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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현리에 성묘하러 갔다가

마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068 추천 수 0 2012.03.08 21: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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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8:21-22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월현리에 성묘하러 갔다가
마18:21-22
2009.9.27


지난주 토요일에 저는 월현리에 다녀왔습니다. 동생들과 처음으로 조상들의 묘에 풀을 깎았습니다. 증조할아버지 묘를 제외하곤 잠들어 계신 모든 분들이 다 저의 생에 기억 속에 계신 분들입니다. 그 때 생각난 게 오늘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지을 경우 몇 번이나 용서해 주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이면 될까요?” 그러자 “일곱 번만 아니라 그렇게 일흔 번 씩이라도 해라.”고 예수님이 대답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용서는 무제한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요, 과연 그런 용서가 가능하기는 한가요?

창 34에 보면 야곱의 딸 디나가 이방인의 왕 세겜에게 강간을 당합니다. 디나가 이뻤던지 세겜이 야곱에게 찾아와 딸을 달라고 말하죠. 그러나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조건을 붙인 형제들에 의해 세겜과 성의 남자들을 모두 죽입니다. 할례를 받고 상처가 아물지 않았을 때죠.  

다윗의 아들 암논은 그의 이복누이 다말을 사랑하다가 상사병이 납니다. 그는 아픈 시늉을 하면서 다말에게 간병을 요구합니다. 그러다가 이복누이 다말을 욕보입니다. 그리고는 마음이 변해서 다말을 내 쫓습니다. 다말의 친오빠 압살롬이 암논을 암살합니다(삼하 13).

용서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아니 어렵다기보다는 오히려 원수를 갚는데 있어서 쾌감을 느낍니다. 그렇지 않다면야 영화를 만들기가 어렵겠죠.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용서를 다르게 해석합니다. 용서를 하지 않으면 자기가 병이 생긴다는 거죠. 그러니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고 너그럽게 봐줘야 한다는 겁니다. 마음에는 우러나지 않지만 그대로 살면 내가 손해니까 그렇게 하자는 것입니다. 일종의 심리요법으로서의 용서인 셈입니다.

이런 심리치료적인 용서에 꼭 따라다니는 신학적인 논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신 무한한 용서는 어떤 사회적인 의미에서의 용서를 말하는 게 아니라, 심리적, 도덕적, 내면적 차원의 용서라고 보는 겁니다. 이 때 용서는 사회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모두 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이루지는 겁니다. 형제, 부모, 가장 자기 앞길을 막는 사람, 그리고 맨 나중에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모든 번민으로부터 해방되는 경험을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용서라고 하면서 감격스러워 하곤 합니다. 그것이 용서의 중요한 차원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단지 마음의 차원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풀기 어렵습니다. 경제적인 손실을 입었다거나, 견해를 달리하는 집단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거나 할 때는 절대로 용서가 되지 않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런 싸움이 심해지면 둘 중 하나는 교회를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분쟁과 균열은 이래서 발생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용서에 대한 바른 해석과 이해가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마18:23-35에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첫 머리에는 무슨 용서의 비유라고 되어 있지 않고 ‘하늘나라는 이와 같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비유이지 용서의 비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용서 문제를 윤리나 도덕의 문제 또는 합리성의 문제로 다루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 문제’로 다루는 방식이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접근 방식입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이 세상에서 풀기 어려운 <용서>의 문제를 푸는 실마리가 시작됩니다.

이제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주인에게 수 조 원을 빚진 종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주인은 사람을 팔아서라도 빚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갚을 수 없게 되자 주인은 가엽게 여겨서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종이 집으로 돌아와서는 같이 일하는 동료에게 꿔간 몇 십 만원을 당장 갚으라고 했습니다. 동료는 며칠만 참아달라고 간청을 했지만 그는 듣지 않고 동료를 감옥에 쳐 넣었습니다. 다른 종들이 이 일을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말해 버렸습니다. 어떻게 되었겠어요? 그는 감옥에 당장 보내지게 되었습니다.

