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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들에게 나누어 준 아버지의 반지

디모데후 이경숙 교수............... 조회 수 2385 추천 수 0 2012.03.07 14:3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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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딤후2:22-26 
설교자 : 이경숙 교수 
참고 : 2012.2.12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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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세 아들에게 나누어 준 아버지의 반지

(디모데후서 2:22-26)

2012년 2월 12일 주일예배

이경숙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부)

 

한국 사회 도처에 국제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과 나란히 대학 사회에서도 국제화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 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국제화라고 하면 보통 우리나라 학생들이 제1세계 즉 미국이나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등으로 유학 혹은 교환학생으로 가거나 그쪽 학생들이 한국에 한두 학기 머물면서 수학하는 것을 의미했지만 요즘은 한국에 와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는 외국 학생들의 숫자로 국제화 지표를 삼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에 와서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대학생활을 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그 대학의 국제화 지표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학위를 위해 한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자 하는 학생들은 주로 아시아권의 학생들인데 이들은 k-pop에도 관심이 있지만 주로 1960년대 이후의 한국의 발전과 한국의 정치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을 유치하기 위해서 각 대학들은 한국학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시아의 학생들 중에는 이슬람권 학생들이 많아서 이화여대 같은 기독교 대학에서는 이들의 종교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유학 온 학생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거리낌 없이 종교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이슬람 기도실을 따로 마련해 주고 음식을 따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부엌을 마련해 달라는 것입니다. 학교로서는 국제화를 해야 하는 당위성과 국제화 지표를 관리해야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어서 이런 문제들을 그냥 무시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이런 요구들을 받아들이면 기독교 대학으로서의 이화여대의 정체성을 훼손하게 되고 또 기독교 전통을 잃게 된다는 동창들의 항의가 빗발쳐서 학교로서는 참으로 곤란한 처지에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과연 어떤 지혜가 필요할까요?

 

이런 문제를 생각하면서 평소에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에 관심이 많던 본인은 이제 기독교와 이슬람과의 관계 역시 정리해야 하는 단계가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이 쓴 "현자 나단"이라는 연극이 생각났습니다: 12세기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살라딘이라는 이슬람 왕이 유대인인 현자 나단에게 유대교와 이슬람 그리고 기독교 중에서 어느 종교가 가장 훌륭하며 참된 종교인가 하며 질문을 던집니다. 곤경에 처한 나단은 아주 절묘하게 곤경을 모면합니다. 나단은 직접 대답하지 않고 하나의 우화를 말함으로 간접적으로 대답한 것입니다. 옛날에 한 아버지가 아주 귀중하고 빛이 영롱하고 기막히게 아름다운 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반지를 존경하던 조상에게서 물려받았는데, 이 반지를 가지고 있는 자는 행동이 아름답고 고귀하여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신망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이 반지는 대대로 아들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착한 아들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세 아들은 모두 마음씨도 행동도 훌륭해서 아버지는 누구에게 반지를 물려줄 것인지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세 아들 중에서 누구에게 이 반지를 물려줄까를 고민하다가 세 아들에게 모두 “너에게 주겠다.” 하고 약속하고 말았습니다. 죽을 때가 가까워 온 이 아버지는 고민을 하다가 두 개의 복제 반지를 만들기로 하였습니다. 장인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만들어 온 두개의 반지가 진짜 반지와 너무나 똑같아서 아버지도 구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세 아들에게 각기 반지 하나씩 주고 세상을 뜨게 되었습니다. 세 아들은 서로 자기 반지가 진짜라고, 또 아버지가 자기에게 생전에 약속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모두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 개의 반지 중에 어느 것이 진짜인지는 아무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재판관에게 가지고 가서 심판을 부탁했는데 그 재판관은 아무리 보아도 어떤 반지가 진품인지 구별이 안 되니 지금은 결정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미래에 행동이 가장 아름답고 고귀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존경받는 아들의 반지가 진짜 반지일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이것이 현자 나단이 살라딘에게 고한 우화의 내용입니다.

 

누군가 정말 진짜 아버지의 반지를 끼고 있다면 그것은 그의 평화와 정의를 위한 행동에 의해서만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한 종교가 자신만이 참된 종교라고 말하면서 다른 종교를 헐뜯고 비방한다면 그 종교는 진짜 반지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일부 한국 기독교인들은 진짜 반지를 끼고 있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자기만 옳다고 이슬람을 공격하고 적으로 몰아 부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한국 개신교도들이 이슬람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적개심은 위험수위를 지나 매우 전투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기독교나 이슬람이나 모두 유대교처럼 유일신을 믿고 있고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진짜 반지를 낀 참된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레싱이 말한 것과 같이 누가 진짜 아버지의 반지를 물려받았는지는 미래에야 결론이 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고 존경하고 칭찬하는 종교가 바로 하나님의 진짜 반지를 낀 아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기독교가 이 점을 깨닫고, 서로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자신의 행동에 주의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받도록 노력하는 여유를 되찾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기독교인들은 어떤 특수성을 지닙니까?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슬람이나 유대교에서 예수는 위대한 예언자 즉 인간이지 신성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라는 타이틀 즉 칭호는 알다시피 히브리어 메시아에서 유래된 헬라어입니다. ‘메시아’는 ‘기름 바르다’라는 뜻을 가진 말에서 파생되었습니다. 본래 ‘기름부음’은 야훼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 아래 있는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 행해진 의식이었습니다. 따라서 수동형으로 야훼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칭호는 주로 왕이나 제사장을 지칭하는 칭호로서, 야훼는 이러한 의식을 통해 미래의 왕을 자신의 보호 아래 둠으로써 그를 성별하고 동시에 그에게 왕의 직무를 위임하였습니다.

