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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자기를 초월하는 것이다.

로마서 허태수 목사............... 조회 수 1705 추천 수 0 2012.02.03 23: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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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7:14~25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사랑은 자기를 초월하는 것이다.
롬7:14~25
2009.3.29 설교

고린도전서 13장을 설교 한 이후로 계속 [사랑]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정설이 없는 어려운 얘기입니다. 그러나 바른 이해를 돋우기 위해 몇 가지를 정리하면서 넘어가겠습니다.  

첫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라는 인간의 고뇌가 '예수를 믿기 전의 상태냐 아니면 예수를 믿은 후의 고뇌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예수 믿기 이전에만 그런 게 아니라 믿고 난 다음에도 이런 고민과 갈등은 이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말은 예수를 믿기 전이냐 후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상태에서 발생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둘째로, 이 고백이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만이 이런 고통을 느끼는 것이고 '우리는 아니다'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럴 수 있나요? 과거의 바울 뿐만 아니라 현재의 나에게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것을 해석하는 데는 지금까지 두 가지 전통적인 해석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것이 고대 희랍의 전통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선과 악 둘 중에서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실제로는 선을 행하려고 해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적 고뇌를 갖는 게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메타몰포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욕망이, 또 한편으로는 이성이 나를 설득한다. 나는 더 좋은 것, 그것을 시인한다. 그러나 나는 더 나쁜 것을 행한다. 묘하게도 나는 분명하게 이성적으로는 좋은 것이 이것임을 아는데 내 행동은 결과적으로는 이성에 반하는 나쁜 것을 행한다. 그래서 내 안의 모순이 생기고 이것 때문에 나는 괴롭다." 다른 하나의 전통은 쿰란전통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말하길 "나는 악한 인류와 죄 짓는 육신의 공동체에 속했다. 그런 고로 나는 괴롭다." 나는 괜찮은데 육체와 세상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틈바구니에서 내가 고통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걸까요? 그것은 본문 15절부터 나와 있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하게 되지 않고 오히려 안 해야 할 일을 하게 된다' 이게 문제입니다. '하고 싶지도 않은데 하게 되는 것'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말이 16절 전 반절, 18절 마지막, 19절, 20절 전반에, 심포니의 주 멜로디처럼 바리에이션을 가지고 반복되어 나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하게 되지 않고 오히려 원하지 않는 것을 하게 되는 이 고뇌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이것이 주제입니다.

세계 일 차 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인생을 낙관하고 살았습니다. 인간을 무한한 가능성으로 보고 우리 자신의 지식과 우리의 기술이 점점 발전이 되어 가면 인간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게 낙관주의입니다. 그런데 세계 1차 대전을 통해서 그만 그 생각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바벨탑을 쌓아서 하늘에 닿을 것 같은 생각을 가졌었는데, 전쟁으로 인간이 쌓아올린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모두 잿더미로 없어진 것을 경험하고부터 그런 생각을 싹 지우고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의 철학자들이 키에르케고르, 파스칼, 토스토예프스키 같은 인물들입니다. 카프카의 '성(Castle)'도 그런 인간의 고뇌를 그린 소설이지요. 내가 큰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밖에서 빙빙 돌고 있는, 그야말로 내 주제 속에도 못 들어가고 내가 주체도 못된 채 손님같이, 내쫓긴 녀석처럼, 내 일에 주체가 못되고 밖에 도는 나, 그것을 그들이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까뮈나 사르트르나 그런 인물들이 문학적으로 이 자기 안에 갈등과 한계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걸 실존주의 라고도 합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내가 자연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뭔가로 부터 조종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언가 나를 끌고 다닌다고 여겼습니다. 오늘날은 돈이 사람을 끌고 다니는 확실한 갈등 원인이죠. 얼마 전에 자살한 여배우의 편지에도 그런 내용이 있더군요. '나는 로봇처럼 누군가의 조종을 받고 있다'고 말입니다. 강제된 삶이 그녀에게 큰 고통이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바울은 율법에 충실했습니다. 그대로 했습니다.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에 흠이 없도록 했습니다. 그는 마침내는 그 강제된 금단에 반항하는 자기를 발견합니다. 반항하는 그게 나쁘다 좋다는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강제된 데 대해서 분해하고 반항하는, 분화된 자기, 이율배반의 자기를 발견한 겁니다.

