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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0:20-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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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워너비 재키]와 [살로메] -십자가를 따르는 치맛바람-
마20:20-28
2009.5.10
[세배데의 아들들의 어머니, 살로메]를 묵상 중에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이었고, 선박왕 오나시스의 부인이기도 했던 [제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를 무지무지하게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가정과 아이들을 위해 오나시스와 결별한 이야기, 마침내는 책을 만드는 출판인으로 일생을 끝마친 그녀의 삶을 통해 [세배데의 아들들의 어머니]를 볼 수 있었습니다. 모든 여자들이 재클린 처럼 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모든 여자들이 재클린처럼 '등대 같은 표정과 빛나는 지성, 상대를 기죽이지 않는 품격 있는 에티튜드를 겸비'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그리고는 재클린을 비난만 하고 있습니다. 마치 [세배데의 아들들의 어미]가 비난 받아 마땅한 여자인 줄 아는 것처럼 말이죠. 부득불 이번 주 설교도 길어서 파행을 자초 할 듯싶습니다. -[워너비 재키], 웅진 윙스-
자식들을 위한 '어머니들의 치맛바람'은 예나 오늘이나 다를바 없이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7-28절에 나오는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다니던 여인이었을까요? 아마도 우리말 개역 성경을 번역한 사람은 그렇게 생각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 역자는 본문에 나오는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를 격하시켜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로 지칭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도합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 20:20-21).
학자들은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가 예수께 와서 간청한 시간은 예수가 수난의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수난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던 바로 '그 때'(마 20:17-19)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때에 자기 아들들을 예수의 좌 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한 이 여인의 간청이 얼마나 세속적인 탐욕에 가득 찬 것이며, 잘못된 것인지에 관해 역설합니다 . 또 많은 설교자들은 예수가 이 여인의 간청을 묵살하고,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는 말로 여인을 꾸중한 것으로 취급해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로 지칭되는 이 여인은 어디에서 살던 누구인가요? 그녀는 어떻게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신이 수난 당할 것을 예언하는 그 순간에 갑자기 아들들을 데리고 나타나서 그런 간청을 한 것인가요? 실제로 그녀의 간청은 예수에 의해 한마디로 거절당하고, 그녀의 일생은 아들들을 위해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다니다가 예수로부터 꾸중들은 것으로 끝나고 말았는가요?
마태복음보다 훨씬 먼저 쓰여진 최초의 전승인 마가복음 에는 예수의 좌 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간청한 사람이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로 지칭되는 여인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인 '야고보와 요한'(막 10:35-45)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이 보도되기 전에, 마가복음에는 예수의 '수난 예고'와 관련하여 그 '제자들'의 행태가 상세히 보도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면서도 예수가 '인자'로서 아버지의 '일들'을 수행하고, 마지막으로는 '예루살렘에 가서 수난 당하고 십자가의 죽임 당해야 한다'는 것을 말할 때 이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가 이 사실을 제일 처음 '드러내놓고'제자들에게 말했을 때, 베드로는 예수를 따로 모시고 만류하다가 예수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막 8:33)하고 꾸중 받지요?
그 후, 예수가 수제자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만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 그 세 사람은 예수의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또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음성을 듣지만,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것을 말하자 "그 말씀이 무슨 뜻인가? 하고 서로 반문"할 뿐, 예수의 말을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막 9:2-13). 예수가 갈릴리에 가서 다시 '제자들'에게 '인자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알려주었을 때에도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했고 묻기조차 두려워했다"(막 9:32). 제자들은 그 일이 있은 직후 가버나움으로 가는 길에서 서로 "누가 더 높으냐?"는 문제로 다투다가 예수로부터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맨 마지막이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막 9:35)는 말로 꾸중을 듣습니다.
그 후, 예수는 수난의 현장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자신이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가서 이방 사람들의 손에 넘겨 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때 예수의 수제자에 속하는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가까이 가서 "주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도록 해 주십시오"(막 10:37)하고 요구합니다. 예수는 그들을 향해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모르는구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하고 반문합니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하고 말하자 예수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 편과 왼 편에 앉게 하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를 위해 마련되었든지 그들이 차지할 것이다"(막 10:40).
