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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7:17-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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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http://www.whyjesusonly.com |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사도행전강해 (30)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그가 우리 족속에게 궤계를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아이들을 내어 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쌔 그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버리운 후에 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같아 애굽 사람을 쳐죽이니라 저는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목시키려 하여 가로되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하느냐 하니 그 동무를 해하는 사람이 모세를 밀뜨려 가로되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행7:17-29)
예수를 부관참시 한 유대 공회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 죄로 유대 공회의 재판정에 서게 된 스데반의 변론이 아브라함에서 시작해서 이제 모세에게 이어졌다. 모세의 일생과 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킨 가운데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을 본격적으로 살펴보자는 뜻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지금 스데반 집사가 유대 공회로부터 핍박을 받는 이유는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었다. 단지 예수님이 생전에 하셨던 말씀을 그대로 옮겨서 전했는데도 말이다. 물론 그 말씀은 율법과 성전으로는 죄 사함을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인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므로 십자가 복음 앞에 회개하여 구원을 얻으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초대교회의 설교나 변증의 요점은 예수 외의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행4:12)에 모아졌다.
그럼 유대 공회는 사실상 자기들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예수를 다시 재판하는 형국이다. 또 재판 말미에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으니까 천하 역적의 시체를 무덤에서 꺼내 다시 형벌을 가하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행한 셈이다.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유대 민족의 철전지 원수로 여기고 있음을 반증한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어 빈 무덤만 남았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지 않는가?
이에 따라 스데반의 반론도 이스라엘 역사를 반추하여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 하는 데에 초점이 모였다. 너희는 예수를 민족의 원수로 여기지만 정작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보내신 진정한 메시아였다는 것이다. 비록 모세가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선조들을 구원해내고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위대한 선지자였지만 단지 하나님의 도구이자 예수를 예표 한 자였다는 뜻이다.
실제 모세와 예수의 일생을 비교해 보면 유사점이 많다. 나자마자 세상군왕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말과 지혜에 능했다. 모세가 바로의 궁정과 미디안 광야에서 준비 훈련 기간을 거쳤듯이, 예수도 나사렛의 이름 없는 목수로 광야에서 금식하고 기도하며 준비되었다.
가장 유사한 점은 둘 다 하나님이 세운 구원자인데도 막상 구원 대상인 백성들로부터 때로 호응도 얻었지만 수없이 배척받았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종이 거의 다 그러하듯이 둘 다 굴곡 많은 삶을 살았다. 물론 세상의 핍박과 자기 백성의 배척마저도 하나님이 당신의 구원 계획을 완전한 섭리로 행하는 과정의 일환이었다. 스데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모세를 보냈다고 했듯이, 바울도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갈4:4)라고 말했다. 하나님이 구원 계획을 오직 당신의 때와 방식대로 이루셨다는 뜻이다.
반면에 가장 다른 점은 모세는 단지 유대 민족을 현실적 환난에서 구원해 준 것에 불과하지만 예수는 모든 인간을 죄에서 구원시켰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였다. 모세는 그래서 완전한 구원이 올 때까지 그리스도 십자가를 예표 하는 성전의 동물희생제사법을 받았다. 모세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정죄함을 받아 진노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일시적 은혜였다. 반면에 예수님은 영단번의 제물로 영원하고도 완전한 구원을 이뤄냈고 그 구원을 보증하기 위해 당신을 믿는 모든 자에게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내주케 했다.
스데반이 모세의 역할을 평가한 내용을 보라.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曠野)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전해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37,38절) 나와 같은 선지자 즉, 예수를 예표한 선지자로 세운 자가 모세였다고 했다. 그래서 바울도 하나님이 때가 차매 예수를 보낸 이유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갈4:5)이라고 말한 것이다.
한마디로 유대 공회는 모세율법과 성전제사를 내세워 어떻게 하든 예수의 이름을 유대 사회와 그 백성들의 마음에서 지워보려 노력했지만 스데반은 오히려 그 배경의 하나님의 뜻을 들어서 그분의 메시아 되심을 더 확실히 증거하고 있다. 모세만 따르려는 공회원들에게 도리어 모세는 예수 오심을 준비한 하나님의 도구였을 뿐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자칭 민족의 구원자 모세
모세의 120년 일생은 공교롭게도 정확히 40년씩 셋으로 나눠진다. 마흔 살까지 바로의 궁에서 왕자로 보낸 후에, 미디안의 광야에서 그 후 40년을 양치기로 칩거하다가, 80살에야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출애굽을 이루고 광야에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러나 막상 가나안 땅에는 발을 디뎌보지 못하고 120살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먼발치서 바라만 보다가 죽었다.
본문은 처음 두 시기인 80년을 아주 간략하게 설명한 것이다. 비록 하나님의 기적적 간섭으로 목숨을 건지고 도리어 왕자라는 큰 특혜 가운데 성장했지만 사실은 그의 초기 2/3 인생은 한 마디로 실패와 시련의 시기였다. 참으로 흥미롭고도 오묘하지 않는가? 그의 현실적 조건을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도무지 실패를 겪을 이유라곤 없었다. 민족의 지도자로 그 만한 자질을 갖추고 합당한 교육을 받은 자도 없었다. 바로의 왕자 신분이라는 것도 오히려 적을 알수록 이길 확률이 높다고 결격사유가 되기는커녕 큰 장점이 될 수 있었다.
스데반도 그런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우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태어났다.(20절) 지도자의 자질을 타고 났다는 것이다. 또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에 능하다고 했다.(22절) 당시로선 세계 최고의 지성적 훈련을 받았다는 것이다. 역사가 필로에 따르면 애굽의 왕자들은 기하학, 음악, 수학, 과학 등을 당대 최고 석학들에게서 개인적으로 교육 받았다고 한다. 또 브루스라는 학자는 모세가 애굽의 철자법을 발명했을 가능성마저 제기했다. 어쨌든 그는 왕위 계승 후보자로서 모든 방면에서 최고 수준의 기량을 갖추게 된 것만은 틀림없다. 선천적 최고 자질에 후천적 최고 교육을 보태었으니 충분히 유대 민족의 영웅이 될 만 했다.
모세 본인도 모든 교육 과정을 마치고 불혹(不惑)의 나이 40에 드디어 입지(立志) 했다. 자기 모든 것을 걸어도 될 만한 인생 목표를 세운 것이다. 애굽에 압제 당하고 있는 동족을 해방시키기로 마음먹었다. 히브리 남아로 죽어야만 했던 그가 하나님의 간섭으로 오히려 바로의 왕자가 되었지만 생모(生母)의 젖을 먹고 자랐다.(출2:8) 틀림없이 엄마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알았고 민족의 역사와 기본적인 신앙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또 바로의 왕자로 수업 받게 된 것도 자신더러 민족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계획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23절) 났다고 했다. 이스라엘 사람을 압제하는 애굽 감독관을 죽여 모래에 묻으면서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25절)했다. 당연히 이튿날 형제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선 자칭(?) 구원자 자격으로 중재시키려 나섰다.
