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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언약, 새 언약

예레미야 정용섭 목사............... 조회 수 3546 추천 수 0 2012.04.06 17: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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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렘31:31-34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582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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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언약, 새 언약

예레미야 31:31-34, 사순절 다섯째 주일, 2012년 3월25일


오늘 우리는 제1독서로 예레미야의 한 부분을 읽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7세기 초부터 6세기 말까지 유다에서 활동하던 선지자입니다. 그가 활동하던 그 시대의 유다는 어려운 처지에 있었습니다. 요시아 왕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개혁운동이 실패하고 나라의 기운이 점점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기원전 587년에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합니다. 나라가 혼란스러우면 많은 사람들이 백가쟁명 식으로 대안들을 쏟아놓기 마련입니다. 당시 여러 선지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신탁을 선포했습니다. 요즘도 대한민국이 북한, 중국, 미국, 일본과의 외교적 관계를 어떻게 끌고 가는가에 대한 진단과 방향제시가 서로 다른 것과 비슷합니다. 미국과의 관계를 더 중요시할 것인지, 중국과의 관계를 중요시할 것인지 서로 다릅니다. 북한에 대해서도 지난 두 정권이 취한 햇볕정책이 좋은지, 지금 이명박 정권이 취하는 압박정책이 좋은지 서로 다릅니다. 예레미야도 비슷한 상황에서 여러 선지자들과 갈등을 겪었습니다.

    

예레미야와 완전히 반대되는 예언을 한 사람은 하나냐입니다. 물론 그 사람도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서로 다른 입장이 렘 28장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유대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재위 4년에 ‘기브온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공개적으로 말했다고 합니다.(렘 28:1) 여호와 하나님이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빼앗아간 모든 기구를 2년 안에 돌려보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예레미야는 하나냐를 거짓 선지자로 비판하면서 하나냐의 예언이 이루어지기 전에 자기 민족인 유다에 큰 재앙이 임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논쟁을 이어갑니다. 예레미야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곧 구원하실 거라는 기대는 낭만적인 것이며, 오히려 바벨론에게 망할 것이고 수치를 당하는 것이 실제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뒤에야 구원이 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한계를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그것을 못 본척하고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예언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아주 현실적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유다가 지금 망한다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망해야 할 이유를 단순히 국내외 정치적인 차원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옳으면 유다가 구원을 받을 것이고, 관계가 잘못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주장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리키는 성서적 개념은 ‘언약’입니다. 언약은 양쪽이 서로 지켜야만 효력이 있습니다. 유다가 이 언약을 깼습니다. (32절) 그래서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으로 유다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끝장 난 것일까요?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렘 31:3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하나님은 새 언약으로 유다와의 관계를 새롭게 했습니다. 새 언약을 알려면 먼저 옛 언약을 알아야 합니다. 옛 언약은 구약성서 곳곳에 나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의 언약이 있습니다. 창세기에 그 내용이 자세하게 나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시내 산에서 언약을 받았습니다.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이 그것입니다. 옛 언약의 중심 개념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복을 받고 그렇게 살지 않으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망하게 된 이유도 역시 이 옛 언약을 지키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인 율법을 잘 지키지 왜 지키지 않았을까, 이상하게 생각되시나요? 그게 쉽지 않습니다. 율법을 실정법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실정법을 완벽하게 지키고 살 수 있으신가요? 도로교통법을 완전하게 지키시나요? 요즘 선거철입니다. 불법 경선이라는 말도 많이 나옵니다. 법은 제도입니다. 제도로 모든 것을 완전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제도가 이용당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상황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도 큰 이유입니다. 어떤 상황에 들어가면 자신의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도 판단하지 못합니다. 예컨대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미국의 노예제도, 대한민국의 레드 콤플렉스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유대 민족이 옛 언약인 율법을 지키지 못한 이유는 믿음이 없다거나 지성적으로 게으르다거나 천성이 부도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법과 인간의 본질적인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문제는 기독교의 복음을 이해하는데도 중요합니다. 다음과 같이 질문해보십시오. “법이 인간을 구원하나?” 문명사회의 척도는 얼마나 건강한 법이 작동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국회는 그런 법을 만드는 기구입니다. 법이 인간을 구원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날 법이 얼마나 악용되는지 아실 겁니다. 이건 국제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엔이 세계 모든 나라에 동등한 법을 적용하고 있을까요? 힘 있는 나라에 유리하게 적용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10년 전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한 미국의 책임을 국제사회가 묻지 못합니다. 법이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유대가 율법이라는 옛 언약을 지키지 못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새 언약

    

예레미야는 이제 옛 언약을 포기합니다. 그것으로는 인간 구원, 민족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새 언약을 외칩니다. 옛 언약은 돌이나 양피지에 기록되지만 새 언약은 마음에 기록됩니다.(33절) 예레미야는 할례를 말할 때도 ‘마음 가죽’을 베라고 했습니다.(렘 4:4) 마음에 기록된 새 언약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양심인가요, 영적 통찰력인가요, 온전한 믿음인가요, 순종인가요? 예레미야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새 언약은 옛 언약과 차원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법정의 논리와 수도원의 논리가 다른 것과 비슷합니다. 전자는 실증적인 논리라면 후자는 은총의 논리입니다. 전자는 생물학이라면 후자는 시(詩)와 같습니다.

