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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55: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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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http://www.whyjesusonly.com |
일기장의 최후 운명 (사55:6-9)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6-9)
성경 퀴즈 2제(題)
주일학교 시절로 돌아가는 마음으로 성경 퀴즈 하나를 내겠습니다. 베드로가 자기에게 잘못을 범한 자를 몇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또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는지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 용서하라고 했습니까?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고 했습니까? 정답은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 특별히 8,9절에서도 그와 비슷한 형식의 퀴즈를 낼 수 있습니다. 평소에 미처 모르고 지나쳤던 내용입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나, 일흔 번이나 일곱 번의 용서는 미묘한 차이는 있어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뜻입니다. 그러나 지금 내려는 퀴즈는 우리 신앙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밝히는 키가 됩니다. 역으로 말하면 신앙을 성숙시키는 최고의 비결입니다.
교회를 10-20년을 다녀도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하나님에 대한 불만사항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왜 이런 간단한 문제도 해결해주지 않느냐는 것 아닙니까? “제가 구역 예배와 교회 봉사에 성실하게 참여했으며, 새벽기도에도 개근하여 뜨겁게 기도했고, 이 불경기에도 힘에 부치도록 헌금하고 있는 것 하나님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로또 당첨되게 해달라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단지 생활비 걱정만 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하나님이 다 아시니 내일 일은 염려하지 말라고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그 세기와 빈도는 사람마다 차이는 있어도 이런 불만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본문은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보면 이해하기 더 쉽습니다. 8절 앞에 이유, 근거, 전제 등을 나타내는 접속사 for가 붙어 있습니다. 그럼 9절은 그 결과라는 뜻입니다.
이제 퀴즈를 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높아서 다릅니까? 달라서 높습니까? 설명을 다 듣고 나니 정답도 이미 나왔고 싱거운 듯합니까? 정답은 물론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기에 높으신 것입니다.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그 둘의 차이를 정확히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껏 우리 신앙의 모든 포커스는 오직 높으신 즉, 크신 하나님에게만 맞춰져 왔습니다. 현재 내가 처한 문제, 사건, 여건, 환난이 아무리 큰들 하나님보다는 결코 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크신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배워왔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키우고 비전을 높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 결과 크신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까? 앞서 말한 불만들이 사라졌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여전히 크신 하나님을 정말로 크게 믿었는데도 왜 아직도 이 꼴인지 더 곤혹스러워졌지 않습니까?
배은망덕한 술 맡은 관원
청년 요셉이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처를 강간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 안에서 바로의 술과 떡을 맡은 두 관원을 만나서 각자가 꾼 꿈을 해몽해주었습니다. 그의 해몽대로 떡 맡은 관원은 사형되고 술 맡은 관원은 복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관원이 그 은혜를 까마득하게 잊는 바람에 요셉은 계속 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요셉의 심정이 바로 우리와 같았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 제가 아무 죄 없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여호와를 아는 자답게 아무 불평 없이 성실하고 의롭게 행했더니 감옥의 사무를 맡았고 열심히 봉사했지 않습니까? 사실 이번 꿈 해몽 사건만 해도 하나님이 일으키신 일 아닙니까? 제 영적 분별력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지혜로 해몽할 수 있었음을 저는 압니다. 능치 못할 하나님이 큰일을 이뤄달라는 것도 아니고 이 억울한 사정 하나 못 들어 주십니까?”
