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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과 이혼

마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301 추천 수 0 2012.02.03 23: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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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5:31-32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기독교 신앙과 [이혼]
마5:31-32
2009.5.3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오늘날 우리네 '가정'이라고 하는 것이 예스럽지 않습니다. 다문화, 홀 부모, 재혼가정 등등 그 양태는 실로 다양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가정'의 문화를 이해하는 접근방식 또한 과거와 전혀 다릅니다. 저는 이제 한 달 동안 이처럼 다양해진 '가정'에 대한 기독교적 물음과 답을 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 '세 쌍 중에 한 쌍이 이혼 가정'이라는 현실에서 ‘이혼은 과연 죄인가?’라는 물음에 답하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본문은 '이혼불가'의 헌장인 줄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본래 마태복음의 그 본문에서 예수는 결코 새로운 이혼 법을 제정한 것도, 절대적으로 이혼을 죄악시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이혼 금지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니라는 것을 성서 본문에 대한 역사비판학적 해석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사실상 지금까지 교회 전통에서는 대부분 마태복음 19장 3-9절의 진술과 5장 31-32절을 해석하면서 예수는 '음행한 경우'는 이혼을 허락했지만, 원칙적으로 이혼을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일어나는 간음으로 규정하고 이혼을 금지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카톨릭 교회는 교리와 법으로 이혼을 간음죄에 해당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사회법으로까지 이혼 금지법을 제정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일들이 예수의 선포에 근거해 있을까요? 예수는 정말 이혼 자체를 간음으로 간주하며, 이혼금지법을 제정했을까요? 아니면, 성서는 근본적으로 '이혼' 자체를 죄악시하며 금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날 '이혼'에 대한 정의를 보면 '어느 쪽이든 한 배우자가 혼인에 관한 법률적인 관례를 해소하여 서로 갈라서는 것'을 의미하며, 현행 상으로는 협의 이혼과 재판상의 이혼이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에 '이혼'은 여자 편에서는 전혀 제기할 수 없었고, 오직 남편 쪽에서만 제기할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협의 이혼과 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남자가 자기 아내를 집에서 '내어보내고', '버리는 것'으로서의 이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잘 드러나듯이 당시 남자들은 여러 명의 아내와 첩을 둘 수 있었고, 그것은 전혀 죄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여자들은 단지 남자의 소유물과 성적 대상으로서만 존재할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일과 관련하여 말라기와 같은 예언자들은, 소싯적 아내를 '내어버리지 말라'고 명령합니다(말 2:13-16). 구약성서에서 '이혼'을 금하는 경우는 바로 이렇게 남자 쪽에서 일방적으로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일과 관련해서 나타나는데, 신명기 저자는 남편이 아내를 취하여 동침한 후 처녀가 아니라고 누명을 씌어서 내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신 22:13-19), 그리고 약혼하지 않은 처녀를 강간한 경우 그 여자를 내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명령합니다(신 22:28-29). 그러나 이와는 달리 구약성서에는 이혼에 대한 금지가 아니라, 도리어 이혼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강요하는 내용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언자 에스라는 이방여인을 아내로 삼은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합니다. "너희가 범죄 하여 이방 여자로 아내를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이제 너희 열조의 하느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 뜻대로 행하여 이 땅 족속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버리라."(스 10:10-11). 말하자면 여기에서 에스라는 종교상의 이유로 이스라엘 남자들이 아내로 취한 이방여자를 '내어버리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남자들은 이 명령과 법령을 시행하기 위해 이방여자와 결혼한 사람을 3개월 동안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 17명, 레위인 10명을 포함한 많은 이스라엘 남자들이 이방인 아내와 그 자식들까지 내어버렸습니다.

신약성서에서도 아내를 내어버리는 일은 결코 일방적으로 비난을 받는 요소나 금지된 행위가 아닙니다. 도리어 누가복음 18장 29절을 보면 남편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행위는 보상과 영생을 받는 조건입니다.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식을 버린 사람은 이 세상에서 여러 갑절로 보상을 받을 것이고, 또한 오는 세상에서 영생을 받을 것이다."

