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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8:31-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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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578880 |
정용섭 목사
생명이란 무엇인가?
마가복음 8:31-38, 사순절 둘째 주일, 2012년 3월4일
고난 예고
복음서 기자들이 전하는 예수님의 공생애는 예상 외로 간단합니다.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시작해서 예루살렘에 들어와 체포당하고 십자가 처형을 당했고,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구조입니다. 그 기간이 짧으면 1년 여, 길면 2년 여가 됩니다. 그 기간을 크게 구분하면 예루살렘 입성 전과 입성 후입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않고 나사렛과 갈릴리와 사마리아에만 머물렀다면 십자가 처형은 당하지 않았을 겁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유대교의 총본부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물론이고, 제사장, 서기관, 장로들로 구성된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들과의 충돌을 무조건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들로부터 어떤 시련을 당할지는 불을 보듯 분명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남은 운명은 이 말씀대로 진행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반대했습니다. 이게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게 복음서와 신약성서 전체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한다면 인류 구원의 이 고백과 결단을 듣고 옆에서 응원을 보내야만 합니다. 베드로는 왜 반대했을까요? 베드로는 바로 앞에서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고 정확하게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군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도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개념이해가 잘못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는 당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즉 메시아가 고난 받고 십자가에 달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은 자를 아무도 그리스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우리는 단순히 교리적으로만 생각합니다. 우리 죄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은 죄를 용서받는다고 말입니다. 죄를 용서받는 것이 곧 구원을 받는 길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인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요? 다른 길은 없었을까요?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빛이 있으라는 말 한 마디로 빛이 생겼습니다. 그런 권능의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모든 인류의 죄를 말 한 마디로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비틀어진 마음도 말씀 한 마디로 고칠 수 있고, 장애도 고치고, 죽은 자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간단한 길을 놓아두고 왜 30대 초반의 한 유대인 남자가 십자가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건을 택해서 인류 구원의 길이 되게 하신 걸까요? 이런 질문은 기독교를 비판하는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늘 최소한 상식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반대한 이유도 이런 상식적인 생각에서 나온 겁니다. 예수님이 억울하게, 무기력하게 죽는다면 결코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 8:33) 베드로는 예수님의 책망을 듣고 좀 억울하다고 생각했겠지요. 자기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했고, 예수님을 염려했으니까 말입니다.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근본 생각이 잘못되었으면 책망을 들어야 합니다. 베드로의 생각이 왜 잘못인지를 예수님은 34절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말은 곧 생명을 구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생명을 얻으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이 설득력이 있나요?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생명을 얻는 것은 정반대처럼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생명을 얻으려면 자기가 더 드러나야 하고 좋은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 자기 이름을 내려고 애를 쓰고, 업적을 남기려고 온갖 수단을 강구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생명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그렇게 이해하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런 세상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만 생명을 얻는다는 말은 받아들여지기 힘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좀더 따라가 봅시다. 35절에 자기 목숨을 구원하려고 하면 잃을 것이고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은 많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필사즉생(必死則生)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슬람 과격파인 알카에다 테러리스트들도 자기 목숨을 버리면 천국에서 순교자의 명예를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중세기의 기독교 십자군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전쟁하러 나갔습니다. 죽을 각오로 공부하고, 죽을 각오로 사업을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들도 합니다. 과연 이렇게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일반적인 가르침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겁니다. 어떻게 다른지는 생명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직결됩니다. 핵심적으로 대답은 두 가지입니다.
