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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6: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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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http://www.whyjesusonly.com |
현대교회와 초대교회의 가장 큰 차이
사도행전강해(26)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한대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6:1-7)
최초의 교회 분쟁
사도들이 두 번이나 유대 공의회로부터 위협을 당하고 매까지 맞았지만 그들의 요구에 전혀 굴복하지 않았다. 그 후 더 많은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며 말씀에 권능이 살아나 예루살렘 교회에 큰 부흥이 일어났다. 본문은 그런 와중에 교회 안에 최초로 사소한 분쟁이 일어났지만 지혜롭게 잘 해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을 26번째로 살펴보고 있는데 6장부터는 새로운 내용이 전개된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유대인을 주 대상으로 삼아 복음을 전한 것이 5장까지의 내용이었다. 이제 예루살렘 밖으로 복음이 확장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각각의 독립된 개별 사건으로 보면 안 된다. 하나님의 인류 구속에 관한 전체 맥락과 연결해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
예수님이 승천하기 직전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 6장에서 12장까지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이방인 선교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한다는 내용이다. 13장부터는 본격적으로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내용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전반에는 유대인의 사도 베드로가 주역을 맡다가 차츰 이방인의 사도 바울로 그 중심이 옮겨진다.
특별히 예수님이 성령의 권능을 받으면 내 증인이 “되리라”고 수동태로 말씀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행동의 주체는 사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능동적 주체는 성령이다. 아무리 베드로와 바울이 초대 교회 설립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어도 성령이 주인공이다. 사도행전이 성령행전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다른 말로 초대 교회는 예수님이 천국 보좌에서 직접 사역하신 결과라는 뜻이다. 그분의 사역과 죽음과 부활이 한갓 옛날이야기가 아니며 초대 교회 또한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다. 영원토록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고 이끌었고 땅 끝까지 확장시키셨다. 저희 교회도 마찬가지로 저나 발기인이 아니라 성령님의 주도하에 세워졌고 이 자리에까지 이르렀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예수님인지라 사도들에게 세상 끝 날까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명했고 또 항상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래서 어느 세대, 어느 지역의 교회라도 십자가의 복음이 제대로 증거 되면 예수의 몸이요 성도는 그 몸의 지체다.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이 지역적 구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종, 문화, 관습, 이념, 제도, 종교 등 사람들 사이를 구분 짓는 모든 장벽을 의미한다. 십자가 복음은 언제, 어디서, 어떤 여건의, 어떤 사람에게도 반드시 전해지고 나눠야 할 참 생명이다. 모든 사람에게 온전한 위로, 평강, 능력, 기쁨, 만족, 행복은 오직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죄 씻음을 받아야만 얻어진다. 십자가 복음은 어떤 사회적 장애가 가로막더라도 반드시 전해져야 할 뿐 아니라, 역으로 사도들의 두 번의 재판에서도 보았듯이 세상 어떤 것도 참 복음과 함께 하는 성령의 권능을 가로막을 수는 없다.
기독교 교회 내에 최초로 발생한 갈등도 사도와 성도들이 성령 충만한 가운데 있었기에 하나님의 뜻 안에서 아무 탈 없이 원만하게 수습되었다. 교회가 죄를 없애고 한 마음이 되면 더 부흥하는 역사를 낳는다는 원리대로 되었다.
성경이 “헬라파 유대인”(1절)이라고 표기했듯이 헬라파와 히브리파 과부는 둘 다 혈통으로는 유대인들이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한 이후로 유대인들은 천하 각국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 이후 중근동은 헬라 문화권으로 바뀌었기에 본토로 귀환하지 않은 유대인들은 헬라파로, 귀환한 자들은 히브리파로 분류한 것이다.
초대교회에 그 둘이 공존하게 된 이유는 간단히 말해 나이 들어 고향으로 돌아온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죽어서 유골이라도 고향 땅에 묻히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대 사회에선 과부는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다. 여호와 하나님이 율법으로 과부를 구제하라고 명했고 여자의 상속권까지 인정한 유대 사회는 여타 지역과는 사정이 조금은 달랐다. 그러나 부양할 가족이나 인척이 없는 과부의 사정이 열악하기는 유대라고 해서 나을 바 없었다. 그런데 서로 물건을 통용하여 핍절한 자가 없던 예루살렘교회인지라 과부들로선 십자가 복음 뿐 아니라 함께 모일 충분한 현실적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팔이 안쪽으로 굽는다고 히브리파 과부에게 구제의 우선권이 돌아가자 헬라파 유대인으로선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당시 예루살렘에도 빈곤층이 많았기에 기독교로 개종하여 나중에 교회에 들어온 헬라파에게는 자연히 등한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불만이 요즘처럼 시기, 질투나 권력 다툼으로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언어와 관습이 많이 달라진지라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고 또 복음을 전하는데 급급해 구제 같은 비본질적인 문제에는 아직 체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도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살펴보면 흥미롭다. 선택된 일곱 집사의 이름이 전부 헬라 식이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모아 놓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자 일곱을 뽑으라고 했다. 말씀 전파와 교육 외의 교회 문제는 성도들의 자치(自治)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모든 제자에 헬라파만 포함된 것은 아닐 것이다. 또 히브리파 중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자가 없었을 리도 없다. 그런데도 기독교 최초의 교인총회에선 자발적으로 헬라파만 집사로 뽑았다.
문제가 된 헬라파 과부들의 사정을 잘 알아 공평하게 처리할 것이라고 기대한 것이다. 나아가 히브리파에선 그간의 잘못을, 본의가 아니었더라도, 사과하고 그 직분을 양보했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처럼 권세와 이권 다툼이나, 개인적 선호도나, 담임 목사의 조종(?)에 전혀 좌우되지 않았다.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고 오직 교회 전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성령의 인도에 따랐던 것이다.
교회 분쟁의 발단
이로써 예루살렘 교회는 전문 사역자와 평신도의 역할을 학연히 구분 지었다. 기독교 교회가 최초로 조직적 체계를 갖추어 직분을 나눈 것이다. 그 계기와 과정과 결과를 간단히 살펴보자. 교회 안에 성도 간에 서로 원망하는 분쟁이 생겨 시급히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또 구제나 분쟁해결에 사도들의 시간이 빼앗겨 막상 복음을 전파해야 할 교회 본연의 임무에 차질이 생겼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임으로 맡을 자와 공궤를 담당할 자를 정해 역할 분담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사도들을 도와 교회 업무를 담당할 집사의 자격 조건으론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롭다고 칭찬 받는 자에 한했다. 온 무리가 인정하고 기뻐할 만큼 타의 모범이 되는 자들을 뽑았다. 회중 전체가 그 선택에 아무런 반발이 없었다는 뜻이다. 구체적 선출절차를 알 수는 없지만 아마 교인 전부가 모여서 모두 납득할 만한 민주적 절차를 거쳤음은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뽑힌 자들을 모든 교인들 앞에서 기도하고 안수하여 공식적으로 집사에 임직되었음을 인정하고 또 격려해 주었다.
