 의인이라고 평가해버리니까 항상 열등감에 사로잡혀 주눅이 든다. 믿음의 큰 도전은 시도도 안 해보고 의무적 형식적인 신자로만 지샌다. 신자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목숨을 건다는 식의 거창한 결단이 아니다. 그러고선 막상 목숨을 걸지 못하느니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일단 작은 일이라도 부딪히고 봐야 한다.
그래서 무조건 믿음만 외쳐댈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처했던 당시 상황을 좀 더 냉정하고도 세밀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베드로가 담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실상 그 또한 모든 재판 과정과 결말을 유심히 지켜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엉터리 같은 판결이라면 얼마든지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믿음으로 무턱대고 밀어 붙인 것이 아니었다. 온전한 전후좌우의 상황 판단 없이 믿음으로만 담대해진다는 것은 믿음이 마취약이나 신경안정제 역할만 한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그가 최후진술을 마치자 공회원들은 세 가지 중요 사항을 검토했다. 첫째는 정황 증거를 검토했다. 사도들은 학문 없는 범인인데도 기탄없이 말했다. 학문이라는 것은 당시로서는 구약성경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베드로가 예수를 설명한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도 시편(118:22)에서 인용한 것이다. 메시아를 예언한 내용을 예수님에게 적용한 것이다. 관원들로선 베드로의 설교 내용에서 정죄할 꼬투리를 전혀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그들이 메시아를 인정하지 않거나 소망하지 않는 사람으로 몰릴 우려도 있었다.
사도들이 예수님 생전이나 죽은 후나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 문제 삼고자 한 것도 학문 없는 자들이 어떻게 기탄없이 말을 하는가가 아니었다. 사도들에게 특별한 정치적 의도가 없으며 또 자기들을 위협할만한 종교 지도자가 될 그릇도 못 된다는 것만 확인한 것이다. 말하자면 사도들의 무죄를 내심 인정했던 것이다.
그 판결에 영향을 미친 두 번째 요소는 증인이었다. 성경은 병 나은 사람이 사십 여세나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다.(14절) 제사장들이나 관원들이 성전 미문 앞에서 항상 구걸하고 있던 앉은뱅이를 모를 리도 없었고, 멀쩡하게 일어나 걷는 것을 저들도 분명히 목도했다. 또 나이 사십이나 된 자가, 그것도 매일 자기에게 구제를 베풀던 그 사회의 지도자들에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증언하면서 거짓이나 꾸밈을 포함시킬 리는 없었다. 그의 증언만으로 증거로서 충분한 효력을 가질 수 있었다. 관원들로선 구체적으로 도무지 설명할 수 없고 이해도 안 되지만 오직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자기들 눈앞에 벌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 그 일은 아주 선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검토했던 사항은 이 기적은 이미 유명한 표적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장소인 성전에서, 그것도 기도 시간에 일어났으니 온 예루살렘 사람들이 다 알게 된 것이다. 너무나 명확하고 엄연한 진실이 되었다. 앉은뱅이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더니 일어나 걷게 되었다. 관원과 제사장들도 도저히 힐난할 말이 없었고(14절) 또 “어떻게 할꼬. 우리도 (도무지) 부인할 수 없다.”라고 실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치 9단의 판결
이런 명확한 사건 내용에 비해 판결은 아주 이상야릇하게 났다. 모든 재판은 피고에게 잘못의 책임이 있는지부터 밝히는 법이다. 형사사건이면 유죄 혹은 무죄여부를, 민사사건이며 누가 옳고 그른가를 먼저 밝힌 다음에 적절한 형량이나 손해배상의 책임이 선고되어야 한다. 제 삼의 판결은 벌을 줄만큼의 잘못이 아닐 때에 한해 훈계하여 방면하는 것이다. 이번 경우에는 앉은뱅이를 고치는 일은 한 번으로 족하니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할 수는 도저히 없다.
사건의 본질은 수십 년 먹은 앉은뱅이가 예수님께 기도하여 단번에 일어나 걷게 된 기적이지 않는가? 권장은 못할망정 아예 재판 받을 사안이 아니다. 그런데 판결 내용은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해도 좋은데 단 예수의 이름으로만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위협을 주면서 말이다.
한 불쌍한 장애인이, 자기들도 심심찮게 구제를 베풀었던, 고침을 받은 선행은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예수의 이름이 확산되는 것을 막는 데만 급급했다. 자기들이 예수 죽인 것의 타당성은 부인되고 예수의 메시아 됨의 진실성만 확연히 부각되는 일은 어떻게든 방지하겠다는 심보다. 자칫 자기들은 메시아 죽인 천하의 죄인으로 전락됨과 동시에 경제, 사회, 정치, 종교 모든 분야에서 누리고 있는 권세와 영향력이 줄 것만 염려했다. 예수를 죽였을 때와 단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판결의 과정과 결과를 조금만 따져 봐도 직권남용에 의한 명백한 오심(誤審)이었다. 그 판결은 오직 자기들의 교권유지와 기득권보호 차원에서만 이루어진 것이었다. 세상 법률로만 따져도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베드로는 아무리 무식해도 그런 사실을 충분히 눈치 챌 수 있었다. 다른 말로 자기가 무죄임을 분명 확신했기에 판결을 대놓고 거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자기가 행한 이적과 설교의 배경에는 땅과 하늘의 권세를 지닌 예수님이, 당신의 마지막 약속대로, 함께 하고 있음을 알았다. 자기 쪽에만 천하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있고 자기들을 판결하는 관원과 제사장 쪽에는 그분이 안 계심을 보았다. 당연히 “하나님 말씀을 따르랴 너희 말을 들으랴?”라고 당당하게 반발할 수 있었다. 그는 사태의 전말을 먼저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판단했다. 아니 성령님이 그를 지혜롭게 깨우쳐 줌과 동시에 담대한 용기로 맞설 수 있게끔 하셨던 것이다.
이 판결을 억지로 갖다 붙인 미숙한 판결이라고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된다. 제사장들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한국의 3김처럼 정치9단들이었다. 한 번 정도는 사도들을 풀어 줄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일단 경고했으니 다음에는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겠다는 무서운 노림수를 숨겨둔 판결이었다.
실제로 차후의 사태도 그렇게 진행되었다. “우리가 이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행5:28) 말하자면 본문의 사건까지만 해도 예수 이름으로 도를 전하는 것에 대한 금지할 법도가 없었기에 풀어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본문의 판결을 선례로 삼아 이후 사도들을 핍박할 확실한 법적 근거를 만들어 놓겠다는 의도였다.
두 번째의 경우에서도 제사장들의 판결은 여전히 흥미롭기 짝이 없다. 이전 판결을 어겼으니 잘못했다라고 따지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자기들에게 돌렸다는 사실에 더 흥분 했다. 방귀 뀐 사람이 더 화낸다는 속담대로 자기들의 죄를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꼴이다.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전하는 도나 이적이 백성들 사이에 성행할수록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사실의 반증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리는 가만히 있어도 그 자체로 진리다. 저절로 빛을 발한다. 사람들이 그 빛을 보고 감탄을 하던 안 하던 아무 관계없다. 모두가 영적 장님이 되어서 그 빛을 보지 못해도 빛은 여전히 빛으로 광채를 발할 뿐이다.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 구태여 비 진리를 부인하면서까지 진리를 내세울 필요는 없다.
두 번째 사건의 동일한 판결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도 여전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 참으로 그 믿음이 대단해 보인다. 그러나 누구라도 한 번 겪었던 일에는 아무래도 더 담담해진다. 베드로는 첫째나 둘째 경우나 공(共)히 자기를 위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음을 온전히 확신했던 것이다.