만약 그 때에 요셉이 옥에서 풀려났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틀림없이 옳다구나 하면서 아버지 야곱과 형들이 있는 고향으로 바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어떻게 달랐습니까?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는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신실한 여호와의 백성 요셉을 우상 숭배하는 죄악의 이방 땅에서 기껏 총리나 시키는 것이 그분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의 뜻을 실현시킬 수단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요셉이 나중에 고백했듯이(창45:7,8) 7년 기근에서 부모형제의 목숨을 부지케 하려고 먼저 노예로 보내어 그런 고생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참 하나님 여호와를 아는 자라고는 야곱 일가 70명뿐이었는데 그들을 보존케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을 장차 이스라엘 12 지파의 선조로 세우려는 뜻이었습니다. 이상한 꿈 이야기 때문에 시기 질투하여 동생마저 죽이려 했던 그들을 서로 온전히 용서토록 하여서 하나님의 진정한 공동체 이스라엘로 바꾸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창살만 없다뿐이지 이방 땅에서 옥살이나 다름없는 어려움 속에 여러분을 두신 하나님의 우리와 다른 뜻은 과연 무엇입니까? 연단을 통해서 큰 믿음으로 인내하다 보면 하나님이 결국에는 큰 축복으로 인도하십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럼 여전히 우리보다 더 크신 하나님일 뿐입니다. 우리와 다른 하나님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연단의 중요성은 불신자들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사서도 한다고 합니다. 실패와 환난이 오히려 성공의 지름길일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들도 고난을 겪을수록 인격이 성숙해짐을 알기에 인내하고 연단하여 더 풍성한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다른 종교의 그것보다 크고 의로운 믿음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정확히 말하면 정반대의 믿음입니다. 우선 믿음의 출발이 정반대여야 하고 또 그래서 평생을 걸어가는 인생 여정이 반대일 수밖에 없습니다. 생을 마감할 때에 맺히는 열매도 전혀 다른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다른 생각과 길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떳떳하다는 뜻은?
불신자에게 “당신은 죄인입니다. 예수 믿어 구원을 얻으십시오.”라고 전도하면 대체로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완전 불신자 집안에서 33살에서야 예수를 믿은 저의 경우는 이랬습니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 내가 왜 죽을 죄인이냐? 최소한 뒤로 호박씨 까는 위선적인 너희 예수쟁이보다는 의롭다. 설령 죄인이라고 해도 착한 자를 천국 보내는 하나님이 공평하지, 예수만 믿었다고 구원을 주는 그런 불공정한 하나님은 추호도 믿을 생각이 없다.”
그러나 본문은 오히려 바로 그런 저를 위선자라고 선언합니다. 또 착한 자를 천국 보내는 하나님이야말로 오히려 가장 불공평한 하나님이자 가짜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다들 일기장을 써보신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데 모든 세대의 세상 모든 사람의 모든 일기장의 최후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전부 아궁이 땔감으로 사라집니다. 절대 손으로 찢어서 버리지 않습니다. 부엌에 쪼그려 앉아서 끝까지 재로 사그라질 때까지 혼자서만 지켜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내나 남편 몰래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MB라고 영어 이니셜로 적어놓은 한 조각이라도 남으면 큰일 나니까 아주 조심합니다. 아내나 남편이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주변 사람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주시고, 살아 역사하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과연 그 내용을 모를 리 있겠습니까? 그럼 하나님도 아니며 구원과도 전혀 상관이 없게 됩니다. 모든 자가 일기장을 태워 없앤다는 것은 자기 일생을 뒤돌아보면 스스로도 부끄럽다는 뜻입니다. 완전히 재가 되어 사라져야만 할 만큼 완전히 부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고도 어떻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다고 큰 소리 칠 수 있습니까? 그 말을 성경적 내용으로 바꾸면 “나는 감옥에 갈 죄만 빼고 나머지 모든 죄는 다 지었다.”일 뿐입니다.
삼 세 번과 일곱 번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느냐고 베드로가 물었을 때에 예수님의 대답은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서두에 냈던 퀴즈의 정답입니다. 그럼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것인데 구태여 그렇게 표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선 베드로의 눈높이에 맞춘 대답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삼 세 번만 용서해도 의인 소리 듣는데 하나님 아는 자로선 완전을 나타내는 숫자인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지 않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또 다른 완전 숫자인 열을 곱해서 일흔 번까지 용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두 배로 완전하게 용서하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베드로의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해준 것입니다.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된다는 것은 역으로 말해 8번째 잘못부터는 얼마든지 저주하면서 벌주거나 복수해도 된다는 뜻이 됩니다.
