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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2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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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572413 |
정용섭 목사
예수의 축귀 능력
마가복음 1:29-39, 주현절후 다섯째 주일, 2012년 2월5일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는 오순절 계통의 여의도순복음교회입니다. 일전에는 당회가 진행되는 중에 아무개 장로의 자해소동이 일어났던 교회입니다. 그 교회를 개척하셨고 지금은 원로 목사로 있는 조용기 목사는 자신의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도 중에 어떤 환자의 병이 낫는 게 환상으로 보이면 그 환자는 틀림없이 병이 낫는다고 합니다. 온누리교회 손 아무개 장로는 신유집회를 인도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기독교 신자들이 축귀와 치병에 큰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신기한 현상에 대한 호기심이 인간의 본능에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린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마술에 호기심을 보입니다. 복권도 사실은 비슷한 현상입니다. 일상에서 일어나기 힘든 일을 경험한다는 것은 매혹적인 일이다. 집회 현장에서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이 당장 일어나거나 암환자의 몸 안에서 암 덩어리를 꺼내는 장면은 아무리 믿기 힘들다고 해도 일단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이런 일들이 반복됩니다. 다른 하나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성경에도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해서 무조건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신앙적이지도 않습니다. 막 16:17,18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축귀, 방언, 뱀, 독, 치병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진술입니다. 이런 말씀을 사실적인 것으로 믿는다면 독을 마셔도 괜찮다는 말이 됩니다. 그건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축귀 등등의 이야기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생명의 주인 마가복음 1장에도 축귀와 치병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21-28절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낸 이야기입니다. 이어지는 오늘 설교 본문인 29-39절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열병이 걸린 시몬의 장모를 고친 이야기이고, 둘째는 예수님이 병든 사람과 귀신들린 사람을 고쳤다는 이야기이고, 셋째는 전도와 축귀에 대해서 제자들과 나눈 대화입니다. 그 다음의 40-45절에도 나병환자의 치유 사건이 나오고, 막 2:1-11절에는 중풍병자의 치유 사건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 앞뒤로 모든 이야기들이 축귀와 치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일련의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병을 고칠 수 있고, 귀신들림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고대인들은 무식해서 저런 식으로 말했을 뿐이지 예수님을 믿는 것과 축귀나 치병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생각인가요? 예수님은 정말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다 고치셨을까요? 이런 질문은 성경을 읽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논점은 이런 것과는 다른 데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겉과 속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성경 읽기의 어려운 점이기도 하고, 자칫 오해하기 쉬운 함정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데, 달을 안 보고 손가락만 본다면 오해하는 겁니다. 본문을 이해하려면 우선 축귀와 치병 자체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현상은 복음서에만 나오는 게 아닙니다. 거의 모든 종교에는 이런 현상이 있습니다. 수준이 낮은 종교일수록 이런 현상에 집착합니다. 일련정종, 속칭 남묘호랑개교는 주문을 외워서 병도 고치고 복도 불러오고, 재앙도 물리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종교행위는 나름으로 효과가 있습니다. 사람의 정신과 몸은 하나로 결합되어 있어서 어떤 정신을 품느냐에 따라서 몸의 상태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기도에 몰입하면 정신이 안정됩니다. 염불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나 염불을 통해서 정신이 안정되면 당연히 삶이 안정되고, 간접적으로 몸도 건강해지고 일들도 잘 풀리게 됩니다. 단전호흡이나 뇌 운동, 명상, 요가 등도 모두 이런 심리적인 효과를 불러옵니다. 기독교는 이런 종교 일반 현상을 본질로 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 때문에 교회에 다닌다면 그건 큰 착각입니다. 그래서 본회퍼는 기독교의 비종교화를 주장했습니다. 기독교는 일반적인 종교적 욕망과 차원이 다르다는 겁니다. 축귀와 치병 문제를 생각할 때 다음의 사실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서 몸과 마음의 건강을 얻는다고 해도 결국 생로병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다시 불치병에 걸립니다. 늙는다는 것은 불치병에 가까이 간다는 뜻입니다. 예외 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축귀와 치병은 우리 인생에서 일시적인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거기에 머물러 있다면 궁극적인 게 못됩니다. 물론 축귀와 치병을 위해서 기도하거나 건강한 삶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 땅에서 숨이 붙어 있는 한 가능한 건강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 노력도 필요합니다. 문제는 신앙의 중심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축귀와 치병, 또는 기복적인 현상에서 찾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변적인 것을 중심에 놓는다면 결국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 마치 세상의 삶을 돈 버는 것에만 찾으면 삶의 신비를 놓치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성경이 보도하고 있는 축귀와 치병이 말하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기자들이 전하고 싶은 근본은 무엇일까요? 축귀와 치병 이야기는 우리의 생명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고백을 가리킵니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고백을 상투적인 것으로 보면 곤란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기 생명을 자기의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기가 잘만하면 이 세상에서 멋지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큰 착각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혼자서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루의 삶을 조금만 돌아보십시오. 