성령은 일상적이다.
언제든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최고 권력자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자는 사실상 없다. 인간의 성정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사도들은 실제로 아주 담담했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인간이 아닌 다른 능력이 함께 작용했다는 뜻이다. 사도들은 성령의 권능을 입어서 담대해졌던 것이다.
베드로는 두 번째 사건에서 스스로 그 사실을 증명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행5:32)고 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에 성령도 함께 증인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성령보다 먼저 자기가 그 일에 증인이라고 했다. 자신들의 판단과 결정으로 증거 한다는 것이다. 성령이 상황을 분석하여 판단하고 대처하는 지혜도 주셨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성령이 단순히 죽음 앞에도 당당한 담대한 배포만 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성령의 권능이 작동하면 신자로 몸이 떨리며 눈물이 나고 감격해서 어쩔 줄 몰라 절로 경건해지게 하며 그 주위에는 기적 같은 일들이 나타나야 한다고 착각한다. 성령은 무엇보다 진리의 영이다. 성도들에게 분별력을 허용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신다. 말하자면 신자가 기대, 상상,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상식적인 모습으로 일상생활의 작은 일에서부터, 신자가 의식하든 못하든, 신자를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자주 회자되는 재미있는 예화가 있다. 어떤 사람이 홍수가 나서 집이 떠내려갈 지경이 되어 지붕위에 피신하고 있었다. 하나님께 제발 구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렸다. 고무보트를 타고 지나가던 이웃 사람이 어서 보트에 옮겨 타라고 권했다. 그 사람은 “아니야! 하나님께 기도했으니 하나님이 구해 주실 거야”라고 거절했다. 또 얼마 있다가 다른 사람이 튜브를 던져 주면서 받으라고 외쳤다. 이번에도 그는 동일한 이유를 대며 거절했다. 조금 후에 또 한 사람이 나타나 밧줄을 던져 주면서 빨리 내려오라고 독촉했다. 여전히 기도했으니 하나님이 건져주신다고 고집 부리며 그대로 있었다.
이 사람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당연히 물에 빠져 죽었다. 다른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죽어서 하나님을 만나 제가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왜 구해 주지 않았느냐고 항의했다. 하나님은 “네 기도를 듣고 너를 구하려 한 번도 아니고 세 사람이나 보냈지 않느냐?”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은 상식과 이성을 초월한 기적적인 방식을 결코 자주 동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신자가 보기에는 아주 합리적이고도 보편적이며 상식적인 방법을 쓰신다. 만약 하나님의 일이 상식적인 일상을 초월해야 한다고만 기대하면 예수님의 지적대로 표적만 구하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되기 쉽다.
우리 보기에는 사도들이 영웅적일만한 담대함을 가지게 된 것은 성령의 권능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성령이 그들에게 작용된 실제적 결과는 반드시 인격적인 교통의 모습이었다. 한 마디로 그들을 갑자기 슈퍼맨으로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 반대로 사도들을 허수아비나 로봇처럼 가만히 있게 해놓고 하나님 혼자서 모든 일을 해치운 것도 아니었다.
사도들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20)라고 말했다. 아무리 협박하면서 위해를 가해도 보고 들은 사실을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목숨이 달린 판에 있지도 않은 일을 보고 들은 양 말할 리는 더더욱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과 3년간 동행하면서 주님이 하시는 모든 사역을 직접 옆에서 보았다. 일상적 삶의 틀 안에서 예수님과 일대일의 대면과 동행을 통해 인격적인 교제를 가졌다. 예수님이 행하신 가르침과 섬김과 이적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강림 등을 통해 도저히 부인하려야 할 수 없는 한 가지 진실을 알게 된 것뿐이다. 바로 자기 스승이 메시아이자 모든 인생의 주관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보고들은 그대로만 전한다고 했다. 오랜 수양과 묵상을 통해 스스로 터득한 심오하고 감동적인 종교 사상이나 계명을 전한 것이 아니었다.
보고 들은 대로 전한다는 말 안에 숨겨진 뜻이 무엇인가? “아니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중시하는 경건한 제사장들이 오히려 우리더러 거짓말을 하라는 말입니까? 우리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사도들은 아주 단순히 정직하게 행한 것이다. 정직이란 인간이라면 누구나 알고 실천해야 할 상식적인 도덕의 한 덕목에 불과하지 않는가?
말하자면 사도들의 담대함은 자신들 인격을 구성하는 한 요소인 양심을 지키는 정도의 가장 초보적인 도덕적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구태여 제사장들에게 성령님이 시켜서, 혹은 내 믿음이 허락하지 않으니 당신들의 경고를 따를 수 없다고 큰 소리로 반발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미리부터 어떻게 당부하며 예언하셨는가? “내 이름으로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눅21:12‐15).”
구재(口才)란 말재주를 말한다. 성령이 학문이 없는 범인 베드로의 입술에 관원들도 놀랄 만한 말재주를 심어 준 것이다. 또 재판 과정을 유심히 살펴서 하나님의 뜻대로 해석 적용할 수 있는 지혜도 생기게 했다. 제사장들의 어떤 협박에도 굴하지 않을 담력과 함께 말이다. 한 마디로 사도들과 관원들의 재판 과정에 겉으로 초자연적 기적과 능력이 드러난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재삼재사 강조하지만 성령은 일상적인 모습에서 상식적인 통로로 신자를 인도할 뿐이다.
왜 신앙영웅이 될 수 없는가?
그렇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일에 영웅적 모습으로 쓰임 받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럼에도 그렇게 되지 않거나, 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다.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을 따르려면 반드시 뭔가 거룩하고 거창한 일을 해야만 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내 형편과 여건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다. 엉뚱한 데로만 다니며 엉뚱한 모습의 하나님만 찾기 때문이다. 거룩하고 경건한 종교적 냄새나 초자연적 능력이 드러나야만 하나님의 일인 양 착각한다. 한 마디로 성령의 인도를 성실하게 받지 못한 것이다.
베드로가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해보라”라고 한 것은 진실을 그대로 말한 것이다. 즉 거짓말을 안 한 것뿐이다. 특별히 심오한 방언을 하거나 입신을 해서 관원들의 눈을 동그랗게 뜨게 만들지 않았다. 술에 취한 듯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눈에 안 보이는 신기한 힘에 사로잡혀서 시키는 대로 따라간 것도 절대 아니다. 죽으면 죽었지 거짓말은 못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예수 믿는 신자들이 예수가 유일한 길이라고 선포해도 사람들이 잘 믿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회적 문화적 신학적으로 깊이 분석할 필요도 사실 없다. 세상 사람들이 신자가 진실을 전한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베드로처럼 죽어도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 전해지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이 유일한 길이라는 선언이 거짓말이라는 뜻이 아니다. 전하는 사람이 평소에 하는 행동을 보면 그 전하는 말이 도무지 진리처럼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죽으면 죽었지 진리대로, 거짓 없이 정직하게 사는 모습이 신자에게서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상식수준에서도 신자의 말이 믿기지 않더라는 것이다. 또 상식수준으로도 못 믿을 정도니 정작 성령의 역사로 방언이 터지고 신유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조차 그들에게 이상한 모습으로 비추인 것이다.
한 때 전도 목적의 간증집회가 유행했다가 최근에는 많이 시들해졌다. 간증한 내용이 금방 거짓이라는 것이 들통 났기 때문이다. 간증에 포함된 하나님의 역사가 거짓이라는 것이 아니라 간증자의 위선이 드러난 것이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순진해서 간증집회에 와서 감격하고 눈물 흘리고 예수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조금 지나 보니까 간증한 자들이 간증한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눈치 챈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구원을 받은 자라면 세상 사람들과는 무엇인가 다르게 살아야 할 텐데도 전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 베드로처럼 죽어도 거짓말은 안 하겠다는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이다.