이렇게 볼 때 예수로부터 꾸중을 들은 것은 분명히 수제자를 자처하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위시한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베드로는 예수가 가야할 수난의 길을 만류하고, 제자들은 예수의 수난 예고를 들으면서도 서로 누가 높으냐는 문제로 다투었으며,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가 영광을 받을 때 그의 좌우편에 앉게 되기를 요구합니다. 이 야고보와 요한의 요청은 '제자들'모두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 것 일 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가 '다른 사람을 섬기며 목숨을 주기 위해 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단지 자신들이 받을 영광을 기대하면서 예수를 따라다녔을 뿐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마가복음의 전승을 받아들여 예수의 수난 예고와 관련한 본문들은 모두 보도합니다. 그런데 그는 마가복음이 강조하고 있는 제자들의 무지에 대한 구절을 변형하여 상당히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베드로는 마가복음에서처럼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을 만류하다가 꾸중 받기 전에, 예수를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함으로써 천국의 열쇠를 부여받습니다. 예수가 변화 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인자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 말했을 때 마가복음에서는 세 제자가 예수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 못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가 '엘리야가 이미 왔고 인자가 고난받을 것'을 말하자, "그 때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 깨달았다"(마 17:13)는 것으로 변형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길에서 "누가 높으냐"는 문제로 다투었다는 마가복음의 보도는 생략되고, 제자들이 예수에게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하고 질문하자 예수가 그 질문에 대해 마가복음과 동일한 답변을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결정적인 변형은 마지막 수난 예고와 관련하여 일어났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열 두 제자'를 "따로 불러서", 인자의 죽음과 부활 사건에 대해 말해 줍니다. 바로 "그 때에"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 수 없는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가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무언인가를 간청합니다. 예수는 그 여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하고 묻자, 그녀는 "저의 두 아들을 당신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오른 편에 하나는 주의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는 복수형으로 "너희는 자기 자신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라고 묻습니다.
학자들은 마태복음 기자가 마가복음의 전승을 받아들이면서 의도적으로 야고보와 요한 대신, 그들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간청한 것으로 변형시키고, 거기에 맞춰 몇 가지 점을 변형시켰다고 말 합니다 . 그들은 마태복음 기자가 이 과정에서 단지 인물만을 대체시키고, 마가복음의 사화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이 사화를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즉,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의 요청에 대해 예수가 그녀에게 대답하지 않고, 복수형으로 "너희가 무엇을 구하는지 모르고 있다"고 답한 것은 마가복음의 보도를 변형시키지 않고 그대로 연결한 데에서 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마태복음에서는 마가복음과 달리 야고보와 요한이 아니라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가 예수께 간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마가복음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열 제자'가 "두 형제에 대해 분개했다"고 보도합니다. 이와 같은 점을 근거로 우리는 마태복음 기자가 본래의 전승이 전하는 야고보와 요한 대신 그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위해 예수께 간청한 것으로 변형시켰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위와 같은 결론 앞에서 이제 우리는 다음 문제들에 직면하죠. 마태복음 기자는 왜 본래의 전승을 변형시켜 야고보와 요한 대신,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가 예수께 간청한 것으로 보도하는가? 이것은 마태복음 기자가 복음서를 쓴 시기인 주후 90-110년 경, 예수의 제자들이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활동하던 것을 염두에 두고 그 제자들의 입장을 난처하지 않게 하기 위해 전승을 변형시킨 것일까? 혹은 이미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 부활의 목격자인 여인들이 복음의 사역자로 활동하며 교회를 세우고 지도적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서 여성들의 치맛바람을 문제시하려는 것인가? 이것을 위해 마태복음 기자는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로 지칭되는 한 여인을 창작해 내고 있는가?