예수의 사후 그리스도교가 헬라 세계에 전파되면서, 신앙의 문제로 부부간에 많은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바울은 과감하게 이혼을 권유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믿지 않는 쪽에서 헤어지려고 하면, 헤어지게 하라"고 말하고, "이런 경우에는 얽매일 것이 없다"(고전 7:15)고 선언합니다. 물론 이 경우, 바울의 주된 관심은 독자적인 '이혼'의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어떻게 주 안에서 남자와 여자, 주인과 노예가 모두 '평화롭게' 살아갈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당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남편과 아내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배우자의 입장에서 그들이 헤어지기를 원하면 헤어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하느님이 모든 사람을 평화롭게 살게 하려고 부르셨다"(고전 7: 15)는 사실을 분명히 하면서, 남편과 아내가 이혼을 통해서라도 쌍방간에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이룩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서는 물론 예수의 경우도 오늘날과 같은 이혼에 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오늘날 일어나는 다양한 이혼 문제에 대해서 예수로부터 그 해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의 근거로 삼고 있는 마태복음 19: 3-9절과 5장 31-32절에 상응하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본문을 살펴보면 실제로 예수가 이혼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를 찾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각 복음서들은 그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면서, 전승된 예수의 말을 첨가, 삭제, 변형시키고 있기 때문이죠. 이것들을 표준새번역 성경전서(대한성서공회, 1993)에 의해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19장 3-9절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그를 시험하려고 물었다. "무엇이든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너희는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 하시기를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어야 한다' 하신 것을 아직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버리라고 명령하였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해 준 것이지, 본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음행한 까닭이 아닌데도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드는 사람은 간음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5:31-32절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는 사람은 그에게 이혼 증서를 써 주어라"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사람은, 누구나 그 여자를 간음하게 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간음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10:2-12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서, 예수를 시험하려고 물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가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그들은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완악함 때문에 이 계명을 써서 너희에게 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이 말씀을 두고 물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드는 남자는, 아내에게 간음하는 것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면, 간음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16:18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드는 남자는 간음하는 것이요,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남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우선 마태복음 5:31-32절에 상응하는 마가와 누가의 진술을 살펴보면, 누가는 가장 간단한 내용으로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남자'와, '버려진 여자에게 장가드는 남자'를 겨냥하여 그 둘을 모두 간음했다고 말합니다. 마가복음은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남자'를 문제 삼으면서, 그는 "아내에게 간음을 행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른 두 복음서에는 없는 내용을 보도하는데, 마태와 누가와는 달리 여자 쪽에서 먼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는' 것을 간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마가복음 기록 당시 헬라 여자들이 여자 쪽에서 먼저 남편을 버리거나 죽이기까지 하면서 다른 남자와 재혼하여 부와 권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을 문제 삼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마태복음은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라는 말을 첨부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마치 예수가 음행의 경우 아내를 버릴 수 있도록 허락한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이 말은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마가와 마태의 신학적 내용이 담긴 구절을 제외하고 본다면 실제로 이들 본문에서 예수가 관심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과 같은 이혼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유대 남자들이 이혼증서를 써 주고 마음대로 조건을 붙여 아내를 버리고 있던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9장 3-9절의 내용에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어요.