대신에 신자들이 세상에 보여준 것이라고는 기도하면 응답받아서 귀신을 쫓고, 병이 낫고 돈도 번다는 것뿐이었다. 예수를 믿었더니 축복 받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 영어로 말해 죄송하지만 그야말로 “So, What?”(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이다. 돈을 벌려면 경영학석사를 따면 되고, 질병은 병원에서 치료 받으면 되고, 심지어 무당굿으로도 고칠 수 있는데 꼭 예수를 믿을 이유가 뭐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것들로 예수가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가 없다. 더 이상 신자들의 허풍 섞인(?) 간증으로는 사람들을 속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들 앞에 예수만이 유일한 길로 보이게끔 살지 않고는 그분을 진정으로 증거할 방도는 따로 없다.
최근에는 그래서 교회들이 어떤 행사에 주력하는가? 성경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경회다. 무슨 뜻인가? 신자들이 자신의 변화된 존재와 삶과 인생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보여줄 수 없으니 하나님의 능력에라도 의존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그리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하나님의 관심은 신자부터 거룩해지는 것인데도 신자들은 자신들이 바뀔 생각은 않고 하나님이라도 나서서 어서 빨리 우리 교회의 빈 좌석부터 채워 달라는 요구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한다는 것은 예수를 증거 하는 최후의 방법일 수 있다. 그런데 그분 말씀에 직접 의존했는데도 잘 안 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다. 갈수록.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가 임박해져 간다는 증거만 늘어난다. 그러나 신자들마저 이렇게 무력하니까 어쩌면 예수님조차 다시 오실 힘을 잃지 않을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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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복음의 부흥을 위해 신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없는가? 왜 요즘에는 베드로 같은 신앙의 영웅이 안 나올까? 다른 이유가 없다. 베드로처럼 죽어도 거짓말 안 하겠다는 신자가 없어진 한 가지 이유뿐이다. 거창하게 기도하고 금식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할 필요 없다. 정말 단순하게 어디에서 어떤 형편이던 있는 모습 그대로 정직하게 사는 것부터 실천하면 된다.
지금은 베드로가 살던 시절처럼 정직하게 살기 위해 생명까지 걸어야만 할 필요는 한국이나 미국에선 절대 없다. 단지 남들보다 돈을 좀 적게 벌기에 화려하고 풍요롭게 살 수 없다는 것만 참으면 된다. 그런데도 오히려 정직한 신자들은 더 줄어들고 있으니 대체 어찌된 연유인가? 집회 때마다 은혜 받았다고 눈물콧물 흘리면서 왜 그렇게는 못사는가? 성령의 역사가 일상적인 작은 일에서 상식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 도저히 마음에 안 들기 때문이다. 사람들 앞에 신비하고 화끈하게 비춰져야만 성령의 역사인 줄 알기 때문이다.
상식을 지키는 신앙
예수를 믿는 내용이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을 수는 있어도 상충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하나님의 역사는 엄청나고 위대하다. 정말 오묘하고 신기한 은혜와 권능으로 세상 사람은 맛볼 수 없는 평강과 자유와 안식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그분의 역사가 오묘하고 신기하다는 것은 인간이 전혀 추측도 못하는 지혜와 영원까지 이어지는 계획에 따라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의미다. 홍해를 가르는 것 같은 엄청난 기적은 정말로 꼭 필요할 때가 아니고는 쉽게 일으키지 않으신다. 말하자면 400년 이상 세계 최강국에서 노예로 고난을 겪었던 어떤 민족 전체를 구원해 낼 때 같은 경우다.
그분의 역사가 엄청난 기적의 형태였든, 일상 가운데 평범한 모습으로 나타났든 오직 당신의 절대 주권에 달렸다. 그리고 아무리 일상적인 모습으로 역사해도 들을 귀가 있고 보는 눈이 있는 신자에게는 당신의 뜻을 분명하게 드러내신다. 신자가 항상 기적만 바라는 믿음을 가져선 안 된다. 역으로 따지면 기적은 도무지 일상적이 아닐 경우에 일어나니까 신자 본인부터 아주 극한적인 상황에 처해있어야 한다는 뜻이 되지 않는가?
신자가 정작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모습은 서두에 말한 대로 그냥 단순하고도 순수하게 그분을 믿으면 된다. 의처증 같은 증세만 안 보이면 된다. 그분이 명하신 내용을 그냥 그대로 행하면 된다. 당신께서 일상 가운데 역사하신다면 신자도 일상 가운데서 그분께 성실하게 충성하면 된다. 특별히 불신자들 앞에선 더더욱 일상에서 성실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요즘 세상 사람들이 예수쟁이라면 무조건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쟁이들이 너무나 상식과 교양이 없는 짓들을 많이 하고 다닌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 선교를 위한 음식바자회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 헌금하는 것이니까 더 비싸게 파는 경우다. 맛이 유별나고 성의껏 만든 것도 아니고 아무래도 전문 음식점 수준보다 딸리는 데도 얼굴도 두껍다. 나아가 티켓을 발부해 아는 사람들에게 강요하다시피 나눠준다.
교회에선 원래 이익을 붙여 물건을 팔면 안 된다. 특별히 미국에서 교회는 반드시 비영리법인으로 미국 국세청에 등록하게끔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교회라도 이익을 보는 사업을 할 때는 신고하고 세금을 내어야만 한다. 음식 바자회는 식재료를 사다 가공해서 이익을 붙여 파니까 분명 영업행위에 해당한다. 상식으로만 따져도 엄격하게 법을 따라야 한다.
반면에 교회 바자회는 헌 물건들을 기부 받아 ‐ 돈을 들여 물건을 사서 파는 영업이 아님 ‐ 싸게 팔아서 헌금에 전용하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국세청에 교회를 등록할 때는 영업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놓고는 버젓이 영업을 하고선 세금 내지 않으면 교회가 앞장서서 거짓말하고 탈세한 꼴이지 않는가? 그것도 하나님의 일이란 거창한 명목을 내세우고 교회에서 행하므로 그야말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 셈이다.
연약한 개척 교회가 건축이나 선교헌금을 모으겠다면 때로는 음식바자회를 해도 좋다. 그러나 아주 맛있고 정갈하게 만들되 시중보다 싸게 팔아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간과해선 안 될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그렇게 한국음식을 싸게 팔면 유타 같이 좁은 동네의 한국식당의 그날 하루 영업은 어떻게 되겠는가? 만약에 한국 식당의 주인이 불신자라면 얼마나 큰 불평을 하겠는가? 재수 없는 예수쟁이들 때문에 제일 손님 많은 주말에 완전 공쳤다고 하지 않겠는가?
까다롭게 따지자는 뜻이 아니다. 예수 믿는 신자는 반드시 예수님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그런 일을 어떻게 처리했을지 가장 먼저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가 아직 연약해 헌금이 부족한 것과 불신자들에게 괜한 일로 예수쟁이라고 싸잡아 욕먹는 것 중에 어느 쪽을 잘못했다고 야단치겠는가? 전자의 경우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기회다. 그럼에도 자칫 인간적 지략으로 세상의 욕을 먹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지 않겠는가?