오늘날 교단과 교파마다 구체적인 면에선 조금 차이가 있지만 교회에서 안수집사나 장로를 선출하고 임직함에 본문의 절차를 본으로 삼아 대동소이하게 진행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초대 교회와 현대 교회에서 가장 크게 다른 사항이 하나 있다. 그 선출 과정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초대 교회에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집사를 선출하여 세웠고 또 사도들과 협의하여 그 임무를 잘 수행했다. 반면에 현대 교회에선 부끄럽게도 목사를 포함하여 직분을 맡은 자들이 교회 문제의 발단일 뿐 아니라 확대시키는 몫을 하고 있다. 교회가 시끄럽고 분쟁이 생겨 다투다 나눠지는 뒤에는 항상 그들이 있다. 목사와 장로가 파를 나눠 싸운다. 집사들이 교회 문제를 해결하려 모인 제직회에서 오히려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다.
교회 문제가 거의 다 위에서 아래로 내러오지 아래 문제 때문에 위가 시끄러운 법은 별로 없다. 정말 교회 직분을 맡은 자들이 연약한 성도들의 문제로 인해 한 마음이 되어 눈물로 기도하는 모습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되었다.
급기야 외부에서 교회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에 한 마디 변명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리 전도해도 예수쟁이들끼리 싸우는 꼴을 보니 도무지 예수마저 믿을 마음조차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교회는 모였다고 하면 다투다 쪼개지는 곳으로 인식되어진지 오래다. 교회로 초대하려는 권유는 아예 씨가 먹히지 않는다.
그러나 불신자들의 그런 비방보다 더 다급한 문제가 있다. 교회 분쟁으로 가장 손해 보는 자는 직분을 맡지 않은 일반 신자들이다. 그중에서도 막 예수를 믿기 시작한 초신자들이다. 교회에 실망하여 믿음조차 버린다. 교회와 예수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상식적으로는 알아도 자기보다 훨씬 믿음이 좋아 보이고 또 좋아야 할 사람들이 행하는 꼬락서니가 오히려 시정잡배보다 못해 보인다. 앞으로 믿음을 제대로 가꾸어보려는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럼 이런 실정에도 전도 받고 교회로 나올만한 자는 어떤 사람이겠는가? 지금 당장 큰 문제가 생겼거나 중병에 걸려서 하나님의 힘을 빌려 해결해 보겠다는 자들 뿐 아니겠는가? 그렇게 해서 교회를 나오는 자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통계에 의하면 성인이 되어서 교회에 출석하는 자들의 90% 이상이 어떤 형태로든 환난을 겪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계속 싸움질 하며 도덕적 문제를 안고 있는 직분자들이 운영하는 교회는 외부적으로 내세울 것이 별반 없다. 자연히 기도하여 복 받고 만사형통하라고 꼬드길(?) 수밖에 없다. 누워 침 뱉기 식으로 작금의 교회 행태를 비방하자는 의도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따져 십자가 진리가 상실된 교회는 기복신앙 말고는 가르칠 것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면 우선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장 큰 손해이고 또 그런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안타깝기 짝이 없다. 사단의 노예가 되어서 죽어 있는 영혼을 예수님의 참 생명을 나눠주어 새롭게 살려내는 곳이 교회다. 당연히 오직 예수님만이 머리가 되어 성령이 운영하여야 한다. 목사나 장로나 집사는 그 머리에 가장 가까이 붙어있는 지체일 뿐이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영양과 힘을 받아 각 지체로 나눠 전해야할 부분부터 막혀 있으니 하부 지체들은 영양실조를 겪다 못해 아사 직전까지 갈 수밖에 없다.
문제를 일으키는 집사
그런데 교회 분쟁을 잘 따져 보면 대부분 아주 사소한 원인에서, 그것도 선한 의도에서 발단된다. 말하자면 교회 일을 잘하려는 사람과 많이 하려는 사람이 그 배후에 항상 있다. 누가 일을 많이 했는지, 잘했는지 따지다 보니 시기, 질투, 의견차이, 충돌, 편 가름, 세몰이, 분쟁 등이 연쇄적으로 생기게 된다. 반면에 교회 일에 아예 참여하지 않는 자들은 내용을 잘 모르고 염치도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다. 분쟁의 발단이나 당사자가 될 수 없다.
또 직분을 맡은 자들은 교회 운영을 효과적, 생산적으로 해야만 옳고 하나님도 기뻐하시리라고 여긴다. 최소 비용을 들여 최대 효과를 내어야만 한다. 실수나 착오를 용납하려 들지 않는다. 교회 생활을 오래 한 자일수록 자기만의 일을 처리하는 익숙한 틀이 있다. 어떤 행사든 다 겪어봤기에 자신만큼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법을 아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 틀에서 벗어나면 잘못하는 일이자 심지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까지 강변한다.
교회란 최소 비용을 들여 최대 효과를 내어야만 하는 곳이 아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성도들의 피땀 어린 헌금을 흥청망청 써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돈, 집기, 시간 같은 것들은 안 가르쳐도 누구나 다 아까운 줄 안다. 특별히 교회에 나와서 훈련을 받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교회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곳이어야 한다. 말하자면 최대 비용을 들였는데도 현실적으로는 최소의 효과를 거두어도 그 안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은혜는 있는 법이다.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는 인간이 문제다. 그럼 최소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법이라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이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적은 것도 아주 크게 만들어 주셨다는 데에 있지 않다. 계속해서 최대한의 능률을 드러낸 기적이 아니다. 그 본질은 모자라는 것으로 함께 나누니까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먹고도 남았다는 것이다. 교회가 성도의 헌금을 갖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행사를 치러 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교회는 일을 하는 곳이 아니라 영혼을 살려내는 곳이다. 모든 교회의 인적 물적 자원을 오직 그 일에 사용되어지면 된다.
일을 잘 처리하고 많이 감당한 자는 알게 모르게 자랑이 앞서게 된다. 주위 사람들의 칭찬을 들으면 괜히 우쭐하게 된다. 또 잘하지 못하고 하지 않는 자들을 지적하고 야단치게 된다. 간혹 교회 대청소를 하면 꼭 강대상 근처에 서성거리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도 목사님과 강대상 근처에 가까이 계신 줄 착각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 눈에 잘 뜨이는 곳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는 표를 내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은밀히 보시고 은밀한 곳에 오히려 더 가깝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화장실이나 쓰레기통을 정말 자원하며 기쁜 마음으로 청소하는 자에게 당신의 위로와 평강은 넘치게 임한다.
