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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까지 안 바쳐도 된다.

사도행전 박신 목사............... 조회 수 1822 추천 수 0 2012.02.02 22:5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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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7:54-8:3 
설교자 : 박신 목사 
참고 : http://www.whyjesusonly.com/ 
생명까지 안 바쳐도 된다.
사도행전강해(33)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울이 그의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쌔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 옥에 넘기니라.”(행7:54-8:3)  

예수님 없는 세상의 실체

이제 스데반의 변론을 겸한 설교가 끝을 맺었다. 그의 변론의 요점은 너희가 나를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 죄로 고소했지만 결코 그런 적이 없고 메시아 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 가르침은 물론 구원을 얻기 위해선 율법 준수나 성전 제사가 더 이상 필요 없고 단지 믿음으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그분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면 된다는 진리였다. 또 예수님이 율법과 성전 제사를 수여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오히려 완성시켰지 폐지나 모독한 적이 없듯이 그분을 믿고 따르는 신자들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변론의 결론으로 삼은 한 마디는 그동안 꾹 참고 누르고 있던 공회원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너희가 천사가 전해준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53절) 성경은 이 말을 들은 공회원들이 이를 갈았다고 한다. 율법의 전문가들에게 제대로 지키지도 않는 자라고 했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는가? 또 그 전에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고 했으므로 분명 어떤 죄책감도 느꼈을 것이다. 이유가 어디 있든 어떤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그런 찔림이 또 다른 살인으로 몰아가니 인간의 실체가 너무나 더럽고 추하며 어떤 면에선 섬뜩하지 않는가?

스데반의 결론은 너희가 나를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 죄로 고소했지만 정작 그렇게 한 것은 너희들이라는 뜻이었다. 무고한 예수를 엉터리 죄목을 붙여 죽였는데 아직도 회개하기는커녕 다시 나에게도 똑 같은 행세를 하려느냐고 되물은 셈이다. 마음에 찔리는데도 이를 갈았다는 것은 그의 변론이 구구절절 옳아서 도무지 반발할 만한 틈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저 그냥 갈아먹고 싶도록 미운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이 자기의 잘못을 지적해 주는 말이 옳으면 옳을수록 더 화가 치미는 것이 인간이다.

이처럼 기독교 최초의 순교사건은 종교 간의 다툼이나 사회적 핍박이 직접적 원인이 아니었다. 시쳇말로 비유하면 방귀 뀐 사람보고 방귀 뀌었다고 하니까 화를 불 같이 내면서 바로 돌을 들고 죽인 것이다. 그것도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경건한 종교지도자들이 그랬다. 인간의 실체도 추하지만 그런 인격자들마저 일종의 집단 광기로 몰아가는 흑암의 세력이 그 배경에 훤히 보이지 않는가? 그래서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고 말한 것이다. 인간을 죄의 노예로 묶어서 죽음으로 내몰아가는, 그것도 하나님을 위한다는 거룩하고도 거창한 명분을 앞세우게 해선, 사단의 궤휼은 생각보다 훨씬 더 치사하고 교묘하며 무시무시하지 않는가?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은 순교하는 그곳에 예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진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스데반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이 재차 순교했다는 뜻이다. 스데반은 오직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관해 전했기 때문에 죽었다. 사실상 죽어서도 제자들을 통해 자기들을 죽을 죄인이라고 선포하는 예수가 유대인들은 죽기보다 더 싫었던 것이다.

바꿔 말해 모든 세대 모든 인간이 얼마나 치사하고 추악한 죄인인지 또 사단이 얼마나 교묘하고 음흉한지는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는 뜻이다. 예수가 아니면 죄와 사단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은 아예 그 노예가 되어 죽음의 장송곡만 부르는 곳이 될 수밖에 없다. 지금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경배하는 종교 지도자들조차 그러고 있지 않는가? 스데반이 지적한대로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영적인 시체였다. 그들이 아무리 율법을 세세하게 풀어 강론했어도 사실은 죽음을 찬양한 꼴이었다.    

이런 일이 있기 6백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을 보라.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라.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 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같이 소경이겠는가 네가 많은 것을 볼찌라도 유의치 아니하며 귀는 밝을찌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42:18-20)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본 자들도 유의치 아니하고 소경과 귀머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오늘 날의 목사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와 사단의 실체를 밝히 드러내지 못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사42:6,7)고 약속하셨다. 메시야가 와선 듣고 볼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빛 되신 예수님이 이 땅에 왔는데도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였고”(요1:5), 나아가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해”(요3:19) 배척하다 못해 십자가에 죽여 버렸다.