신자가 세상에서 욕먹고 핍박 받을 일은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고 또 그들과 죄악에 동참하지 않는 모습에 한정되어야 한다. 정말 신자답게 죄악과 사단과 사망에 당당하게 맞선다면 얼마든지 욕을 먹어도, 아니 핍박을 받을수록 복이 있다. 반면에 세상의 상식, 습관, 법률, 도덕이 성경의 진리와 상충되지 않을 때는 구태여 종교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세상에서 그들과 함께 얼마든지 아름답게 어울릴 수 있어야 한다.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의 모습으로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모습으로 접근한 바울의 본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은 심지어 바리새인들더러 금식한 표시를 내지 말라고 말씀하셨지 않은가? 물론 그들의 외식하는 종교 행위를 야단 친 것이 근본 의도이지만,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들 사이에서도 지킬 것은 지키라는 뜻이지 않는가? 하물며 세상 사람들을 대할 때는 더더욱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교회와 성도는 자기 교회와 성도만을 위한다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선 안 된다.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불신자들에게 선한 유익과 거룩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 정말 예수 믿는 분들은 다르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
신자들의 비상식적인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자. 성도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 위문 가서는 신자들끼리 잔치를 하고 온다. 옆 침대에 환자가 있든 없던 큰 소리로 기도하고 찬양하며 예배 본다. 거룩한(?) 목사님이 앞장서고 교양 있어 보이는 여자 분들이 서로 권사님, 집사님이라고 불러가면서 실컷 떠들어 놓고는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진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에 누가 감히 뭐라고 할쏘냐?” 식이다.
우선 다른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한다. 또 원한다면 다른 환자들부터 기도 해주고 난 후에 자기 성도를 위해 예배 드려야 한다. 만약 다른 사람이 양해를 하지 않거나 썩 내켜하지 않으면 목사님과 한두 사람이 남에게 안 들릴 정도로 조용히 기도와 위로만 해주면 된다. 소리 내어 찬양하고 울부짖지 않아도 주님은 다 아신다. 또 당신께서 돌보아야 할 성도는 반드시 치료해 주신다.
평생 싸워야 할 싸움
다시 말하지만 우리도 베드로처럼 얼마든지 담대한 신앙의 영웅이 될 수 있다. 예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증거할 수 있다. 현재 처해 있는 상황에서 지성과 이성으로 조금만 따져보면 금방 그 구체적 방도까지 깨달을 수 있다. 잘 모르겠으면 그냥 정직하게 진리대로 살면 된다. 기실. 목숨까지 걸 것도 없다. 돈을 조금 손해 보고, 남들에게 조금 더 양보만 하면 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핍박자들 앞에서 전할 구재를 심어주겠다고 하면서 마지막 결론으로 무엇을 약속하셨는가? “너희 머리털 하나라도 상치 아니하리라.”(눅21:18) 베드로가 담대하게 재판장의 판결을 그 자리에서 거부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관원들이 백성들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다.” 예수님의 약속이 그대로 이뤄졌지 않는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성경은 백성들도 베드로가 한 말이 절대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다고 말한다. 바로 그것이 신자가 성령 충만한 모습의 실체다. 사람들이 신자가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진리라고 선포하고 또 그 진리대로만 즉, 예수님의 약속만 바라보고 사는 것을 인정해 주는 것이다. 신자가 자신이 선포하는 진리대로 살지 않으면 세상은 더 이상 속지 않는다. 그리고 예수가 증거 되지 않아 전도 안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신자가 그렇게 살지 않으면 바로 예수님을 속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큰 죄를 짓게 된다는 것이다.
신앙이란 예수 잘 믿었다고 모든 환난과 문제에서 건져주려는 금 동아줄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절대 아니다. 하나님은 낡고 낡은 동아줄이나 고무튜브를 너무나 평범한 사람을 통해 아무렇게나 던져줄 수 있다. 그러나 신자가 세상 앞에 주님의 진리대로만 서있다면 그 약해 보이며 아무 생색나지 않는 일상적인 모습에서도 하나님은 신자의 머리털 하나도 다치지 않게 해주신다.
하나님의 권능과 은총은 흔히 예상 기대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상식적인 모습으로 매일 매순간 신자 앞으로 다가온다. 신자가 보여야 할 반응도 비상한 모습만 띄려, 특별히 종교적 모습을 취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비상한 분이지 신자는 단지 범인일 뿐이지 않는가?
요컨대 신앙은 하나님과 사람과 자신의 어느 한쪽이 아닌 셋 모두에게 정직하게 사는 것이다. 바꿔 말해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등지는 모습이 있을 때마다 성령의 인도를 구하여 하나님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싸움이다. 하나님께 정직하기만 하면 나머지 둘에게 정직할 수 있게끔 성령이 인도해 주신다. 그러나 이 싸움에 한두 번 크게 성공했다고 신앙의 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평생을 두고 꾸준히 싸우는 자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당신의 일에 쓰임 받게 해주신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 자신, 사람들 중 누구에게 가장 정직한가? 혹시 사람 눈치 보느라 정직과는 담을 쌓고 있지는 않는가? 무엇보다 평생을 두고 꾸준하게 하나님께만 정직할 자신이 있는가?
2/25/2009
유타대학촌 교회 7/7/1996 주일 설교-->
사도행전강해 (20)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 여세나 되었더라.” (행4:13‐22)
죽은 사람에게 겁먹는 제사장들
본문은 법정최후진술을 마친 베드로에게 대제사장이 판결을 내리는 장면이다.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는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다. 전후사정을 살펴보면 도저히 사도들에게서 죄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갖다 댈 법규조차 없어서 나온 궁여지책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는 절대 설교하지 말라는 판결은 사도 자신들을 포함해 다른 누구의 명의로는 해도 된다는 것이다. 유대 사회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라는 이름에 얼마나 과민한 반응을 보였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자기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던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던 안 느꼈던, 굉장히 민감해 있었다는 뜻이다. 예수라는 인물과 생전의 행적과 십자가 사건이 당시 유대사회에서 지녔던 폭발력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지 않는가?
바꿔 말해 예수님이 생전에 베푸신 모든 이적과 부활 승천하셨다는 성경 기록이 역사적 진실임을 입증해 준다. 단순히 종교적으로 심오한 가르침을 베풀면서 도덕적으로 선한 본을 보인 인물 즉, 랍비나 선지자였다면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할 이유는 없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데 영향을 끼쳐봐야 얼마나 심각하고 오래 가겠는가?
예컨대 베드로가 기적을 베풀어도 그의 생전에는 추종자들이 어느 정도 생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정말 큰 기적을 일으켰지만 관원들이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아주 평범한 인물에 불과하며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서 기적이 일어난 줄 알았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해 예수는 관원들이 보기에도 범인과는 완전히 달랐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행적이 인간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들도 인정했다는 뜻이다. 외면의 이상할 정도로 강한 부정은 오히려 내면의 강한 긍정을 의미하지 않는가? 유대 지도층들이 그 분이 메시야였음을 부인하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 사실을 더 확증 짓는데 도움 될 뿐이었다.
말도 안 되는 그 억지 판결을 베드로는 일언지하에 거부해버렸다. 하나님 말을 듣지 않고 어떻게 너희들 말을 따르겠느냐고 했다. 사람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은 정말 당당하고도 올바른 믿음이다. 지금 재판장이 단순히 판결만 내린 것이 아니라 겁을 주며 위협했다. 그럼에도 즉각 반발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유대 대법정은 지금으로 치면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 세 부서의 권한을 다 가졌다. 헤롯이 로마 앞잡이 왕이라면 대제사장은 유대의 실질적 통치자였다. 그런 자의 명령을 바로 대놓고 거절한다는 것은 생명을 건 모험으로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신자들이 이런 성경 기사를 볼 때마다 예수 믿는 자라면 당연히 이 정도는 되어야지라고 큰 도전을 받고 또 그렇게 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솔직히 매번 실패하는 것도 사실이다. 자꾸만 자기 믿음에 대해 실망하고 좌절한다. 정말 마음의 소원은 있으되 육신이 따르지 않음을 절감한다.