이 핑계 저 핑계로 교회 행사마저 빠지는 교인들이 많다. 직분을 맡은 자들일수록, 특별히 담임 목사는 더더욱 그들을 판단 정죄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기꺼이 참여할 정도로 믿음이 자랄 때까지 온유함으로 기다려 주어야 한다. 이제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동생더러 고등학교 형이 분수도 계산 못하느냐고 야단칠 수는 없다. 그렇게 야단치는 형이 오히려 바보이며 부모가 도리어 형을 야단칠 것 아닌가? 교회에서 연약한 교인에게 권면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말씀 공부와 기도 모임에 참여하라는 것뿐이다. 그 다음은 그 본인의 자원여부에 맡겨야 한다.
교회가 행사하는 곳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는 곳이기에 만약 자원이 모자라 행사를 못할 경우가 생기면 안 하면 된다. 예컨대 성가대원의 숫자가 모자라면 매주 솔로나 이중창으로 해도 되고, 피아노 반주자가 없으면 무반주로 찬양해도 된다. 정말 한 번 그렇게 해보라. 오히려 은혜는 훨씬 더 넘친다. 나아가 성도들이 안쓰러워서라도 자원하는 자가 속출한다. 자원한 자는 자원이 모자라 어지간히 힘들어도 불평을 터뜨리지 않는 법이다.
교회 일은 봉사다.
교회가 일하는 곳이 아니라고 해서 정작 수행해야 할 일마저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매번 모여서 기도하고 찬양하며 예배만 드리고 헤어지라는 것이 아니다. 교육, 교제, 전도, 선교, 구제, 등 할 일은 많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의 성격을 일(Business)로서, 이익을 내는 영업이 아니라 반드시 어떤 소기의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업무로, 간주하지 말라는 것이다.
업무로 간주하면 마치고 난 후의 실적이 가장 문제가 되기에 생산성과 효율성을 따질 수밖에 없다. 자연히 일 잘하고 많이 한 자가 큰소리치게 된다. 직분을 맡은 자들 사이에 업무의 중요도와 성취도에 따라 파당이 생기고 파워 게임으로 인한 긴장이 형성된다.
교회의 모든 업무는 성도들의 영적 유익을 높여 주고 전체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봉사(Service)다. 직분자란 교회의 업무를 하라고 사람들에 의해 뽑힌 것이 아니라, 교인들을 위해 봉사하라고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자다.
업무란 맡은 자에게 의무가 되지만 봉사가 되면 자원하는 자만이 행하는 권리이자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또 업무를 하기 위해선 직분자가 계획하고 판단하여 수행한다. 업무의 성격과 소요되는 자원과 장소와 시간 등을 전부 직분자가 결정한다. 결국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교회를 위해 바친다고, 다른 말로 희생한다고, 여기게 된다. 그 다음에 따를 것이라고는 직분자들 사이의 공과(功過) 다툼이 될 것은 너무나 빤하지 않는가?
업무가 아니라 봉사가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해야 할 일의 내용은 똑 같지만 그 이유, 범위, 시간, 장소 등은 오직 봉사 받을 자의 필요와 형편에 따라 달라진다. 봉사자로선 봉사가 필요한 때와 장소에 그냥 가서 이미 정해진 일만 하면 된다.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진정한 이웃 사랑이란 오직 도움이 필요한 자의 모든 형편에 맞추어 도와주는 것이다. 봉사자가 자기 형편에 따라 행하는 것은 이미 봉사가 아니라 짐짓 흉내만 내었거나 적선에 불과하다.
자원봉사자가 자기가 잘나서 봉사 잘하고 많이 했다고 자랑하는 것은 너무나 우스운 일 아닌가? 봉사가 더 많이 필요한 곳을 일부러 찾아 간 자만이 봉사를 많이 하는 법이다. 또 그런 자는 자기를 내세워 자랑할 리도 없다. 봉사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많이 봉사해 주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 또 아직도 봉사가 필요한 곳이 많이 남아 있어서 너무나 안타깝게 여긴다.
모든 교회의 분쟁은 사실상 봉사와 업무의 이런 간단한 차이조차 잘 모르는 데서부터 생긴다. 아니 어쩌면 이론적으로는 잘 알 것이다. 그럼 사단의 방해로 자꾸 잊어버리거나, 각자의 욕심을 부추겨서 분쟁이 생기는 것인가? 물론 그런 측면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봉사와 업무가 다르다는 사실은 알지만 자기 자신에게만은 그대로 적용시키지 않으니 항상 문제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는 순간 봉사자가 아니라 관리자로 바뀐 양 착각하는 것이다. 자기가 아니면 그 일을 못할 것같이 여긴다. 단적으로 말해 교회는 그 일을 안 해도 되고, 그런 직분자가 없어도 된다. 직분을 줌으로써 본인부터 낮아지고 다른 이를 섬김으로써 함께 자라가라는 뜻인데 오직 그 일을 하라는 뜻으로만 받아들인다.
집사든 장로든 목사든 직분을 맡는 것은 가장 먼저 봉사자가 되라는 뜻이다.(To be a servant) 그런데도 여전히 봉사 자체를 잘 하라고(To do a service) 직분을 맡은 줄 착각하는 것이다. 봉사도 하나의 업무로 취급하는 것이다. 봉사자가 된다는 것은 알기 쉽게 말해 성도가 왕이기에 왕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자기가 봉사하지 않으면 교회 운영에 차질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예 차원이 다르지 않는가?
본문에서 보듯이 초대 교회가 가장 먼저 세운 직분은 집사(Deacon)였다. 그 헬라 원어 디아코니아는 식당이나 집의 식탁 곁에서 serve 하려고 항상 대기 중인 waiter를 뜻한다. 본문의 “공괘를 일삼는 것”(2절)도 영어 성경에는 “wait on tables”라고 번역되어 있다. 교회에서 애찬을 나눌 때에 과부들에게 음식을 날라주고 또 그들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는 뜻이다.
결국 집사란 주인이 부르면 언제 어디서 어떤 형편에 있든지 무조건 달려가서 시키는 대로 따르는 자라는 것이다. 일의 성격이 싫든 좋든, 힘들던 쉽든, 귀찮든 편하든 절대 따지지 않고 따질 수도 없다. 식당 웨이터가 손님에게 음식을 직접 갖다 먹지요, 너무 무거워 못 갖다 주겠다, 왜 나만 힘든 일을 시키느냐는 등의 이유로 그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가? 또는 요구대로 해주면서 불평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지 않는가? 만약 그랬다간 주인에게서 당장 해고 통보를 받을 것이다.
봉사를 위해 항상 대기해야 한다는 것은 평생을 두고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봉사가 아예 몸에 밴 습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들이 최초의 일곱 집사를 교회 앞에 세워서 기도하고 안수한 뜻도 바로 그것이다. 그들에게 특별한 권능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이제 평생을 두고 성도들의 종이 되겠다고 헌신한 것을 성도들로 확인시켜준 것뿐이다.