그러나 결과는 무참한 실패였다. 그 스스로는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고 또 그 일을 수행할 준비를 마쳤다고 자부했는데 막상 형제들의 반응은 차갑기만 했다. 심지어 재판장이나 일개 관원 취급도 하지 않았다.(27절) 아예 살인자로 취급해서 자기들 일에 끼어들지도 말라고 했다.(28절) 청운의 꿈은 펼쳐보지도 못하고 접어야 했다. 급기야 살인한 것이 탄로나 생명이라도 부지하려고 아무도 자기를 못 알아보는 먼 광야로 줄행랑을 놓아야 했다. 말하자면 위대한 지도자 동지의 자리에서 한 순간에 지명수배자, 기소중지자로 도망 다녀야 하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마음먹고 시작해보려는 첫 단계에서부터 처참한 실패를 겪었다. 아니 수족조차 도저히 움직여 볼 수 없는 구렁텅이로 밀려 떨어졌다. 그가 느꼈을 실망감, 수치심, 곤혹감, 황당함, 두려움 등등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최고로 화려하고 높은 자리에서 더 이상 내려갈 데도 없는 가장 낮고 비참한 처지로 떨어졌다.
모세의 실패는 하나님의 성공
이상하지 않는가? 모세는 분명히 하나님이 세운 종이었다. 선천적 자질을 타고 낳고 후천적 소양도 쌓았다. 그런데도 왜 실패했을까? 그 답은 하나다. 하나님이 실패케 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하나님이 실패케 한 것이지 하나님 당신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 당신이 실패할 리는 절대 없지 않는가? 모세에게 뭔가 부족하거나, 잘못했던 것 때문에 실패했고 하나님은 그 실패마저도 당신의 성공을 위해 허락하셨다는 의미다. 또 당신의 성공이 궁극적으로 신자에게 성공이 된다.
정작 따져 보아야 할 것은 모세에게 어떤 점이 부족했는지 혹은 무엇을 잘못했는지 여부다. 결론부터 말하면 모세는 교만에 차서 인간적 방법으로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애굽의 노예로 있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려면 정치적, 군사적 방법이어야 한다고 지극히 상식적으로 섣불리 판단했다. 자기가 앞에서 노예해방이라는 너무나 정당한 횃불을 치켜들면 이백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동으로 자기 뒤에 줄설 줄 기대했다. 결과는 단 한 명도 동조하지 않았다. 왕자로 법률과 군사의 최고 전문가인데도 관원과 재판장 정도로도 인정받지 못했다.
모세의 실력이 부족한 것이 절대 아니라면 그 이유가 대체 무엇이었는가? 우선 사백 년간이나 노예로 지내다 보니 타성에 젖었을 수 있다. 그러나 바로가 히브리 민족이 창성해지는 것을 두려워 할 정도가 되었으면 종살이를 끝내고 싶은 기운은 충분히 생겼을 것이다. 비록 육체노동으로 다져진 기초 체력 말고는 실제 전투나 군사훈련 경험이 전혀 없는 오합지졸이긴 해도 말이다.
백성들은 모세를 자기 지도자로 세우기에 전혀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던 것이다. 정확히 말해 단지 그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모세 혼자서 짝사랑한 것이다. 청계천에서 빈민 선교를 했던 김진홍 목사님의 설교에서 이런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학생 시절에 민중해방과 노동자권익을 신장하려고 반정부 운동했던 운동권 출신자들 중에는 사실은 그 일을 하기에 부적격자가 많다고 했다. 말로는 무산계급, 노동자, 농민 같은 민중을 해방시켜야 된다고 그럴싸한 논리를 제시하지만 막상 사는 곳은 강남의 부촌이라는 것이다. 학교 강의, 저작, 강연은 열심히 하지만 민중 속에 들어가 몸으로 뒹굴며 함께 고생하지 않고 해본 적도 없는 연약한 지성인이라는 것이다.
모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는 사람을 간단히 죽일 정도의 체력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최고의 자질을 가졌다. 노예를 해방시킬 영웅이 충분히 될 만 했다. 그러나 여전히 바로의 왕자였지 히브리 노예는 아니었던 것이다. 비단 옷에 번쩍이는 칼을 찬 채로는 아무리 노예해방의 기치를 높이 들어도 강남의 고급 아파트에 살면서 민중해방 한다고 외치는 것과 똑같을 뿐이다. 지식, 법률, 교양, 정의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민중을 해방시켜 주는 것은 아닌 것이다.
아마도 히브리 노예들끼리 서로 다툰 까닭도 빵 한 조각이나 편하게 쉴 수 있는 자리를 먼저 차지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먹고 마시고 입을 것 걱정한 적 없고 죽도록 노동한 적도 전혀 없는 왕자 주제에 어떻게 우리의 중재자 내지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서느냐고 따진 것이다. 과연 우리의 고통과 한숨과 눈물의 의미를 네가 제대로 알기는 아느냐고 다그친 것이다.
나이 40에 신학교에 들어온 한 미국남학생이 이런 간증을 했다. 열렬히 사랑한 여자와 결혼한지 얼마 안 되어 아내가 원인 모를 불치병에 걸렸다.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아무 소용없이 죽어버렸다. 대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고 불신과 원망만 늘어났다. 간혹 친구나 친척들이 찾아와 “당신의 슬픔을 이해합니다. 너무 슬퍼 마시고 다시 힘을 내십시오.”라는 위로를 들을 때마다 속으로는 “당신들이 대체 내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반발과 분노만 치솟았다. 그런 인사치레에 불과한 말을 들을 때마다 때려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고 했다.
모세가 중재자로 나섰을 때에 동족들로부터 두들겨 맞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왕자 복장을 하고 나갔으니 봐준 것이지 안 그랬으면 큰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맨발에 다 떨어진 누더기를 걸친 채 노동에 지쳐서 멀건 죽 한 사발로 한숨 돌리려는 자들 앞에 비단 옷 입은 왕자가 나타나 당신들의 고통을 이해합니다라고 말했다고 가정해보라.
흙먼지 묻은 빵 한 조각에 마치 전 인생이 걸린 양 먼저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벌리는 자들 앞에 대체 무슨 위로와 화해와 중재의 말이 통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위로는커녕 동족끼리 싸우는 것은 나쁜 짓이니 그만 두라고 타일렀으니 당연히 싸우던 자들이 도리어 한 패가 되어 모세를 죽이려 들지 않겠는가?
물론 모세는 동족이 학대 받는 모습을 보고 순수한 의협심과 분노가 속에서부터 치밀었을 것이다. 정의감과 사명감에 불타 반드시 동족을 구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을 것이다. 그래서 온갖 궁리를 다했을 것이다. 애굽의 총리나 바로가 되어서 정치적으로 해결하든지, 노예들을 고무해서 반란을 일으키게 하고 그 지휘를 맡든지, 왕자라는 직책을 이용해서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을 베푸는 방안들을 연구했을 것이다.
애굽 관원을 때려죽인 것이 평소의 급한 성격 때문에 우발적으로 일어났는지, 아니면 뭔가 궁리한 계책의 일환으로 그랬는지는 불명하다. 어쨌든 그러면 자기의 진심을 동족들이 인정해 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가 저지른 결정적인 착각과 잘못은 자신이 왕자라는 위치를 백분 활용하자고만 작정한 것이었다. 그래서 왕자 복장을 하고 중재자로 나선 것인데 그야말로 강남에 살면서 말로만 노동자 농민 해방시키겠다는 수준밖에 안 되었다.