마태복음 기자가 언급하고 있는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는 실제의 인물입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야고보와 요한이 갈릴리 호숫가에서 그물을 깁고 있다가 예수의 부름을 받고, 그들의 아버지인 세베대와 삯군들을 배에 남겨두고 곧 예수를 따라갔다(막 1:19-20)고 보도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로 지칭되는 여인은 바로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입니다. 학자들은 마가복음 15장 40절에 근거해서 이 여인의 이름을 '살로메'라고 말하기도 하며, 요한복음 19장 25절에 나오는 예수의 이모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이 여인의 이름은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녀는 요한복음에 명시된 '글로바의 아내'나 누가복음에 나타난 '헤롯의 시종 구사의 아내 수산나' 처럼, 한 번도 어느 누구의 '아내'로 명시된 적도 없습니다. 그녀는 철저히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로만 존재합니다.
일부 다처제의 유대사회 에서 살던 그녀는 '세베대의 아내'로 불리 워질 수 없던 처지에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정말로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로 불리워질 정도로 오직 자식들에게 자신의 전 생애의 목표와 가치관을 걸고 살아가던 여인이었기 때문인가요? 그녀는 도대체 어떤 상황에서 살고 있던 여인이었을까요? 우선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로마의 통치 아래에서 동족인 남쪽 유대 사람들로부터도 멸시 당하던 지역인 갈릴리 지방에서 살고 있었으며, 갈릴리 호수 가에서 배를 가지고 있고 삯군을 부릴만한 처지에 있던 '세베대'의 '아들들'을 낳은 여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갈릴리에서 살고 있던 이 여인은 어떻게 예수와 그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현장에 나타나서 자기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의 좌 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청할까요?
누가복음 기자는 예수와 제자들이 도시와 마을로 두루 다니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복음을 전할 때 "막달라 마리아와 헤롯의 시종 구사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와 그 밖의 여러 다른 여인들이 그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다"(눅 8:1-3)고 증언합니다. 최초의 전승인 마가복음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임종할 때 "여인들이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그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 따르며 섬기던 여인들"(마4 15:41)이라고 밝힙니다. 또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을 때,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른 여인들이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그 여인들 가운데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있었다"(마 27:56)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로 불리 우던 여인은 예수가 갈릴리에서 사역하던 처음 시기부터 예수를 따르며 섬기다가, 지금, '갈릴리로부터 예수를 따라온 여인들' 속에 섞여서 예수와 그 제자들을 동행하고 있던 것이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7절에서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열 두 제자를 따로 불러서" 인자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말해주었다는 보도는 '열 두 제자' 외에 '갈릴리로부터 예수를 따른 여인들'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음을 암시해 줍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아들들을 위해 예수께 간청하는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는 갈릴리에서 그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아버지 세베대와 삯군들과 배를 버리고 예수를 따라나선 바로 그 때, 그녀 역시 고향과 남편과 집을 뒤로하고 아들들과 함께 예수를 따라 나선 여인임이 분명합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는 어찌되었건 그 고향과 남편과 집을 뒤로 하고 아들들과 함께 예수를 따르며, 예루살렘의 수난 현장에까지 올라간 여인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직전, 길에서 예수가 '열 두 제자'를 따로 불러서 자신이 당할 수난에 대해 얘기하던 바로 그 때, 이 여인은 다른 '열 제자'가 그녀에게 퍼부을 비난에 대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께 나아가 꿇어앉아 절하며, 그녀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예수의 좌 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녀는 아직 예수의 모든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와 함께 '수난의 잔을 마시는 것'이 주의 좌 우편에 앉게 되는 영광의 길임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서 영광을 받을 때에 우리를 하나는 주의 오른 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도록 해 주십시요"(막 10:37)하고 말하면서, '영광 받는' 문제를 생각하는 반면, 이 어머니는 "주의 나라에서"(마 20:21) 일어날 일을 생각하며, 아들들을 위해 간청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위해 자신의 온 몸을 내던지며, 그 자녀의 행복을 위해 끈질기게 예수에게 간청하는 여인들로 부각됩니다. 마태복음에서 귀신들린 딸을 가진 가나안 여인은 마가복음에서 보다 더 끈질긴 여인으로 증언되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큰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의 제자들을 괴롭히고, 두 번 씩 이나 예수에게 자신의 딸이 얼마나 고통당하는지에 관해 큰 소리로 호소하며 고쳐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녀는 예수가 "아이들이 먹을 떡을 집어 개에게 던져 주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을 때에도 모든 자존심을 내동댕이치고,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먹습니다"하고 말함으로써 마침내 예수로부터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는 칭찬까지 받고, 그 딸을 살려내죠(마 15:21-28).