나아가 일곱 번이나 용서할 수 있는 큰 믿음을 가진 착한 자는 천국 가는 것이 마땅하지만, 여섯 번밖에 용서 못하는 나쁜 자들은 당연히 지옥가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스스로 자기가 그런 의인이라고 자랑한 꼴입니다. 착한 자가 천국 가려면 어떤 합격선이 있어야 하는데 용서에선 그 카트라인이 얼마인지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라는 것은 분명히 한 사람에게 범한 동일한 잘못에 해당됩니다. 같은 잘못을 일흔 번씩 반복했고 또 그런 잘못을 7 세트로 범해도 용서해주라는 것입니다.
알기 쉽게 말하면 마누라 지갑까지 훔쳐 도박판에 가있는 남편을 찾아내어 다시는 그런 짓 안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찢기를 되풀이하는 일을 70장이 되도록 용서해주라는 것입니다. 거기다 여자를 70명을 바꿔 가면서 바람을 피워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알코올중독, 마누라나 자식 폭행, 마약 등 7 세트의 잘못을 다 그렇게 용서해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과연 가능한 일입니까? 솔직히 삼 세 번 용서하기도 벅차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뜻은 너희 중에 어느 누구도 그렇게 용서할 수 없으면서 어째서 7번씩이나 용서하면 천국 보내고 6번밖에 못하면 지옥으로 보내는 하나님이야말로 공평하다고 큰소리치느냐고 되물은 것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나의 생각과 나의 길은 너희의 것과 다르다. 나는 절대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와 오라. 죄 중에 빠져 있어도 좋고, 예수가 밥 먹여주나 하면서 주먹을 휘두르며 나와 원수 사이가 되어 있어도 좋다. 일기장을 불태울 수 밖에 없는 너희의 체질이 얼마나 진토이며 그 심령이 얼마나 연약한지 잘 안다. 고달픈 삶과 상처 많은 인간관계로 인해 남몰래 흘리는 눈물을 내가 보았다. 또 죄악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신음 소리를 내가 들었다. 너희가 어떤 추악하고 치사하고 더러운 모습으로 있든지 간에 십자가 앞으로 오라. 진홍 같은 너희 죄를 양털 같이 희게 해주리라.”
용서의 참 의미
예수님이 우리더러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라고 권면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게 용서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뜻은 용서라는 단어의 뜻이라도 정확하게 알라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끝까지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최근 황혼 이혼이 유행이다시피 하는데 만약 어떤 부부가 50년 동안 금슬 좋게 살다가 51년째에 이혼하면 사랑한 것입니까 미워한 것입니까?
용서란 상대가 아무리 포악해도, 모든 잘못의 원인이 100% 상대에게 있고 자신에게 아무 잘못이 없어서 완전히 억울해 미치는 경우에도, 그래서 모든 손해를 당해 가진 것 다 빼앗겨도 원망을 전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원망만 않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찾아가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상대가 나보다 더 불쌍한 존재임을 깨닫기에 한없는 긍휼로 대해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남편이 각서를 수도 없이 찢어 없애도 꾹 참아주면 나중에는 어떤 생각이 듭니까? 오히려 너무 불쌍하고 초라하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시쳇말로 저 인간을 낳고도 시어머니는 미역국을 끓여 먹었을까 싶지 않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불쌍한 인간을 두고도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더 초라한 꼴 아닙니까?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의 도덕적 영적 실력이 사실은 그 정도 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영도 더 되는 천군천사로 로마 제국을 당장에 멸할 수 있었음에도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아무 말씀도 없이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삼 년간이나 동고동락하면서 가르친 수제자, 바로 이 용서의 가르침도 받은 베드로가, 자기는 일곱 번까지 용서할 수 있다고 큰 소리쳐놓고 막상 스승을 저주하면서까지 세 번이나 배반했지 않습니까? 그것도 배반할 것이라고 스승으로부터 미리 경고 받은 지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서 말입니다. 그런 형편에 베드로를 대신해 죽는 일 말고는 무슨 말을, 어떤 행동을 또 할 수 있겠습니까?