이제 유대 지도자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고도 당장에 누리고 있는 세상의 형통과 안락과 권세와 명예를 더 사랑했기에 아무 망설임 없이 또 다시 스데반을 죽였다. 그들이 도덕적 종교적으로 선하지 않고 경건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단지 예수님의 빛에 대해 까막눈이었을 뿐이다. 그들의 눈이 오직 세상과 사람으로만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차에 다는 물고기 문양

인류 최초의 순교자 아벨을 보라. 제사를 아벨보다 먼저 드렸을 정도로 하나님을 알고 섬겼던 형 가인에게 아무 죄 없는데도 죽임을 당했다. 예수님, 스데반, 모든 순교자들이 다 그랬다. 어둠이 단지 빛이 싫다는 이유로 빛을 말살하려 했다. 그러나 순교를 당할수록 오히려 그 빛은 더 빛났다. 로마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에 찢겨 죽임을 당해도 찬양을 부르며 평강을 잃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관중들은 야유와 조롱을 퍼부었어도 그 마음에 찔림은 엄청났었고 결국은 기독교의 폭발적인 부흥을 부르는 촉매가 되었지 않는가?

순교라는 영어단어 martyr, martyrdom은 놀랍게도 ‘증언하다’(witness)는 뜻을 가진 헬라어에서 유래되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약속하셨을 때나, 제자들이 가룟 유다로 결원이 된 제자를 채우면서 “예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행1:22)이 되게 하자고 했을 때에 ‘증인’, ‘증거’로 쓰인 단어다.

헬라어에 그 전에는 순교라는 단어가 없었다는 뜻이다. 실제 그 단어가 표상하는 현상이 없다면 특정한 말도 생기지 않는 법이다. 당시까지 다른 종교에선 직업적인 제사장과 사제를 제외한 일반 신자가 목숨을 바쳐가며 자기들 신을 끝까지 증거 하는 어리석은 짓은 아무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기독교 신자들이 너무 어리석었던 까닭인가? 결코 아니다. 다른 종교에선 자기 생명이 그 신보다 훨씬 더 소중했지만 기독교에선 그 정반대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너무나 소중했기에 얼마든지 자기 목숨을 바칠 수 있었다. 그분의 부활을 직접 목격했기에 죽음을 뛰어넘는 천국 소망을 견고하게 붙들었다. 성령의 권능을 입자 이미 얻은 구원을 아직 흑암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증언하지 않으면 마음에 찔림과 눌림이 생겼다. 모든 사람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절대적 진리이기에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도 복음을 외쳤던 것이다.

신자들이 순교하는 모습을 생전 처음 접한 사람들은 어떤 말로도 그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다. 자기들로선 꿈도 꾸지 못할 일을 신자들은 전혀 두려움 없이, 아니 오히려 평강과 감사와 기쁨을 가득 안고 기꺼이 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 도무지 없는 일이었다. 상식을 가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당연히 세상 언어로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그냥 예수를 증언했다는 설명만으로 순교라는 뜻으로 굳어버렸다. 핍박이 보편화되는 것에 비례해서 신자의 복음 선포에 성령의 권능은 더 넘쳤다. 메시지를 듣는 자가 마음에 찔림을 얻어 철저한 회개에 이르든지 이를 갈며 돌을 들어 치려했다. 그야말로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예수의 증인이자 곧 바로 순교자였다.  

현대 교회가 초대 교회에서 배워야 할 사항이 무엇인가? 가진 소유를 서로 나누며 모이기에 힘쓰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는가? 물론 그래야 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십자가 복음에 온전히 바로 서야한다. 예수님으로 인해 삶과 죽음이 갈라진 체험이 모든 신자에게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땅의 삶보다 그분이 훨씬 더 소중해야 한다.

예수님에 대해 증언 했다는 한 자기 이유만으로 스데반이 순교했다면 모든 신자 또한 그러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든 순교당할 가능성에 직면해 있기에 그럴 준비태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당연히 비방과 핍박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과는 정반대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로 인해 순교하는 자들이 나오는 것이 교회의 일상사가 되어야 한다.

신자들이 자동차에 물고기 문양을 붙이고 다니는 이유가 무엇인가? 베드로더러 이제는 물고기 대신에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는 예수님 말씀의 상징인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으로 오천 명을 먹인 이적을 나타내는 것인가? 단순히 신자라는 증명인가? 모두 다 아니다. 예수님을 위한 일이라면 목숨을 버려도 좋다는 표식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메시아이며 그분이 아니고는 어떤 인간에게도 절망뿐이라는 것을 평생을 두고 증언하겠다는 선서다.

초대 교회 당시에 로마 제국의 시민이라면 로마 황제 가이사가 나의 주(主, Lord)라고 인사해야 했다. 자기 인생을 주관할 뿐 아니라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까지 가진 완전한 주인이라는 뜻이다. 공치사라도 그 인사를 하면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지만 끝까지 거부하면 로마에 대한 반역죄를 적용해 사형시켰다. 이 조치를 기독교 신자 외에는 어느 누구도 부담 갖지 않고 지켰다.    