고난당하는 메시아
첫째, 성서가 말하는 생명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런 말은 우리가 성경 곳곳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사람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에 의해서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생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36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온 천하를 얻는 것을 사람들은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살고 있지만 성경은 그런 방식으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이 뜬구름처럼 느껴지는 분도 있을 겁니다. 천하를 얻으려고 살벌하게 경쟁하는 세상에서 그런 말은 한가하게, 또는 공허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온 천하를 다 얻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으로 여러분의 영혼이 만족스러울지를 상상해보십시오. 상상이 잘 안 되지요? 우리 교회를 생각해보십시오. 불편하지 않게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당을 장만했다고 합시다. 300평 대지에 100평 건물로 된 교회당입니다. 파이프오르간이 있으면 더 좋겠지요. 교회 앞마당에 아담한 정원이 있고, 벤치도 있으면 더더욱 좋을 겁니다. 거기에 앉아서 기도하고, 책도 읽고 차도 마실 수 있습니다. 모두 원하는 교회당입니다. 그게 현실이 되면 우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까요?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영혼의 안식이 없으면 결국 생명을 얻지 못한 겁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천하를 얻는 방식으로 참된 영혼의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생명이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실존이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은 우리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에 의해서만 주어집니다. 이런 점에서 생명은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거기에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방식의 생명 사건이 예수님에게 일어났습니다. 하늘의 권능으로 세상을 호령하는 방식이 아니라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달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승리의 메시아가 아니라 고난의 메시아였습니다. 지배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수난당하는 메시아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칠 정도로 나락으로 떨어진 메시아였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습니다.(요 1:29) 베드로를 비롯한 당
시 모든 제자들과 유대인들은 이런 메시아 표상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반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번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체포당하실 때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운명을 구원 사건으로, 즉 생명사건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만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인들 모두에게 해당되며, 오늘 우리도 똑같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처럼 계속해서 주님의 말씀과 그 약속 앞에서 ‘안 됩니다.’ 하고 헛발질을 하면서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종말론적 생명
둘째, 성서가 말하는 생명은 종말론적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생명이 무엇인지 아직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생명의 잠정성이 그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생명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온 천하를 얻어도 생명이 확인되는 게 아닙니다. 그건 당연합니다. 생명은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무엇인지가 다 드러난다면 하나님도 다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 것처럼 생명을 본 자도 죽습니다. 죽어야만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듯이 죽어야만 생명을 대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3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면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올 때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종말입니다. 그때 생명이 다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생명이 드러나면 생명 아닌 것들은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종말론적입니다. 지금은 아직 종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들이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거울로만 세상을 볼 수 있지 직접 볼 수는 없습니다. 이런 종말론적 관점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이 오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당장 천하를 손에 넣는 것으로만 생명을 확인하려고 수고를 아끼지 않게 됩니다.
지금 당장 먹고 사는 것도 힘에 벅찬데 어떻게 종말의 생명을 생각하면서 살 수 있느냐, 하고 고민하실 분들도 있을 겁니다. 아무리 종말론적 생명을 생각한다고 해도 그런 인식이 현실에는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종말은 너무 먼 이야기라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에 온통 빠져 있는 젊은 사람들일수록 종말이라는 말에 실감을 느끼지 못할 겁니다. 그건 착각입니다. 종말은 반드시 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갑자기 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상황을 도둑과 신랑으로 비유했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닥친다는 말씀입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도 이것은 옳습니다. 지금 제 나이가 만으로 59세입니다. 신학대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하던 40년 전이 엊그제 같습니다. 40년의 세월이 한 순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분명한 사실인지, 그 순간이 얼마나 갑자기 오는 것인지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40년 전의 내 나이에 해당되는 청년들도 곧 지금의 내 나이를 먹을 것이며, 저도 곧 80살, 90살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의 세월도 쏜살같이 지나서 종말을 맞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이 막연하거나 두렵게 생각됩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생명의 온전한 주인이고, 종말에 생명을 완성하실 하나님이 인류 역사에 들어오셨습니다.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고유한 방식으로 생명을 이루셨습니다. 그 생명 사건이 곧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과 그에게 일어난 일에 여러분의 운명과 미래를 맡기고 사십시오. 그러면 생명을 얻습니다. 이 사실을 외면하면 마지막 때 우리는 외면당할 것입니다. 지금 온 천하를 얻고도 하나님의 생명을 잃으면 우리의 모든 수고와 노력과 업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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