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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오늘날 살았다면?

갈라디아 박신 목사............... 조회 수 2224 추천 수 0 2012.03.09 13: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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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갈2:11-12 
설교자 : 박신 목사 
참고 : http://www.whyjesusonly.com/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面責)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갈2:11,12)

교회사적으로 엄청난 사건

예수님의 골고다 십자가 사건 이래로 기독교 역사상에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이 다마섹에서 회심한 것을 비롯해,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것, 교황들과 구라파 제후(諸侯)들과의 다툼, 종교개혁, 영적 대각성 운동, 아주사 성령부흥 등등 하나님은 필요할 때마다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었습니다.

인류 문명을 더 풍요롭게 인도하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최초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가 퇴색, 변색, 첨색(添色), 말소될 처지에 놓일 때마다 상황을 반전시켜 오히려 그리스도 복음의 광채를 더 빛나게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모든 세대에서 당신의 사랑하는 이들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 앞에 무릎 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적 전환점들 가운데 아주 큰 의미를 지녔는데도 별로 중요시 여기지 않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본문에서 보듯이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인과의 식사 교제 문제로 바울이 베드로를 야단친 일입니다. 바울이 신약성경의 절반가량이나 저작했기에 더 위대한 사도로서 베드로를 면책할 수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독교 초기에 누가 더 위대한 지도자가 되느냐는 헤게모니 다툼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 사건이 오늘날의 기독교계 안팎에 던져주는 메시지를 깊이 새겨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바울은 처음에는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 일에 모든 것을 바쳤던 가장 극렬한 반대자였습니다.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을 죽이는 일을 진두지휘했으며, 기독교를 나사렛 이단으로 매도하며 국내는 물론 외국에 있는 신자까지 잡으러 나선 자였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주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최초로 고백했습니다. 주님의 모든 사역과 기적의 현장에 있었고 심지어 물 위를 걷는 등 직접 기적에 참여까지 했습니다. 변화산에서 하늘의 신비한 영광도 직접 목격했고 부활 사건의 최초 증언자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둘의 목회자로서의 경력은 도무지 비교가 안 되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바울은 정식으로 학위를 받지 않아 변방을 돌며 사역하는 비주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임을 자타가 공인하는 요즘으로 치면 교단 총회장 격이었습니다. 만약 총회장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면 조용히 따로 찾아가 정중한 어투로 에둘러서 조심스럽게 권면할 것입니다. 그것도 여러 번 같은 잘못을 저질러야 그럴 텐데 바울은 사람들 앞에서 곧장 야단친 것입니다. 오늘날로선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진 셈입니다.

베드로가 범한 잘못은 언뜻 볼 때에는 아주 하찮은 것이었습니다. 이방인과 식사 교제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오자 머쓱해져 그 자리에서 물러난 것입니다. 잘못이랄 것도 없는 단순한 실수나 무의식중에 행한 자연적 반응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모든 정황을 면밀히 살펴보면 바울이 얼마든지 야단칠 수 있는, 또 반드시 그래야만 했던 까닭이 차고 넘칩니다. 그는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당시의 전후 상황

무엇보다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식사 교제를 해도 된다는 계시를 최초로 받은 사도였습니다. 동일한 계시를 여호와의 사자로부터 받은 이달리아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의 초대에 응해 교제를 했었습니다,(행10장)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교제의 물꼬를 처음으로 튼 것입니다. 그랬음에도 지금 주님께 직접 받은 계명을 스스로 어겼습니다.

학자들은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을 주후 약 40년경으로 봅니다. 최초의 예루살렘 공의회(AD50년)에서도 이방인에게 할례 같은 율법의 규정을 부과하지 말라고 결의했습니다. 이방인에게는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메어 죽인 것과 피"(행15:20) 외에는 금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반면에 본문의 사건은 AD56년경으로 최초의 계시로는 15년, 1차 공의회로는 5년 이상 경과된지라 이젠 유대인과 이방인의 식탁교제를 아무도 탓할 수 없었습니다.