그러나 예수를 통해 참 하나님을 알아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온 신자로선 우상이나 인간을 주라고 부를 수는 결코 없었다. 대신에 헬라어로 “이에수 크리스토스 테온 우이오스 소테레오”(예수는 그리스도로 나의 구주이다.)라고 고백했는데, 각 단어의 머리글을 따서 모으면 생선이라는 뜻의 ‘익투스’가 되었다. 그래서 생선을 그리거나 말하면 자신은 기독교 신자라는 암호로 사용되었다. 결국 차에 다는 물고기 문양은 초대 교회가 행한 예수를 위해 기꺼이 죽겠다는 고백의 상징인 셈이다.

예수 믿는 마녀 같은 며느리

현재 서구 민주주의를 채택한 나라에는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기에 이전 같은 박해는 없다. 그럼에도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목숨을 걸고 선교하는 자들이 많으며 실제로 지금 세기가 숫자로 따지면 순교자의 숫자가 가장 많다고 한다. 초대교회의 순교했던 모습을 닮아야 한다고 해서 누구나 이슬람권 선교사로 가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그럴 수도 없다.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일 뿐이다. 다 사도, 다 교사, 다 능력행하는 자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신자에게 생명까지 걸라고 요구하지 않는 이유는 기실 따로 있다. 신자는 신자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그리 강하지 않다. 신앙을 가졌다고 갑자기 어떤 환난과 문제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는 끈기, 담력, 용기,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여전히 연약하고 무능하며 무지하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님의 은혜 없이는 한 순간도 제대로 살 수 없다.

예수님이 왜 수제자로 베드로를 택했는가? 혹은 그렇게 행세하도록 묵인하셨는가? 그가 모든 인간의 보편적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었기 때문 아니겠는가? 그는 인류최초로 예수님을 향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고백했다. 말하자면 ‘익투스’ 물고기의 원저작권자였다. 또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하자 절대 그럴 수 없다면서 자기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큰 소리쳤다. 그런데 실제 그런 상황이 닥치자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스승을 부인했다.

그럼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 호숫가에서 그에게 세 번이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묻고선 그 배반했던 죄를 용서해주면서 참 회개로 이끄셨다. 또 오순절에 성령 세례를 주어 한 번의 설교로 삼천 명을 회개시키는 권능으로 입혀주었다. 그 후로 그는 이전과 정반대로 정말 담대해졌다. 그러나 율법의 구습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하고 유대인 신자들을 만나선 또 다시 비겁하게 눈치를 보는 바람에 동료 사도인 바울에게조차 야단을 맞았다.(갈2:11-14)  

로마 대화재 때에 흉흉한 민심을 달래려고 네로 황제가 기독교 교인들에게 그 책임을 전가했다. 전설이긴 하지만 화재와 박해를 피해서 베드로가 도망을 가고 있는 중에 로마로 들어가는 예수님을 만났다고 한다. 예수님께 베드로가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더니 주님은 내가 네 양을 버리고 도망을 가니 내라도 대신 들어가 보살펴야 하지 않느냐고 대답했다. 예수님이 부활 후에 자신을 용서하며 네 양을 치고 먹이라고 주신 계명 앞에 맹세코 그러겠다고 헌신했던 그 가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그는 사도로서 충성하는 가운데도 여러 번 실족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중에 어느 누가 베드로를 감히 욕할 수 있겠는가? 초대교회의 수장이나 다름없었던 그마저 오르락내리락하는 신앙과 자기 목숨을 아끼는 연약한 모습을 보였지 않는가? 우리가 결코 그보다 나을 것 하나 없다. 하나님이 우리더러 목숨 버려 순교하라고까지 요구하지 않는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신자도 얼마든지 핍박받을 수는 있다. 물리적 육체적 핍박이 아니라 예수 믿는 일을 다른 어떤 것보다 가장 소중하게 여김으로써 겪는 반사적인 손해다. 손쉬운 예로 완고한 불신자 집에 시집간 신자 며느리를 들 수 있다. 주일 교회 가는 것과 제사 지내는 문제 등에서 자연히 충돌이 생긴다. 끝까지 제사는 거부하면서 교회는 출석하면 집안의 미운 오리 새끼가 된다. 조금이라도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예수 믿는 며느리 때문이라고 마녀 취급을 받는다. 단지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무 잘못 없어도 모든 구박은 혼자서 다 당해야 한다.