한 마디로 모세는 동족의 눈물과 한숨과 고통을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들의 지도자가 되려 했다. 그의 지도를 따를 자는 그를 지도자로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데도 말이다. 당연히 모세의 생각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바로의 왕궁에서 자라게 한 하나님의 뜻은 애굽 사정에 능통케 하려는 것이었지 왕자라는 직분을 이용해 구원자가 되도록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예수의 예표 모세
결국 모든 것이 모세 본인의 잘못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실패마저도 당신의 절대적 섭리 안에 계획해 놓으셨다. 그래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치게 했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정의롭다고 자부한 모세를 깎고 깎아 낮추시려는 뜻이었다. 무려 40년간이나 철저한 자기반성의 시간을 갖게 했다. 그의 영혼이 알게 모르게 사단에게 오염되었던 기간만큼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 바로 잡는 기간 또한 똑 같이 필요했다.
모세는 사방이 다 막힌 절망의 상태에서 하나님 그분과만 일대일로 씨름할 수밖에 없었다. 광야에선 궁정의 관습, 교양, 제도, 법률, 군사지식 등이 아무 짝에도 소용없었다. 정말 세상에서 힘이 될 만한 것들을 전부 다 완전히 내려놓게 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무력함, 어리석음, 연약함을 철두철미 깨닫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모세로 바로의 궁정에서 지내도록 한 시기가 허송세월이었던 것은 아니다. 나중에 바로와 그 신하들 및 술사들과 열 번이나 대결할 때는 실제적 측면에서 아주 유용했다. 동일한 맥락에서 하나님은 그가 나중에 광야 길로 백성들을 인도하고 방황하게 될 때를 대비해 또 40년간을 광야의 전문가로 훈련하고 준비시켰던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모세더러 뼈저린 눈물과 한숨과 고통의 터널을 직접 통과토록 했다. 산해진미 대신에 때로는 굶게도 때로는 멀건 죽만으로 끼니를 때우게끔 했다. 말하자면 피와 땀과 눈물이 젖은 빵의 고마움을 절실히 느끼도록 만들었다. 자기 동족이 현재 당하고 있는 최고 밑바닥 인생을 비슷하게나마 체험하도록 한 것이다. 산해진미로 호의호식 했던 40년의 기간에서 1년도 부족하지 않는 동일한 기간을 쓴 물과 돌 같이 딱딱한 빵으로 지새게 했다. 모세 인생의 초반 두 시기의 길이가 똑 같았던 이유다.
백성의 슬픔과 고통을 마음으로 헤아리는 정도로는 진정한 지도자가 될 수 없다. 함께 체험해야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또 그래야만 백성의 아픔을 바로 자기 아픔으로 삼아서 모든 것을 바치며 해 해결하려는 도자가 될 수 있다. 다윗이 임시 성막으로 자꾸 옮겨 다니는 언약 괘가 안쓰러워 여호와를 위해 성전을 짓겠다고 하자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 ...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삼하7:6,9) 하나님마저도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함께 거했고 또 앞서 가서 대적을 멸하였지 않는가?
하나님은 모세로 그가 구해야 할 백성과 똑 같은 처지에 처하게 했다. 도망자 신세로 은둔 생활을 하게함으로써 자유가 속박된 노예의 형편을 깨닫게 했다. 피구원자와 동일한 처지와 신분에 처하지 않으면 진정한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뜻이다.
예의 미국 신학생의 간증은 또 이렇게 이어졌다. 졸지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선 삶의 의욕을 일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을 해도 기쁨과 의미가 없었다. 결국 마약에 손을 댔고 감옥까지 들어갔다. 그런데 어쩌다 자기와 똑 같은 처지에 있는 자를 감옥 안에서 만났다. 사랑하는 여인이 원인 모를 병으로 죽어서 방황하다 마약에 손댄 것이다. 그 두 사람은 상대의 아픔과 슬픔이 너무나 실감나게 사무쳐서 끌어안고는 한참을 울었다.
그 신학생은 어려서 교회를 나갔지만 복음서가 지어낸 이야기 같고 기독교 비리들이 싫어서 청년이 된 이후로는 신앙을 버렸다. 특별히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와서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죄인을 구원하셨다는 교리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었다. 거기다 아내가 죽는 바람에 하나님께 남은 것은 원망과 분노뿐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똑 같은 처지의 죄수를 만나 함께 울던 바로 그 때에 불현듯 어렸을 때 배웠던 예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예수가 인간으로 오셔야만 인간의 모든 고통과 허물과 죄를 감당하여 온전한 구원이 가능하다는 진리가 비로소 이해되었다. 같은 처지가 아니면 구원은커녕 참된 위로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성령님이 그의 오랜 갈등과 방황과 죄악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도록 만든 것이다.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예수 안에서, 또 인생의 목표와 가치를 예수를 따르기로 헌신함으로써 온전히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온 이유는 우리의 고통, 번뇌, 한숨, 허물, 상처, 갈등, 죄악, 죽음까지 당신께서 다 짊어지는 진정한 구원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인간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겪기 위해서였다. 모세의 첫 실패는 동족의 아픔을 겪어보기는커녕 제대로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자기 잘난 것으로 그들을 구원하려 덤볐기 때문이다. 설령 구원을 이루어도 자신의 이름만 높아질 뿐이다. 어쩌면 은연중에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닐 것이다.
예수님은 30년을 인간과 같이 낮아져 지낸 후에도 3년간 자신의 모든 것으로 인간을 섬기고 나서야 십자가로 가셨다. 모세는 그런 절차라곤 전혀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슈퍼맨 행세를 하려 했다. 정작 하나님조차 그러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권선징악의 구원
모세로 민족의 구원자로 나서게 했던 정의감의 본질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악한 자는 벌주고 착한 자는 상주고 가난하고 힘없어 불쌍한 자는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권선징악의 윤리다. 바로의 궁전에서 배운 대로 행하려 했던 것이다. (아무리 우상을 숭배하는 애굽이라도 왕자에게 권선징악의 보편적 윤리를 안 가르쳤을 리는 없다.)
권선징악이라는 뜻 자체는 아주 좋은 것이다. 문제는 인간이 인간을 판단해서 인간이 심판한다는 데에 있다. 모든 인간은 더하거나 덜할 것 전혀 없는 똑 같은 죄인이다. 인간의 생각은 끊임없이 악을 산출하는데 원죄로 인해 그 영혼이 근본적으로 부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시기, 질투, 음란, 교만, 위선, 허영, 미움, 분노, 쾌락 등을 향해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달음박질 한다.
하나님이 노아 홍수로 인류를 심판한 후에 다시 그렇게는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사람이 이제 정신 차리고 죄 짓지 않아서인가? 아니다. 그 정반대다.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8:21) 모두가 악하니까 심판하려면 모두 죽여야 한다. 그렇다고 심판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모두 악하니까 악함을 씻겨주어 심판 대신 구원을 하시겠다는 것이다. 구원 받지 못한 자는 자연히 심판 되기 때문이다.