심지어 목숨을 걸만큼 거창한 일이 아닌데도 그렇다. 교회 행사에 열심을 내자니 남편이 화를 내고, 주님의 일을 하자니 돈을 못 버는 처량한 신세로 떨어진 것 같다. 언제쯤이면 베드로처럼 정말 강하고 담대한 신앙의 용사가 될 수 있을지 항상 죄책감에 사로 잡혀 있다. 중도에 포기할 수도 없어 어정쩡하게 의무감으로만 형식적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부담감을 도무지 지울 수 없다. 그럼 베드로의 그런 담대함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이며 우리는 왜 그렇게 되지 못할까?
담대함의 근거
신자들이 크게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자기 믿음이 아주 약하다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다. 믿음의 가장 큰 특성은 안 믿어지면 끝까지 못 믿는 것이고, 어떤 연유가 되었든 일단 믿어지면 계속해서 믿게 되는 것이다. 믿음이란 그저 그냥 믿는 것일 뿐, 강하게 믿거나 약하게 믿는다는 표현 자체에 어폐가 있다. 예컨대 사장이 자기 차를 모는 운전수의 실력을 믿지 못하면 당장 해고할 것이다. 일단 믿으면 고용해서 안심하고 타고 다니지 계속 불안해하면서 탈 리는 없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선 더 그렇다. 그분이 우주 만물의 주인으로 살아계시며 인간 만사를 주관하시고 특별히 자기 인생을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 이끄시고 있다는 것은 모든 신자가 믿는다. 이 부분에서 의심, 불신, 불만을 가진다면 신자가 아니다. 비유컨대 의처증에 걸린 남편이 아내를 감시하듯이 하나님을 항상 의심의 눈초리를 갖고 예의 주시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런 맥락에서 베드로의 믿음이 우리보다 월등히 나은 것은 결코 아니다. 믿음의 수준에서 대동소이하다면 믿음에는 또 다른 요소가 있다는 뜻이다. 믿음의 위인을 본받자, 우리의 믿음을 키우자고 초등학생도 해석 적용할 수 있는 방식은 아무 효력이 없다. 솔직히 더 키워야할 믿음도 따로 없다. 성적 나쁜 학생이 일등 하는 학생의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본받자고 아무리 구호로 외쳐봐야 본인이 죽기 살기로 공부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것과 같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슈퍼맨들이 절대 아니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범인들이다. 베드로도 무식한 어부였지 않는가? 그럼에도 그들은 “기도한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는”(약4:17,18)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냈다. 현대의 신자들은 누구나가 최소한 베드로보다는 더 똑똑하고 믿음에서도 뒤지지 않는다. 그럼 오히려 우리 가운데 그보다 더 뛰어난 신앙 영웅이 나을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사도들을 무조건 믿음의 영웅 혹은 거룩한 의인이라고 평가해버리니까 항상 열등감에 사로잡혀 주눅이 든다. 믿음의 큰 도전은 시도도 안 해보고 의무적 형식적인 신자로만 지샌다. 신자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목숨을 건다는 식의 거창한 결단이 아니다. 그러고선 막상 목숨을 걸지 못하느니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일단 작은 일이라도 부딪히고 봐야 한다.
그래서 무조건 믿음만 외쳐댈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처했던 당시 상황을 좀 더 냉정하고도 세밀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베드로가 담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실상 그 또한 모든 재판 과정과 결말을 유심히 지켜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엉터리 같은 판결이라면 얼마든지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믿음으로 무턱대고 밀어 붙인 것이 아니었다. 온전한 전후좌우의 상황 판단 없이 믿음으로만 담대해진다는 것은 믿음이 마취약이나 신경안정제 역할만 한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그가 최후진술을 마치자 공회원들은 세 가지 중요 사항을 검토했다. 첫째는 정황 증거를 검토했다. 사도들은 학문 없는 범인인데도 기탄없이 말했다. 학문이라는 것은 당시로서는 구약성경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베드로가 예수를 설명한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도 시편(118:22)에서 인용한 것이다. 메시아를 예언한 내용을 예수님에게 적용한 것이다. 관원들로선 베드로의 설교 내용에서 정죄할 꼬투리를 전혀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그들이 메시아를 인정하지 않거나 소망하지 않는 사람으로 몰릴 우려도 있었다.
사도들이 예수님 생전이나 죽은 후나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 문제 삼고자 한 것도 학문 없는 자들이 어떻게 기탄없이 말을 하는가가 아니었다. 사도들에게 특별한 정치적 의도가 없으며 또 자기들을 위협할만한 종교 지도자가 될 그릇도 못 된다는 것만 확인한 것이다. 말하자면 사도들의 무죄를 내심 인정했던 것이다.
그 판결에 영향을 미친 두 번째 요소는 증인이었다. 성경은 병 나은 사람이 사십 여세나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다.(14절) 제사장들이나 관원들이 성전 미문 앞에서 항상 구걸하고 있던 앉은뱅이를 모를 리도 없었고, 멀쩡하게 일어나 걷는 것을 저들도 분명히 목도했다. 또 나이 사십이나 된 자가, 그것도 매일 자기에게 구제를 베풀던 그 사회의 지도자들에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증언하면서 거짓이나 꾸밈을 포함시킬 리는 없었다. 그의 증언만으로 증거로서 충분한 효력을 가질 수 있었다. 관원들로선 구체적으로 도무지 설명할 수 없고 이해도 안 되지만 오직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자기들 눈앞에 벌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 그 일은 아주 선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검토했던 사항은 이 기적은 이미 유명한 표적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장소인 성전에서, 그것도 기도 시간에 일어났으니 온 예루살렘 사람들이 다 알게 된 것이다. 너무나 명확하고 엄연한 진실이 되었다. 앉은뱅이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더니 일어나 걷게 되었다. 관원과 제사장들도 도저히 힐난할 말이 없었고(14절) 또 “어떻게 할꼬. 우리도 (도무지) 부인할 수 없다.”라고 실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치 9단의 판결
이런 명확한 사건 내용에 비해 판결은 아주 이상야릇하게 났다. 모든 재판은 피고에게 잘못의 책임이 있는지부터 밝히는 법이다. 형사사건이면 유죄 혹은 무죄여부를, 민사사건이며 누가 옳고 그른가를 먼저 밝힌 다음에 적절한 형량이나 손해배상의 책임이 선고되어야 한다. 제 삼의 판결은 벌을 줄만큼의 잘못이 아닐 때에 한해 훈계하여 방면하는 것이다. 이번 경우에는 앉은뱅이를 고치는 일은 한 번으로 족하니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할 수는 도저히 없다.
사건의 본질은 수십 년 먹은 앉은뱅이가 예수님께 기도하여 단번에 일어나 걷게 된 기적이지 않는가? 권장은 못할망정 아예 재판 받을 사안이 아니다. 그런데 판결 내용은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해도 좋은데 단 예수의 이름으로만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위협을 주면서 말이다.