실제 얼마 전에 바로 이런 문제로 상담해온 여자 성도가 있었다. 그래서 자꾸 집안에 분란이 끊어지지 않으면 제사도 참석하고 주일 교회 출석도 쉬라고 권한 적이 있다. 당장 저를 이단으로 몰지 말기 바란다. 본인부터 신앙을 바로 세워야 하고 단지 당분간이라는 단서를 붙였기 때문이다.  

혹여 제사에 참여해도 기도하는 형식을 취해야 함은 물론이다. 도무지 절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분위기라면 내면의 믿음이 우상에게 결코 절하지 않는다고 바로 서있으면 된다. 형식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문제다. 나아가 모든 우상은 인간이 만든 것으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절을 해도 절을 받을 대상이 사실상 없다. 혹시라도 사단의 졸개들이 조상귀신을 위장하여 그 자리에 있어도 마음속으로 그 더러운 세력을 대적하며 물리치는 기도를 하면서 그러면 된다.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문둥병의 치유를 받고는 우상의 땅인 고국으로 돌아가서도 오직 여호와만 믿기로 헌신했다. 그러나 한 가지 양해를 구했다. “내 주인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거기서 숭배하며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왕하5:18)

마찬가지로 제사에 참여하는 것은 도저히 피치 못할 최후의 단계에 한한다. 그 전에 여러모로 설득을 해도 완강하게 반대하고 심지어 제사에 참여치 않거나 교회 출석하면 이혼을 시키려드는 것 같은 경우다. 또 솔직히 말해 믿지 않는 자에게 시집갈 때에 응당 그런 일들이 생기리라 이미 예상, 각오한 것 아닌가? 물론 자기 믿음마저 포기하고 평생을 그렇게 순순히 복종만 하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스스로 자기 믿음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관점의 폭을 더 넓혀야 한다는 뜻이다.

믿음의 폭을 넓혀라.

흔히들 믿음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적용하는가? 신자 쪽에서 지키고 가꾸고 성장시켜야 할 내면의 경건한 상태로만 간주한다. 그래서 진심, 정의, 결단, 헌신, 희생, 수고, 마지막에는 순교까지, 온전히 실천해야 한다. 예컨대 기생 라합이 생명을 걸고 이스라엘 정탐꾼을 보호해 주듯이 해야 한다. 물론 맞다. 모든 신자가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고 삶의 방식부터 불신자와 정반대가 되어야 하며 인생의 목표도 완전히 뒤바뀌어야 한다. 한 알의 썩는 밀알로 일생을 보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먼저 맛보고 제대로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자발적이고도 기꺼운 반응으로써 그런 실천이 따라 나와야 한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서 말이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에 대한 온당한 반응으로 행하는 믿음이어야 한다. 신자 스스로 믿음을 지키고 키우려 들면 쉽게 지치고 넘어지게 마련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간혹 따라오긴 해도 항상 그렇지는 않다.  신자의 일방적인 믿음에는 죄와 욕심이 개입될 가능성이 항상 있기 때문이다.  

내 믿음을 내가 굳건히 지켜야지라고 하면 자기 믿음의 성숙도에 관한 판단도 스스로 하게 된다. “일개 기생 라합도 하나님을 위해 생명을 바쳤는데, 무식한 어부 베드로도 위대한 사도가 되어서 기꺼이 십자가에 거꾸로 처형당했는데, 나는 왜 이 시댁의 핍박마저 이겨내지 못하는가? 제사 참석이나 교회 출석마저 제대로 맞서 싸워 이기지 못하면 내 신앙을 대체 어떻게 지켜낼 수 있겠는가?” 믿음으로 불신자와 대적하거나 스스로 자책하는 일밖에 할 줄 모른다.  

신자가 불신자 집안으로 시집갈 때에 가장 중요한 사항은 자기 신앙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사단의 집에서 그 가족들과 끝까지 대적하여 이겨내는 것이 신앙의 목표가 되어선 안 된다. 예수를 보배로 모시는 신자는 이미 사단에게 궁극적 승리를 보장 받았다. 아니 승리를 이미 소유하고 있다. 잠시 시부모께 순종하여 제사에 참석한다고 자신의 구원이 취소되거나 그 일로 벌을 받는 것도 아니다. 대신에 그들을 끝까지 십자가 사랑으로 섬겨서 복음의 진리를 깨닫도록 하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8) 신자는 이미 주의 것이 되어 있다. 주님이 신자를 떠나는 법은 평생토록 없다. 주를 위해 살고 죽는 것이 단순히 종교 계명을 지키라는 뜻이 아니다. 자신은 주의 것이 이미 되어 있다는 온전한 사실을 주위 사람에 증거 하라는 뜻이다.