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시험하면서 "무슨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는가?"하고 질문합니다. 이러한 물음은 당시 가부장적 유대사회에서 남성 위주로 일방적으로 자행되던 이혼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래 구약 신명기 법(신 24:1-2)에는 남자가 그 아내를 취하여 동침한 후에 마음대로 내어보내거나 학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조건을 달아 놓았습니다. 그것은 그녀에게 '수치 되는 일'이 발견되는 한에 있어서만 아내를 내어보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본래 이 '수치 되는 일'은 신명기에서는 여성의 성적 순결의 문제에만 관련되어 있었습니다(신22: 13-22). 신명기 저자는 아내를 취한 후 처녀가 아닌 경우 돌로 쳐죽이던 유대법을 완화시키고, 이혼장을 써 주어 내어보내는 것으로 그 여인의 생명을 보호했습니다. 그리고 이혼장을 가진 여자는 다시 여러 번 재혼할 수 있도록 법으로 그녀의 인권을 보호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당시 유대교의 힐렐파와 샴마이파는 신명기에 기록된 '수치 되는 일'을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했습니다. 샴마이파는 '간음'을 이혼의 사유로 규정하고, 힐렐파는 우리나라의 칠거지악보다 더 한 규정을 만들어서 아내가 요리를 할 줄 모른다거나 남편이 보기에 다른 여자보다 더 밉다든지 하면 이 모든 것을 아내가 "남편에게 수치 되는 일"을 저지른 것으로 간주하여 이혼증서를 써 주고 그 아내를 쫓아내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절에서 예수는 바로 이러한 유대 남자들의 불의를 문제 삼으면서, "창조주가 처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고, 남자는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으므로, 이제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니 하느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는 이 말을 통해 결혼 자체를 '하나님이 짝 지워주신 것으로서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는' 신성한 것임을 강조하려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하려고 "무엇이든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는가?"하고 묻는 그 물음 자체가 불의한 것임을 폭로하려는데 그 뜻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기에서 창세기의 두 가지 창조기사 중,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로부터 만들었다는 창조 기사를 인용하지 않고, "창조주가 처음부터 동등하게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는 창조기사를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제는 둘이 한 몸"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일방적으로 남편이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일을 금합니다. 누가 누구를 버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5장 31-32절의 진술이 들어있는 산상복음의 가르침은 형식상으로는 "옛 사람에게 말한바 너희는 ...라고 들었다. 그러나 나 자신은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법조문의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상 그 언어의 지향성은 법조문이 아니라 율법을 내세우면서 불의를 자행하던 유대 남자들의 그것을 폭로하며 고발하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이혼'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는 마태복음 5장 31-32절의 본문에서도 예수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마음대로 이유를 붙여 자기 아내를 내어버리고 있던 유대남자의 불의입니다. 이런 경우에 한하여 예수는 이혼을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마가의 경우는 달라진 사회 풍조 속에서, 남편만이 아니라 아내 쪽에서 먼저 부당하게 남편을 버리는 행위도 문제 삼고 있지요.

이혼의 문제와 관련하여 사람들이 가장 큰 관심을 보이는 것 중 하나는 적어도 배우자가 성적으로 음행을 저지르거나 간음을 했을 경우만은 예수도 이혼을 허락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5장 31-32절에서 예수가 '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사람'을 문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마가와 누가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이렇게 물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마태는 '음행'의 경우, 이혼의 조건이 된다고 보았단 말인가? 정말로 그는 이 본문을 통해 ‘이혼’을 말하고 있는 걸까요?  

그런데 우리말 번역에서 '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 혹은 '음행한 연고 없이'로 번역하고 있는 구절은 희랍어 원문은, '음행의 말도 없이', 혹은 '음행의 말 외에'라는 뜻입니다. 마태는 이 구절을 '음행한 경우' 에는 이혼을 해도 된다든지,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된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32절이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여기에서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다른 여자를 보고 욕심을 품고' (마 5:27-28), 음행하지도 않은 아내를 버리는 남자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별다른 상황 증거도 없이 남자가 일방적으로 ‘아내가 음행했다’고 지껄이며 아내를 버렸던 것입니다. 그런 남자들을 향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이야말로 간음한 자이며(마 5:28), 음행하지도 않은 아내를 버리는 남자야말로, '그 아내를 간음하게 하는' 불의한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역전입니다. 예수 당시 유대사회에서 음행이나 간음은 전적으로 여자들에게만 적용되었습니다. 