특별히 이곳 안디옥 교회는 최초의 이방인 교회였습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행11:19-22)  

말하자면 흩어진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도 상당수 출석했을 안디옥 교회에서 베드로는 아무 거리낌 없이 이방인과 함께 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발굽이 갈렸지만 되새김질을 하지 않으므로 율법으로 부정한 음식이었던 돼지고기도 식탁에 올라왔을 것입니다.(레11:7) 실제로 사도들이나 유대인 신자들이 먹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말입니다.

그러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할례자들"을 보자마자 베드로는 두려워하며 떠나 물러갔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으로 일차 예루살렘 공의회 때 회장을 맡았고 이후로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으로 봉직했습니다. 또 친동생으로서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 가장 정확히 말씀해 줄 수 있었기에 자연히 최고 큰 권위가 따랐을 것이며 수제자 베드로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목할 사항은 초기의 유대인 신자들은 고유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마치 한국인 신자들이 제사 문제를 제외하고는 유교의 좋은 가르침이나 관습을 오래 유지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야고보는 특별히 할례자들만의 예루살렘 교회를 책임지고 있었기에, 개인적 신념이었는지 교인들의 정서에 맞추려고 했는지는 정확히 구분할 수 없지만, 유대 율법을 중시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바울이 삼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기사가 그런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행21:17-24)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 유대인 교인이 수만 명이 되었습니다. 절기 때의 순례로 혹은 개인적 업무로 예루살렘에 올라오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신자들마저 모두 이 교회에 출석했습니다.(최초의 초대형 교회였습니다.) 또 다시 당시의 야고보의 위치와 권세를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야고보도 이방인에게는 네 가지 금기사항 외에는 종교적 부담을 지우지 않았습니다.(행21:25). 그러나 유대인 신자들이 여전히 율법대로 살았기에 바울더러 같은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완전히 무시한다는 오해를 사서 구태여 분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권했고 바울도 그대로 따랐습니다.

율법대로 살아가는 자체는 결코 나쁜 일이 아닙니다. 아니 하나님의 율법은 아주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비록 제사법, 의식법, 음식법 같은 것들이 폐지되었을지라도 그 안에 담긴 인간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뜻과 근본원리는 너무나 거룩한 것입니다. 나아가 그 모든 법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상징, 예표, 암시하고 있기에 복음적 해석이 가능합니다.

바울도 유대인으로서 개인적으로는 죄 사함을 얻는 동물 희생 제사법은 몰라도 나머지 법들은 지켰던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실제로 그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서원한 내용이 만기(滿期)가 되었기에 성전에 올라가 함께 예배드린 것으로 해석합니다. “바울이 이 사람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드릴 때까지의 결례의 만기된 것을 고하니라.”(행21:26)

그렇다고 그가 율법을 복음보다 중요시 여겼던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야고보의 권면을 따른 것도 단순히 예루살렘 유대인 교인들의 눈치를 보거나, 야고보의 신임을 얻으려고 행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9:19,20)

바울은 범사에서 한 명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전도할 상대의 입장에 맞추어 준다는 분명한 원칙 아래 행동했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는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에서 자기를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해서만 염려했던 것입니다. 식탁에서 물러가버린 행동이 불러올 엄청난 결과에 대해선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큰 사도임에도 하나님보다 오로지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 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게 된 경위를 설명한 바울의 영적 원리와 대조해 보십시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베드로에겐 바울만한 확고한 신념이 모자랐거나,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당황해서 잠시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베드로는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나가는 예의 성급한 모습을 또 다시 나타냈습니다. 거기다 유대인의 사도이기에 아무래도 야고보사도와 예루살렘 교회의 동정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인간적 약점과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사도라면 결코 범해선 안 되는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별로 심각해보이지 않은 것 같은 이 잘못은 실은 엄청나게 심각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오늘날의 신자, 특별히 목회자들이 깨어서 조심하지 않으면 베드로와 동일한, 아니 더 큰 잘못을 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13절). 안디옥 교회 내의 모든 유대인들이, 심지어 그 교회의 담임목사 격인 바나바마저 베드로에 동조했습니다. 바울을 제외하고는 전부 베드로 편에 서버렸습니다. 말하자면 교회 안에 파당이, 그것도 목사들이 한 편에 가담한, 형성될 판입니다.

