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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13-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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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580021 |
정용섭 목사
성전을 헐라!
요한복음 2:13-22, 사순절 셋째 주일, 2012년 3월11일
성전 청결 사건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당시의 십자가 처형은 반국가사범에게만 집행되던 사형제도였습니다. 요즘 식으로 바꿔 말하면 간첩죄로 사형당한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를 고치셨던 예수님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죽음이었습니다. 복음서의 보도에 따르면 십자가 처형의 책임은 대표적으로 유대교의 최고법정인 산헤드린과 로마의 유대 총독입니다. 형식적으로만 본다면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결정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당시 사형 선고는 총독만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산헤드린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로마 총독에게 고발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시도했지만 산헤드린은 민중들을 선동해서 그것을 가로막았습니다.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유대교의 권위를 상대화한다고, 즉 해체한다고 오해했습니다. 그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안식일과 성전의 상대화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성전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이 가까워오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당시에 경건한 유대인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떠나던 성지순례에 나선 겁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서 그곳에 시장이 선 것을 보았습니다. 소, 양,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고, 돈을 바꿔주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성전 안에서 처음부터 시장이 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순례자들의 편의를 위한 조치였습니다. 성전에 오는 사람들은 제물을 바쳐야했습니다. 멀리서 소나 양을 끌고 오기는 쉽지 않습니다. 끌고 왔다고 해도 제물로 바칠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한 것인지 검사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깨끗한 동물을 미리 준비해 놓으면 순례자들이 그걸 사서 제물로 바칠 수 있습니다. 환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에 성전세를 비롯해서 헌금을 드리려면 성전이 허락한 돈이 필요했습니다. 순례자들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아프리카와 유럽과 근동 이곳저곳에서 모여들었기 때문에 돈이 가지각색이었습니다. 환전은 순례자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좋은 뜻으로 시작된 이런 제도가 세월이 흐르면서 결국 성전의 이권사업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문제를 당시에도 알 만한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감히 왈가왈부하지 못했습니다. 제사장들의 권위가 막강했고, 그 제도가 나름으로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성전에 펼쳐진 시장을 뒤집어버렸습니다. 15절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평소 예수님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점잖게 타이르던지, 아니면 이 책임의 장본인들인 제사장들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게 좋았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불법 노점상을 폭력적으로 쫓아내는 시청, 구청 직원들이나, 재개발지역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몰아내는 용역회사 직원들처럼 행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이고, 또한 복음서가 기록되던 시대의 기독교인들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한번 소란을 피워 성전을 청결하게 했다는 에피소드로 끝나는 게 아니라 성전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차원에서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의 노선투쟁이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을 요한복음만이 아니라 공관복음까지 네 복음서가 다 다루고 있다는 사실도 이것이 초기 기독교에서 심각한 사안이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상황을 우리는 채찍을 휘두르신 다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16절) 유대교가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었다는 비판입니다.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18절) 유대인들도 성전에서 벌어지는 장사 행위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태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성전 제도를 개혁할 수 있는 자격이 당신에게 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원래 진리에 대한 인식을 표적에서 찾았습니다. 바울도 고전 1:22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표적(세메이온)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가리킵니다. 갈라진 홍해, 만나와 메추라기, 무너진 여리고 성벽, 갈멜산의 불같은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이런 표적을 보여주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요구를 대부분 거절하셨습니다. 마 16:1절 이하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도 이런 이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막 13:22) 표적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표적을 보이라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사흘만이 세울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표적 중의 표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성전을 허물 수는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이 참 애매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에둘러 성전 건축 기간이 46년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자랑하는 말이기도 하고, 성전을 허물어야 표적을 보일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할 말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표적과 우상
예수님이 성전을 허물라고 하신 말씀과 46년 운운한 유대인들의 말을 좀더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하셨지만 유대인들이 실제로 그렇게 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표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모든 종교적, 정치적 업적이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원래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이 건축했지만 기원전 587년 바벨론에 의해서 파괴되었다가 다시 재건되었고, 또 파괴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헤롯에 의해서 복원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모든 삶은 성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렇게 크고 화려한 건물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절대화하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많은 제도가 만들어졌습니다.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서 세를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이 설명하듯이 이권이 걸린 시장도 열었습니다. 하나님의 표적이 이제는 우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표적의 왜곡이 곧 우상숭배입니다. 표적과 우상과의 차이는 종이 한 장입니다. 표적은 간직해야 하지만 우상은 허물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그것을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허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교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말씀으로 그들에게 들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고, 그 결과가 십자가 처형입니다.