지금 모세가 권선징악적인 윤리로 정의감에 불탄 것 자체를 탓하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고 애굽이 악하지 않다는 뜻도 아니다. 악을 악으로 갚아 구원하려는 방식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애굽을 심판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해야 한다. 물론 아무리 바로의 왕자라고 해도 인간인 그가 온전한 선만으로 구원할 수 없고 또 그래 봐야 바로에게 씨도 먹히지 않는다. 나아가 인간 모세로선 권선징악적 외의 방식은 떠올릴 수조차 없다. 요컨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여 구원의 방식도 그분이 지시하는 대로 따르지 않은 것이 그의 실패였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방식은 언제나 선으로 악을 갚고 원수까지 사랑하는 방식이다. 애굽에 열 번이나 재앙을 내렸는데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선 큰 착각이다. 열 번이나 참고 참으면서 회개의 기회를 주었다. 애굽에 직접적 인명 피해가 난 것은 마지막 열 번째 재앙 때뿐이었다. 애굽의 우상과 대비해 여호와 하나님이 상천하지의 유일한 하나님임을 여러 번 그들로 직접 목도케 했다. 고센 땅에는 전혀 재앙을 내리지 않음으로써 당신의 백성을 구별해서 보호하심도 알게 했다. 애굽이 그런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어도 인정만 했더라면 그들도 심판만은 면할 수 있었다.
너무나 순진하게도 모세는 자신이 선을 과시하면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악을 제거하고 같이 선으로 따라 나설 것이라 섣불리 기대했다. 그 이전에 모세 스스로 자신이 의인인양 교만하게 행세한 것부터 하나님 앞에 죄였다.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단 한 명도 없다. 지금 설교 하고 있는 저부터 시작해서 여러분 모두가 그렇다. 여전히 죄인이다. 단지 용서 받은 죄인과 아직 그렇지 못한 죄인으로만 나뉠 뿐이다.
혹시라도 여러분 중에 의인이라고 자부하거나 스스로 그럴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자는 전혀 교회에 나올 필요가 없다. 다른 종교에선 몰라도 기독교에서만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지금 설교 중에라도 제 설교를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 당당하게 일어서 나가도 된다. 의인에게는 구원이 전혀 필요 없지 않는가?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을 뿐이기 때문이다.
순전히 이해를 돕기 위해 제 이야기를 좀 나누겠다. 저희 교회의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 A 형제가 처음 이곳 대학의 박사과정에 입학허가를 받고 이사를 왔지만 장애인 전용 학생 아파트가 배당되려면 몇 달을 기다려야 했다. 유학생 중심 교회인지라 교인 중에 마땅히 도울 분도 없고 해서 저희 집에서 그 기간 동안 기거토록 했다.
그런데 교회에서 한식으로 식사교제를 할 때마다 국(soup)을 잘 먹지 않았다. 그래서 국을 안 좋아 하는지 물었더니 싱긋이 웃기만 했다. 나중에 어머니 권사님이 그 이유를 말씀해주었다. 하반신 불수인지라 소변을 절제할 수 없어서 플라스틱 호스와 큰 주머니를 차고 다니는데 그 처리가 여간 불편하지 않아 외출 할 때는 가능한 물기 많은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오줌통 말고도 말 못할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 사람들은 모를 것이라는 하소연도 덧붙였다. 결정적으로는 바로 곁에서 항상 시중을 드는 엄마인 자신도 모르는 본인만의 고통은 또 얼마나 많겠느냐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간에 제 나름대로 장애인을 도왔다는 자부심에 도취되었고 또 함께 기거함으로써 그들을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는지 부끄러워졌다. 그 모자(母子) 앞에선 한 동안 감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저야말로 원인 모를 불치병으로 아내를 잃은 청년 옆에서 “당신의 고통을 이해합니다. 힘을 내세요.”라고 어리석고도 가식적인 말을 하는 자였던 셈이다. 또 그런 말 한마디 건넸다고 신자로서 의무를 다했기에 의롭다고 자부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영적 교만이자 위선이며 죄인 줄은, 설교로는 잘 가르치면서, 제가 그렇게 행하고 있다는 것은 미처 실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기껏 장애자용 시설을 만들고 모든 일에 우선권을 주는 것으로, 물론 꼭 해야 하고 의로운 일이지만, 할 바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화장실 안에서 개인적으로 겪는 고통은 같은 처지가 되지 않고는 절대 알 수 없다. 장애인의 고통은 장애인만이 알 수 있다. 같이 휠체어를 타고 있는 자들끼리는 아무 위로의 말이나 행동이 필요 없다. 그냥 단순히 서로 웃고 악수하는 것만으로, 아니 함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 안에 모든 위로와 권면과 섬김과 사랑이 다 포함되어 있다.
제가 그 형제와 어머님을 저희 집에 몇 달간 기거케 한 것이 인간적 윤리로는 분명 선하고 심지어 칭송받을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제 내면은 여전히 부패한 채로 남아 있었다. 세상 모두를, 심지어 나 자신까지 속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만은 보고 계셨다. 그분 앞에서 깨끗한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인간으로 오시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말고는 말이다.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도 하나님뿐이다. 그것도 우리의 연약함을 똑 같이 체휼하시고 당신께서 모두 안고 가는 방법으로만 말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권선징악적 논리나 방식으로는 모세가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절대 될 수는 없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특별히 하나님이 택하시어 세상 열방 앞에 당신의 백성으로서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맡아야 할 이스라엘의 경우는 더더욱, 아니 반드시 하나님의 방식으로만 구원해야 했다.
여러분이 모세의 생애를 볼 때에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부분이 어디인가? 홍해 앞에서 멋지게 바다를 가를 때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거룩한 율법을 수여 받을 때인가? 그래서 얼굴에 사람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광채가 날 때인가? 하나님과 함께 하시면 그런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 전에 2/3의 실패와 시련이 없었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쓰지 않으신다. 아니 하나님이 마지막 1/3을 위해서 그렇게 호되게 훈련시키셨다.
다른 말로 그런 훈련과 준비를 거칠 각오와 헌신이 없다면 그분의 큰일에 쓰임 받지 못한다. 이 땅에서 쌓은 공력이 불에 타서 드러나면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수는 있어도 말이다.(고전3:10-17) 스데반도 지금 유대 공회원들에게 모세가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였지만 예수님의 예표일 뿐이라고, 또 예표가 되는 까닭도 그가 구원에 성공했던 모습보다 백성들에게 배척당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모세가 실패했던 가장 큰 원인은 스스로 자기에게 속은 것이다. 눈에 보이는 주위 환경과 자기가 쌓은 실력에 도취되었던 것이다. 유학생활을 하는 여러분은 앞으로 어떤 영역에서든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반면에 남들보다 뛰어난 위치 때문에 모세처럼 자기도취에 빠지기도 가장 쉽다. 그렇다고 일부러 시련을 자청하라는 것은 아니다. 항상 자신을, 특별히 영적 상태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점검해 보아야 한다. 쉽게 말해 “이 세상에서 지혜가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하나님 앞에선 최고로) 미련한 자가”(고전3:18) 되라는 것이다.