교회의 매니저는 한 분뿐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맡아도 봉사자(servant), 그것도 많은 봉사자들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목사와 집사는 본문에서 보듯이 그 맡은 역할만 다르지 똑 같은 봉사자다. 그런데도 항상 문제는 마치 관리자(manager)라도 된 양, 그것도 위계질서가 있는 조직의 경영층이 된 양 착각하는 데서 일어난다. 교회의 관리자는 오직 한 분 예수님뿐이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3-5)
교회 안에 여러 직분이 있는데 각자의 믿음의 분량과 은사의 종류에 맞추어 하나님이 각기 맡기신 것이라고 한다. 물론 그 전에 믿음과 은사 또한 각자에게 가장 합당하고 유익하게 하나님이 나눠주신 것이다. 직분을 맡기는 준비에서부터 이미 하나님이 모든 일을 주관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최종 매니저는 오직 한 분 하나님뿐임을 절대 잊지 말라는 것이다.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것은 다 같은 봉사자로 불림 받았기에 서열 내지 우열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봉사하도록 맡겨진 영역에서 자기 믿음과 은사를 최대한 동원하여 섬기라는 것이다.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서로 다른 역할을 맡았을 뿐인데 서로 간에 지적, 판단, 정죄할 문제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 직분자는 모두가 봉사자이지 매니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믿음의 분량을 넘어서는 것이자 성도로서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성도들의 종으로서 봉사자(servant)에 불과한데도 목사는 교회의 머리(CEO)가, 장로 집사는 중간 관리자(Manager)가 된 양 착각하면 안 된다. 바울이 이 말씀을 복음 안에 들어온 성도가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자기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첫 걸음으로 권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성도가 가장 먼저 또 중요하게 감안해야 할 사항이라는 뜻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교회의 직분자끼리 말썽을 일으키면 결국 성도들에게 큰 피해가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왕에 전해졌던 복음의 능력과 은혜마저 쇠퇴하고 실종되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가 분쟁으로 지새느라 기독교는 개독교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이름이 시중에서 망령되이 일컬어지고 있지 않는가? 하부지체를 섬기라고 직분을 맡겨 놓았더니 오히려 성도들의 짐만 되는 특권계급이 되어서 모든 문제를 양산하고 있다.
이처럼 교회의 직분자가 자신을 봉사자로 인식하는지 아니면 관리자로 군림 하려는지 가르는 단순한 인식의 차이가 너무나 엄청난 결과를 맺는다. 복음이 살아서 영적 부흥을 일으키느냐 아니면 복음이 빛을 잃고 세상의 미혹된 영혼들을 사단에게 계속 묶여서 죽도록 방관하느냐를 가름할 정도다.
집사를 세운 참 뜻
그런데 본문 기사를 그만큼 직분자가 중요하니 자격 있는 집사를 잘 뽑아 세우라는 것으로 단순히 이해하고 치우면 안 된다. 사도들을 공궤에서 해방시켜서 말씀과 기도에만 전무케 시키라는 뜻도 아니다.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따로 있다.
결론이 어떻게 낳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7:1) 성경의 장절은 근대에 붙여진 것으로 원본에는 없다. 장절로만 따지면 이 구절이 본 사건과 관계없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집사를 택하여 세운 후에 예루살렘 교회에 나타난 결말을 설명한 것이다.
봉사자가 정작 해야 할 일이 교회 운영하는 업무는 물론 성도 간의 봉사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복음만 전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단지 초대 교회에 분쟁이 생기려는 것을 막아서 교회가 시끄럽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집사를 세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도들이 그 바람에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게 된 것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그렇다고 사도들의 임무를 줄여서 편하게 만들어준 것이 아니다. 오직 온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고 또 그 말씀대로 실천하라는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집사를 세움으로써 분쟁이 해결된 것을 넘어서 서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하나가 되었다. 교인들은 서로 봉사하며 기도하는 일에 전무하고 사도들은 세상을 향해 복음을 외치는 일에 전무했다. 그 때까지 세상에선 도저히 볼 수 없는 성령이 충만한 공동체가 불신자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쉽게 말해 어느 누구도 관리자나 우두머리가 아니며 모두가 오직 예수만 따르는 지체가 되어 있는 이상야릇한 조직이었다.
성경은 그 모습을 본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마저 새로운 도에 복종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물론 그들 또한 일차적으로는 복음의 권능 앞에 항복한 것이지만 아름답게 섬기는 공동체의 모습이 전해진 말씀의 진리 됨을 더 보장해 주었기 때문이다. 헬라파나 히브리파를 막론하고 당시의 모든 유대인들에게 기독교는 온전한 하나님의 도로 비춰졌던 것이다.
교회에서 성도들이 가장 염려해서 잘못되었다면 고쳐야 할 부분이 무엇인가? 교회 업무가 왜 이리 효율적이지 못한지 따지는 것인가? 누가 봉사를 많이 하고 잘하는 여부인가? 또 불평하는 자는 누구이며 왜 불평하는지 살펴야 하는가? 직분자들이 봉사자 대신에 관리자 행세를 하는 것인가? 그 어느 것도 아니다. 과연 십자가 복음을 가감 없이 성경대로 전해지고 있는지 여부일 뿐이다. 예수님이 과연 모든 성도의 머리가 되어 있는지 여부다. 정말로 예수로 인해 살고 예수로 사는 성도로 변화되어 가는지 여부다.
다른 말로 성도가 교회에 대해 가져야 불평도 하나뿐이다. 왜 예수 이야기를 많이 전하지 않는가? 왜 우리의 죄를 통박해 주고 회개로 촉구하지 않는가? 왜 천국 소망을 강조하지 않는가? 왜 심판과 구원의 갈림길로 십자가가 분명하게 서있지 않는가? 목회자가 왜 기도와 말씀에만 전무하지 않는가?
요컨대 강대상에선 목사가 성도들의 눈치와 세상 사람들의 비방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예수만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 십자가 복음이 생생하게 살아나면 성령의 권능도 살아나고 자연히 성도간의 분쟁도 줄며 서로 하나가 되어 사랑하게 된다. 나아가 모든 교인이 자원봉사자로 나서기에 직분 때문에 시험들 일 또한 없어진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것을 너무 신비롭게 생각할 필요 없다. 그분이 주신 “성령의 권능을 받아 오직 십자가 복음만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전하라”는 한 가지 소명만 실천하고 있으면 된다. 또 교회 안에 예배, 교육, 교제, 봉사, 전도 등 제반 활동도 성도가 십자가 안에서 성숙하고 대외적으로 복음이 선포되는 한 가지 목포만을 지향하면 된다. 십자가 없는 곳에 성도와 교회의 모든 문제가 발생하고 십자가가 든든히 서있는 곳에는 어떤 문제도 발 디딜 틈이 없다.