이 비유는,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형제나 자매를 용서하여 주지 않으면, 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라는 마태복음 기자의 적용문으로 끝납니다. 이 적용문에서 <용서>문제에 대한 초대교회의 해석 가운데 하나를 엿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커지면서 교우들 사이에 서로 반목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문제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의식하여 마태복음 기자는 강조점을 약간 수정합니다. 본래 이 비유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용서하여 주셨으니 여러분도 형제나 자매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긍정문입니다. 마태복음 6:12의 주기도문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이것을 ‘용서해 주어야~~~용서해 주신다’는 조건 명제로 바꿔 버렸습니다. 압력을 가하는 문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꼭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겨야 했다”입니다. 똑같이 불쌍히 여긴다는 말을 쓰고는 있지만, 왕이 종의 빚을 탕감해 준 것과 종이 동료의 빚을 탕감한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만 달란트는 2 조원이고 백 데나리온은 3백 만 원 정도입니다. 이렇게 말도 되지 않는 비유를 드는 것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나타난 구원의 크기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갈릴리의 사람들, 예수를 따르며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들, 창녀들 그리고 귀신 들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정죄에서 벗어났고, 세상 속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조건 없이 받아 주셨습니다. 그게 바로 2 조 원짜리 빚을 탕감 받은 것과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주인으로서는 이게 엄청 손해여요 아니어요? 손해도 이만저만이 아니죠. 그렇습니다. 여기 <용서>의 실마리가 시작되는 거예요. <용서>란 내가 이만큼 손해를 보는 일이예요. 그걸 말씀 하시는 거죠. 만약 자신의 삶을 구체적으로 개입시키지 않으면서 말로만 용서나 사죄를 남발하는 사람은 마치 컴퓨터프로그램을 복사해서 인심 쓰는 것과 똑 같습니다. 받아가는 사람은 고맙다고 하겠지만 주는 사람 입장에서는 손해날 게 없습니다. 자꾸 복사해서 주면 되니까 말입니다. 이건 용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컴퓨터에 항상 프로그램은 저장되어 있으니까요. 예수님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용서라는 게 마치 프로그램을 복사해서 나눠 주듯이 자신은 어떤 손해나 위험도 감수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시의 사람들의 죄를 사하는 일에는 큰 위험이 따랐습니다.  손해나는 일이었습니다.

중풍 병 환자 이야기는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친구들이 지붕을 뚫고 달아 내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말하십니다. “아들아,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그러자 율법학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이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나님 한 분 밖에는 누가 과연 죄를 사할 수 있는가?”(막2:5-7). 그렇게 반발했습니다. 병든 사람들을 영접하고 사죄를 선포한 행동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어야 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온갖 고난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용서는 이렇게 나의 손해를 수반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용서를 복사해 준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고난과, 목숨과 바꾼 것입니다. 그것은 만 달란트가 아니라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이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비유인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경험한 구원의 현실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현실에 참여한 사람에게 <용서>는 애쓰고 애써야 할 어떤 목표가 아닙니다. 의무가 아닙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의 기쁜 삶으로서의 결과입니다. 그들이 무조건 받아 들여졌기에 그들은 또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들이 그렇게 용서를 받았으니 다른 사람에게도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거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용서는 거절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핑계 댈 수 없는 것일 때 용서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잔인한 복수를 하는 영화 장면에서 쾌감을 느낍니다. 내 앞길을 가로막는, 나의 감정을 긁는 사람과 사건 앞에서 분노하는 죄인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우리를 좌절하게는 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도덕적인 노력으로는 극복 할 수 없는 문제일지라도, 당신의 목숨을 바쳐 가면서까지 온전히 우리를 받아준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서 용서가 여전히 쉬운 과제는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우리는, 겉으로는 형제를 용서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위장된 용서를 용서라고는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용서는, 남을 용서해야 건강에 좋다는 심리치료학이나, 용서는 마음의 문제라고 하는 내면주의의 논리가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온전히 내놓기까지 하면서 나를 받아들이고 용서한 예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자녀들이 부모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애정과 동시에 분노도 함께 자녀를 키웁니다. 어떤 경우에는 부모가 돌아가신 다음에도 여전히 생전의 부모를 용서하지 못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니 삶의 현장에서야 <용서>가 어떻게 실현 가능한 이야기겠어요. 그런데요,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묘의 풀을 깎고 난 다음에 어머니를 비롯해서 형제들의 옛날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용서>의 실마리가 풀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추석은 가족들이 서로가 서로를 풀어 받아들이는 관습적인 제의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조건이 없는 것입니다. 경중도 없습니다. 무조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용서>하는 사람의 무한한 손해를 전제로 가능합니다.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그랬듯이, 예수께서 그랬듯이 너희 형제들에게 이웃들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이치에 맞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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