현실적으로도 주님이 당신의 사역에 대해 뭔가 해명을 하기 시작하면 그 자리에 있던 베드로부터 잡혀 죽었을 것입니다. 그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아무 말씀하지 않으셔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베드로 한 사람만 대신해서 죽었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당시에 가장 경건하고 의로운 자는 예수님의 제자 열두 명이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도망가고 배반했습니다. 그나마 베드로는 끝까지 따라갔기에 세상에서 최고로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대신했다면 주님은 분명 모든 인간의 죄책을 담당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6,7절에서 여호와를 만날 만할 때에, 가까이 계실 때에 찾으라고 합니다. 힘든 일이 생기면 기도하여서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라거나, 예수 믿으라고 전도를 받으면 바로 영접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이사야서는 40장부터 메시야가 수난의 종의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이 핵심주제로 본문도 주님의 초림에 비추어 해석해야 합니다.
“이제 곧 전혀 다른 하나님이 오신다. 그분의 구원에 대한 생각과 길은 우리의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긍휼히 여기시며 “널리 용서하시는” 그분께 돌아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스승을 세 번이나 배반하는 수제자라도, 십자가에 당신을 매단 자들마저 저들이 자기가 하는 짓이 무엇인지 모르므로 용서하실 만큼 널리 용서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아무 말씀도 않고 죽으셨다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용서 아니,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단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일기장의 내용만 아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반드시 불태워 없애야 하는 그 참담한 심정도 아시며, 심지어 일기를 쓰면서도 스스로도 자기 손이 부끄러워서 일기장에도 기록해 놓지 못하는 우리의 허물, 실패, 상처, 고난, 죄악, 눌림, 허망함, 갈급함까지 우리보다 더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신자 된 축복
신자 된 축복이 무엇입니까? 크신 하나님을 크게 믿어서 크게 형통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에는 그런 약속이 없습니다. 요셉의 경우만 해도 형통하다는 단어를 두 번 사용했는데 그가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있을 때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였습니다. 총리가 된 이후에는 형통이라는 말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용서라는 단어의 뜻도 모른 채 삼세 번 용서했으니 하늘을 우러러 부럽지 않다고 큰소리쳤고, 또 내심 네 번째 한 번만 더 잘못하면 당장에 크게 응징하고 말리라 벼르고 있었던 것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겨우 깨닫게 된 것이 바로 신자 된 참 축복입니다. 일곱 번이나 용서한 착한 자는 천국에 보내야 하고 여섯 번밖에 용서 못하는 악한 자는 지옥에 떨어트려야 하는 하나님이야말로 공평한 하나님이라고 목청 높였던 것이 얼마나 참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컬은 것이며 그분 앞에 큰 죄인지 알게 된 것뿐입니다.