4/9/2009
유타대학촌교회 9/22/1996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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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강해(26)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한대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6:1-7)
최초의 교회 분쟁
사도들이 두 번이나 유대 공의회로부터 위협을 당하고 매까지 맞았지만 그들의 요구에 전혀 굴복하지 않았다. 그 후 더 많은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며 말씀에 권능이 살아나 예루살렘 교회에 큰 부흥이 일어났다. 본문은 그런 와중에 교회 안에 최초로 사소한 분쟁이 일어났지만 지혜롭게 잘 해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을 26번째로 살펴보고 있는데 6장부터는 새로운 내용이 전개된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유대인을 주 대상으로 삼아 복음을 전한 것이 5장까지의 내용이었다. 이제 예루살렘 밖으로 복음이 확장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각각의 독립된 개별 사건으로 보면 안 된다. 하나님의 인류 구속에 관한 전체 맥락과 연결해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
예수님이 승천하기 직전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 6장에서 12장까지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이방인 선교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한다는 내용이다. 13장부터는 본격적으로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내용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전반에는 유대인의 사도 베드로가 주역을 맡다가 차츰 이방인의 사도 바울로 그 중심이 옮겨진다.
특별히 예수님이 성령의 권능을 받으면 내 증인이 “되리라”고 수동태로 말씀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행동의 주체는 사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능동적 주체는 성령이다. 아무리 베드로와 바울이 초대 교회 설립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어도 성령이 주인공이다. 사도행전이 성령행전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다른 말로 초대 교회는 예수님이 천국 보좌에서 직접 사역하신 결과라는 뜻이다. 그분의 사역과 죽음과 부활이 한갓 옛날이야기가 아니며 초대 교회 또한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다. 영원토록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고 이끌었고 땅 끝까지 확장시키셨다. 저희 교회도 마찬가지로 저나 발기인이 아니라 성령님의 주도하에 세워졌고 이 자리에까지 이르렀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예수님인지라 사도들에게 세상 끝 날까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명했고 또 항상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래서 어느 세대, 어느 지역의 교회라도 십자가의 복음이 제대로 증거 되면 예수의 몸이요 성도는 그 몸의 지체다.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이 지역적 구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종, 문화, 관습, 이념, 제도, 종교 등 사람들 사이를 구분 짓는 모든 장벽을 의미한다. 십자가 복음은 언제, 어디서, 어떤 여건의, 어떤 사람에게도 반드시 전해지고 나눠야 할 참 생명이다. 모든 사람에게 온전한 위로, 평강, 능력, 기쁨, 만족, 행복은 오직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죄 씻음을 받아야만 얻어진다. 십자가 복음은 어떤 사회적 장애가 가로막더라도 반드시 전해져야 할 뿐 아니라, 역으로 사도들의 두 번의 재판에서도 보았듯이 세상 어떤 것도 참 복음과 함께 하는 성령의 권능을 가로막을 수는 없다.
기독교 교회 내에 최초로 발생한 갈등도 사도와 성도들이 성령 충만한 가운데 있었기에 하나님의 뜻 안에서 아무 탈 없이 원만하게 수습되었다. 교회가 죄를 없애고 한 마음이 되면 더 부흥하는 역사를 낳는다는 원리대로 되었다.
성경이 “헬라파 유대인”(1절)이라고 표기했듯이 헬라파와 히브리파 과부는 둘 다 혈통으로는 유대인들이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한 이후로 유대인들은 천하 각국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 이후 중근동은 헬라 문화권으로 바뀌었기에 본토로 귀환하지 않은 유대인들은 헬라파로, 귀환한 자들은 히브리파로 분류한 것이다.
초대교회에 그 둘이 공존하게 된 이유는 간단히 말해 나이 들어 고향으로 돌아온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죽어서 유골이라도 고향 땅에 묻히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대 사회에선 과부는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다. 여호와 하나님이 율법으로 과부를 구제하라고 명했고 여자의 상속권까지 인정한 유대 사회는 여타 지역과는 사정이 조금은 달랐다. 그러나 부양할 가족이나 인척이 없는 과부의 사정이 열악하기는 유대라고 해서 나을 바 없었다. 그런데 서로 물건을 통용하여 핍절한 자가 없던 예루살렘교회인지라 과부들로선 십자가 복음 뿐 아니라 함께 모일 충분한 현실적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팔이 안쪽으로 굽는다고 히브리파 과부에게 구제의 우선권이 돌아가자 헬라파 유대인으로선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당시 예루살렘에도 빈곤층이 많았기에 기독교로 개종하여 나중에 교회에 들어온 헬라파에게는 자연히 등한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불만이 요즘처럼 시기, 질투나 권력 다툼으로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언어와 관습이 많이 달라진지라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고 또 복음을 전하는데 급급해 구제 같은 비본질적인 문제에는 아직 체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도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살펴보면 흥미롭다. 선택된 일곱 집사의 이름이 전부 헬라 식이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모아 놓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자 일곱을 뽑으라고 했다. 말씀 전파와 교육 외의 교회 문제는 성도들의 자치(自治)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모든 제자에 헬라파만 포함된 것은 아닐 것이다. 또 히브리파 중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자가 없었을 리도 없다. 그런데도 기독교 최초의 교인총회에선 자발적으로 헬라파만 집사로 뽑았다.
문제가 된 헬라파 과부들의 사정을 잘 알아 공평하게 처리할 것이라고 기대한 것이다. 나아가 히브리파에선 그간의 잘못을, 본의가 아니었더라도, 사과하고 그 직분을 양보했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처럼 권세와 이권 다툼이나, 개인적 선호도나, 담임 목사의 조종(?)에 전혀 좌우되지 않았다.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고 오직 교회 전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성령의 인도에 따랐던 것이다.
교회 분쟁의 발단
이로써 예루살렘 교회는 전문 사역자와 평신도의 역할을 학연히 구분 지었다. 기독교 교회가 최초로 조직적 체계를 갖추어 직분을 나눈 것이다. 그 계기와 과정과 결과를 간단히 살펴보자. 교회 안에 성도 간에 서로 원망하는 분쟁이 생겨 시급히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또 구제나 분쟁해결에 사도들의 시간이 빼앗겨 막상 복음을 전파해야 할 교회 본연의 임무에 차질이 생겼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임으로 맡을 자와 공궤를 담당할 자를 정해 역할 분담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사도들을 도와 교회 업무를 담당할 집사의 자격 조건으론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롭다고 칭찬 받는 자에 한했다. 온 무리가 인정하고 기뻐할 만큼 타의 모범이 되는 자들을 뽑았다. 회중 전체가 그 선택에 아무런 반발이 없었다는 뜻이다. 구체적 선출절차를 알 수는 없지만 아마 교인 전부가 모여서 모두 납득할 만한 민주적 절차를 거쳤음은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뽑힌 자들을 모든 교인들 앞에서 기도하고 안수하여 공식적으로 집사에 임직되었음을 인정하고 또 격려해 주었다.