단, “식물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아야”(롬14:20) 한다. 만사를 오직 “믿음으로 좇아”(롬14:23) 해야 한다. 재차 강조하지만 자기 믿음을 지키는 것이 믿음으로 좇는 일이 아니다. 이미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 되어 있으니 더 이상 지킬 믿음도 따로 없다. 대신에 그 믿음으로 불신자를 살려내어 그리스도 구원의 은혜에 들어가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업이 더 확장되게 해야 한다.

불신자 시댁에 함께 살면서 제사에 참여치 않고 교회에 출석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는 없다. 그보다는 어떻게 하면 시댁 식구를 구원할 수 있을지를 유일하고도 우선적인 목표로 삼아야 한다. 또 그러기 위해선 그 두 문제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부분에서 정말 나무랄 데 없는 현숙한 며느리가 되어야 한다. 예수 믿는 며느리가 달라도 확실히 다르다는 인식을 정말 확실하게 심어주어야 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 바울은 우상이란 존재하지 않기에 우상에 바쳐진 고기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지만, 그 진리를 모르고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으면 먹지 않았다. 고기를 먹고 안 먹고는 문제가 아니라 오직 복음을 전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다는 뜻이다. 고기 먹는 일을 문제 삼는 것은 자기 믿음을 지키는 일에 해당되지만, 복음이 목적이면 이미 주님의 것이 된 자가 그분을 위해 사는 일이다.

스데반이 자기 믿음만 지키려다가 순교 당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오해는 말아야 한다. 물론 믿음을 지키는 것은 당연히 기본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보라. 스데반이 유대 법정의 모든 사람에게 “내가 너희에게 절대 지지 않는다. 너희 사단의 종이 아무리 나에게 무고한 누명을 씌우려하지만 나는 믿음으로 이 어려운 일을 이겨낼 수 있어. 설령 죽음으로 내몰아도 너희는 지옥가지만 나는 천국 가니까 아무 염려 없어”라는 의분에 가득 찬 심정으로 맞상대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그 대신 얼마나 안타깝고 불쌍한 심정으로 그들을 대했겠는가? 주님의 심장으로 대적이 아니라 너무나 연약하고 무지하며 어리석은 죄인들로 대했지 않겠는가? 그러니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도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자 며느리가 시댁의 어떤 핍박도 이겨내면서 제사에 불참하고 교회 출석하는 것이 정작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더더욱 그들을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모습이 가족들의 피부에 와 닿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신자는 이미 영생을 확보했는데 무엇이 두려워서 그렇게 못하는가?

앞에서 말한 대로 핍박은 그 집에 시집가려고 결심했을 때에 이미 예상된 것이다. 사전에 미리 알고 준비한 어려움은 고난이 아니다.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다른 말로 시댁의 구박을 이겨낸 것이 믿음의 자랑이나 승리의 표상이 될 수 없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완전한 불신자 집안에서 아녀자 혼자 그 모든 어려움을 겪어낸 것은 대단한 일이며 하나님도 기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은 최고로 성숙한 신자가 갖는 믿음의 범위와도 도무지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너무나도 광대하다는 사실부터 확고히 인식해야 한다.      

이런 일에 대해 성경은 바울과 베드로 두 사도를 통해 분명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고전7:14,16) 먼저 바울은 불신자와 결혼한 신자는 배우자의 구원에 전부를 걸라고 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벧전3:1,2) 아내가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는 모습으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불신자 남편더러 구원 얻게 하라고 했지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구원을 얻는 일이 세상 어떤 일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하다는 것이다.

신자는 세상에선 너무나 어리석은 자로 취급당할 수 있다. 그러나 눈과 귀가 열려 영원한 빛을 본 자다. 신자를 조롱하고 핍박하는 자는 세상에선 영민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선 여전히 소경과 귀머거리다. 단순히 불신자로 남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불 못으로 걸어가는 중이다. 자기 배우자의 가족을, 아니 어떤 인간이라도 빤히 보이는 죽음으로 떨어지고 있는데 그냥 두고 볼 수만 있겠는가?

하나님이 순교를 요구하지 않는 이유

하나님이 모든 신자를 순교까지 요구하지 않는, 정확히 말하면 그런 상황으로 밀어 넣지 않는 이유는 두말 할 것 없이 우리 연약함을 너무 잘 아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태초부터 인간이 타락할 줄 아셨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예비 되어 있었기에 인간을 창조하셨다. 타락 후의 인간 체질이 진토이며 영혼도 썩을 대로 썩어 있는지 오히려 그분이 더 잘 아신다. 특별한 경우에 특별히 택한 자가 아닌 이상 아무에게나 감당치 못할 순교를 허락하지 않으신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허약하고 치사하며 비겁하고 위선적이다. 믿음 안에 들어온 신자도 크게 예외가 아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자기 믿음으로 스스로 대적을 이겨내어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신자의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해 대신 대적을 물리쳐서 신자를 지켜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이미 얻은 믿음 자체만 지켜나가기만 하면 된다.  