한 불쌍한 장애인이, 자기들도 심심찮게 구제를 베풀었던, 고침을 받은 선행은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예수의 이름이 확산되는 것을 막는 데만 급급했다. 자기들이 예수 죽인 것의 타당성은 부인되고 예수의 메시아 됨의 진실성만 확연히 부각되는 일은 어떻게든 방지하겠다는 심보다. 자칫 자기들은 메시아 죽인 천하의 죄인으로 전락됨과 동시에 경제, 사회, 정치, 종교 모든 분야에서 누리고 있는 권세와 영향력이 줄 것만 염려했다. 예수를 죽였을 때와 단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판결의 과정과 결과를 조금만 따져 봐도 직권남용에 의한 명백한 오심(誤審)이었다. 그 판결은 오직 자기들의 교권유지와 기득권보호 차원에서만 이루어진 것이었다. 세상 법률로만 따져도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베드로는 아무리 무식해도 그런 사실을 충분히 눈치 챌 수 있었다. 다른 말로 자기가 무죄임을 분명 확신했기에 판결을 대놓고 거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자기가 행한 이적과 설교의 배경에는 땅과 하늘의 권세를 지닌 예수님이, 당신의 마지막 약속대로, 함께 하고 있음을 알았다. 자기 쪽에만 천하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있고 자기들을 판결하는 관원과 제사장 쪽에는 그분이 안 계심을 보았다. 당연히 “하나님 말씀을 따르랴 너희 말을 들으랴?”라고 당당하게 반발할 수 있었다. 그는 사태의 전말을 먼저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판단했다. 아니 성령님이 그를 지혜롭게 깨우쳐 줌과 동시에 담대한 용기로 맞설 수 있게끔 하셨던 것이다.
이 판결을 억지로 갖다 붙인 미숙한 판결이라고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된다. 제사장들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한국의 3김처럼 정치9단들이었다. 한 번 정도는 사도들을 풀어 줄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일단 경고했으니 다음에는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겠다는 무서운 노림수를 숨겨둔 판결이었다.
실제로 차후의 사태도 그렇게 진행되었다. “우리가 이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행5:28) 말하자면 본문의 사건까지만 해도 예수 이름으로 도를 전하는 것에 대한 금지할 법도가 없었기에 풀어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본문의 판결을 선례로 삼아 이후 사도들을 핍박할 확실한 법적 근거를 만들어 놓겠다는 의도였다.
두 번째의 경우에서도 제사장들의 판결은 여전히 흥미롭기 짝이 없다. 이전 판결을 어겼으니 잘못했다라고 따지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자기들에게 돌렸다는 사실에 더 흥분 했다. 방귀 뀐 사람이 더 화낸다는 속담대로 자기들의 죄를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꼴이다.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전하는 도나 이적이 백성들 사이에 성행할수록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사실의 반증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리는 가만히 있어도 그 자체로 진리다. 저절로 빛을 발한다. 사람들이 그 빛을 보고 감탄을 하던 안 하던 아무 관계없다. 모두가 영적 장님이 되어서 그 빛을 보지 못해도 빛은 여전히 빛으로 광채를 발할 뿐이다.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 구태여 비 진리를 부인하면서까지 진리를 내세울 필요는 없다.
두 번째 사건의 동일한 판결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도 여전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 참으로 그 믿음이 대단해 보인다. 그러나 누구라도 한 번 겪었던 일에는 아무래도 더 담담해진다. 베드로는 첫째나 둘째 경우나 공(共)히 자기를 위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음을 온전히 확신했던 것이다.
성령은 일상적이다.
언제든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최고 권력자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자는 사실상 없다. 인간의 성정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사도들은 실제로 아주 담담했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인간이 아닌 다른 능력이 함께 작용했다는 뜻이다. 사도들은 성령의 권능을 입어서 담대해졌던 것이다.
베드로는 두 번째 사건에서 스스로 그 사실을 증명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행5:32)고 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에 성령도 함께 증인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성령보다 먼저 자기가 그 일에 증인이라고 했다. 자신들의 판단과 결정으로 증거 한다는 것이다. 성령이 상황을 분석하여 판단하고 대처하는 지혜도 주셨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성령이 단순히 죽음 앞에도 당당한 담대한 배포만 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성령의 권능이 작동하면 신자로 몸이 떨리며 눈물이 나고 감격해서 어쩔 줄 몰라 절로 경건해지게 하며 그 주위에는 기적 같은 일들이 나타나야 한다고 착각한다. 성령은 무엇보다 진리의 영이다. 성도들에게 분별력을 허용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신다. 말하자면 신자가 기대, 상상,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상식적인 모습으로 일상생활의 작은 일에서부터, 신자가 의식하든 못하든, 신자를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자주 회자되는 재미있는 예화가 있다. 어떤 사람이 홍수가 나서 집이 떠내려갈 지경이 되어 지붕위에 피신하고 있었다. 하나님께 제발 구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렸다. 고무보트를 타고 지나가던 이웃 사람이 어서 보트에 옮겨 타라고 권했다. 그 사람은 “아니야! 하나님께 기도했으니 하나님이 구해 주실 거야”라고 거절했다. 또 얼마 있다가 다른 사람이 튜브를 던져 주면서 받으라고 외쳤다. 이번에도 그는 동일한 이유를 대며 거절했다. 조금 후에 또 한 사람이 나타나 밧줄을 던져 주면서 빨리 내려오라고 독촉했다. 여전히 기도했으니 하나님이 건져주신다고 고집 부리며 그대로 있었다.
이 사람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당연히 물에 빠져 죽었다. 다른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죽어서 하나님을 만나 제가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왜 구해 주지 않았느냐고 항의했다. 하나님은 “네 기도를 듣고 너를 구하려 한 번도 아니고 세 사람이나 보냈지 않느냐?”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은 상식과 이성을 초월한 기적적인 방식을 결코 자주 동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신자가 보기에는 아주 합리적이고도 보편적이며 상식적인 방법을 쓰신다. 만약 하나님의 일이 상식적인 일상을 초월해야 한다고만 기대하면 예수님의 지적대로 표적만 구하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되기 쉽다.
우리 보기에는 사도들이 영웅적일만한 담대함을 가지게 된 것은 성령의 권능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성령이 그들에게 작용된 실제적 결과는 반드시 인격적인 교통의 모습이었다. 한 마디로 그들을 갑자기 슈퍼맨으로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 반대로 사도들을 허수아비나 로봇처럼 가만히 있게 해놓고 하나님 혼자서 모든 일을 해치운 것도 아니었다.
사도들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20)라고 말했다. 아무리 협박하면서 위해를 가해도 보고 들은 사실을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목숨이 달린 판에 있지도 않은 일을 보고 들은 양 말할 리는 더더욱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과 3년간 동행하면서 주님이 하시는 모든 사역을 직접 옆에서 보았다. 일상적 삶의 틀 안에서 예수님과 일대일의 대면과 동행을 통해 인격적인 교제를 가졌다. 예수님이 행하신 가르침과 섬김과 이적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강림 등을 통해 도저히 부인하려야 할 수 없는 한 가지 진실을 알게 된 것뿐이다. 바로 자기 스승이 메시아이자 모든 인생의 주관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보고들은 그대로만 전한다고 했다. 오랜 수양과 묵상을 통해 스스로 터득한 심오하고 감동적인 종교 사상이나 계명을 전한 것이 아니었다.
보고 들은 대로 전한다는 말 안에 숨겨진 뜻이 무엇인가? “아니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중시하는 경건한 제사장들이 오히려 우리더러 거짓말을 하라는 말입니까? 우리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사도들은 아주 단순히 정직하게 행한 것이다. 정직이란 인간이라면 누구나 알고 실천해야 할 상식적인 도덕의 한 덕목에 불과하지 않는가?
말하자면 사도들의 담대함은 자신들 인격을 구성하는 한 요소인 양심을 지키는 정도의 가장 초보적인 도덕적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구태여 제사장들에게 성령님이 시켜서, 혹은 내 믿음이 허락하지 않으니 당신들의 경고를 따를 수 없다고 큰 소리로 반발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미리부터 어떻게 당부하며 예언하셨는가? “내 이름으로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눅21:12‐15).”
