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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9:8-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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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577078 |
정용섭 목사
하나님의 새 약속
창세기 9:8-17, 사순절 첫째 주일, 2012년 2월26일
대홍수 이야기 노아홍수 이야기는 창세기 6-9장에 나옵니다. 노아 시대에 대홍수가 발생해서 방주에 들어간 노아가족과 동물들만 살아남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대홍수를 일으킨 이유는 사람들의 죄가 너무 커서 그냥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노아 홍수 이야기는 기독교인들 사이에도 논란이 큽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노아 방주의 유적을 찾겠다는 생각으로 노아 방주가 닻을 내린 곳으로 추정되는 터키의 어느 지역에 유적 탐사를 떠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거꾸로 노아 홍수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영적인 교훈을 주기 위한 전승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홍수 이야기는 사실 성경만이 아니라 고대의 다른 문헌에도, 특히 유대교와 직간접적으로 깊이 연관되어 있는 바빌로니아 문헌에도 비슷한 사건이 나옵니다. 고대 문명은 모두 큰 강 연안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홍수와 관계된 이야기들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노아홍수 이야기를 읽다보면 궁금한 게 하나 둘이 아닙니다. 노아가족만 살아남고 나머지 모든 인류가 죽었다고 합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결혼지 얼마 되지 않은 신혼부부도, 태어난 지 얼마나 되지 않은 어린아이들도, 평생 장애로 살았던 사람도 모두 죄 때문에 죽어야만 했다는 말이 됩니다. 간혹 인도네시아의 쓰나미나 일본의 쓰나미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선포하는 목사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성경을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노아홍수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는 오해입니다. 물론 성서는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성서기자들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고대인들이 자연에 대해서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비가 왜 오는지, 태양이 왜 뜨는지, 전염병이 왜 오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장애나 난치병을 조상이나 본인의 죄라고 여기기도 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창세기 기자도 노아홍수를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만 보면 곤란합니다. 창세기 기자는 죄와 심판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근원적인 다른 것을 말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걸 놓치면 성서를 바로 못 보게 됩니다. 더 근원적인 것이 무얼까요? 노아홍수 이야기의 전체 구도를 일단 꼼꼼히 보십시오. 인류몰살에 대해서는 예상 외로 간략하게 묘사합니다.(창 7:21-24) 나머지 이야기는 노아가 방주를 짓는 일, 세상의 생물을 방주로 끌어들이는 일, 그리고 홍수가 물러가는 장면입니다.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게 기록합니다. 노아홍수 이야기의 초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 초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압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에서는 인간의 죄에 대한 이야기도 그 무게가 떨어집니다. 하나님의 구원 의지가 강력하게 묘사되었습니다. 노아홍수 이야기를 근거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한다면 성서의 중심을 놓치는 겁니다. 성서의 다른 대목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설교자는 지옥표상을 선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청중들을 위협합니다. 성서에 유황불이나 구더기라는 단어가 나오고, 영원한 고통이라는 단어도 나오지만 그것도 역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부각시키려는 것이지 청중들을 공포에 빠지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노아홍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 구원을 위해서 세심하게 신경 쓰신다는 사실을, 즉 하나님이 구원의 주도권을 행사하신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서기자들의 영적 통찰이었습니다.