오늘날 교단과 교파마다 구체적인 면에선 조금 차이가 있지만 교회에서 안수집사나 장로를 선출하고 임직함에 본문의 절차를 본으로 삼아 대동소이하게 진행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초대 교회와 현대 교회에서 가장 크게 다른 사항이 하나 있다. 그 선출 과정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초대 교회에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집사를 선출하여 세웠고 또 사도들과 협의하여 그 임무를 잘 수행했다. 반면에 현대 교회에선 부끄럽게도 목사를 포함하여 직분을 맡은 자들이 교회 문제의 발단일 뿐 아니라 확대시키는 몫을 하고 있다. 교회가 시끄럽고 분쟁이 생겨 다투다 나눠지는 뒤에는 항상 그들이 있다. 목사와 장로가 파를 나눠 싸운다. 집사들이 교회 문제를 해결하려 모인 제직회에서 오히려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다.
교회 문제가 거의 다 위에서 아래로 내러오지 아래 문제 때문에 위가 시끄러운 법은 별로 없다. 정말 교회 직분을 맡은 자들이 연약한 성도들의 문제로 인해 한 마음이 되어 눈물로 기도하는 모습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되었다.
급기야 외부에서 교회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에 한 마디 변명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리 전도해도 예수쟁이들끼리 싸우는 꼴을 보니 도무지 예수마저 믿을 마음조차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교회는 모였다고 하면 다투다 쪼개지는 곳으로 인식되어진지 오래다. 교회로 초대하려는 권유는 아예 씨가 먹히지 않는다.
그러나 불신자들의 그런 비방보다 더 다급한 문제가 있다. 교회 분쟁으로 가장 손해 보는 자는 직분을 맡지 않은 일반 신자들이다. 그중에서도 막 예수를 믿기 시작한 초신자들이다. 교회에 실망하여 믿음조차 버린다. 교회와 예수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상식적으로는 알아도 자기보다 훨씬 믿음이 좋아 보이고 또 좋아야 할 사람들이 행하는 꼬락서니가 오히려 시정잡배보다 못해 보인다. 앞으로 믿음을 제대로 가꾸어보려는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럼 이런 실정에도 전도 받고 교회로 나올만한 자는 어떤 사람이겠는가? 지금 당장 큰 문제가 생겼거나 중병에 걸려서 하나님의 힘을 빌려 해결해 보겠다는 자들 뿐 아니겠는가? 그렇게 해서 교회를 나오는 자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통계에 의하면 성인이 되어서 교회에 출석하는 자들의 90% 이상이 어떤 형태로든 환난을 겪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계속 싸움질 하며 도덕적 문제를 안고 있는 직분자들이 운영하는 교회는 외부적으로 내세울 것이 별반 없다. 자연히 기도하여 복 받고 만사형통하라고 꼬드길(?) 수밖에 없다. 누워 침 뱉기 식으로 작금의 교회 행태를 비방하자는 의도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따져 십자가 진리가 상실된 교회는 기복신앙 말고는 가르칠 것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면 우선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장 큰 손해이고 또 그런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안타깝기 짝이 없다. 사단의 노예가 되어서 죽어 있는 영혼을 예수님의 참 생명을 나눠주어 새롭게 살려내는 곳이 교회다. 당연히 오직 예수님만이 머리가 되어 성령이 운영하여야 한다. 목사나 장로나 집사는 그 머리에 가장 가까이 붙어있는 지체일 뿐이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영양과 힘을 받아 각 지체로 나눠 전해야할 부분부터 막혀 있으니 하부 지체들은 영양실조를 겪다 못해 아사 직전까지 갈 수밖에 없다.
문제를 일으키는 집사
그런데 교회 분쟁을 잘 따져 보면 대부분 아주 사소한 원인에서, 그것도 선한 의도에서 발단된다. 말하자면 교회 일을 잘하려는 사람과 많이 하려는 사람이 그 배후에 항상 있다. 누가 일을 많이 했는지, 잘했는지 따지다 보니 시기, 질투, 의견차이, 충돌, 편 가름, 세몰이, 분쟁 등이 연쇄적으로 생기게 된다. 반면에 교회 일에 아예 참여하지 않는 자들은 내용을 잘 모르고 염치도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다. 분쟁의 발단이나 당사자가 될 수 없다.
또 직분을 맡은 자들은 교회 운영을 효과적, 생산적으로 해야만 옳고 하나님도 기뻐하시리라고 여긴다. 최소 비용을 들여 최대 효과를 내어야만 한다. 실수나 착오를 용납하려 들지 않는다. 교회 생활을 오래 한 자일수록 자기만의 일을 처리하는 익숙한 틀이 있다. 어떤 행사든 다 겪어봤기에 자신만큼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법을 아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 틀에서 벗어나면 잘못하는 일이자 심지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까지 강변한다.
교회란 최소 비용을 들여 최대 효과를 내어야만 하는 곳이 아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성도들의 피땀 어린 헌금을 흥청망청 써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돈, 집기, 시간 같은 것들은 안 가르쳐도 누구나 다 아까운 줄 안다. 특별히 교회에 나와서 훈련을 받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교회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곳이어야 한다. 말하자면 최대 비용을 들였는데도 현실적으로는 최소의 효과를 거두어도 그 안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은혜는 있는 법이다.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는 인간이 문제다. 그럼 최소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법이라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이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적은 것도 아주 크게 만들어 주셨다는 데에 있지 않다. 계속해서 최대한의 능률을 드러낸 기적이 아니다. 그 본질은 모자라는 것으로 함께 나누니까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먹고도 남았다는 것이다. 교회가 성도의 헌금을 갖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행사를 치러 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교회는 일을 하는 곳이 아니라 영혼을 살려내는 곳이다. 모든 교회의 인적 물적 자원을 오직 그 일에 사용되어지면 된다.
일을 잘 처리하고 많이 감당한 자는 알게 모르게 자랑이 앞서게 된다. 주위 사람들의 칭찬을 들으면 괜히 우쭐하게 된다. 또 잘하지 못하고 하지 않는 자들을 지적하고 야단치게 된다. 간혹 교회 대청소를 하면 꼭 강대상 근처에 서성거리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도 목사님과 강대상 근처에 가까이 계신 줄 착각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 눈에 잘 뜨이는 곳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는 표를 내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은밀히 보시고 은밀한 곳에 오히려 더 가깝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화장실이나 쓰레기통을 정말 자원하며 기쁜 마음으로 청소하는 자에게 당신의 위로와 평강은 넘치게 임한다.