4/20/2009
유타대학촌 교회 10/27/1996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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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강해 (30)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그가 우리 족속에게 궤계를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아이들을 내어 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쌔 그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버리운 후에 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같아 애굽 사람을 쳐죽이니라 저는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목시키려 하여 가로되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하느냐 하니 그 동무를 해하는 사람이 모세를 밀뜨려 가로되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행7:17-29)
예수를 부관참시 한 유대 공회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 죄로 유대 공회의 재판정에 서게 된 스데반의 변론이 아브라함에서 시작해서 이제 모세에게 이어졌다. 모세의 일생과 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킨 가운데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을 본격적으로 살펴보자는 뜻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지금 스데반 집사가 유대 공회로부터 핍박을 받는 이유는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었다. 단지 예수님이 생전에 하셨던 말씀을 그대로 옮겨서 전했는데도 말이다. 물론 그 말씀은 율법과 성전으로는 죄 사함을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인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므로 십자가 복음 앞에 회개하여 구원을 얻으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초대교회의 설교나 변증의 요점은 예수 외의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행4:12)에 모아졌다.
그럼 유대 공회는 사실상 자기들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예수를 다시 재판하는 형국이다. 또 재판 말미에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으니까 천하 역적의 시체를 무덤에서 꺼내 다시 형벌을 가하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행한 셈이다.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유대 민족의 철전지 원수로 여기고 있음을 반증한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어 빈 무덤만 남았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지 않는가?
이에 따라 스데반의 반론도 이스라엘 역사를 반추하여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 하는 데에 초점이 모였다. 너희는 예수를 민족의 원수로 여기지만 정작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보내신 진정한 메시아였다는 것이다. 비록 모세가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선조들을 구원해내고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위대한 선지자였지만 단지 하나님의 도구이자 예수를 예표 한 자였다는 뜻이다.
실제 모세와 예수의 일생을 비교해 보면 유사점이 많다. 나자마자 세상군왕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말과 지혜에 능했다. 모세가 바로의 궁정과 미디안 광야에서 준비 훈련 기간을 거쳤듯이, 예수도 나사렛의 이름 없는 목수로 광야에서 금식하고 기도하며 준비되었다.
가장 유사한 점은 둘 다 하나님이 세운 구원자인데도 막상 구원 대상인 백성들로부터 때로 호응도 얻었지만 수없이 배척받았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종이 거의 다 그러하듯이 둘 다 굴곡 많은 삶을 살았다. 물론 세상의 핍박과 자기 백성의 배척마저도 하나님이 당신의 구원 계획을 완전한 섭리로 행하는 과정의 일환이었다. 스데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모세를 보냈다고 했듯이, 바울도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갈4:4)라고 말했다. 하나님이 구원 계획을 오직 당신의 때와 방식대로 이루셨다는 뜻이다.
반면에 가장 다른 점은 모세는 단지 유대 민족을 현실적 환난에서 구원해 준 것에 불과하지만 예수는 모든 인간을 죄에서 구원시켰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였다. 모세는 그래서 완전한 구원이 올 때까지 그리스도 십자가를 예표 하는 성전의 동물희생제사법을 받았다. 모세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정죄함을 받아 진노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일시적 은혜였다. 반면에 예수님은 영단번의 제물로 영원하고도 완전한 구원을 이뤄냈고 그 구원을 보증하기 위해 당신을 믿는 모든 자에게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내주케 했다.
스데반이 모세의 역할을 평가한 내용을 보라.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曠野)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전해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37,38절) 나와 같은 선지자 즉, 예수를 예표한 선지자로 세운 자가 모세였다고 했다. 그래서 바울도 하나님이 때가 차매 예수를 보낸 이유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갈4:5)이라고 말한 것이다.
한마디로 유대 공회는 모세율법과 성전제사를 내세워 어떻게 하든 예수의 이름을 유대 사회와 그 백성들의 마음에서 지워보려 노력했지만 스데반은 오히려 그 배경의 하나님의 뜻을 들어서 그분의 메시아 되심을 더 확실히 증거하고 있다. 모세만 따르려는 공회원들에게 도리어 모세는 예수 오심을 준비한 하나님의 도구였을 뿐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자칭 민족의 구원자 모세
모세의 120년 일생은 공교롭게도 정확히 40년씩 셋으로 나눠진다. 마흔 살까지 바로의 궁에서 왕자로 보낸 후에, 미디안의 광야에서 그 후 40년을 양치기로 칩거하다가, 80살에야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출애굽을 이루고 광야에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러나 막상 가나안 땅에는 발을 디뎌보지 못하고 120살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먼발치서 바라만 보다가 죽었다.
본문은 처음 두 시기인 80년을 아주 간략하게 설명한 것이다. 비록 하나님의 기적적 간섭으로 목숨을 건지고 도리어 왕자라는 큰 특혜 가운데 성장했지만 사실은 그의 초기 2/3 인생은 한 마디로 실패와 시련의 시기였다. 참으로 흥미롭고도 오묘하지 않는가? 그의 현실적 조건을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도무지 실패를 겪을 이유라곤 없었다. 민족의 지도자로 그 만한 자질을 갖추고 합당한 교육을 받은 자도 없었다. 바로의 왕자 신분이라는 것도 오히려 적을 알수록 이길 확률이 높다고 결격사유가 되기는커녕 큰 장점이 될 수 있었다.
스데반도 그런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우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태어났다.(20절) 지도자의 자질을 타고 났다는 것이다. 또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에 능하다고 했다.(22절) 당시로선 세계 최고의 지성적 훈련을 받았다는 것이다. 역사가 필로에 따르면 애굽의 왕자들은 기하학, 음악, 수학, 과학 등을 당대 최고 석학들에게서 개인적으로 교육 받았다고 한다. 또 브루스라는 학자는 모세가 애굽의 철자법을 발명했을 가능성마저 제기했다. 어쨌든 그는 왕위 계승 후보자로서 모든 방면에서 최고 수준의 기량을 갖추게 된 것만은 틀림없다. 선천적 최고 자질에 후천적 최고 교육을 보태었으니 충분히 유대 민족의 영웅이 될 만 했다.
모세 본인도 모든 교육 과정을 마치고 불혹(不惑)의 나이 40에 드디어 입지(立志) 했다. 자기 모든 것을 걸어도 될 만한 인생 목표를 세운 것이다. 애굽에 압제 당하고 있는 동족을 해방시키기로 마음먹었다. 히브리 남아로 죽어야만 했던 그가 하나님의 간섭으로 오히려 바로의 왕자가 되었지만 생모(生母)의 젖을 먹고 자랐다.(출2:8) 틀림없이 엄마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알았고 민족의 역사와 기본적인 신앙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또 바로의 왕자로 수업 받게 된 것도 자신더러 민족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계획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23절) 났다고 했다. 이스라엘 사람을 압제하는 애굽 감독관을 죽여 모래에 묻으면서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25절)했다. 당연히 이튿날 형제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선 자칭(?) 구원자 자격으로 중재시키려 나섰다.
