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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고후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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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네 얼굴 지금 환 하냐?
고후4:6
2009.11.15
경주 박물관에 있다는 신라시대의 '웃는 얼굴 기와'를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이동찬이라는 시인은 그걸 보고 이런 시를 적었습니다.
옛 신라 사람들은
웃는 기와로 집을 짓고
웃는 집에서 살았나 봅니다.
기와 하나가
처마 밑으로 떨어져
얼굴 한 쪽이
금가고 깨졌지만
웃음은 깨지지 않고
나뭇잎 뒤에 숨은
초생달처럼 웃고 있습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한번 웃어주면
천년을 가는
그런 웃음을 남기고 싶어
웃는 기와 흉내를 내봅니다.
200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바람에 낙엽이 이리저리 굴러다닙니다. 제법 묵직하게만 느껴지던 '생명'이라는 단어도 가을 바람 앞에서는 그만 가벼운 낙엽이 됩니다. 바람이 생각을 키웁니다. 이렇게 낙엽처럼 흩날리는 생명체가 '빛'으로 산다는 게 뭘까? 그러는데, 예배당 2층 서고에 꽂힌 '와당에 새겨진 역사'라는 책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는 동강난 반쪽짜리 '웃는 기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천년도 더 지난 물건인데, 그나마 반쪽이 깨져 달아난 기왓장인데 환하게 웃는 그 모습은 여전합니다. 이게 빛으로 사는 것일까?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담고 있습니다"(고후4:7).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고린도 교회에서는 그리스의 이원론적 사고에 빠진 열성 신도들이 나타나서 물의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혼은 영원하고 불멸하는 것이지만, 육체는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몸으로 아무 짓이나 했습니다. 덧없는 것인데 무슨 상관이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또 그들은 육체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금욕도 했습니다. 결혼도 기피하고, 부부생활도 거부하였습니다. 그 또한 덧없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 문제에 대응하여 우리 몸은 우리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르고 사신 것이고, 또 우리 몸은 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이며, 성령이 거하는 전이며, 그리스도의 몸(고전6:15-20, 고후6:13)이라고 했습니다. 이 보다 몸을 더 높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에는 우리 몸이 보물을 담는 질그릇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질그릇은 말 그대로 흙으로 만든 그릇이죠. 본래 인간이 흙으로 지음을 받았으니 질그릇이라는 은유를 쓸 만도 합니다. 그런데 질그릇은 흙으로 만든 것 가운데 가장 평범하며 연약한 그릇입니다. 그러니 가장 값이 싸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을 왜 이렇게 평범하고, 연약하고, 값싼 질그릇에 비유하는 것입니까?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릇이 뭐 대수냐. 거기 보화가 담겨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면 됐지, 그까짓 거 싸고 연약하고 평범하고 그런 거 따질 필요가 있느냐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바울이 이런 생각으로 이 표현을 한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바울이야 말로 그리스 철학의 이원론을 그대로 받아들인 게 됩니다. 그릇(몸)이야 아무 거면 어떠냐. 그까짓 거 대수롭지 않은 거지. 그 안에 뭐가 담겨(영혼) 있는지가 중요한 거 아니냐. 그게 중요한 거지.
바울이 말하는 질그릇은 유약을 바르지 않은 황토 그대로의 토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릇은 물을 담으면 물이 스며들고, 술을 담으면 술이 스며들고, 꿀을 담으면 꿀이 그릇에 스며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질그릇은 바로 이런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레위기 11:33과 15:1에, "고름을 흘리는 남자가 질그릇을 만지면 깨 버리고, 나무그릇을 만지면 씻으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압니다.
질그릇이 나무 그릇보다 더 오염되기 쉽다는 것이죠. 이와 같이 질그릇의 특성은, 그 안에 담긴 것에 의해서 변화되기 쉽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말을 하기 앞서, 그 안에 담긴 보물이 뭐라고 했는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이건 금덩어리처럼 그릇에 담았다가 꺼낼 수 있는 게 아니죠. 물처럼 쏟아 낼 수도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질그릇에 담길 수도 있고 그 안에 스밀 수도 있지만, 아무고 그걸 꺼내거나 쏟지 못합니다. 그것은 질그릇에 한 번 담기면 그것을 질적으로 변화 시키고, 다시는 그것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습니다. 흙으로서 질그릇이 인간을 상징한다면, 그 안에 담긴 보물은 이런 존재의 변화 내지 구원과 관련된 무엇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질그릇'은 연약하고 깨지기 쉽고 싼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가장 소중하고 값진 것이라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우리는 보잘 것 없는데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보화다'그런 게 아니라, '너는 값진 존재다. 보화 같은 사람이다'그 말입니다. 왜 그러냐?
예수그리스도의 빛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비쳐라'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다"(고후4:6).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보화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첫 사람 아담과 대조하면서 마지막 아담(고전15:45)이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처음 비춘 환한 빛을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환한 빛과 대조를 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빛이 이 세상을 밝게 비춘 빛이라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빛은 우리 마음을 비춘 빛이라는 겁니다. 빛이 밝으면 빛을 담은 그릇도 환하게 빛나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인 것처럼(요8:12),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세상의 빛(마5:14)인 것입니다. 바울이 질그릇 속에 담긴 보물이라는 뜻은 바로 이런 환함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환함,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얼굴에 나타난 환함이 그것입니다. 이게 질그릇에 보물을 담는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네 얼굴 지금 환 하냐?"하고 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는 지금 보물을 품고 또는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우리 몸을 질그릇이라고 했을 때, 어쩌면 이렇게 약하고, 깨어지기 쉽고, 이런 불행 앞에서 너무나도 무기력한 인간 존재의 모습을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 질그릇은 쉽게 부정하게 되는 그릇이고 일단 부정하게 되면 깨뜨려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그 반면에, 그렇게 쉽게 물들고 깨지기 쉬운 물건인 동시에 새롭게 변화되기에도 쉽다는 반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금이나 은그릇이라고 해 보십시오. 거기 뭘 담아도 그 그릇이 변화 하겠어요?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서 도자기가 아닌 게 천만 다행 아닙니까? 질그릇이 부정한 사람의 손에 닿아서 부정하게 되기 쉽다면, 그리스도의 빛, 그의 환함, 그의 밝음에 닿으면 온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질그릇'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빛이 담겨지기 이전에는 부정 타기 쉽고, 깨지기 쉬운 그릇이었지만, 빛으로 채워져 변화된 그릇은 그게 여전히 질그릇일지라도 쉽게 깨지지도 않을뿐더러 어떤 고난이나 불행이 스며들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로 환난을 당해도 곤경에 빠지지 않으며, 난처한 일을 당해도 절망에 빠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을 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8-9).
이 질그릇에 담겨 있는 보물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10).
이것이 질그릇에 담긴 보물의 비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죠. 이 빛은 찬란한 천상의 세계에서 비춰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임 당하심, 그의 십자가에서 비춰 오는 것입니다. 질그릇에 담긴 보물은 무슨 신령한 보물항아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항상 짊어지고 다니는 예수의 죽임 당하심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의 생명이 우리에게 환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보물을 담고 있는 사람들, 질그릇들도 빛이 스며든 사람의 얼굴이어야 합니다. 천년의 웃음을 머금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환한 얼굴과 천년의 세월 뒤에도 여전히 빛날 웃음 말입니다. 그 웃음은 얼굴에 있으니, 질그릇에 보물을 담았는지 아닌지를 보려면 그가 [천년의 웃음]띤 얼굴을 갖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면 금 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낙엽지는 가을에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한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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