이 핑계 저 핑계로 교회 행사마저 빠지는 교인들이 많다. 직분을 맡은 자들일수록, 특별히 담임 목사는 더더욱 그들을 판단 정죄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기꺼이 참여할 정도로 믿음이 자랄 때까지 온유함으로 기다려 주어야 한다. 이제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동생더러 고등학교 형이 분수도 계산 못하느냐고 야단칠 수는 없다. 그렇게 야단치는 형이 오히려 바보이며 부모가 도리어 형을 야단칠 것 아닌가? 교회에서 연약한 교인에게 권면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말씀 공부와 기도 모임에 참여하라는 것뿐이다. 그 다음은 그 본인의 자원여부에 맡겨야 한다.
교회가 행사하는 곳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는 곳이기에 만약 자원이 모자라 행사를 못할 경우가 생기면 안 하면 된다. 예컨대 성가대원의 숫자가 모자라면 매주 솔로나 이중창으로 해도 되고, 피아노 반주자가 없으면 무반주로 찬양해도 된다. 정말 한 번 그렇게 해보라. 오히려 은혜는 훨씬 더 넘친다. 나아가 성도들이 안쓰러워서라도 자원하는 자가 속출한다. 자원한 자는 자원이 모자라 어지간히 힘들어도 불평을 터뜨리지 않는 법이다.
교회 일은 봉사다.
교회가 일하는 곳이 아니라고 해서 정작 수행해야 할 일마저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매번 모여서 기도하고 찬양하며 예배만 드리고 헤어지라는 것이 아니다. 교육, 교제, 전도, 선교, 구제, 등 할 일은 많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의 성격을 일(Business)로서, 이익을 내는 영업이 아니라 반드시 어떤 소기의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업무로, 간주하지 말라는 것이다.
업무로 간주하면 마치고 난 후의 실적이 가장 문제가 되기에 생산성과 효율성을 따질 수밖에 없다. 자연히 일 잘하고 많이 한 자가 큰소리치게 된다. 직분을 맡은 자들 사이에 업무의 중요도와 성취도에 따라 파당이 생기고 파워 게임으로 인한 긴장이 형성된다.
교회의 모든 업무는 성도들의 영적 유익을 높여 주고 전체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봉사(Service)다. 직분자란 교회의 업무를 하라고 사람들에 의해 뽑힌 것이 아니라, 교인들을 위해 봉사하라고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자다.
업무란 맡은 자에게 의무가 되지만 봉사가 되면 자원하는 자만이 행하는 권리이자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또 업무를 하기 위해선 직분자가 계획하고 판단하여 수행한다. 업무의 성격과 소요되는 자원과 장소와 시간 등을 전부 직분자가 결정한다. 결국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교회를 위해 바친다고, 다른 말로 희생한다고, 여기게 된다. 그 다음에 따를 것이라고는 직분자들 사이의 공과(功過) 다툼이 될 것은 너무나 빤하지 않는가?
업무가 아니라 봉사가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해야 할 일의 내용은 똑 같지만 그 이유, 범위, 시간, 장소 등은 오직 봉사 받을 자의 필요와 형편에 따라 달라진다. 봉사자로선 봉사가 필요한 때와 장소에 그냥 가서 이미 정해진 일만 하면 된다.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진정한 이웃 사랑이란 오직 도움이 필요한 자의 모든 형편에 맞추어 도와주는 것이다. 봉사자가 자기 형편에 따라 행하는 것은 이미 봉사가 아니라 짐짓 흉내만 내었거나 적선에 불과하다.
자원봉사자가 자기가 잘나서 봉사 잘하고 많이 했다고 자랑하는 것은 너무나 우스운 일 아닌가? 봉사가 더 많이 필요한 곳을 일부러 찾아 간 자만이 봉사를 많이 하는 법이다. 또 그런 자는 자기를 내세워 자랑할 리도 없다. 봉사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많이 봉사해 주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 또 아직도 봉사가 필요한 곳이 많이 남아 있어서 너무나 안타깝게 여긴다.
모든 교회의 분쟁은 사실상 봉사와 업무의 이런 간단한 차이조차 잘 모르는 데서부터 생긴다. 아니 어쩌면 이론적으로는 잘 알 것이다. 그럼 사단의 방해로 자꾸 잊어버리거나, 각자의 욕심을 부추겨서 분쟁이 생기는 것인가? 물론 그런 측면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봉사와 업무가 다르다는 사실은 알지만 자기 자신에게만은 그대로 적용시키지 않으니 항상 문제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는 순간 봉사자가 아니라 관리자로 바뀐 양 착각하는 것이다. 자기가 아니면 그 일을 못할 것같이 여긴다. 단적으로 말해 교회는 그 일을 안 해도 되고, 그런 직분자가 없어도 된다. 직분을 줌으로써 본인부터 낮아지고 다른 이를 섬김으로써 함께 자라가라는 뜻인데 오직 그 일을 하라는 뜻으로만 받아들인다.
집사든 장로든 목사든 직분을 맡는 것은 가장 먼저 봉사자가 되라는 뜻이다.(To be a servant) 그런데도 여전히 봉사 자체를 잘 하라고(To do a service) 직분을 맡은 줄 착각하는 것이다. 봉사도 하나의 업무로 취급하는 것이다. 봉사자가 된다는 것은 알기 쉽게 말해 성도가 왕이기에 왕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자기가 봉사하지 않으면 교회 운영에 차질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예 차원이 다르지 않는가?
본문에서 보듯이 초대 교회가 가장 먼저 세운 직분은 집사(Deacon)였다. 그 헬라 원어 디아코니아는 식당이나 집의 식탁 곁에서 serve 하려고 항상 대기 중인 waiter를 뜻한다. 본문의 “공괘를 일삼는 것”(2절)도 영어 성경에는 “wait on tables”라고 번역되어 있다. 교회에서 애찬을 나눌 때에 과부들에게 음식을 날라주고 또 그들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는 뜻이다.
결국 집사란 주인이 부르면 언제 어디서 어떤 형편에 있든지 무조건 달려가서 시키는 대로 따르는 자라는 것이다. 일의 성격이 싫든 좋든, 힘들던 쉽든, 귀찮든 편하든 절대 따지지 않고 따질 수도 없다. 식당 웨이터가 손님에게 음식을 직접 갖다 먹지요, 너무 무거워 못 갖다 주겠다, 왜 나만 힘든 일을 시키느냐는 등의 이유로 그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가? 또는 요구대로 해주면서 불평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지 않는가? 만약 그랬다간 주인에게서 당장 해고 통보를 받을 것이다.
봉사를 위해 항상 대기해야 한다는 것은 평생을 두고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봉사가 아예 몸에 밴 습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들이 최초의 일곱 집사를 교회 앞에 세워서 기도하고 안수한 뜻도 바로 그것이다. 그들에게 특별한 권능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이제 평생을 두고 성도들의 종이 되겠다고 헌신한 것을 성도들로 확인시켜준 것뿐이다.