쌀과 배추를 비롯한 먹을거리가 없으면 우리는 다 죽습니다. 산소가 없어도 죽습니다. 인간이라는 종은 지구의 여러 생명체와 유기적으로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기 밖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기초적인 생명조차 유지할 수 없습니다. 생명은 우리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는 절대적인 세계라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생명은 신비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성서는 그 생명의 신비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만 생명여탈권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설명이 교리적으로만 들리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지금 당장 잘 먹고 잘 살고 건강하게 살다가 죽어서 천국 가는 게 신자들의 복된 삶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은 삶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차원에서 이해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것 같은 모양을 취하지만 실제 삶은 세속적입니다. 세속적인 일들이 교회에서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생명의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없고 경험도 없기 때문에, 즉 기독교의 본질도 모르고 생명의 신비로 모르기 때문에 세속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축귀 능력 오늘 본문에서 마가복음 기자가 말하고 싶은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생명 여탈권이 있다고, 인간 구원의 주도권은 예수님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시몬 장문의 열병을 치료한 것이나, 치병과 축귀 능력을 보이신 것은 모두 그 사실을 전하려는 것입니다. 39절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적으로 전합니다.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여기서 예수님의 사역은 두 가지로 요약되었습니다. 전도와 축귀입니다. 전도는 도를 전하는 것, 즉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것입니다. 루터는 전도를 가리켜 ‘설교’라고 번역했습니다. 전도나 설교나 모두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똑같은 말입니다. 축귀는 병든 마음과 몸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모든 병은 악한 귀신의 행위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축귀는 곧 치병과 똑같습니다. 마가복음 기자를 비롯해서 모든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즉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그 사실이 고대인들의 세계관인 축귀 사건으로 묘사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고대인들의 세계관을 그대로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이후로 더 이상 천동설에 머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화산폭발을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현현으로 볼 필요가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축귀 능력은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악한 영을 몰아내고 생명을 주신다는 그 사실만은 어떤 경우에도 유보될 수 없습니다. 그걸 포기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축귀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축귀 능력은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날까요? 대답을 찾으려면 먼저 오늘날 악한 귀신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고대인들이 경험한 귀신은 말 그대로 주술적인 어떤 현상을 가리킵니다. 지금도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무당의 신들림과 비슷합니다. 푸닥거리나 굿을 보신 적이 있나요? 접신을 한다고 합니다. 죽은 영혼을 불러내서 대화를 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심리는 겉으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무의식으로 깊어서 이상한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런 현상들이 종종 일어나기 때문에 신자들도 거기에 빠져들 때가 많습니다. 온누리교회 김하중 장로의 <하나님의 대사>는 장기 베스트셀러입니다. 김 장로는 기도 목록이 많다고 합니다. 기도할 때 손이 올라가는 항목을 응답을 받은 것이고, 손이 올라가지 않는 것은 응답이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팔이 아파서 더 간단한 방식으로 알려달라고 기도했더니 성령님이 기도할 때마다 가부를 정확하게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이건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점쟁이 일입니다. 이런 비슷한 정서가 한국교회에 팽배합니다. 귀신이 무엇일까요? 성서시대 사람들은 왜 귀신에 대해서 말할까요? 귀신은 말 그대로 성령과 반대되는 악한 영입니다. 성령이나 악령이나 똑같이 영이기 때문에 대단한 능력을 보입니다. 악령의 카리스마도 막강합니다. 그런 것만 보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전도관의 박태선 장로와 통일교의 문선명 선생도 카리스마가 강했습니다. 악한 영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생명을 파괴하는 영입니다. 평화를 파괴하는 영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힘이 무엇인지를 보십시오. 청소년들을 자살로 몰아가는 이 시대정신은 귀신입니다. 남북통일을 거부하는 힘은 귀신입니다. 생태계를 파괴하는 물질만능주의는 귀신입니다. 우리가 처리하기 힘든 존재론적 악령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 당시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악한 영이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삶을 파괴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귀신을 쫓아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죄와 죽음을 부활로 극복하신 예수님에 의해서 악한 세력은 이미 쫓겨났습니다. 축귀 신앙은 바로 이 사실을 증거 하는 것이며,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악한 귀신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굴복되었다는 복음서기자들의 증언을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때로는 인내하고 때로는 투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말고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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