그렇다고 제대로 용서할 수 있는 자가 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수십 년을 살을 맞대고 살았던 마누라가 돈 못 벌어 온다고 잔소리 조금 했다고 “그냥 콱! 이혼해버려.”라는 마음이 여전히 솟구칩니다. 그러나 예수를 몰랐을 때는 그 생각이 너무나 당연하고 내가 더 잘났기에 실제로 그렇게 하려고 법원의 절차까지 알아봤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생각이 솟구칠 때마다 내 속에 남아 있는 죄의 본성이 얼마나 치사하고 교묘하며 음흉하고 강력한지 철저하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며 십자가 앞에 눈물로 엎드리는 것만이 내 삶의 소망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없는 죄책감에 묶여서 그저 넘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27:10)는 말씀대로 주님이 먼저 손을 내미시고 붙들어 일으켜 주십니다. 성령이 내 영을 새롭게 씻으시고 또 충만케 해주시어 다시 일어서는 부흥을 반드시 맛보게 해주십니다. 주님께 진정으로 엎드릴 때에 그분은 단 한 번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용서의 의미도 모르면서 큰 믿음으로 큰 용서를 여러 번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온전한 용서를 단 한 번이라도 하는 것이 세상 사람은 모르는 신자만의 특권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죄를 열심히 짓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죄인이 아니라고 큰소리 쳤으니 실제로 위선자였습니다. 이제는 여전히 죄를 짓고 있지만 죄인이라고 자백하니 위선자가 아닙니다. 겨우 위선자 신분을 벗어난 것이 신자 된 축복이라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뒤로 호박씨 깐다고 흉을 보아도, 실제로 그런 일을 수시로 하고 있어도, 끝까지 있는 모습 그대로 용서하고 사랑해주시는 주님이 있기에 그분만으로 충분하다는 고백이 절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입은 것만이 가장 큰 축복이기에 세상의 어떤 것도 부럽지 않게 된 것입니다.
새가슴 밖에 안 되는 우리
하나님은 분명 크십니다. 인간으로선 결코 측량, 추측, 가정은커녕 상상도 못할 정도로 광대하십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크신 하나님을 정말로 크게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광대하신 하나님을 담아두기에는 우리 가슴이 너무나 작고 좁다는 것입니다.
주일 아침에 경건하게 예배드리러 나오는 중에도 평소에 전혀 별 볼일 없어서 상대도 않던 평신도가 감히 중직인 나를 아는 척도 안한다고 삐질 정도로 작습니다. 아예 제쳐 놓은 사람이 무시한다고 삐지면 그러는 자가 더 초라한 것 아닙니까? 교회에 하나님 보러 오지 사람 보러 오는 것은 아니라고 단단히 결심해 놓고는 그 가장 별 볼일 없는 사람 하나에 가려서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는 실력으로 어떻게 광대하신 하나님을 크게 볼 수 있겠습니까?
신구약 성경 전부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인간이 계속해서 큰 하나님만 찾고 또 찾다가 비참하게 실패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한 적이 없습니다. 끝까지 열심히 믿었습니다. 가나안 신들이 더 풍요를 갖다 주고, 전쟁도 더 잘 치는 것 같으니까 함께 믿은 것입니다. 이왕이면 큰 신들을 다 같이 믿어서 큰 믿음으로 크게 형통하자고 덤볐지만 결과는 참 하나님께서 성전 문까지 닫아버렸습니다.
베드로가 비록 너무나 비참한 실패로 결말났지만 끝까지 빌라도 법정에까지 따라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무엇보다 스승의 안위가 걱정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럴 리는 없지만, 예수님이 큰 권능으로 기적을 일으켜 로마를 물리쳐 주면 앞장서서 도와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을까요? 바로 이방 우상 죄악의 땅에서 비전을 키워서 기껏 총리나 하겠다는 심보이지 않습니까?
성경은 또 그런 인간에 비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고 설명했습니까? 당신의 긍휼은 다함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아니 실제로 그랬지 않습니까? 용서, 사랑만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긍휼, 자비, 은혜, 구원, 능력, 자유, 평강, 위로, 그 모든 단어들이 인간의 것으로 적용되면 삼 세 번도 과할지 몰라도, 그분에게는 절대로 수정, 가감, 포기, 취소가 없습니다. 말 그대로 영원토록 신실(faithful)하실 뿐입니다.