 

메시아 대망은 구약성서 예언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정치적 상황이 어려울 때 미래의 이상적 통치자에 관한 기대가 생겼고 이를 우리는 ‘메시아 대망’이라고 칭합니다. 미래의 통치자에 대한 기대는 이사야서에 나타나는데 외세의 침입으로 어둠 속에서 살던 백성들이 해방되고, 그들에게 다윗 왕좌를 계승할 왕이 주어짐으로써 흔들리지 않는 왕국이 재건되고, 그 왕국에서 평화가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이러한 기대는 미래에 다윗왕국이 재건되고 그 안에서 평화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소박한 기대에서부터 출발하였습니다. 이때 다윗의 후손으로, 혹은 이새의 후손으로 왕이 된 메시아는 정의의 통치자이며 야훼의 영을 받았고 세계는 물론 자연과 함께 우주적 평화와 통일을 이루며 종말적 통치자의 성격을 지니기도 합니다.(사 9장에서 11장으로 변화)

그러다가 조금 더 후기 나온 미가서에서는 이 미래의 왕이 “유다 족속 중에 지극히 작은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바뀝니다.(미가 5:2-6) 이는 예루살렘 중심의 왕권 사고와 거리를 두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그는 평화를 가져다 줄 뿐 아니라 스스로 “구원” 혹은 “평화”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는 정치적인 활동을 하며,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는 평강의 왕이며, 이스라엘을 앗수르의 손에서 건져낼 것입니다.

 

이렇게 예언서에 등장하는 메시아적 대망은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구언하고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통치자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가랴서 9:9-10에서 매우 새로운 메시아 상이 등장합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여기서 메시아는 왕에 대한 전통적 이미지를 받아들이면서 크게 변형시키고 있습니다. 미래의 통치자 메시아는 여전히 왕으로 불리고 있지만 보통 왕에게 부여된 모든 특징이 배제되고 있습니다. 그는 다른 왕들과는 달리 ‘온순’하고, ‘가난’해서 나귀를 탈 것입니다. 말은 전쟁의 동물이지만 나귀는 가난한 자들의 동물입니다. 메시아 자신이 ‘가난하고 겸손하고 낮은 자’입니다. 이러한 메시아 표상에 관하여 여러 가지 설명이 있지만 (제2이사야의 영향, 포로기 이후의 정치적 행동능력을 상실한 이스라엘의 상황 등으로) 아무튼 분명한 것은 무기력한, 겸손한, 낮은 자로서의 메시아 상이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메시아의 능력은 작아졌지만 대신 지평은 “땅 끝까지” 확대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으로 은사를 받아 왕으로 올 정의의 통치자 메시아가 크게 변형되어 낮고 겸손한 왕이 등장합니다. 낮은 자로서의 메시아 상이 시작된 것입니다. 한국의 민중 신학에서는 낮은 자로서의 메시아 상을 강조하면서 서남동에서 시작해 안병무, 김용복에 이르기까지 ‘민중 메시아론’을 탄생시키기도 하였습니다.

 

메시아사상은 더 후대의 다니엘서에 이르러서 묵시문학의 ‘인자’상과 결부가 되면서 전혀 다른 모습을 띄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세상의 통치자이기도 하지만 종말 이후의 통치자이기도 하고 동시에 선재적으로 태초부터 존재하였습니다. 이 천상의 존재가 종말에 활약을 시작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는 ‘인간의 모습을 닮은’(인자) 천상의 존재인 것입니다. 이들 메시아상은 모두 예수에게 집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초대 기독교인들에 의해 그리스도, 혹은 인자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었습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유대교와 이슬람과는 차별성을 갖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메시아사상은 구약성서 안에서 다양하게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의 과업은 언제나 일정합니다. 즉 ‘암흑 속에 살던 백성에게 해방과 평화와 기쁨을 선사하는 일’입니다.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약한 자를 해방하고 구원하는 일인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왕이나 통치자가 무조건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고통과 억압에서 해방시킨 자가 메시아가 된 것입니다. 유대교에서 메시아의 구원과 해방은 언제나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과 구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메시아 예수의 해방과 구원은 민족과 종족의 해방이 아닙니다. 고통 받고 신음하는 모든 인간의 해방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고 예수의 제자들이 된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고통과 어려움에 동참하고 이들을 억압하는 힘과 세력을 없애는 일에 앞장선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늘 어둠에 처한,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여야 합니다. 가난 때문에, 질병 때문에, 일자리가 없어서, 학원 폭력 때문에, 외로움 때문에, 이혼 문제로, 사회적 차별 때문에, 사회적 구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우리 이웃의 고통의 원인을 찾고 제거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새 가능성을 주어야 합니다. 고통과 억압에 처한 사람들 편에서 그들이 여기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 그리스도 되신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가 바로 부활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고백이 진정으로 실천될 때에만 기독교가 진짜 반지를 가진 종교로 인정받을 것입니다. 기독교를 통하여 힘과 권력을 얻고 세력을 가지겠다는 발상이나 이슬람을 추방해야 기독교가 힘을 가진다고 하는 발상은 매우 비기독교적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지고 낮은 자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부활하셔서 우리의 그리스도 되심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고 은총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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