모든 인간은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휘날리는 갈대와 같다. 믿음을 가진 자와 갖지 않은 자의 차이는 갈대이긴 마찬가지인데 신자는 진흙 밭에 심겨진 갈대이고 불신자는 뿌리가 뽑힌 채 바람에 날아다니는 갈대다.  
  
따라서 믿음의 실체도 자신이 갈대이지만 진흙 밭에 확고하게 심겨져 있기에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비록 바람 부는 대로 쏠리긴 해도, 절대 그 영양이 마르거나 뿌리 채 뽑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다. 진흙 밭에서 영양을 계속 공급받고 있으니까 바람이 자면 다시 바르게 설 수 있다. 공중에 떠다니는 갈대는 그저 그냥 날리다가 결국에는 말라 죽을 뿐이다.  

다른 말로 신자가 바람에 날려 다니는 것까지는 하나님이 다 아시니까 크게 야단치거나 벌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가장 기본적인 뜻도 바로 그렇지 않은가? 인간의 정의, 의리, 절개, 인내, 담력, 도덕, 능력, 믿음 등으로 고난과 죄악을 스스로 이겨낼 수 있었다면 그분이 직접 이 땅에 오실 이유는 없었다. 이미 수여해 놓으신 율법을 제대로 지키는 자는 상주고 그렇지 못한 자는 벌만 주면 되었다. 그러나 당대에 최고로 경건한 바리새인들마저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기보다는 자기 자랑하기에 바빴지 않는가? 또 성전 제사 같은 종교적 행위만 끝까지 고집했지 실제로 베풀어야 할 신과 의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지 않는가? 인간 중에 그나마 가장 믿을만한 부류가 이랬으니 어찌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시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더 기가 찰 노릇은 바로 그런 자들이 그리스도 되는 그분을 말도 안 되는 죄목을 덮어 씌워서 저주 받은 죽음으로 나무에 달았지 않는가? 나사렛 예수가 당대의 최고 경건한 자들에게 무고한 죽임을 당했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그분은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임이 분명하다. 아무리 경건하고 신령한 인간이라도 시쳇말로 죽었다 깨어나도 그분 같은 인생을 살 수 없다. 그분 같은 죽음은 더더욱 죽을 수 없다. 드라마로 꾸미려 해도 아예 상상조차 되지 않았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부에선, 그것도 자칭 기독교계 내에서, 예수는 후대 사람들이 꾸며낸 신화라고 한다. 성경이 없었다면 예수 같은 일생은 꾸며내기는커녕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음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 때까지 세상에 아예 없었던 인생이지 않는가? 기껏 순교라는 말조차 없었는데 그분의 일생을 표현할 말은 도무지 없었는데 어찌 꾸며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자들은 너무나 완악하고 배역하여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기독교를 개혁한다는 미명(?)을 앞세워 자행하고 있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며 지금 스데반을 죽이려 유대 법정에 모인 자들과 단 하나도 다를 바 없다.    

남편과 시부모의 반대로 교회에 출석하지 못하고 또 제사에 참여했다고 위선이 아니며 하나님을 배신한 것이 아니다. 유다처럼 적극적 자발적으로 자기 영혼을 사단에게 팔아넘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교 재판을 마치고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둥글다고 혼자서 중얼거린 갈릴레오처럼 되어도 된다. 정말 아무도 몰래 골방에서 혼자 눈물로 성경보고 찬양하며 경배 드리는 곳에 주님은 분명 함께 계신다. 그러나 단순히 믿음으로 핍박을 견디어내려 하기보다는 비록 자기는 어떤 험한 꼴을 당하더라도 진정 애끓는 심정으로 그들을 주께로 인도하고자 할 때에 주님은 훨씬 더 가까이 계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신다면 결국 그런 약한 자를 들어 쓰신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넘어지고 쓰러지고 비겁해 보이는 그런 모습까지도 주님은 다 당신의 뜻을 드러내는 통로로 만드신다. 야곱이 얼마나 치사하고 음흉했는가? 모세는 얼마나 성격이 급하면 살인까지 저질렀겠는가? 바울은 예수의 가장 큰 대적이었고 베드로는 비겁함의 절정이었지 않는가? 그들이 실패할 때에 스스로는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고 있다고는 꿈도 꾸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당신만의 방식으로 그렇게 하셨지 않는가?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해도 우리 속에는 주님의 사랑과 권능이 이미 충만하게 임재 해 있다. 또 실감하지 못하더라도 우주의 주인 되시는 그분이 우리를 들어서 쓰고 계신다. 어느 정도로 말인가? 그분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고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는 정도다. 그러나 이름도 소문도 나지 않는 아주 적고 세밀한 일에서부터 그렇게 하신다. 그분이 보시기에는 역사에 기록된 일이나 아무도 모르게 스쳐 지나간 일이라도 당신이 함께 하셨기에 거룩하고 신령하며 위대한 그분만의 역사다.

