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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복음

마가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003 추천 수 0 2012.03.08 21: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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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8:31-33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예수 복음
막8:31-33
2009.10.11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에 제자들을 불러 앉혀 놓고, 자신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엄청난 고난을 당한 다음에 죽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막8:31, 9:31, 10:33-34).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펄쩍 뛰었다고 합니다. 그를 비롯한 당시의 어느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었는지, 그 말을 듣자마자 그는 예수님을 꼭 붙들면서 항의를 했다고 합니다(8:33).

사실 말이 좋아서 항의지 이 단어의 뜻은 '비난하다' '꾸짖다'는 뜻입니다. 바로 다음 구절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꾸짖을 때 썼던 바로 그 단어입니다. 감히 제자가 스승을 꾸짖다니요? 그 정도로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를 비롯한 일행들에게 뜻밖의 일이라는 말입니다. 베드로뿐만이 아닙니다. 유대사람들의 상식으로도 메시야가 고난을 받는 다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메시야는 종말의 때에 구름을 타고 와서 현세의 권력자들을 권좌에서 끌어 내리고  심판하는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당시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도 신이란 어떤 움직임이나 격정도 없는 존재로 묘사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길, 신이란 자기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존재들을 움직이게 하는 '제1 운동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신이 어떻게 감정이나, 열정, 또는 충동을 가질 수 있겠어요? 더욱이 어떻게 신이 고난을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복음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즉 신을 설명하는데 기존의 신 이해를 무시하고 있었어요. 배고프고, 목마르고, 피곤하고, 고통을 받고,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고, 조롱도 당하고, 사랑도 하고, 분노도 하는 신으로 예수를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이러니 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이겠어요. 오죽하면, 초기의 교부들도 예수의 고난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나름대로 절충점을 찾곤 했습니다. 이를테면, 그리스도는 실제로 음식을 소화하고 배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잠시, 아주 잠깐 동안 인간의 몸을 입고 와서 고난을 받은 것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자꾸 눈을 감으려고 하고, 영광의 그리스도, 높임을 받은 그리스도만 바라보려고 하는 태도는 오늘날에도 믿는 사람들 속에 퍼져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궁상맞은 일, 피하면 피할수록 좋은 일로 여깁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말하고는 있지요. 그러나 그것은 '내'고난이 아니라 '남의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그저 내 죄를 없애주는 기능으로만 있을 뿐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아주 적극적으로 고난에 대해서 무감각해지는 비법을 터득하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대 헬레니즘의 스토아 철학자들의 생각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올바른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감각도 격정도 없는 신의 이해를 바탕으로 윤리를 만들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감각이나 격정이 없는 신의 성품을 타고 태어났으므로, 인간에게서 가장 옳은 것이란 모든 격정이나 열정으로부터 벗어나서 마음의 평정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그들은 '아파데이아'라고 했습니다. 이 경지는 '고난 따위에는 무관심한 상태'를 의미 합니다. 아주 무서운 경지입니다. 영어로 무관심이라는 단어가 apathy입니다. 거기서 '아파데이아'가 나온 겁니다. 무관심의 반대어는 '동정'이죠. 이건 '함께 아파한다'는 뜻입니다. 즉 아파데이아의 경지는 누구하고도 아파할 필요 없는, 무관심한 경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관심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들은 자신이나 타인의 고난에 대해서 아무런 느낌도 갖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고난을 벗어나 있으려 하고, 무관심으로 돌아가려고 하면서, 자신의 일만 걱정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광의 그리스도는 알아도 고난 받는 메시아는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베드로의 그 황당한 발언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그를 꾸짖었다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이나 인간의 사상에 반하는 생각과 행동이 예수에게 있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믿는 [예수의 복음]인 것입니다.

33절에서 그런 생각을 갖고 사는 베드로를 꾸짖습니다. 그리고 34절에서 베드로와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 오라'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겠죠? 사람들이 제멋대로 지껄이는 자기 멋대로의 편리로서의 '부인'이 아니고 바로 이런 시대의 윤리적인 정신을 버릴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를 일컬어 '나는 마른 막대기보다 못합니다'하라는 게 아니에요. 자기를 가치 없게 여기거나 멸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만을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의 고난에 대해서 무감각증에 빠지는 무관심의 삶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큰 뜻 앞에서 자기를 굴복 시키라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삶은 막14:36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지만,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에서 이 '자기'라는 단어를 그릇되게 해석을 합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내면의 문제에 매달리라는 말인 줄 알아요. 그들은 자녀들이 속을 썩이거나, 남편이나 아내가 문제를 일으키면, 집안 일이 잘 안되거나, 사업이 신통치 않으면, 늘 자기 십자가가 무겁다고 한탄을 합니다.  나아가 무슨 하기 싫은 일을 서로 미루다가 억지로 떠맡을 때, '제가 십자가를 지죠'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하기 싫은 일을 마지못해 할 때나, 개인적인 불행을 견디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죠? 이럴 때 그 의미는 흔히 우리 관습에서 쓴 '業'이라는 말의 의미와 다를 게 없습니다.

이런 사고의 틀을 갖고 있으면 모든 고난은 하나님의 형벌이 됩니다. 모든 고난은 하나님이 하시는 시험이고, 교육이거나, 또는 우리 영혼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경우에서처럼,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불합리한 요구를 하시는 무서운 존재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교적 매커니즘이란 이런 하나님의 불합리성에 대해서 어떤 이의나 항의를 할 수 없게 만들지 못하고 그저 [순종]하게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신앙이라고 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좋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랬다고 합시다.
그러나 고난을 이렇게 이해 할 때, 우리가 고난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지는 뻔합니다. 그것은 나의 고난인 경우 참고 참아야 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고난인 경우에는 무관심 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수없이 많다고 해도 세상은 한 뼘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해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제 목숨을 구할 것이다"(막835).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의 초대교회 상황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나옵니다(마16:25, 눅9:24). 셋을 비교해 보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나를 위하여'가 마가복음에서는 '나와 복음을 위하여'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복음을 위하여 라는 말이 실제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마가 기자의 말이며 나아가 초대교회의 해석임을 알게 해줍니다. 그 말 한마디에서, 초대교회의 예수의 수난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라든지, 남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런 결정에 대해 순종해야 한다는 식으로, 새디즘적, 매저키즘적인 해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대신에, 그들은 예수의 죽음에서 아주 적극적인 의미를 찾아내고 있습니다. 예수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제부터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그들을 사랑하되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한 예수를 위해서 살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를 위해서 죽기까지 산다는 것은 뭡니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예수를 애도하거나 그것에 대한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산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가난한 사람에게 전해진 소식이며, 포로 된 사람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에게 다시 보게 함을, 억눌린 사람을 해방하여 주의 은혜를 선포하는 것”입니다(눅4:18). 이 한 구절에 예수의 삶과 죽음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일이 무엇이며, 복음을 위해 사는 것이 어떤 것인 줄 알게 해 줍니다.

이것이 [예수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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