미국의 골수 백인들은 흑인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인정하긴 해도 그 솔직한 심정으로는 싫어합니다. 그와 마찬가지의 정서가 유대인들에게도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주님의 십자가 사랑은 인종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 품어 안으며 또 기독교의 일차 공의회에서 그렇게 하도록 의결을 했지만 유대인들의 뿌리 깊은 이방인 혐오의식이 하루아침에 완전히 씻어질 수는 없습니다. 울고 싶던 차에 뺨을 때려 준다고 베드로의 행동은 유대인들의 그런 정서를 옳다고, 최소한 틀린 것은 아니라고 인정해주는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우리라고 그렇게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나서지 않겠습니까?    

교회의 분쟁과 파당은 아주 거룩하거나 위대한 명분으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발단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 시작됩니다. 법정에까지 끌고 가다가 결국은 서로 욕하며 쪼개지는 원인이 거의가 너무나 하찮은 일입니다. 심지어 헤어질 때는 서로 자기 쪽에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그분이 있다고 끝까지 우깁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침례를 받았느뇨.”(고전1:12,13)

고린도 교회에도 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 파등이 나눠졌다고 합니다. 이어서 바울이 침례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을 보면 침례 같은 교회 의식의 문제를 갖고 의견이 나눠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오직 복음에 합당하게 그런 문제를 해결하라고 합니다. 요컨대 교회에서 싸움질이나 하라고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고전3:3,4) 바울은 심지어 “너희가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견책했습니다.

너희가 인간 대신 짐승이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성령에 속하지 않고 여전히 육신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믿고 난 이후에도 믿기 전에 육신의 욕심을 따라 행하던 그대로 한다는 뜻입니다. 믿은 후에 믿은 표시가 전혀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욕심이나, 자존심과 체면이 발동하면 그리스도의 계명마저 예사로 위반한다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아담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막는다면 하나님마저 배반할 수 있다고 나선 것이 원죄이지 않습니까? 십자가 복음 외의 지엽적인 것으로 교회 안에서 파당을 지어 서로 자기가 옳다고 우기는 일도 하나님은 뒷방으로 완전히 내몰고 순전히 자기 잘난 것만 내세우려는 너무나 큰 죄일 뿐입니다. 어떤 종교적 도덕적 명분을 내세워도 바울이 다시 온다면 여전히 “너희가 육신에 속한 자”라는 엄한 꾸중을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계명만 위반한 것이 아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안디옥 교회는 최초의 이방인 교회였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단결과 화합이 가장 잘 되었던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너무나 어리석었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이제 화합은 물 건너 갈 참입니다. 이는 단지 교회 분열의 문제로 그치지 않습니다.  

복음 이전에 율법만 있을 때에는 이방인과 유대인은 서로 상종할 수도 없는 대적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직접 모세에게 주신 율법에는 그런 의도는 추호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 받은 뜻을 오해하고 자기들 욕심을 보탠 유대 장로들의 유전 때문에 그랬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사이에는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와 저주 받은 하나님의 원수로 나눠지는 높은 담이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우리의 화평이신 주님이 오셔서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둘로 하나를 만드셨습니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의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엡2:15)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수제자인 베드로는 자신이 의식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 담을 다시 쌓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야단친 내용의 핵심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갈2:14)

한 마디로 베드로가 기독교의 도덕적 잣대는 이중적일 뿐 아니라 사람을 가려가며 교제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스스로 본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방인 신자들에게 아주 깊은 마음의 상처를 심어준 것은 둘째 치고 앞으로 그들을 어떻게 전도할 것이냐고 호통친 것입니다. 아무리 참 생명을 얻는 고귀한 진리를 전하더라도 자기들과 식사교제도 않으려는 자들에게 마음 문을 열 수도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베드로의 가장 큰 잘못은 따로 있었습니다. 이방인과 교제하며 전도해도 된다는 예수님의 계명을 어긴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복음 안에서 이미 다 자유케 해놓은 율법의 멍에를 베드로가 다시 묶어버렸습니다. 복음만으로 충분치 않고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예수님의 수제자가 가르치고 있는 꼴이 되었습니다. 신자라도 할례는 반드시 받아야만 한다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조한 셈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한 번 복음의 원리를 설명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2:16) 자기도 유대인이지만 구원에 아무 효력이 없는 율법 대신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더러 이미 헐었던 이방인 교제 금지 규정을 다시 세우면 그 법에 따라 자신을 죄인으로 옭아매는 꼴이 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베드로가 죄인 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대속의 죽음으로 그에게 이미 구원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완전히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21)  

바울이 이 시대에 다시 산다면?