순전히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겠다. 한국의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에 민주화 운동을 하던 박종철 군이 물고문을 받고 사망했다. 그것이 기폭제가 되어서 반정부 데모에 불이 붙었다. 당시 정권은 운동권이 극렬하게 데모하는 것에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어떤 정권에도 그런 적극적 반대파는 항상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 정권이 정작 겁을 먹고 직선제 개헌으로 가려고 결심한 계기는 딴 데 있었다. 그때까지 수수방관하던 넥타이 부대 즉, 아주 평범한 직장인들이 서서히 데모에 가담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모두가 박종철 같은 순교자가 될 필요는 없다. 사실 그럴 그릇도 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팔짱 낀 구경꾼들마저 들어 쓰실 수 있다. 아니 주로 그런 자를 통해 당신의 역사를 이루신다. 하나님의 일에 기적, 영웅, 슈퍼맨이 필요 없다. 당신께서 범사를 주관하시기 때문이다. 숨어서 기도하는 수많은 당신의 남겨진 종들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이룬다.  

박해가 부흥을 부른다.  

그런데 초대 교회에도 때때로 극심한 박해가 있을 때는 제외하고는 순교자의 숫자는 사실상 소수였다. 주류를 이룬 자들은 주로 어떠한 자였는가?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이 말씀의 뜻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음에 세상의 조건, 자질, 자격, 능력 등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약한 자들로 결국 교회를 형성케 했으니 구원 이후의 하나님의 역사도 그 약한 자들을 통해 이루신다는 뜻이 된다. 어떤 육체라도 구원과 그 후에 하나님 앞에 자랑치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구약에서 유대 민족의 구원자이자 스승이었던 모세에게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셨는가? 가시덤불의 불꽃이었다. 이왕이면 레바논의 백향목이나 하다못해 감람나무도 아닌 광야의 덤불이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입이 뻣뻣하고 둔하며 살인자로 도망 중에 있는 다 늙어빠진 양치기 노인 같은 자를 들어 쓰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드러난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백향목보다 가시덤불에서 더 흥왕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연약함을 인간 스스로 강하게 바꾸지 못한다. 그 영혼의 가난함을 풍요와 평강으로 바꾸지는 더더욱 못한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바로 세울 수 있다. 또 그분의 능력과 지혜는 인간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기에 어떤 연약한 자도 하나님은 들어 쓰실 수 있다.  

스데반의 순교를 보면서 그를 따라 언제 어디서든 생명을 바쳐 주를 섬겨야지 섣불리 결심하고 헌신 안 해도 된다. 오히려 사도도 아닌 이름 없던 헬라인 집사를 최초 순교자로 부르신 주님의 섭리부터  깨달아야 한다. 비록 외부의 핍박이 더 강해졌지만 여전히 이름 없던 신자들의 믿음은 더 강해졌다.  그 연약한 자들로 로마 제국의 곳곳으로 흩어지게 만들어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게 만드신 그분의 비밀을 눈치 채야 한다. 당신께서 숨겨두고 남겨든 자들로만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신자는 자기가 처한 장소와 상황에서 동참하기만 하면 된다.

초대 교회에 대한 로마 당국의 본격적인 핍박은 주후 60년 네로 황제 때부터였다. 물론 본문의 경우처럼 주후 30-35 년경 유대교로부터의 핍박이 가장 먼저 있었다. 그러다 언제 핍박이 끝났는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밀라노 칙령을 선포한 주후 313년이다. 황제도 세례를 받고, 교회의 재산이 보존되고, 종교의 자유가 완전히 허용되었다. 성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껏 가르치며 존경을 받았다.

이제 더 이상 지하 동굴에 숨어서 예배를 볼 필요가 없고 곳곳에 거창한 예배당들이 건축되었다. 그에 따라 교회 예배도 더 은혜롭고 화려하고 풍성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성직자들도 서서히 황금빛 법의를 입기 시작했다. 생활이 보장되는 단계를 넘어 부유해졌다. 유대교 기득권층들처럼 기독교에도 종교적 특권층이 생기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기독교가 핍박이 사라지고 양적, 외적으로 부흥되기 시작하자 곧 바로 영적, 내적으로는 곪아 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기독교가 약한 자들이 종교가 아니라 정의감에 불타고 똑똑하고 부유한 자들의 종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단순히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의 편이라는 뜻이 아니다. 비록 우리처럼 치사하고, 넘어지고, 실패하더라도 진심으로 그 심령이 가난해져 예수님 말고는 소망이 없다고 고백하는 자만 그분이 들어 쓰시기 때문이다.