남자들은 여러 명의 아내나 첩을 두어도 그것은 간음으로 간주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문제가 되는 때가 있는데, 그것은 다른 남자의 소유물로 간주되었던 여자, 즉 다른 남자와 약혼하거나 결혼한 여자를 취했을 때에는 간음죄로 간주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남자의 재산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처녀라는 징표가 없을 때나, 아무 죄도 없이 남편으로부터 의심을 사는 경우, 모두 음행과 간음을 한 것으로 간주되어 돌로 쳐죽임을 당하거나 의심의 법에 따라 독한 물을 먹고 결백을 검증 받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는 당시에 다른 여자를 취하기 위해 실제로는 아무 죄도 짓지 않은 자기 아내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 내어보냄으로써 그 아내로 하여금 '간음을 하도록 만드는' 남자들의 불의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마태의 이러한 진술은 마태복음이 기록되던 주후 90년 당시 유대사회에서의 여성의 비참했던 삶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여성들은 유대 전쟁 이후 로마의 지배와 유대사회의 가부장적 문화 전통 속에서 그 어느 계층의 사람들보다 더 극심한 고통과 차별을 받아왔습니다. 여성들은 전혀 인격적 주체가 될 수 없었고 단지 남성들의 재산과 성적 소유물일 뿐이었습니다. 그 여인들은 남편에 의해 하루아침에 버림을 받게 되면, 오늘날처럼 직장을 갖거나 자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여인들은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다른 남자를 찾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될 경우 유대교의 법률에 의해 '남편이 있는 여자가 재혼했다'는 이유로 간음한 여자로 취급받았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저자는 자신의 신학적 관점에 따라 당시 유대적 관점에서 '죄인'으로 규정하던 사람들에 대해 전혀 다른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가 볼 때, 사실상 유대인들에 의해 '죄인'으로 규정 당한 사람들은 실제로는 굶주림과 헐벗음에 허덕이며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야 할 사람으로서, 유대인들이 만들어 놓은 법 체제에서 '죄인'이라는 무거운 멍에를 지고 신음하는 사람들일 뿐이었습니다. 아니, 그가 볼 때 사실 그들은 '아무 죄도 없는 무죄한 사람'으로서, 유대인들이 만들어 놓은 법 체제 아래에서 가난 때문에 '걸려 넘어지게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가 볼 때 죄인은 사실상 하느님의 율법을 불법으로 이용해 힘없는 사람들을 멸시하고 차별하고 착취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걸려 넘어지게 한'(죄짓게 한)율법학자와 권력자들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는 마태복음 18장 6-9절에서 "작은 사람들 가운에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이야말로 죄가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손이나 발이 그 사람을 죄짓게 하거든 잘라 버리라'는 무서운 비유를 통해, 그들이 먼저 회개하고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죄짓게 만드는 요소를 철저히 없애라고 명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관점 아래 마태는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탐하여 재혼하는 남자들의 불의한 행동을 철저히 금하기 위해서 '여자를 보고 욕심을 품는 것'을 이미 '간음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리고 신명기법으로는 버림받은 여자가 재혼하는 것이 법으로 허락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는 '남자가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간음'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마태 역시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이혼' 행위 자체를 '간음'으로 규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또 그는 '음행'의 경우에도 이혼을 허락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마태복음에서 바울은 '버림받은 여자'와 '재혼하는 남자'를 문제 삼았지만, 실제로 이혼 당한 여자의 재혼 자체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거나, 재혼의 문제를 독자적으로 거론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 남자들의 불의를 폭로하며, 그들이야말로 힘없는 자들과 여자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불의를 저지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오늘날 이혼 문제와 관련하여 갈등하는 사람들이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답하기 위해 관련되는 성서 본문을 고찰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본문들은 사실상 이혼문제를 독자적인 주제로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이혼으로 인해 제기되는 많은 문제들에 대한 지침서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성서본문이 말하고 있는 내용을 근거로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이혼'한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며, 또한 그들이 부딪치고 있는 문제들을 어떻게 함께 풀어가야 할 것인지를 모색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이 문제를 조금 더 좁혀서, 어떤 이유로든지 이혼한 여자들(그들이 남편에 의해 부당하게 버림받았든지, 혹은 마가복음에서처럼 그녀들 스스로 먼저 남편을 버렸든지 간에)의 경우를 가지고 말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아무리 이혼의 사례가 늘어나고 있어도 여전히 이혼한 여성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곱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혼한 여자는 무언가 문제가 있는 여성으로, 혹은 가정과 자녀를 잘 돌보지 못한 덕이 없는 여성으로, 나아가서는 죄인으로까지 매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가 볼 때 결코 이혼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또 '이혼'은 '간음죄'에 해당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는 이혼했다는 이유만으로 이혼한 여자를 간음자로 못 박거나 정죄한 적이 없습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는 형장에서 간음죄의 죄명으로 끌려나와 돌로 쳐죽임을 당하려던 여자가 아니라, 여자를 죽이려고 둘러 쌓아있던 유대 남자들의 불의를 폭로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서를 통해 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예수가 실제로 이혼한 여자를 자신의 복음 사역의 동역자로 삼았으며, 그 여인들은 다른 어떤 제자보다 더 참되게 예수를 따르며 섬겼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은 결혼 여부를 알 수 없는 많은 '갈릴리의 여인들'이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까지 예수를 따라갔으며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고 보도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로 불리던 여인이 갈릴리에서 배와 종들을 가지고 있던 부유한 남편 세베대와 그의 집을 떠나서, 아들들과 함께 예수의 복음 사역의 길에 동행하며 예루살렘의 수난과 부활의 현장까지 예수를 섬기고 따랐다는 사실을 말합니다(마 20:20, 27:55-56, 막 1:20). 