무엇이든지 억지로 하게 되면 그것에 반발하는 또 하나의 법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것, 자기에게서 발견된 다른 하나의 법, 강제로 살았더니 생겨난 그 법에 대해서 얘기하는 겁니다.
선악과 얘기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 질문하는 것이지만, 왜 하나님이 하필 선악과를 만들어 동산 가운데 딱 세워놓고, 이걸 먹으면 죽는다고 먹지 말라고 했습니까? 안 만들어 놓으면 괜찮은데 만들어 놓고 먹지 말라고 그랬습니까?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다른 확연한 특징을 여기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먹지 말라. 강제성이 있습니다. 먹으면 죽습니다. 그 말이 옳다고 전제해도 바로 그런 강제성 때문에 금단의 열매에 대해 매력을 느낍니다. 오히려 저항심이 생깁니다. 여기서 고뇌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뇌하는 아담의 얘기가 나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먹습니다. 그리고 죽음으로 들어갑니다. 소설 '실락원'은 바로 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구약 창세기의 선악과 이야기는 뭡니까? '강제는 사람을 고뇌하게 만든다' 또는 억지로 하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고뇌에 빠트린다'는 것입니다. 이 원초적인 경험 속에서 마침내 바울은 절규를 합니다(24절). "아아, 나는 괴로운 사람이다. 그러다 결국 나는 죽어버린다. 여기에 반항하면 나는 죽는다. 진리니까, 참이니까. 죽어가는 나를 누가 구원해 줄 것인가?" 이것은 아담의 절규이기도 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예수님의 비명에도 비길 수 있습니다. 아담=바울=예수의 고뇌는 이런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억지로 하는 일, 강제된 삶이 주는 분열에 대해서입니다. 그겁니다. 아하, 나는 괴로운 사람이다. 누가 나를 여기서 구해 줄 건가? 기본적으로 말하면 이겁니다. '누가 나를 사망에서 구해 줄 것인가' 한 다음에 24절과 25절 사이에는 커다란 무덤이 하나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십자가의 처형과 같은 무덤이 놓여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25절을 읽어야 됩니다. 누가 나를 구원해 주랴? 그 사이에 무덤이 있습니다. 죽었습니다. 대답이 없습니다. 거기에 대답이 연속 발전이 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한계는 거기까지입니다. 누가 나를 구해주랴? 내가? 아닙니다. 나는 거기서 끝입니다. 그런데 25절에서 갑자기, '나는 우리 주님께 감사하며 그리고 그와 더불어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합니다. 다른 표현으로 바울이 제일 많이 쓰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뜻입니까? 율법이 선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전달하지만 그 강제성에 견딜 수 없어 나는 반항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다시 강제 받지 않는 자율의 나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감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해지는 사랑'이 있다고 해요. 짐승도, 벌레도, 우리도, 어머니가 제 자식을 사랑하듯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사랑이 바로 '해지는 사랑'입니다. 이건 자연적이고 동물적인 사랑이죠. 그 다음 단계로 '해야 할 사랑'이 있다고 해요. 이것은 하기 싫어도 억지로 또는 강제로 해야 하는 겁니다. 저도 교회에서 자꾸 여러분에게 해야 할 것을 얘기하는데, 그때마다 이게 율법이 아닌가 하고 고민합니다. 그러고서는 또 여러분이 잘 호응해 주지 않으면 마음속에 서운함과 실망이 일어납니다. 그 때 저도 바울처럼 '오호라, 난 곤고하구나!' 하지요. 그 다음 세 번 째 단계는 '해야 할 사랑이 해지는 사랑'입니다. 제 마음에서 나온 거지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그 행위가 제 몸 밖으로 스스로 걸어서 나온 겁니다. 어떤 상태인가요? 억지로 하던 것이 자율적으로 되는 상태, 마치 어릴 때 이를 닦으려면 부모와 실랭이를 하지만 점차 제 스스로 그 필요성을 알아 이를 닦듯이, 이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타율적인 것을 자율적으로 결단하고, 내가 주체가 되는 것, 해야 할 것이 해지는 사랑, 그것이 '죽음을 극복 한 상태'입니다. 바울이 그런 표현을 많이 합니다. '내가 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한다' 나와 그리스도가 분별이 안 된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마는 거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보라, 나는 새로운 존재(New Being, New Creation)이다!'그럽니다.  새로운 존재란 다른 게 아닙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즐겨서 할 때 그 때 바로 '새로운 존재' 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사랑은 무엇이냐 하면 '억지로 하던 삶'에서 '스스로 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한 단계 끌어 올린다고 할까요? 자기를 초월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서의 여러 곳에서 무슨 일을 하던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라고 말하십니다. 뭔가에 붙들려 하기 싫은 그 마음을 벗어나라는 것이죠. 이것을 '자기초월'이라고 하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안에서 이런 '자기 초월'을 하자는 겁니다.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겁니다. 그 사람이 '진리로 자유'해 지는 겁니다. 우리는 이기적으로 생겨 먹었습니다. 우리 모두 구약의 가인입니다. 그래서 내 욕심 차리는 것 밖에 모르지만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사랑'즉, 이기적인 자기를 극복하고 자기를 초월해서 너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비약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다. 누가 나를 여기서 구해주랴?' 그러고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하고 소리 친 것은 자기 극복을 한, 자기 초월을 한 바울이 내지른 탄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기초월의 사건이 놀랍게도 교회 안에서 일어나지 않고 지금은 계속 교회 밖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긍정적이지 않고 부정적인 초월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여자 연예인의 자살은 왜 일어났습니까? 뭔가 강압적인 것이 그녀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 때문에 고뇌하고 절망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그런 자기 상황을 초월하려고 했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자유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선택했습니다. 그녀에게 그것은 '자살'입니다. 그 길밖엔 그 자신을 초월하여 벗어날 길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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