그러나 결과는 무참한 실패였다. 그 스스로는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고 또 그 일을 수행할 준비를 마쳤다고 자부했는데 막상 형제들의 반응은 차갑기만 했다. 심지어 재판장이나 일개 관원 취급도 하지 않았다.(27절) 아예 살인자로 취급해서 자기들 일에 끼어들지도 말라고 했다.(28절) 청운의 꿈은 펼쳐보지도 못하고 접어야 했다. 급기야 살인한 것이 탄로나 생명이라도 부지하려고 아무도 자기를 못 알아보는 먼 광야로 줄행랑을 놓아야 했다. 말하자면 위대한 지도자 동지의 자리에서 한 순간에 지명수배자, 기소중지자로 도망 다녀야 하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마음먹고 시작해보려는 첫 단계에서부터 처참한 실패를 겪었다. 아니 수족조차 도저히 움직여 볼 수 없는 구렁텅이로 밀려 떨어졌다. 그가 느꼈을 실망감, 수치심, 곤혹감, 황당함, 두려움 등등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최고로 화려하고 높은 자리에서 더 이상 내려갈 데도 없는 가장 낮고 비참한 처지로 떨어졌다.
모세의 실패는 하나님의 성공
이상하지 않는가? 모세는 분명히 하나님이 세운 종이었다. 선천적 자질을 타고 낳고 후천적 소양도 쌓았다. 그런데도 왜 실패했을까? 그 답은 하나다. 하나님이 실패케 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하나님이 실패케 한 것이지 하나님 당신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 당신이 실패할 리는 절대 없지 않는가? 모세에게 뭔가 부족하거나, 잘못했던 것 때문에 실패했고 하나님은 그 실패마저도 당신의 성공을 위해 허락하셨다는 의미다. 또 당신의 성공이 궁극적으로 신자에게 성공이 된다.
정작 따져 보아야 할 것은 모세에게 어떤 점이 부족했는지 혹은 무엇을 잘못했는지 여부다. 결론부터 말하면 모세는 교만에 차서 인간적 방법으로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애굽의 노예로 있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려면 정치적, 군사적 방법이어야 한다고 지극히 상식적으로 섣불리 판단했다. 자기가 앞에서 노예해방이라는 너무나 정당한 횃불을 치켜들면 이백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동으로 자기 뒤에 줄설 줄 기대했다. 결과는 단 한 명도 동조하지 않았다. 왕자로 법률과 군사의 최고 전문가인데도 관원과 재판장 정도로도 인정받지 못했다.
모세의 실력이 부족한 것이 절대 아니라면 그 이유가 대체 무엇이었는가? 우선 사백 년간이나 노예로 지내다 보니 타성에 젖었을 수 있다. 그러나 바로가 히브리 민족이 창성해지는 것을 두려워 할 정도가 되었으면 종살이를 끝내고 싶은 기운은 충분히 생겼을 것이다. 비록 육체노동으로 다져진 기초 체력 말고는 실제 전투나 군사훈련 경험이 전혀 없는 오합지졸이긴 해도 말이다.
백성들은 모세를 자기 지도자로 세우기에 전혀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던 것이다. 정확히 말해 단지 그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모세 혼자서 짝사랑한 것이다. 청계천에서 빈민 선교를 했던 김진홍 목사님의 설교에서 이런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학생 시절에 민중해방과 노동자권익을 신장하려고 반정부 운동했던 운동권 출신자들 중에는 사실은 그 일을 하기에 부적격자가 많다고 했다. 말로는 무산계급, 노동자, 농민 같은 민중을 해방시켜야 된다고 그럴싸한 논리를 제시하지만 막상 사는 곳은 강남의 부촌이라는 것이다. 학교 강의, 저작, 강연은 열심히 하지만 민중 속에 들어가 몸으로 뒹굴며 함께 고생하지 않고 해본 적도 없는 연약한 지성인이라는 것이다.
모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는 사람을 간단히 죽일 정도의 체력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최고의 자질을 가졌다. 노예를 해방시킬 영웅이 충분히 될 만 했다. 그러나 여전히 바로의 왕자였지 히브리 노예는 아니었던 것이다. 비단 옷에 번쩍이는 칼을 찬 채로는 아무리 노예해방의 기치를 높이 들어도 강남의 고급 아파트에 살면서 민중해방 한다고 외치는 것과 똑같을 뿐이다. 지식, 법률, 교양, 정의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민중을 해방시켜 주는 것은 아닌 것이다.
아마도 히브리 노예들끼리 서로 다툰 까닭도 빵 한 조각이나 편하게 쉴 수 있는 자리를 먼저 차지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먹고 마시고 입을 것 걱정한 적 없고 죽도록 노동한 적도 전혀 없는 왕자 주제에 어떻게 우리의 중재자 내지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서느냐고 따진 것이다. 과연 우리의 고통과 한숨과 눈물의 의미를 네가 제대로 알기는 아느냐고 다그친 것이다.
나이 40에 신학교에 들어온 한 미국남학생이 이런 간증을 했다. 열렬히 사랑한 여자와 결혼한지 얼마 안 되어 아내가 원인 모를 불치병에 걸렸다.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아무 소용없이 죽어버렸다. 대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고 불신과 원망만 늘어났다. 간혹 친구나 친척들이 찾아와 “당신의 슬픔을 이해합니다. 너무 슬퍼 마시고 다시 힘을 내십시오.”라는 위로를 들을 때마다 속으로는 “당신들이 대체 내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반발과 분노만 치솟았다. 그런 인사치레에 불과한 말을 들을 때마다 때려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고 했다.
모세가 중재자로 나섰을 때에 동족들로부터 두들겨 맞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왕자 복장을 하고 나갔으니 봐준 것이지 안 그랬으면 큰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맨발에 다 떨어진 누더기를 걸친 채 노동에 지쳐서 멀건 죽 한 사발로 한숨 돌리려는 자들 앞에 비단 옷 입은 왕자가 나타나 당신들의 고통을 이해합니다라고 말했다고 가정해보라.
흙먼지 묻은 빵 한 조각에 마치 전 인생이 걸린 양 먼저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벌리는 자들 앞에 대체 무슨 위로와 화해와 중재의 말이 통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위로는커녕 동족끼리 싸우는 것은 나쁜 짓이니 그만 두라고 타일렀으니 당연히 싸우던 자들이 도리어 한 패가 되어 모세를 죽이려 들지 않겠는가?
물론 모세는 동족이 학대 받는 모습을 보고 순수한 의협심과 분노가 속에서부터 치밀었을 것이다. 정의감과 사명감에 불타 반드시 동족을 구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을 것이다. 그래서 온갖 궁리를 다했을 것이다. 애굽의 총리나 바로가 되어서 정치적으로 해결하든지, 노예들을 고무해서 반란을 일으키게 하고 그 지휘를 맡든지, 왕자라는 직책을 이용해서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을 베푸는 방안들을 연구했을 것이다.
애굽 관원을 때려죽인 것이 평소의 급한 성격 때문에 우발적으로 일어났는지, 아니면 뭔가 궁리한 계책의 일환으로 그랬는지는 불명하다. 어쨌든 그러면 자기의 진심을 동족들이 인정해 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가 저지른 결정적인 착각과 잘못은 자신이 왕자라는 위치를 백분 활용하자고만 작정한 것이었다. 그래서 왕자 복장을 하고 중재자로 나선 것인데 그야말로 강남에 살면서 말로만 노동자 농민 해방시키겠다는 수준밖에 안 되었다.