또 누가복음에 의하면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눅 8:3)라는 여인은, 예수가 성과 마을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 자기의 재산으로 예수와 일행을 섬기며 함께 동행합니다. 그리고 요안나도 예수의 무덤을 찾아가서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고 다른 사도들에게 예수 부활의 첫 소식을 전하는 여자들의 무리에 들어있습니다(눅 24: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 교회 전통에서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로 불리던 여인과 요안나는 성화 그림에서도 뒷 배경에 위치할 뿐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녀가 남편을 둔 주부이면서 가정과 남편을 떠나 예수를 따랐다는 것이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못내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세기에 한 여성 선교자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여 저술된 [바울과 테클라의 행전](Acts of Paul and Thecla)을 보면, 많은 헬라 여인들이 개종한 후 집을 떠나 복음 사역에 앞장섰으며, 특히 테클라는 바울에 의해 개종한 후 금욕의 맹세를 했기 때문에 약혼자와 가족에 의해 박해를 당하다가, 바울에 의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도록' 위임을 받고 집을 떠나 사도로서 맹렬히 활동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남편과 아내가 헤어지려고 하는 경우를 특별히 거론하면서, 믿지 않는 쪽에서 헤어지려고 하면 헤어지라고 과감하게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초기에 그리스도교 복음이 전파되면서, 신앙의 문제로 이혼을 당하거나 집에서 쫓겨난 여성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여자들 쪽에서 과감하게 남편과 가정을 뒤로하고, 복음 사역의 길로 나선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만일 그 여인들을 단지 가부장적인 규범과 가치관에 의해 판단한다면, 그 여인들은 모두 가정을 지키지 않은 부도덕한 여인들로 정죄를 받아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역사는 실제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으로 활동했던 저 여인들과, 가정과 자녀와 자신들의 목숨까지도 뒤로 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던 여성들에 의해 계승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오늘날과 같은 교회의 발전은 사실상 복음이 전파되던 초기부터 지금까지 자녀와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고 비난받으면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가정교회를 세우고, 교회의 주역으로 활동했던 여성들의 헌신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설교를 맺기 전에 한 가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게 있습니다. 나는 이 설교를 통해서 '이혼한 여성'을 무조건 옹호하거나 이혼을 권장하고 찬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려는 요점은 성서가 결코 이혼 자체를 간음으로 규정한 것도, 예수와 바울이 이혼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비난하고 정죄한 것도 아니며, 변할 수 없는 법칙으로 이혼 금지법을 제정한 것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가 바라는 바는 남편과 아내가 하나님의 동등한 창조물로서 '한 몸'을 이루어 진정으로 서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또한 바울이 원한 것도 남편과 아내가 주 안에서 참된 평화와 생명을 누리며 사는 일입니다. 그런데 만일 겉으로는 결혼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실제로는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고 싶어 한다면 그들은 헤어지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혼생활을 잘 유지한다고 자랑하는 사람일지라도 실제로는 진정한 사랑 없이, 돈과 체면 때문에 형식적인 부부 관계를 이루면서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예수는 그들이야말로 간음자와 죄인으로 규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마가복음으로부터, 오늘 우리 시대에서도 단지 결혼을 자신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간주했다가 그러한 기대가 어긋나면 일방적으로 하루아침에 미련 없이 상대방을 버리고 떠남으로써 제기되는 무분별한 이혼 사태에 대한 경고의 말도 듣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 이상 이혼했다는 이유만으로, 이혼한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선포하는 교회가 이런 저런 이유로 결혼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멸시하고 차별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도리어 교회는 지금까지 고통에 찬 삶을 보내면서 이혼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그들을 멸시하고 죄인처럼 냉대해온 죄를 고백하며, 성서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가르침으로 이혼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아픔과 눈물을 씻어주며 생명으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동등한 창조물로 이루어진 '한 몸'으로서 참된 사랑과 생명과 평화의 삶을 이루어갈 수 있도록, 모든 불의한 제도와 법과 교리를 고치는 일에 앞장서 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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