‘내 언약’ 이 사실이 오늘 설교 본문인 창 9:8-17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홍수 사건이 어느 정도 정리된 다음에 하나님은 노아와 약속을 맺으십니다. 이 약속의 대상으로는 노아 가족만이 아니라 후손, 그리고 모든 짐승까지 포함됩니다. 이 대목에 ‘언약’이라는 단어가 우리말 성경으로 일곱 번이나 반복됩니다. ‘내’ 언약으로 나오기도 하고, ‘영원한’ 언약으로도 나옵니다. 구약은 기본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언약을 바탕으로 합니다. 구약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개념이 언약입니다. 노아와의 언약은 그 뒤로 나오는 아브라함과의 언약 및 모세와의 언약과 대비됩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와 맺으신 언약은 기본적으로 인격적입니다. 약속에 어떤 단서가 따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복을 받고 거스르면 벌을 받는다고 말입니다. 이에 반해서 노아와의 약속은 그런 단서가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약속을 맺으셨습니다. 노아는 죽은 듯이 아무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무조건적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노아홍수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들의 신학적 통찰이 놀랍습니다. 그들은 지금 인류몰살이라는 절체절명의 재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중입니다. 그런 경험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고대인들에게 아주 실질적이었습니다. 이런 경험은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인류 조상이 된 호모 에렉투스가 살던 200만전에 지구에는 빙하기가 왔었습니다. 그들은 먹을거리를 찾기가 점점 힘들게 되었습니다. 추위를 막기도 힘들었습니다. 노약자들이 먼저 죽어갔겠지요. 모든 종족이 전멸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운 좋게 그들은 생존했고, 그래서 인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지구에는 앞으로 빙하기는 또 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지구와 혜성의 충돌도 예상됩니다.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에 의해서 인류가 멸종될 수도 있습니다. 노아홍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이런 두려움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앞으로 결코 이런 대재난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세우신 영원한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영적 통찰은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합니다. 하나는 사람에 대한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관점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 약속은 인간에게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노아홍수 이야기의 시작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사람들이 얼마나 정의롭게 사느냐 하는 것을 기준으로 구원 여부를 결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아무도 구원받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바울 역시 로마서에서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죄에 물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율법이 있는 사람들은 율법으로, 율법이 없는 사람들은 율법 없이 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인간에게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옳다면 결국 구원은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실행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 약속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확신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은총을, 창조 보존의 은총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성서기자들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모든 구원의 기초로 봅니다. 사도신경의 첫머리도 역시 권능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예수의 부활도 역시 창조의 권능에서만 가능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은총은 인간의 윤리와 도덕성까지 넘어섭니다. 이에 근거해서 창세기 기자는 자연의 대재앙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앞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외칠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 기자의 이런 통찰이 옳을까요? 우리는 물론 옳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거기에 희망을 걸고 살아갑니다. 그 은총이 없다면 우리는 불안과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오늘 본문은 약속의 증거를 무지개라고 말합니다. 무지개라는 히브리어는 전쟁의 활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공중에 걸렸다는 사실은 더 이상 멸망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노아홍수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무지개와 같습니다. 어두운 이야기가 아니라 밝은 이야기입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약속에 대한 이야기니까요.
부활생명 이 이야기가 말하려는 핵심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구원하실 테니 걱정하지 말고 아무 생각 없이 즐겁게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 무책임, 폭력, 이기심을 가볍게 보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인간 멸망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고백이자 결단입니다. 노아홍수 전승의 역사적 배경은 바벨론 포로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대홍수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노아홍수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은 바벨론 제국의 악한 질서가 자신들을 멸망시키지 못할 것이며, 더 나가서 그런 질서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군사모험주의, 경제만능주의, 출세지향주의 등등..., 사람다운 삶을 파괴하는 온갖 악한 힘과 질서에 대한 거부입니다. 이게 쉽지 않습니다. 무엇이 악한 힘이며 질서인지를 분간하기도 힘듭니다. 겉모양만 보고는 분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을 노아홍수 사건과 연관해서 말씀드리면, 우리 영혼을 두렵게 하는 세력이 그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불이익이 오는 걸 가장 크게 두려워합니다. 자식들을 밤늦게까지 공부를 시키는 이유도 공부하지 않았다가는 나중에 불이익을 당할까 하는 겁니다. 건강과 노동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OECD 국가 중에서 대한민국 사람들의 노동 강도가 가장 강합니다. 목회자들이 뺑뺑이 돌듯이 목회를 하는 이유도 교회가 부흥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있습니다. 50년 전, 100년 전에 비해서 우리의 모든 삶의 조건이 좋아졌는데도, 그리고 대한민국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좋은 조건에서 사는데도 불구하고 모두 멸망의 두려움과 공포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두렵게 하는 힘이 악한 질서이고 세력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이런 데서 쉽게 벗어나는 게 아닙니다. 더구나 두려움의 실체를 분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두려움이지만 의식적인 차원에서는 달콤한 평안과 연민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영을 허락해달라고 기도하는 게 최선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영혼을 두렵게 하는 악한 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자기 소멸, 자기 멸망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노아시대에는 방주가 필요했습니다. 현대인들도 온갖 종류의 방주를 만들고 있습니다. 인생의 안전장치들입니다. 그것들은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궁극적인 대홍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우리를 지켜줄 수 없습니다. 궁극적인 대홍수는 죽음입니다. 아무리 방주를 튼튼하게 만들어도 죽음이라는 홍수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도 죽음에 대한 무의식이 우리의 온 영혼을 두렵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노아시대에 무지개로 증거를 보여주신 하나님이 새 약속의 증거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길입니다. 더 이상 대홍수가 없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죄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자기가 소멸되는 것에 대해서, 현재의 삶이 단절되는 것에서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권능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새 약속이, 즉 부활 생명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새 약속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을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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