    

예레미야는 새 언약을 34절에서 간접적으로 설명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째, 새 언약의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전도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표현은 심층적인 것입니다. 실제로 온 세상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인류 역사를 끌어가는 절대자가 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페르시아에 의한 바벨론의 붕괴입니다. 유대를 비롯해서 많은 나라를 멸망시키고 당시 근동의 헤게모니를 잡았던 막강 바벨론 제국이 페르시아에 의해서 무너지리라는 건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절대권력의 붕괴는 그 절대권력을 초월하는 능력이 역사를 주관한다는 증거입니다. 그걸 뚫어보는 사람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페르시아 첫 왕인 고레스는 바벨론에 의해서 포로로 잡혀 왔던 각국 사람들을 모두 복귀시키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그 칙령에 따라서 유대인들도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유다가 바벨론 포로가 된지 50년 만인 기원전 538년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옛 언약은 율법 조항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방식이라면, 새 언약은 이처럼 역사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방식입니다.

    

어떤 분은 율법을 지키는 옛 언약보다 역사를 통한 새 언약이 더 어렵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역사를 뚫어보려면 학식이 깊어야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학식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학식이 오히려 우리의 눈을 가릴 수 있습니다. 마치 율법에 대한 학식이 많았던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레미야가 말했듯이 양피지의 법이 아니라 마음의 법입니다. 여기서 역사라는 것을 단순히 세계역사로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삶의 중심을 가리킵니다. 이제 봄이 왔습니다. 겨울철 내도록 움츠렸던 땅이 녹았고, 생명체들이 나올 준비를 합니다. 따뜻한 바람에서 생명의 깊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곧 꽃이 피겠지요. 그 꽃 한 송이에 우주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촌부라 하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서 신비를 경험합니다. 그게 역사를 보는 눈입니다.

    

둘째, 새 언약의 세계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옛 언약의 세계에서는 악행은 벌을 받아야 합니다. 죄는 기억되어야 합니다. 옛 언약에 따라서 유다는 지금 멸망 직전까지 왔고, 결국 멸망당합니다. 이게 옛 언약의 패러다임입니다. 이게 옛 언약에서 정의를 이루어가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새 언약의 세계에서는 그런 것들이 다 무효가 됩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여러분도 안도의 숨을 돌릴 겁니다. 만약 우리의 악행이 그대로 벌을 받아야 한다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죄가 그대로 기억된다면 아무도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할 겁니다.

    

예레미야가 보는 이런 새 언약의 세계는 실제로 가능한 걸까요? 하나님이 왜 이런 방식으로 구원하시겠다는 걸까요? 이런 방식으로 도대체 세상에서 정의가 세워질 수 있을까요? 많은 질문이 뒤따를 겁니다. 예레미야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악하다는 사실을, 그래서 의를 세울 수 없다는 사실을 꿰뚫어보았습니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그것을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율법 없이 죄를 범하고 율법을 갖고도 죄를 범한다고 말입니다. 그런 기준으로만 본다면 인간은 죄로 멸망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이 인간 멸망을 그냥 내버려두실 리가 있습니까.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여신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악행을 평가하지 않으시고 일방적으로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구원 주도권의 극대화입니다. 예레미야는 인간 구원의 빛을 바로 거기서 본 것입니다. 그는 놀라운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가 왜 놀라운 선지자라고 제가 말했는지 여러분도 이심전심으로 느끼셨을 겁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복음을 전한 겁니다. 보십시오. 예레미야는 예수님보다 6백여 년 전에 활동한 인물입니다. 예수님의 복음과는 거리가 먼 시대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진수를 전했습니다. 이런 유다의 선지자들 덕분에 예수님이 역사에 등장하실 수 있었겠지요. 예레미야의 새 언약 개념은 예수님에 의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역사의 신비입니다.

    

오늘은 사순절 다섯째 주일입니다. 다음 주일은 종려주일이고 그 다음 주일은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나중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인류의 죄가 용서받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덕분으로 우리의 악행은 용서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이제 우리의 죄는 기억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역설적인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죄가 확인되는 사건이라면 부활은 그것이 무화되는 사건입니다. 인간은 무죄한 이를 십자가에 달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기억조차 하지 않는 방식으로 해결하십니다. 우리가 부활체가 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모두 나비가 되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애벌레였을 때의 그 비루한 모습들이 기억조차 나지 않을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완전히 새로운 언약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기뻐하십시오. 그 언약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그것을 누리십시오


댓글 '1'

바울의복음

2015.04.25 23:23:34

우리가 지키는 율법이 폐해진것이다.
주님이 지켜주시겟다고 약속한 언약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에게 율법이 이루어지게 하시겟다고 약속하셧다.
자꾸 율법 율법거리는 사람치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을 본적이없다
율법이 쏘는 것은 죄로 죄되게 하는것이다.
그렇다 율법은 선하기에 악을 보면 정죄한다.
문제는 우리가 그율법을 지키기로 대들면 정죄를 당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짐을 믿는자들에게는 결코정죄함이없다는것이다.
사람들은 유월절 어린양 그리스도가뭔지 잘모르는데
유월절에도 양의피를 통하여 어떠한 사람이든 구원을 입은것처럼
신약애서는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는 어린양이되어 그를 믿는 자를 구원케하신것이다.
이외에 더하거나 뺴는 다른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라디아서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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