믿음이 절개 높은 기생 논개처럼 목숨을 걸더라도 내 믿음을 지켜야지 하는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면 그 믿음은 부러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보다는 바람에 날리는 갈대 같이 매일 실패하고 또 실패하여 교회 나올 때마다 회개 말고는 가져 나올 것 없는 그런 자들 사이에 거하시길 더 좋아하신다.

주님은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푸시는”(사42:2,3) 분이지 않는가? 싱싱한 갈대에 꺾이지 않도록 보호대를 붙일 이유가 없으며 또 활활 잘 타고 있는 등불도 구태여 꺼지지 않도록 바람을 막아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영웅을 원하지 않는다. 그분은 모든 인간이 너무나 연약하기에 같은 연약함으로 다른 연약한 이들과 어울려 그 연약함을 함께 지고 갈 자만 찾으신다. 적은 일에 충성할 자라야 당신의 어떤 큰일에도 충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으로 영웅이 되려 하지 말라. 무슨 일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만 소원하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니까 또 다시 위대하고 엄청나고 신령한 일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하나님이 적은 일에 충성하기를 원하신다면, 약한 것으로 들어 쓰셔서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려고 하신다면, 바로 그런 적은 일들 가운데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한 알의 밀알은 땅에 떨어져 썩어야 싹이 나고 열매가 맺는다. 썩어야 한다고 해서 또 다시 생명을 바쳐 순교하는 것이라고 섣불리 판단하지 말라. 씨앗은 땅에 떨어져 썩는 일 말고는 아무 할 일이 없다. 씨앗이 따로 힘을 모으고 자라고 준비해서 큰일을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신자 또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그 장소, 그 환경에서, 붙여준 바로 그 사람들에게 성실하게 행하면 된다. 특별히 다른 장소, 환경, 사람, 사건을 찾아가 위대함을 보일 필요가 없다. 바로 그것이 진정한 순교다.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도 마찬가지였다. 신자로서 복음을 자기가 보고 듣고 체험한 그대로 전했을 뿐이다.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그 장소, 그 환경에서 게으름 부리지 않고 했을 뿐이다. 순교로 생을 마감해야만 했던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그랬을 뿐이다. 그 순교 또한 진흙 밭에 심겨진 갈대로서 열매를 맺어야 할 때에 맺은 것뿐이다. 그는 유대 공회가 아니었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복음을 전했을 것이며 또 그로 인해 공회에 계속 잡혀 왔더라도 똑 같은 변론과 설교를 했을 것이다.

지금 불신자 가정에 시집가서 온갖 구박을 받고 있는가? 취향과 삶의 방식과 인생의 목적마저 전혀 다른 배우자를 만나 정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는가? 매일 똑 같은 빨래, 식사준비, 설거지, 청소, 등등에 파묻혀 우울증으로 치달을 정도로 스트레스가 쌓이는가? 불신자 배우자가 교회라도 따라가 주면 다른 모든 불만을 죽일 수 있겠건만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들어주지 않은 하나님이 이제 원망스러운가?

다시 말하지만 믿음의 영웅이 되어서 그들을 스스로 구원하겠다고 나서지 말라. 자신의 연약함부터 하나님 앞에 들고나가라. 그래서 주위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연약한지부터 알아라. 예수님의 은혜 없이 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음부터 절감해라. 신자가 믿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믿음으로 참여할 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생명보다 더 귀하다는 확신이 들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됨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세상의 핍박은, 아니 현실의 고난조차 믿음이 있음에도 제대로 이겨내지 못하고 항상 괴로울 뿐이다. 사단이 아무리 유대 종교 지도자를 집단광기로 몰아갈 정도로 음습하고 무시무시해도 그 자리에서 하늘 문을 열고서 스데반에게 보여준 예수님의 놀라운 승리가 있었지 않는가?

스데반처럼 십자가 앞에서 최대한 낮아지고 깨어져서 자기를 핍박하는 자가 도리어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워져야 한다. 그럼 그 때까지 현실에 없던 순교 같은 놀랍고도 새로운 현상을 신자와 교회들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세상 사람이 감당은커녕 상상도 못하는 일을 하나님은 오직 연약한 자를 통해 일으키시기 때문이다. 당신은 믿음의 영웅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은가? 아니면 십자가 앞에 엎드려 날마다 순간마다 깨어지기를 먼저 원하는가?

5/20/2009
(유타대학촌 교회 11/17/1996 주일 예배 설교를 보완 정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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