참으로 성경은 정미한 기록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더라."(행11:24-26)

안디옥 교회가 최초의 이방인 교회일 뿐 아니라, 비로소 그 교회 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쩌면 처음으로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게 된 이방인들의 놀랍게 변화된 모습을 당시 사람들이 보고 그렇게 불렀을지 모릅니다. 유대인들의 믿음은 이미 중근동에 널리 알려졌기에 그들의 경건한 모습은 새삼스럽게 시선을 끌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하나가 되어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모습에 감동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그런 평판을 완전히 무색하게 만들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크리스천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울과 바나바가 일 년간이나 복음으로 가르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전 유대교의 복잡한 종교적 계명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된 모습을 보고 유대인이지만 유대교인과는 다르다는 뜻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베드로는 복음을 거꾸로 율법으로 묶게 만들었기에 그리스도인을 유대교인으로 다시 되돌린 셈이었습니다. 그의 행동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실감하실 수 있습니까?  

어떤 잘못을 두고 그 자리에서 바로 면박을 준다는 것은 성질이 불같거나 그 잘못이 아주 컸다는 두 가지 이유뿐입니다. 아시다시피 베드로나 바울 둘 다 성격이 불같았습니다. 성마른 베드로가 군말 없이 바울의 꾸중을 들은 것은 결코 초대 교회의 주도권 다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도 늦게나마 자기가 저지른 잘못이 얼마나 큰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 외에는 모든 이가 베드로의 외식에 넘어갔습니다. 바울만은 아무리 간단해보여도 그대로 두었다간 자칫하면 기독교가 영적으로 잘못된 흐름에 휩쓸려서 정상괘도를 이탈할 것이라는 점을 곧바로 눈치 챈 것입니다. 절대적 진리를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무조건 제 멋대로 하고 싶은 인간 본성에 어긋납니다. 당연히 대중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킵니다. 아마  이방인을 제외한 안디옥 교회 내의 모든 유대인들이 속으로는 바울을 비방했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사람을 기쁘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기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바로 세우기로 한 것입니다. 천사라도 복음을 잘못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포한 그로선 총회장 격인 베드로라도 그대로 넘길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다른 모든 이들이 듣고 보는데서 반드시 십자가 복음으로 제대로 환기시켜야만 했습니다. 기우뚱 넘어지려는 골고다 언덕의 영광스런 십자가를 곧바로 다시 세워야만 했던 것입니다.  

만약 그런 바울이 이 시대의 영적 상황을 본다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또 다른 수많은 베드로 같은 목회자를 야단치기 바쁘겠습니까?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상 복음을 세상 종교나 인간 사상과 혼합, 왜곡, 타협, 대체하려는 움직임은 계속 있어 왔습니다. 지금도 바른 복음을 전하는 자의 숫자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 많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는 믿어야 하지만 자기들 교회에서 정해 놓은 온갖 인간적 공로를 보태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 말입니다. 모든 이단들의 공통점이지 않습니까?

제 추측으로는 바울이 지금 시대에 오면 틀림없이 아주 이상한 상황 하나를 발견할 것 같습니다. 본문의 베드로처럼 변색된 복음을 전하거나 또 몸소 실천하고 있는 데도 교단의 높은 지위를 가졌다고, 종교적 도덕적 업적을 많이 쌓았다고, 아무도 나서서 견책하려 들지 않는 꼴을 보고 더 통탄해 하지 않겠습니까? 또 오히려 그런 자들에게 굽실거리며 아부하는 모습들을 보고는 가슴을 치고 대성통곡할 것입니다.