한 마디로 모세는 동족의 눈물과 한숨과 고통을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들의 지도자가 되려 했다. 그의 지도를 따를 자는 그를 지도자로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데도 말이다. 당연히 모세의 생각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바로의 왕궁에서 자라게 한 하나님의 뜻은 애굽 사정에 능통케 하려는 것이었지 왕자라는 직분을 이용해 구원자가 되도록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예수의 예표 모세
결국 모든 것이 모세 본인의 잘못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실패마저도 당신의 절대적 섭리 안에 계획해 놓으셨다. 그래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치게 했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정의롭다고 자부한 모세를 깎고 깎아 낮추시려는 뜻이었다. 무려 40년간이나 철저한 자기반성의 시간을 갖게 했다. 그의 영혼이 알게 모르게 사단에게 오염되었던 기간만큼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 바로 잡는 기간 또한 똑 같이 필요했다.
모세는 사방이 다 막힌 절망의 상태에서 하나님 그분과만 일대일로 씨름할 수밖에 없었다. 광야에선 궁정의 관습, 교양, 제도, 법률, 군사지식 등이 아무 짝에도 소용없었다. 정말 세상에서 힘이 될 만한 것들을 전부 다 완전히 내려놓게 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무력함, 어리석음, 연약함을 철두철미 깨닫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모세로 바로의 궁정에서 지내도록 한 시기가 허송세월이었던 것은 아니다. 나중에 바로와 그 신하들 및 술사들과 열 번이나 대결할 때는 실제적 측면에서 아주 유용했다. 동일한 맥락에서 하나님은 그가 나중에 광야 길로 백성들을 인도하고 방황하게 될 때를 대비해 또 40년간을 광야의 전문가로 훈련하고 준비시켰던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모세더러 뼈저린 눈물과 한숨과 고통의 터널을 직접 통과토록 했다. 산해진미 대신에 때로는 굶게도 때로는 멀건 죽만으로 끼니를 때우게끔 했다. 말하자면 피와 땀과 눈물이 젖은 빵의 고마움을 절실히 느끼도록 만들었다. 자기 동족이 현재 당하고 있는 최고 밑바닥 인생을 비슷하게나마 체험하도록 한 것이다. 산해진미로 호의호식 했던 40년의 기간에서 1년도 부족하지 않는 동일한 기간을 쓴 물과 돌 같이 딱딱한 빵으로 지새게 했다. 모세 인생의 초반 두 시기의 길이가 똑 같았던 이유다.
백성의 슬픔과 고통을 마음으로 헤아리는 정도로는 진정한 지도자가 될 수 없다. 함께 체험해야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또 그래야만 백성의 아픔을 바로 자기 아픔으로 삼아서 모든 것을 바치며 해 해결하려는 도자가 될 수 있다. 다윗이 임시 성막으로 자꾸 옮겨 다니는 언약 괘가 안쓰러워 여호와를 위해 성전을 짓겠다고 하자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 ...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삼하7:6,9) 하나님마저도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함께 거했고 또 앞서 가서 대적을 멸하였지 않는가?
하나님은 모세로 그가 구해야 할 백성과 똑 같은 처지에 처하게 했다. 도망자 신세로 은둔 생활을 하게함으로써 자유가 속박된 노예의 형편을 깨닫게 했다. 피구원자와 동일한 처지와 신분에 처하지 않으면 진정한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뜻이다.
예의 미국 신학생의 간증은 또 이렇게 이어졌다. 졸지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선 삶의 의욕을 일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을 해도 기쁨과 의미가 없었다. 결국 마약에 손을 댔고 감옥까지 들어갔다. 그런데 어쩌다 자기와 똑 같은 처지에 있는 자를 감옥 안에서 만났다. 사랑하는 여인이 원인 모를 병으로 죽어서 방황하다 마약에 손댄 것이다. 그 두 사람은 상대의 아픔과 슬픔이 너무나 실감나게 사무쳐서 끌어안고는 한참을 울었다.
그 신학생은 어려서 교회를 나갔지만 복음서가 지어낸 이야기 같고 기독교 비리들이 싫어서 청년이 된 이후로는 신앙을 버렸다. 특별히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와서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죄인을 구원하셨다는 교리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었다. 거기다 아내가 죽는 바람에 하나님께 남은 것은 원망과 분노뿐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똑 같은 처지의 죄수를 만나 함께 울던 바로 그 때에 불현듯 어렸을 때 배웠던 예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예수가 인간으로 오셔야만 인간의 모든 고통과 허물과 죄를 감당하여 온전한 구원이 가능하다는 진리가 비로소 이해되었다. 같은 처지가 아니면 구원은커녕 참된 위로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성령님이 그의 오랜 갈등과 방황과 죄악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도록 만든 것이다.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예수 안에서, 또 인생의 목표와 가치를 예수를 따르기로 헌신함으로써 온전히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온 이유는 우리의 고통, 번뇌, 한숨, 허물, 상처, 갈등, 죄악, 죽음까지 당신께서 다 짊어지는 진정한 구원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인간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겪기 위해서였다. 모세의 첫 실패는 동족의 아픔을 겪어보기는커녕 제대로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자기 잘난 것으로 그들을 구원하려 덤볐기 때문이다. 설령 구원을 이루어도 자신의 이름만 높아질 뿐이다. 어쩌면 은연중에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닐 것이다.
예수님은 30년을 인간과 같이 낮아져 지낸 후에도 3년간 자신의 모든 것으로 인간을 섬기고 나서야 십자가로 가셨다. 모세는 그런 절차라곤 전혀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슈퍼맨 행세를 하려 했다. 정작 하나님조차 그러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권선징악의 구원
모세로 민족의 구원자로 나서게 했던 정의감의 본질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악한 자는 벌주고 착한 자는 상주고 가난하고 힘없어 불쌍한 자는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권선징악의 윤리다. 바로의 궁전에서 배운 대로 행하려 했던 것이다. (아무리 우상을 숭배하는 애굽이라도 왕자에게 권선징악의 보편적 윤리를 안 가르쳤을 리는 없다.)
권선징악이라는 뜻 자체는 아주 좋은 것이다. 문제는 인간이 인간을 판단해서 인간이 심판한다는 데에 있다. 모든 인간은 더하거나 덜할 것 전혀 없는 똑 같은 죄인이다. 인간의 생각은 끊임없이 악을 산출하는데 원죄로 인해 그 영혼이 근본적으로 부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시기, 질투, 음란, 교만, 위선, 허영, 미움, 분노, 쾌락 등을 향해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달음박질 한다.
하나님이 노아 홍수로 인류를 심판한 후에 다시 그렇게는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사람이 이제 정신 차리고 죄 짓지 않아서인가? 아니다. 그 정반대다.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8:21) 모두가 악하니까 심판하려면 모두 죽여야 한다. 그렇다고 심판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모두 악하니까 악함을 씻겨주어 심판 대신 구원을 하시겠다는 것이다. 구원 받지 못한 자는 자연히 심판 되기 때문이다.