이렇게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와 제자를 괴롭히며 간청한 가나안 여인을 칭찬한 예수가 아들들을 위해 간청하는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는 꾸짖고 말았을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예수는 "여인아, 너는 너의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이 여인을 꾸짖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복수형으로 묻고 있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너희는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예수가 '마시려는 잔'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는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수난의 잔'입니다.
예수는 처음 제자들을 부르면서부터 이 십자가의 길로 "나를 따라 오라"고 부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지금, 수난의 현장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단지 자기 자신의 영광과 자녀를 위해 간청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묻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고, 십자가의 길을 따라오려는가?" 예수의 물음에 대해 "마실 수 있습니다"하고 답변한 것은 예수께 간청했던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가 아니라 복수형으로 된 그들, 말하자면 야고보와 요한을 위시한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마실 수 있습니다"하고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그런데 예수가 십자가의 길을 갈 때, 예수를 따르겠다고 장담하던 야고보와 요한을 위시한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수난의 잔을 함께 마셨습니까? 복음서 기자들은 한 결 같이 제자들 중 어느 한 사람도 예수가 가는 십자가의 길을 따르지 않았다고 보도합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를 배반하여 팔아넘기고, 베드로는 세 번 씩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으며, 제자들 중 남아있던 한 사람마저 발가벗은 채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따라다니며 예수가 행하는 '일들'을 보았음에도 예수의 십자가의 수난 앞에서 모두 예수를 버리고 떠나 버렸습니다. 그들이 그때까지 예수를 따른 것은 예수를 통해 자신들의 열망이 이루어지고, 영광을 받으며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예수는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의 간청을 들은 후, 복수형으로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자기 자신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마 20:22)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는 '열 제자'가 듣고,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는 것을 보고 , 제자들을 불러서 말해준다. "이방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립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중에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한다." 또 예수는 자신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 물로 자기 목숨을 내어주러 왔다"(마 20:28)는 점을 밝히며, '참 제자'가 되려면 자신과 가족의 안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을 섬기며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오라고 요구합니다.
앞에서 밝힌 대로, 예수의 십자가의 수난 앞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위시하여 예수의 제자들은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도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자기 아들들을 위해 간청하다가 예수의 제자들과 함께, 예수가 알려주는 말을 듣고 있었던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태복음 기자는 27장 55-56절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도합니다.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이 보도에 근거해 보면,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는 아들들을 위해 간청한 후에도 계속해서 예수를 따라 다녔음이 분명합니다. 그녀는 예수의 남자 제자들이 모두 예수를 배반하고 부인하며 도망쳐 버린 상황에서, 그리고 자신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처음에는 따라가지 못한 십자가의 현장에까지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예수를 따라간 것입니다.