작금의 상황은 올바른 복음을 전하는 자를 거꾸로 틀렸다고 비방하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바울처럼 복음을 변질하지 말라고 문책하는 의로운 자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일군의 목회자나 신학자들이 덤벼들어 매장시키려는 모습을 보고는 어쩌면 아무리 담대한 그라도 너무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서 기절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1:6-8)

율법에 묶여 있는 자를 풀어주기 위해 주님은 복음을 들고 이 땅에 처음 오셨습니다. 그 이후로는 다른 복음이 없는 십자가 복음만의 시대입니다. 신자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고 오직 주님만 따라가야 합니다.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더 보태면 아무리 도덕적 종교적으로 선하고 거룩해보여도 바울의 선포대로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다 정작  바울보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는 불신자들보다 가장 먼저 다른 복음을 전했던 자부터 찾지 않겠습니까?  

10/5/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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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55 고린도전 향방 없는 달음박질을 하지 않는가? 고전9:25-27  박신 목사  2012-03-11 2869
6554 잠언 과속 운전이 성경적 죄가 되는 이유 잠16:9  박신 목사  2012-03-11 2352
6553 빌립보서 두세 번 뿐인(?) 인생의 대박 기회 빌3:13-14  박신 목사  2012-03-09 2551
» 갈라디아 바울이 오늘날 살았다면? 갈2:11-12  박신 목사  2012-03-09 2224
6551 창세기 이 땅이 텅텅 비어진 이유 창1:1-5  박신 목사  2012-03-09 1948
6550 고린도후 네 얼굴 지금 환 하냐? 고후4:6  허태수 목사  2012-03-08 2011
6549 출애굽기 우리가 꼭 해야 할 가을걷이 출3:6-9  허태수 목사  2012-03-08 1695
6548 고린도후 자기 인생이 꼬였다고 생각되면 고후8:1-4  허태수 목사  2012-03-08 2424
6547 고린도전 사랑 밖에 난 몰라(13장의 바른 해석) 고전13:8-13  허태수 목사  2012-03-08 2517
6546 전도서 이런 쾌락을 탐하라 전9:4-10  허태수 목사  2012-03-08 1994
6545 마가복음 예수 복음 막8:31-33  허태수 목사  2012-03-08 2003
6544 창세기 야곱 같은 조상들이 되시라 창32:22-32  허태수 목사  2012-03-08 2075
6543 마태복음 월현리에 성묘하러 갔다가 마18:21-22  허태수 목사  2012-03-08 2070
6542 누가복음 예수께서 비유를 하나 말씀 하셨다. 눅18:1-8  허태수 목사  2012-03-08 2164
6541 요한복음 그 때 그 사람 요1:47  허태수 목사  2012-03-08 1958
6540 누가복음 조남식과 최수정의 잔칫날을 앞두고 눅14:15-24  허태수 목사  2012-03-08 2048
6539 누가복음 당신의 손 눅18:9-14  허태수 목사  2012-03-08 2019
6538 고린도전 품위 있는 삶 고전7:32-35  허태수 목사  2012-03-08 2332
6537 빌립보서 서울 춘천고속도로에서 빌3:12-15  허태수 목사  2012-03-08 2020
6536 누가복음 어리석은 농부 눅8:5-8  허태수 목사  2012-03-08 2213
6535 마태복음 믿음, 그 교묘함에 대해서 마6:25  허태수 목사  2012-03-08 1968
6534 창세기 하나님의 새 약속 창9:8-17  정용섭 목사  2012-03-07 2095
6533 마가복음 침묵 명령 막9:2-9  정용섭 목사  2012-03-07 1926
6532 고린도전 믿음은 구도다 고전9:24-27  정용섭 목사  2012-03-07 2090
6531 마가복음 예수의 축귀 능력 막1:29-39  정용섭 목사  2012-03-07 2170
6530 에배소서 순간의 선택 엡5:16-17  최현섭 형제  2012-03-07 2006
6529 디모데후 세 아들에게 나누어 준 아버지의 반지 딤후2:22-26  이경숙 교수  2012-03-07 2385
6528 창세기 순례자의 하나님 창12:1-4  장윤재 교수  2012-03-07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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