지금 모세가 권선징악적인 윤리로 정의감에 불탄 것 자체를 탓하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고 애굽이 악하지 않다는 뜻도 아니다. 악을 악으로 갚아 구원하려는 방식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애굽을 심판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해야 한다. 물론 아무리 바로의 왕자라고 해도 인간인 그가 온전한 선만으로 구원할 수 없고 또 그래 봐야 바로에게 씨도 먹히지 않는다. 나아가 인간 모세로선 권선징악적 외의 방식은 떠올릴 수조차 없다. 요컨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여 구원의 방식도 그분이 지시하는 대로 따르지 않은 것이 그의 실패였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방식은 언제나 선으로 악을 갚고 원수까지 사랑하는 방식이다. 애굽에 열 번이나 재앙을 내렸는데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선 큰 착각이다. 열 번이나 참고 참으면서 회개의 기회를 주었다. 애굽에 직접적 인명 피해가 난 것은 마지막 열 번째 재앙 때뿐이었다. 애굽의 우상과 대비해 여호와 하나님이 상천하지의 유일한 하나님임을 여러 번 그들로 직접 목도케 했다. 고센 땅에는 전혀 재앙을 내리지 않음으로써 당신의 백성을 구별해서 보호하심도 알게 했다. 애굽이 그런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어도 인정만 했더라면 그들도 심판만은 면할 수 있었다.
너무나 순진하게도 모세는 자신이 선을 과시하면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악을 제거하고 같이 선으로 따라 나설 것이라 섣불리 기대했다. 그 이전에 모세 스스로 자신이 의인인양 교만하게 행세한 것부터 하나님 앞에 죄였다.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단 한 명도 없다. 지금 설교 하고 있는 저부터 시작해서 여러분 모두가 그렇다. 여전히 죄인이다. 단지 용서 받은 죄인과 아직 그렇지 못한 죄인으로만 나뉠 뿐이다.
혹시라도 여러분 중에 의인이라고 자부하거나 스스로 그럴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자는 전혀 교회에 나올 필요가 없다. 다른 종교에선 몰라도 기독교에서만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지금 설교 중에라도 제 설교를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 당당하게 일어서 나가도 된다. 의인에게는 구원이 전혀 필요 없지 않는가?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을 뿐이기 때문이다.
순전히 이해를 돕기 위해 제 이야기를 좀 나누겠다. 저희 교회의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 A 형제가 처음 이곳 대학의 박사과정에 입학허가를 받고 이사를 왔지만 장애인 전용 학생 아파트가 배당되려면 몇 달을 기다려야 했다. 유학생 중심 교회인지라 교인 중에 마땅히 도울 분도 없고 해서 저희 집에서 그 기간 동안 기거토록 했다.
그런데 교회에서 한식으로 식사교제를 할 때마다 국(soup)을 잘 먹지 않았다. 그래서 국을 안 좋아 하는지 물었더니 싱긋이 웃기만 했다. 나중에 어머니 권사님이 그 이유를 말씀해주었다. 하반신 불수인지라 소변을 절제할 수 없어서 플라스틱 호스와 큰 주머니를 차고 다니는데 그 처리가 여간 불편하지 않아 외출 할 때는 가능한 물기 많은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오줌통 말고도 말 못할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 사람들은 모를 것이라는 하소연도 덧붙였다. 결정적으로는 바로 곁에서 항상 시중을 드는 엄마인 자신도 모르는 본인만의 고통은 또 얼마나 많겠느냐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간에 제 나름대로 장애인을 도왔다는 자부심에 도취되었고 또 함께 기거함으로써 그들을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는지 부끄러워졌다. 그 모자(母子) 앞에선 한 동안 감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저야말로 원인 모를 불치병으로 아내를 잃은 청년 옆에서 “당신의 고통을 이해합니다. 힘을 내세요.”라고 어리석고도 가식적인 말을 하는 자였던 셈이다. 또 그런 말 한마디 건넸다고 신자로서 의무를 다했기에 의롭다고 자부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영적 교만이자 위선이며 죄인 줄은, 설교로는 잘 가르치면서, 제가 그렇게 행하고 있다는 것은 미처 실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기껏 장애자용 시설을 만들고 모든 일에 우선권을 주는 것으로, 물론 꼭 해야 하고 의로운 일이지만, 할 바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화장실 안에서 개인적으로 겪는 고통은 같은 처지가 되지 않고는 절대 알 수 없다. 장애인의 고통은 장애인만이 알 수 있다. 같이 휠체어를 타고 있는 자들끼리는 아무 위로의 말이나 행동이 필요 없다. 그냥 단순히 서로 웃고 악수하는 것만으로, 아니 함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 안에 모든 위로와 권면과 섬김과 사랑이 다 포함되어 있다.
제가 그 형제와 어머님을 저희 집에 몇 달간 기거케 한 것이 인간적 윤리로는 분명 선하고 심지어 칭송받을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제 내면은 여전히 부패한 채로 남아 있었다. 세상 모두를, 심지어 나 자신까지 속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만은 보고 계셨다. 그분 앞에서 깨끗한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인간으로 오시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말고는 말이다.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도 하나님뿐이다. 그것도 우리의 연약함을 똑 같이 체휼하시고 당신께서 모두 안고 가는 방법으로만 말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권선징악적 논리나 방식으로는 모세가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절대 될 수는 없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특별히 하나님이 택하시어 세상 열방 앞에 당신의 백성으로서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맡아야 할 이스라엘의 경우는 더더욱, 아니 반드시 하나님의 방식으로만 구원해야 했다.
여러분이 모세의 생애를 볼 때에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부분이 어디인가? 홍해 앞에서 멋지게 바다를 가를 때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거룩한 율법을 수여 받을 때인가? 그래서 얼굴에 사람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광채가 날 때인가? 하나님과 함께 하시면 그런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 전에 2/3의 실패와 시련이 없었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쓰지 않으신다. 아니 하나님이 마지막 1/3을 위해서 그렇게 호되게 훈련시키셨다.
다른 말로 그런 훈련과 준비를 거칠 각오와 헌신이 없다면 그분의 큰일에 쓰임 받지 못한다. 이 땅에서 쌓은 공력이 불에 타서 드러나면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수는 있어도 말이다.(고전3:10-17) 스데반도 지금 유대 공회원들에게 모세가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였지만 예수님의 예표일 뿐이라고, 또 예표가 되는 까닭도 그가 구원에 성공했던 모습보다 백성들에게 배척당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모세가 실패했던 가장 큰 원인은 스스로 자기에게 속은 것이다. 눈에 보이는 주위 환경과 자기가 쌓은 실력에 도취되었던 것이다. 유학생활을 하는 여러분은 앞으로 어떤 영역에서든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반면에 남들보다 뛰어난 위치 때문에 모세처럼 자기도취에 빠지기도 가장 쉽다. 그렇다고 일부러 시련을 자청하라는 것은 아니다. 항상 자신을, 특별히 영적 상태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점검해 보아야 한다. 쉽게 말해 “이 세상에서 지혜가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하나님 앞에선 최고로) 미련한 자가”(고전3:18) 되라는 것이다.
4/20/2009
유타대학촌 교회 10/27/1996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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