구재(口才)란 말재주를 말한다. 성령이 학문이 없는 범인 베드로의 입술에 관원들도 놀랄 만한 말재주를 심어 준 것이다. 또 재판 과정을 유심히 살펴서 하나님의 뜻대로 해석 적용할 수 있는 지혜도 생기게 했다. 제사장들의 어떤 협박에도 굴하지 않을 담력과 함께 말이다. 한 마디로 사도들과 관원들의 재판 과정에 겉으로 초자연적 기적과 능력이 드러난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재삼재사 강조하지만 성령은 일상적인 모습에서 상식적인 통로로 신자를 인도할 뿐이다.
왜 신앙영웅이 될 수 없는가?
그렇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일에 영웅적 모습으로 쓰임 받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럼에도 그렇게 되지 않거나, 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다.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을 따르려면 반드시 뭔가 거룩하고 거창한 일을 해야만 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내 형편과 여건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다. 엉뚱한 데로만 다니며 엉뚱한 모습의 하나님만 찾기 때문이다. 거룩하고 경건한 종교적 냄새나 초자연적 능력이 드러나야만 하나님의 일인 양 착각한다. 한 마디로 성령의 인도를 성실하게 받지 못한 것이다.
베드로가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해보라”라고 한 것은 진실을 그대로 말한 것이다. 즉 거짓말을 안 한 것뿐이다. 특별히 심오한 방언을 하거나 입신을 해서 관원들의 눈을 동그랗게 뜨게 만들지 않았다. 술에 취한 듯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눈에 안 보이는 신기한 힘에 사로잡혀서 시키는 대로 따라간 것도 절대 아니다. 죽으면 죽었지 거짓말은 못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예수 믿는 신자들이 예수가 유일한 길이라고 선포해도 사람들이 잘 믿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회적 문화적 신학적으로 깊이 분석할 필요도 사실 없다. 세상 사람들이 신자가 진실을 전한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베드로처럼 죽어도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 전해지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이 유일한 길이라는 선언이 거짓말이라는 뜻이 아니다. 전하는 사람이 평소에 하는 행동을 보면 그 전하는 말이 도무지 진리처럼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죽으면 죽었지 진리대로, 거짓 없이 정직하게 사는 모습이 신자에게서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상식수준에서도 신자의 말이 믿기지 않더라는 것이다. 또 상식수준으로도 못 믿을 정도니 정작 성령의 역사로 방언이 터지고 신유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조차 그들에게 이상한 모습으로 비추인 것이다.
한 때 전도 목적의 간증집회가 유행했다가 최근에는 많이 시들해졌다. 간증한 내용이 금방 거짓이라는 것이 들통 났기 때문이다. 간증에 포함된 하나님의 역사가 거짓이라는 것이 아니라 간증자의 위선이 드러난 것이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순진해서 간증집회에 와서 감격하고 눈물 흘리고 예수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조금 지나 보니까 간증한 자들이 간증한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눈치 챈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구원을 받은 자라면 세상 사람들과는 무엇인가 다르게 살아야 할 텐데도 전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 베드로처럼 죽어도 거짓말은 안 하겠다는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이다.
대신에 신자들이 세상에 보여준 것이라고는 기도하면 응답받아서 귀신을 쫓고, 병이 낫고 돈도 번다는 것뿐이었다. 예수를 믿었더니 축복 받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 영어로 말해 죄송하지만 그야말로 “So, What?”(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이다. 돈을 벌려면 경영학석사를 따면 되고, 질병은 병원에서 치료 받으면 되고, 심지어 무당굿으로도 고칠 수 있는데 꼭 예수를 믿을 이유가 뭐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것들로 예수가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가 없다. 더 이상 신자들의 허풍 섞인(?) 간증으로는 사람들을 속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들 앞에 예수만이 유일한 길로 보이게끔 살지 않고는 그분을 진정으로 증거할 방도는 따로 없다.
최근에는 그래서 교회들이 어떤 행사에 주력하는가? 성경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경회다. 무슨 뜻인가? 신자들이 자신의 변화된 존재와 삶과 인생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보여줄 수 없으니 하나님의 능력에라도 의존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그리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하나님의 관심은 신자부터 거룩해지는 것인데도 신자들은 자신들이 바뀔 생각은 않고 하나님이라도 나서서 어서 빨리 우리 교회의 빈 좌석부터 채워 달라는 요구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한다는 것은 예수를 증거 하는 최후의 방법일 수 있다. 그런데 그분 말씀에 직접 의존했는데도 잘 안 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다. 갈수록.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가 임박해져 간다는 증거만 늘어난다. 그러나 신자들마저 이렇게 무력하니까 어쩌면 예수님조차 다시 오실 힘을 잃지 않을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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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복음의 부흥을 위해 신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없는가? 왜 요즘에는 베드로 같은 신앙의 영웅이 안 나올까? 다른 이유가 없다. 베드로처럼 죽어도 거짓말 안 하겠다는 신자가 없어진 한 가지 이유뿐이다. 거창하게 기도하고 금식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할 필요 없다. 정말 단순하게 어디에서 어떤 형편이던 있는 모습 그대로 정직하게 사는 것부터 실천하면 된다.
지금은 베드로가 살던 시절처럼 정직하게 살기 위해 생명까지 걸어야만 할 필요는 한국이나 미국에선 절대 없다. 단지 남들보다 돈을 좀 적게 벌기에 화려하고 풍요롭게 살 수 없다는 것만 참으면 된다. 그런데도 오히려 정직한 신자들은 더 줄어들고 있으니 대체 어찌된 연유인가? 집회 때마다 은혜 받았다고 눈물콧물 흘리면서 왜 그렇게는 못사는가? 성령의 역사가 일상적인 작은 일에서 상식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 도저히 마음에 안 들기 때문이다. 사람들 앞에 신비하고 화끈하게 비춰져야만 성령의 역사인 줄 알기 때문이다.
상식을 지키는 신앙
예수를 믿는 내용이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을 수는 있어도 상충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하나님의 역사는 엄청나고 위대하다. 정말 오묘하고 신기한 은혜와 권능으로 세상 사람은 맛볼 수 없는 평강과 자유와 안식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그분의 역사가 오묘하고 신기하다는 것은 인간이 전혀 추측도 못하는 지혜와 영원까지 이어지는 계획에 따라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의미다. 홍해를 가르는 것 같은 엄청난 기적은 정말로 꼭 필요할 때가 아니고는 쉽게 일으키지 않으신다. 말하자면 400년 이상 세계 최강국에서 노예로 고난을 겪었던 어떤 민족 전체를 구원해 낼 때 같은 경우다.
그분의 역사가 엄청난 기적의 형태였든, 일상 가운데 평범한 모습으로 나타났든 오직 당신의 절대 주권에 달렸다. 그리고 아무리 일상적인 모습으로 역사해도 들을 귀가 있고 보는 눈이 있는 신자에게는 당신의 뜻을 분명하게 드러내신다. 신자가 항상 기적만 바라는 믿음을 가져선 안 된다. 역으로 따지면 기적은 도무지 일상적이 아닐 경우에 일어나니까 신자 본인부터 아주 극한적인 상황에 처해있어야 한다는 뜻이 되지 않는가?
신자가 정작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모습은 서두에 말한 대로 그냥 단순하고도 순수하게 그분을 믿으면 된다. 의처증 같은 증세만 안 보이면 된다. 그분이 명하신 내용을 그냥 그대로 행하면 된다. 당신께서 일상 가운데 역사하신다면 신자도 일상 가운데서 그분께 성실하게 충성하면 된다. 특별히 불신자들 앞에선 더더욱 일상에서 성실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요즘 세상 사람들이 예수쟁이라면 무조건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쟁이들이 너무나 상식과 교양이 없는 짓들을 많이 하고 다닌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 선교를 위한 음식바자회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 헌금하는 것이니까 더 비싸게 파는 경우다. 맛이 유별나고 성의껏 만든 것도 아니고 아무래도 전문 음식점 수준보다 딸리는 데도 얼굴도 두껍다. 나아가 티켓을 발부해 아는 사람들에게 강요하다시피 나눠준다.