요셉을 하나님이 2년이나 더 감옥에 두신 또 다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지막에는, 본인으로선 언제 풀려나갈지 전혀 감을 못 잡은 상태이므로,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꿈마저 완전히 포기했을 것입니다. “이젠 감옥 안에서 평생을 썩어도 좋습니다. 가까이 계셔서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여호와 한 분으로 족합니다. 여호와만이 저의 만족, 행복, 안전, 구원, 평안, 위로, 기쁨입니다. 다른 어떤 것도 찾지도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라는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물론 끝까지 귀향을 포기하지 않고 간절히 기도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제 뜻대로 마옵시고 여호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는 고백은 나왔을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 나름대로 큰 믿음을 갖고 큰 하나님께 끈질기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배은망덕한 술 관원 한 사람에게 가려 하나님을 진짜로 크게 볼 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추가 2년간의 옥살이 동안에 하나님은 그의 눈에서 그 가리개를 벗겨 준 작업을 하셨던 것입니다.
신앙 성숙의 최고 비결
현재 여러분이 처해 있는 문제, 사건, 여건, 환난이 크신 하나님보다 더 클 수는 절대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사실을 즉, 하나님이 광대하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하는 자 아무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여러 분의 믿음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죄와 탐욕으로 오염된 기도를 하기에 큰 하나님을 못 보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이런 불경기를 잘 견뎌낼 수 있도록 일용할 양식만 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기도하기 전에 있는 죄, 없는 죄를 생각나는 대로 열심히 회개하지 않습니까?
정작 문제는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실 일이 전혀 없다.”는 진리에 우리 생각을 너무 고착시킨 것입니다. 그 진리를 너무 열렬히 믿어서 그 생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힘들어도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능치 못하시는 하나님이 이 작은 일도 해결 못해주시는지 의아심과 불만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 그 진리만 유일한 신앙상의 지침으로 붙들고 있기에 항상 그런 불만에서 벗어날 재간이 없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은 이런 작은 일 정도는 해결 못할 분이 절대로 아님을 너무나도 확실히 믿는 것입니다.
결국 크신 하나님만 바라보려다가 그 외의 여러 다른 면의 하나님은 전혀 보지 못하게 됩니다. 내 기도 제목을 큰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기도하여 응답 받고야 말겠다고 덤비는 것은 하나님을 그 기도 제목 안에 가두는 꼴입니다. 무엇이든 능치 못하실 일이 없는 하나님에게 오직 한 가지 가능성만, 그것도 내가 정해서 묶어 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가 부려 먹으려 드는 너무나 불경스런 짓입니다.
물론 그런다고 이미 구원 받은 우리가 다시 정죄 받을 염려는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진심은 그런 뜻이 아님을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든 동원하실 수 있는 수천, 수만의 다른 가능성을 우리 스스로 막는 너무나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럼 지금껏 해소하지 못한 신앙 상의 불만이 평생을 두고 우리를 떠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셨습니다. 지금도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분께 구태여 큰 믿음, 큰 비전을 들고 나갈 필요 없습니다. 물론 진정한 의미의 큰 믿음, 큰 비전은 필요합니다. 순전히 응답에만 초점을 맞추어 그분의 능력만 빌리려고 “으샤!, 으샤!” 하는 믿음은 큰 믿음이 결코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진리를 온전히 믿는 믿음만이 진정으로 큰 믿음입니다. 당신의 독생자까지 주신 하나님이 다른 모든 좋은 것을 은사로 주신다는 진리를 전혀 의심치 않는 믿음입니다. 십자가 안에 들어온 신자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것은 세상에 단 하나도 없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없는 애굽의 궁정에서 총리가 되어 평생을 사느니, 단 하루라도 예수 있는 감옥에서 죄수로 사는 것이 더 좋다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새벽기도마다 눈물의 감사와 함께 건성이 아니라 저절로 고백해야 합니다. 또 실제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 때에 비로소 정말로 광대하신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당신의 사이즈에 맞게끔 크게, 아니 평강과 자유가 더 풍성하고 아름답게 넘치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인생으로 바꿔 주실 것입니다.
7/22/2010
(7/18/2010 LA 아름다운 교회에서 주일 설교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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