사실 복음서 기자들의 증언에 근거해 보면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는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인들' 중에 섞여서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으며(막 16:1, 마 28:8, 눅 23:55), 부활한 예수로부터 사도들에게 부활소식을 전하라는 사명을 부여받고(마 28:9-10), 이 소식을 사도들에게 전했음이 분명합니다 (마 28:11눅 24:10). 마태복음 기자는 이러한 사실을 증언하면서도 무덤을 찾아가서 부활한 예수를 만난 과정에서는 복수형으로 '여인들'이 그 일을 수행했다고 말할 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의 이름을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예수가 간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서 그 죽음을 지켜보았다는 점만은 분명하게 밝힙니다.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자로서, 유대사회의 가부장적 가치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던 마태복음 기자가 이 사실을 보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여자'와 '아이들'은 '사람'으로 간주되지도, 사람의 수에 들지도 않았습니다. 이러한 유대사회의 가부장적 가치관을 반영하듯이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가 굶주린 사천 명을 먹인 이야기를 보도하면서 여자와 아이를 숫자에 넣지 않고, "먹은 사람은 여인과 아이들 외에 남자가 사천 명이었다"(마 15:38)고 말합니다. 유대사회에서 '여자'는 한 인격체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아버지나 그 남편의 소유물로 존재했으며, 성적 대상으로 간주되었을 뿐입니다. 여인들이 대문 밖을 나가지 않는 것이 미덕으로 간주되었고, 부득불 여인들이 바깥출입을 해야 할 경우에는 면사포로 그 얼굴을 가려야 했습니다. 여인들은 율법을 배울 수도, 회당에 나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을 가르치거나 남자들에게 말을 붙인다는 것은 모두 금지 되었습니다 .
이러한 유대 사회에서 살았던 유대 남자인 마태복음 기자의 눈에 이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는 어떤 여인으로 비쳤을까요? 아마도 그가 전통적 유대사회의 가부장적 가치관에 고정되어 있다면, 아무리 예수를 따른다 할지라도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는 그렇게 내놓고 칭송할 여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라! 그녀는 가정과 남편을 버려둔 채 , 집밖으로 나돈 여자가 아닌가? 더욱이 그녀는 여자로서 예수의 남자 제자들과 함께 예수를 따르며, 갈릴리로부터 시작하여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과 마을을 두루 돌아다닌 여인이 아닌가요? 유대인과 로마가 공모하여 예수를 죽이고 그 제자들도 잡으려 한 무시무시한 그 때에도 그녀는 치마를 입은 여자의 몸으로 십자가의 처형 장소까지 따라가서 예수의 처형을 지켜본 여인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당시 가부장적 사고를 가진 유대 남자의 눈에 이 여인은 남편과 집을 내버려두고 나돌아 다니는 부도덕하고 '정신 나간 여인'으로 비취지 않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 기자는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로 지칭되는 여인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 된 '갈릴리로부터 예수를 따른 여인들'의 무리 속에 있었으며, 예수의 십자가를 따라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역사적 예수의 주변에는 예루살렘의 수난과 부활 현장에 이르기까지 '갈릴리로부터 예수를 따르며 섬긴 여인들'이 있었으며, 이 여인들에 대한 증언을 본래의 전승으로부터 전해 받은 마태복음 기자가 그것을 그대로 묵살해 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당시에 실제로 예수를 따른 여인들이 가부장적인 전통과 규범을 깨치고 나오며,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증언하는 제자로 활동함으로써 터져 나오는 새 역사의 위력을 눈으로 목격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만 이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비록 가부장적 사고를 가진 유대남자였지만 마태복음 기자는 "형제나 자매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자식이나 땅이나 집"(마 19:29)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며,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만이 참 제자가 된다는 예수의 말을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에 대한 증언을 통해 수난의 현장에서 남자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도망쳐 버렸으나 도리어 당시 사회에서 멸시 당하고 있던 '치마 입은 여인들'이 세상 적으로 집착하던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갔으며, 다른 사람을 섬기는 '참 제자직'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증언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가부장적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의 눈에 한낱 무모한 '치맛바람'을 일으키다가 예수로부터 꾸중들은 여인으로 취급당해 왔던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 여인은 본래 유대사회의 가부장적 사회 규범 속에서 단지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로만 존재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당시 민족의 수난의 역사 속에서, 갈릴리 사람들이 로마 뿐 아니라 동족으로부터도 멸시와 억압을 당하는 수난의 현장 속에서, 당시의 관습에 맹종하여 집 문 밖을 나가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면서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우고 물건처럼 집안에 앉아있던 유대여인도, 남편의 소유물과 성적 대상 이상의 취급을 받지 못하며 노예처럼 생활하던 '아내'의 자리에 안주해 있은 여인도 아닙니다. 또한 그녀는 끝까지 아들들만을 위해 예수께 간청하다가 '꾸중' 들은 채 생을 마친 여인도 아닙니다.