교회에선 원래 이익을 붙여 물건을 팔면 안 된다. 특별히 미국에서 교회는 반드시 비영리법인으로 미국 국세청에 등록하게끔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교회라도 이익을 보는 사업을 할 때는 신고하고 세금을 내어야만 한다. 음식 바자회는 식재료를 사다 가공해서 이익을 붙여 파니까 분명 영업행위에 해당한다. 상식으로만 따져도 엄격하게 법을 따라야 한다.
반면에 교회 바자회는 헌 물건들을 기부 받아 ‐ 돈을 들여 물건을 사서 파는 영업이 아님 ‐ 싸게 팔아서 헌금에 전용하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국세청에 교회를 등록할 때는 영업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놓고는 버젓이 영업을 하고선 세금 내지 않으면 교회가 앞장서서 거짓말하고 탈세한 꼴이지 않는가? 그것도 하나님의 일이란 거창한 명목을 내세우고 교회에서 행하므로 그야말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 셈이다.
연약한 개척 교회가 건축이나 선교헌금을 모으겠다면 때로는 음식바자회를 해도 좋다. 그러나 아주 맛있고 정갈하게 만들되 시중보다 싸게 팔아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간과해선 안 될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그렇게 한국음식을 싸게 팔면 유타 같이 좁은 동네의 한국식당의 그날 하루 영업은 어떻게 되겠는가? 만약에 한국 식당의 주인이 불신자라면 얼마나 큰 불평을 하겠는가? 재수 없는 예수쟁이들 때문에 제일 손님 많은 주말에 완전 공쳤다고 하지 않겠는가?
까다롭게 따지자는 뜻이 아니다. 예수 믿는 신자는 반드시 예수님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그런 일을 어떻게 처리했을지 가장 먼저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가 아직 연약해 헌금이 부족한 것과 불신자들에게 괜한 일로 예수쟁이라고 싸잡아 욕먹는 것 중에 어느 쪽을 잘못했다고 야단치겠는가? 전자의 경우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기회다. 그럼에도 자칫 인간적 지략으로 세상의 욕을 먹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지 않겠는가?
신자가 세상에서 욕먹고 핍박 받을 일은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고 또 그들과 죄악에 동참하지 않는 모습에 한정되어야 한다. 정말 신자답게 죄악과 사단과 사망에 당당하게 맞선다면 얼마든지 욕을 먹어도, 아니 핍박을 받을수록 복이 있다. 반면에 세상의 상식, 습관, 법률, 도덕이 성경의 진리와 상충되지 않을 때는 구태여 종교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세상에서 그들과 함께 얼마든지 아름답게 어울릴 수 있어야 한다.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의 모습으로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모습으로 접근한 바울의 본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은 심지어 바리새인들더러 금식한 표시를 내지 말라고 말씀하셨지 않은가? 물론 그들의 외식하는 종교 행위를 야단 친 것이 근본 의도이지만,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들 사이에서도 지킬 것은 지키라는 뜻이지 않는가? 하물며 세상 사람들을 대할 때는 더더욱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교회와 성도는 자기 교회와 성도만을 위한다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선 안 된다.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불신자들에게 선한 유익과 거룩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 정말 예수 믿는 분들은 다르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
신자들의 비상식적인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자. 성도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 위문 가서는 신자들끼리 잔치를 하고 온다. 옆 침대에 환자가 있든 없던 큰 소리로 기도하고 찬양하며 예배 본다. 거룩한(?) 목사님이 앞장서고 교양 있어 보이는 여자 분들이 서로 권사님, 집사님이라고 불러가면서 실컷 떠들어 놓고는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진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에 누가 감히 뭐라고 할쏘냐?” 식이다.
우선 다른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한다. 또 원한다면 다른 환자들부터 기도 해주고 난 후에 자기 성도를 위해 예배 드려야 한다. 만약 다른 사람이 양해를 하지 않거나 썩 내켜하지 않으면 목사님과 한두 사람이 남에게 안 들릴 정도로 조용히 기도와 위로만 해주면 된다. 소리 내어 찬양하고 울부짖지 않아도 주님은 다 아신다. 또 당신께서 돌보아야 할 성도는 반드시 치료해 주신다.
평생 싸워야 할 싸움
다시 말하지만 우리도 베드로처럼 얼마든지 담대한 신앙의 영웅이 될 수 있다. 예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증거할 수 있다. 현재 처해 있는 상황에서 지성과 이성으로 조금만 따져보면 금방 그 구체적 방도까지 깨달을 수 있다. 잘 모르겠으면 그냥 정직하게 진리대로 살면 된다. 기실. 목숨까지 걸 것도 없다. 돈을 조금 손해 보고, 남들에게 조금 더 양보만 하면 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핍박자들 앞에서 전할 구재를 심어주겠다고 하면서 마지막 결론으로 무엇을 약속하셨는가? “너희 머리털 하나라도 상치 아니하리라.”(눅21:18) 베드로가 담대하게 재판장의 판결을 그 자리에서 거부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관원들이 백성들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다.” 예수님의 약속이 그대로 이뤄졌지 않는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성경은 백성들도 베드로가 한 말이 절대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다고 말한다. 바로 그것이 신자가 성령 충만한 모습의 실체다. 사람들이 신자가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진리라고 선포하고 또 그 진리대로만 즉, 예수님의 약속만 바라보고 사는 것을 인정해 주는 것이다. 신자가 자신이 선포하는 진리대로 살지 않으면 세상은 더 이상 속지 않는다. 그리고 예수가 증거 되지 않아 전도 안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신자가 그렇게 살지 않으면 바로 예수님을 속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큰 죄를 짓게 된다는 것이다.
신앙이란 예수 잘 믿었다고 모든 환난과 문제에서 건져주려는 금 동아줄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절대 아니다. 하나님은 낡고 낡은 동아줄이나 고무튜브를 너무나 평범한 사람을 통해 아무렇게나 던져줄 수 있다. 그러나 신자가 세상 앞에 주님의 진리대로만 서있다면 그 약해 보이며 아무 생색나지 않는 일상적인 모습에서도 하나님은 신자의 머리털 하나도 다치지 않게 해주신다.
하나님의 권능과 은총은 흔히 예상 기대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상식적인 모습으로 매일 매순간 신자 앞으로 다가온다. 신자가 보여야 할 반응도 비상한 모습만 띄려, 특별히 종교적 모습을 취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비상한 분이지 신자는 단지 범인일 뿐이지 않는가?
요컨대 신앙은 하나님과 사람과 자신의 어느 한쪽이 아닌 셋 모두에게 정직하게 사는 것이다. 바꿔 말해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등지는 모습이 있을 때마다 성령의 인도를 구하여 하나님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싸움이다. 하나님께 정직하기만 하면 나머지 둘에게 정직할 수 있게끔 성령이 인도해 주신다. 그러나 이 싸움에 한두 번 크게 성공했다고 신앙의 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평생을 두고 꾸준히 싸우는 자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당신의 일에 쓰임 받게 해주신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 자신, 사람들 중 누구에게 가장 정직한가? 혹시 사람 눈치 보느라 정직과는 담을 쌓고 있지는 않는가? 무엇보다 평생을 두고 꾸준하게 하나님께만 정직할 자신이 있는가?
2/25/2009
유타대학촌 교회 7/7/1996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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