오늘도 표적과 우상이 혼동되고 있습니다. 은행, 주식시장, 기업체, 학교, 병원, 정치 집단, 예술단체, 티브이 프로그램 등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섬기던 예루살렘 성전과 다를 게 없습니다. 가장 화려하고 가장 큰 건물을 만들고, 가장 화려하게 치장합니다. 높은 생산성을 올리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쏟습니다. 거기서 구원이 나올 것처럼 선전해야 합니다. 거기에서 삶이 풍요로워질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런 일에서 큰 업적을 보이는 사람들은 예언자이며, 메시야로 추앙받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결국 시장이 들어서듯이 오늘날 우리 삶의 모든 곳에 상업논리가 지배합니다. 이런 시장주의가 21세기 들어서서 더 극심하게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이게 인류의 숙명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심지어 교회마저 성장주의에 물들어버렸습니다. 46년 동안 지은 예루살렘 성전 건물에 영혼을 맡기는 유대인들의 행태와 똑같습니다.
성전을 허물라는 주님의 말씀은 준엄합니다. 장사꾼들, 환전상들은 모두 쫓겨났습니다. 이런 장면을 보고 속이 후련하신가요? 역시 역사를 개혁하고 혁명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당연히 왜곡된 우상은 타파되어야 합니다.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채찍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 안에 장사꾼과 환전상이 그대로 들어있다는 사실입니다. 호화롭고 장엄해 보이는 성전 건물에 대한 우상숭배를 단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싶으시지요? 그렇지만 그게 잘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아시지요? 46년 동안 지은 것을 어떻게 허물 수 있을까요? 평생 집중하던 그것을 어떻게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작은 생활 습관도 고치기 힘든데, 혼신의 힘을 다해서 추구하던 것을 포기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그것은 자기 혼자만 추구한 것이 아니라 세상 모두가 추구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죽을 때까지 우상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표적 같지만 실제로는 우상인 그것을 섬길 것입니다. 표적과 우상이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의 설교 본문을 기억하시나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 34) 자기를 부인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생명을 잃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우상이 된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의 상황은 참으로 딱합니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받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알고 싶으신가요? 기대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살아있는 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억지로라도 벗어나기 위해서 자기 삶을 완전히 바꾼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그런 이들을 가리켜 성인이라고 합니다. 예컨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같은 사람입니다. 지중해 무역상의 아들이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대기업 2세였습니다. 그는 모든 걸 포기하고 탁발승의 길을 갔습니다. 그게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이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우상이 된 성전 건물에 매력을 느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 자체가 우상 지향적이기도 하고, 표적과 우상을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우상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참된 표적에 대한 관심을 넓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복음 기자는 성전을 허물면 삼일 만에 일으킬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의 육체를 가리키는 것이며, 예수님의 부활 후에야 제자들도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해석했습니다. 옳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과 그에게 일어난 사건이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유일한 표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처럼 사람이 만든 것은 아무리 위대해도 궁극적으로 표적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에 근거해서 그들은 세상과 신앙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 매달리지 않게 되었고, 로마의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인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에 기만당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과 그에게 일어난 일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그런 관심 때문에 오늘도 일상을 멈추고 예배에 참석하셨을 겁니다. 단지 의무적으로나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영혼의 깊이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영광을 돌리십시오. 우상을 완전히 떨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참된 표적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대폭 늘어나면 우상은 여러분의 삶에서 능력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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