그녀는 그 엄청난 가부장적 사회에서 당시의 규범을 깨뜨리고 고향 갈릴리와 집과 남편을 뒤로하고 아들들과 함께 예수를 따라나섰으며, 예수와 제자들을 '섬김'으로서, 억압받는 자들을 구원하는 '복음'의 사역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가장 집착했던 그 아들들조차 십자가의 길 앞에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도망쳐 버린 그 순간에도 그녀는 아들들을 따라가는 대신 그녀 스스로 결단하여 끝까지, 고난 받는 자를 위하여 걸어간 예수의 십자가의 길을 따랐습니다. 이리하여 그녀는 예수와 함께 수난의 잔을 마신 '참 제자'가 되었으며, 예수가 약속한대로 '주의 나라에서 예수의 좌 우편에 앉게 된'장본인이 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이 점을 올바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의 십자가를 따라가서 지켜 본 여인들이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긴"(막 15:41) 여인들이라는 보도를 들으면서도, 여인들의 그 '섬김'이 예수가 말한 참된 제자직의 모범으로 제시된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의 남자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복음을 전하고, 여인들은 단지 예수와 제자들의 '시중을 들었다'는 식으로 번역하고 해석하면서18) 여인들의 '섬김'을 격하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을 멸시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예수의 제자로 자처하는 자들이 앞장서서 '높은 자리'를 탐내며, 누가 높으냐는 문제로 다투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의 증언에 입각하여 분명하게 말합니다. 민족의 수난과 고난의 현장에서, 자신이 받을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의 길을 따르며, 그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섬긴 여인,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로 불리우던 그 여인이야말로 예수를 따른 참 제자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데 복음서 기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로 지칭되던 이 여인의 행위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녀는 '갈릴리로부터 예수를 따른 여인들'의 한 사람으로서, 무덤을 찾아가서 부활한 예수를 만났으며, 예수로부터 직접 남자 제자들에게 부활 소식을 전하라는 사도직을 부여받고 그 일을 수행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십자가의 길을 배반하고 도망쳤던 예수의 남자 제자들이 돌이켜 수난의 현장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예수의 '부활'소식을 전하게 됨으로써, "모든 사람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은 나누며 서로를 섬기는"(행 2:43-47) 새 역사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킵니다 .
사도행전 기자는 이러한 과정을 자세히 보도해 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요한의 형 야고보가 헤롯의 칼에 맞아"(행 12:2) 예수의 제자들 가운 데 가장 먼저 순교했음을 언급합니다. 파피아스의 증언에 의하면 야고보의 동생인 요한도 초대교회 안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하다가 순교했다고 했습니다 . 이렇게 볼 때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가 예수께 와서 자신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예수의 좌 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간청한 것은 결국 성취된 것이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였던 여인이 자기의 아들들에 대한 집념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참 제자'가 되어, 자식들의 안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으로 전환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소식을 들으면서 이제 우리는 '여인들의 치맛바람'을 무조건 비난하면서 여인들에게 가부장적 가치관과 침묵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 사회에도 '세베대 아들들의 어머니'처럼 단지 자식들의 안일을 위한 '세속적 치맛바람'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민족의 수난과 고난의 현장에서 '십자가를 따르는 치맛바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멸시와 억압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섬김으로써 생명과 부활의 새 역사를 일으키고 있는 '치맛바람'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러한 여인들의 '치맛바람'이야말로 그 자녀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며, 비겁함과 침묵 속에서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헛된 탐욕에 집착하는 우리의 무지를 일깨워 십자가를 따르며 다른 사람을 섬기는 '참 제자'의 길로 안내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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