교회의 매니저는 한 분뿐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맡아도 봉사자(servant), 그것도 많은 봉사자들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목사와 집사는 본문에서 보듯이 그 맡은 역할만 다르지 똑 같은 봉사자다. 그런데도 항상 문제는 마치 관리자(manager)라도 된 양, 그것도 위계질서가 있는 조직의 경영층이 된 양 착각하는 데서 일어난다. 교회의 관리자는 오직 한 분 예수님뿐이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3-5)
교회 안에 여러 직분이 있는데 각자의 믿음의 분량과 은사의 종류에 맞추어 하나님이 각기 맡기신 것이라고 한다. 물론 그 전에 믿음과 은사 또한 각자에게 가장 합당하고 유익하게 하나님이 나눠주신 것이다. 직분을 맡기는 준비에서부터 이미 하나님이 모든 일을 주관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최종 매니저는 오직 한 분 하나님뿐임을 절대 잊지 말라는 것이다.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것은 다 같은 봉사자로 불림 받았기에 서열 내지 우열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봉사하도록 맡겨진 영역에서 자기 믿음과 은사를 최대한 동원하여 섬기라는 것이다.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서로 다른 역할을 맡았을 뿐인데 서로 간에 지적, 판단, 정죄할 문제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 직분자는 모두가 봉사자이지 매니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믿음의 분량을 넘어서는 것이자 성도로서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성도들의 종으로서 봉사자(servant)에 불과한데도 목사는 교회의 머리(CEO)가, 장로 집사는 중간 관리자(Manager)가 된 양 착각하면 안 된다. 바울이 이 말씀을 복음 안에 들어온 성도가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자기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첫 걸음으로 권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성도가 가장 먼저 또 중요하게 감안해야 할 사항이라는 뜻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교회의 직분자끼리 말썽을 일으키면 결국 성도들에게 큰 피해가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왕에 전해졌던 복음의 능력과 은혜마저 쇠퇴하고 실종되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가 분쟁으로 지새느라 기독교는 개독교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이름이 시중에서 망령되이 일컬어지고 있지 않는가? 하부지체를 섬기라고 직분을 맡겨 놓았더니 오히려 성도들의 짐만 되는 특권계급이 되어서 모든 문제를 양산하고 있다.
이처럼 교회의 직분자가 자신을 봉사자로 인식하는지 아니면 관리자로 군림 하려는지 가르는 단순한 인식의 차이가 너무나 엄청난 결과를 맺는다. 복음이 살아서 영적 부흥을 일으키느냐 아니면 복음이 빛을 잃고 세상의 미혹된 영혼들을 사단에게 계속 묶여서 죽도록 방관하느냐를 가름할 정도다.
집사를 세운 참 뜻
그런데 본문 기사를 그만큼 직분자가 중요하니 자격 있는 집사를 잘 뽑아 세우라는 것으로 단순히 이해하고 치우면 안 된다. 사도들을 공궤에서 해방시켜서 말씀과 기도에만 전무케 시키라는 뜻도 아니다.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따로 있다.
결론이 어떻게 낳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7:1) 성경의 장절은 근대에 붙여진 것으로 원본에는 없다. 장절로만 따지면 이 구절이 본 사건과 관계없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집사를 택하여 세운 후에 예루살렘 교회에 나타난 결말을 설명한 것이다.
봉사자가 정작 해야 할 일이 교회 운영하는 업무는 물론 성도 간의 봉사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복음만 전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단지 초대 교회에 분쟁이 생기려는 것을 막아서 교회가 시끄럽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집사를 세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도들이 그 바람에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게 된 것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그렇다고 사도들의 임무를 줄여서 편하게 만들어준 것이 아니다. 오직 온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고 또 그 말씀대로 실천하라는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집사를 세움으로써 분쟁이 해결된 것을 넘어서 서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하나가 되었다. 교인들은 서로 봉사하며 기도하는 일에 전무하고 사도들은 세상을 향해 복음을 외치는 일에 전무했다. 그 때까지 세상에선 도저히 볼 수 없는 성령이 충만한 공동체가 불신자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쉽게 말해 어느 누구도 관리자나 우두머리가 아니며 모두가 오직 예수만 따르는 지체가 되어 있는 이상야릇한 조직이었다.
성경은 그 모습을 본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마저 새로운 도에 복종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물론 그들 또한 일차적으로는 복음의 권능 앞에 항복한 것이지만 아름답게 섬기는 공동체의 모습이 전해진 말씀의 진리 됨을 더 보장해 주었기 때문이다. 헬라파나 히브리파를 막론하고 당시의 모든 유대인들에게 기독교는 온전한 하나님의 도로 비춰졌던 것이다.
교회에서 성도들이 가장 염려해서 잘못되었다면 고쳐야 할 부분이 무엇인가? 교회 업무가 왜 이리 효율적이지 못한지 따지는 것인가? 누가 봉사를 많이 하고 잘하는 여부인가? 또 불평하는 자는 누구이며 왜 불평하는지 살펴야 하는가? 직분자들이 봉사자 대신에 관리자 행세를 하는 것인가? 그 어느 것도 아니다. 과연 십자가 복음을 가감 없이 성경대로 전해지고 있는지 여부일 뿐이다. 예수님이 과연 모든 성도의 머리가 되어 있는지 여부다. 정말로 예수로 인해 살고 예수로 사는 성도로 변화되어 가는지 여부다.
다른 말로 성도가 교회에 대해 가져야 불평도 하나뿐이다. 왜 예수 이야기를 많이 전하지 않는가? 왜 우리의 죄를 통박해 주고 회개로 촉구하지 않는가? 왜 천국 소망을 강조하지 않는가? 왜 심판과 구원의 갈림길로 십자가가 분명하게 서있지 않는가? 목회자가 왜 기도와 말씀에만 전무하지 않는가?
요컨대 강대상에선 목사가 성도들의 눈치와 세상 사람들의 비방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예수만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 십자가 복음이 생생하게 살아나면 성령의 권능도 살아나고 자연히 성도간의 분쟁도 줄며 서로 하나가 되어 사랑하게 된다. 나아가 모든 교인이 자원봉사자로 나서기에 직분 때문에 시험들 일 또한 없어진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것을 너무 신비롭게 생각할 필요 없다. 그분이 주신 “성령의 권능을 받아 오직 십자가 복음만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전하라”는 한 가지 소명만 실천하고 있으면 된다. 또 교회 안에 예배, 교육, 교제, 봉사, 전도 등 제반 활동도 성도가 십자가 안에서 성숙하고 대외적으로 복음이 선포되는 한 가지 목포만을 지향하면 된다. 십자가 없는 곳에 성도와 교회의 모든 문제가 발생하고 십자가가 든든히 서있는 곳에는 어떤 문제도 발 디딜 틈이 없다.
4/9/2009
유타대학촌교회 9/22/1996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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