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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35: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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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ullin.org |
두려움과 희망 사이에서
2006-09-10
I. 본문의 배경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언약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 안에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자주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치고 싶어 하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잠시 잃어버렸던 창조의 목적과 구원의 계획을 따라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 야곱만큼 우리의 흥미를 끄는 인물이 없을 것입니다. 그는 리브가가 이삭에게서 낳은 쌍둥이 중 동생이었습니다. 그녀의 뱃속에서부터 형과 다투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배고픈 형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고(창 25:31), 아버지의 축복을 속여서 취하였습니다.(창27:23절).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야곱은 형의 낯을 피하여 부모와 헤어진 후, 밧단아람으로 정처 없는 도피의 길을 떠나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야곱은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창세기 28장이 증거하고 있는 바와 같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받고 또 서원까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이십 여 년 간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창 31:42). 마지막으로 32장에서는 자신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는 형, 에서를 만나기전 얍복강 가에서의 자기 깨어짐의 경험을 통해 야곱은 인생의 위기에서 다시 한번 하나님을 크게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가 형, 에서와 화해하고 난 후 잠시 정착하였던 세겜에서의 일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세겜은 그가 형과 화해하고 난 후, 잠시 머무르고자 했던 동네였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는 거기에서 상당히 오랜 기간 머물렀습니다. 어린 아이였던 아이들이 장성한 성인이 된 것을 보면, 최소한 10년 이상의 기간을 거기에서 머물렀던 것입니다. 본문의 문맥으로 볼 때에, 야곱은 거기에서 세겜 사람들과 함께 거하며 무역을 하면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창34:10). 오늘 본문은 이 때 일어난 일들을 통해 야곱이 경험하게 된 절망과 두려움의 시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II. 절망과 두려움의 길에서
야곱이 형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도망간 메소포타미아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처절한 고생의 시기였습니다. 계산적이고 야비한 외삼촌을 만나 많은 속임을 당하고 인생의 황금 같던 시기 14년을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얻기 위해 허비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후,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큰 부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에게 있어서 세겜은 잠시 머물고자 한 곳이었으나, 세겜 사람들과 함께 장사하고 사는 동안에 상당한 시간이 흐르게 됩니다.
A. 디나의 강간 사건
이즈음에 야곱의 생애에 가장 가슴 아픈 일들 중 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레아가 야곱에게서 나은 딸, 디나가 그 땅의 추장 세겜에 의해 강간을 당하는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추장은 디나를 사랑하여 결혼하기를 원했습니다. 가슴 아픈 사연을 당한 야곱은 그 때까지만 해도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를 다루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장성한 자신의 아들들이 들판에서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야곱과도 의논하지 않은 채 세겜의 아비인 하몰을 속여 그 족속들 중 남자들이 할례를 받는 조건으로 디나를 주겠다고 거짓약속을 합니다. 그들이 할례를 받고 고통 하여 거동이 불편할 동안에 디나의 오라비인 시므온과 레위는 각기 칼을 가지고 성을 엄습하여 모든 남자를 죽이고 추장과 추장의 아비를 죽인 후 디나를 빼앗아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성에 가서 노략질까지 하였으니, 짐승들과 어린자녀와 아내들까지 사로잡아 왔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의 그러한 감정적 행동은 매우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나안 족속이었고, 그 땅 다른 지역에 사는 족속들에게 이 소식이 알려지면 이방인인 야곱의 식구들은 엄청난 공격을 받을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가문을 멸망으로 데려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이렇게 한탄합니다.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창 34:30).
이제 야곱에게는 큰 두려움이 임했습니다. 인생의 위기마다 재치와 기지로 모면하였고, 또 어떤 때에는 하나님이 그를 도와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한 절망과 두려움의 막다른 골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잠시 후면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들이 자기의 집안을 치러 내려올 것이고, 그리하면 멸망하는 일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뛰어난 모략가였던 야곱의 머리로도 이 절망과 두려움의 막다른 골목길에서 벗어날 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B. 약속의 땅을 생각함
야곱에게 이처럼 고난이 찾아온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항상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동행하심으로 인생의 위기를 넘어오게 하신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야곱에게 이처럼 절망과 두려움을 안겨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됩니다.
첫째로는, 그가 머물고 있는 세겜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그에게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창 31:3)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그에게 누리도록 주신 유업은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은 일찍이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뜻을 가지시고 잠시 밧단아람으로 그를 보내셨으나, 그를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이미 화해한 형 에서와의 약속을 어기면서까지 그를 따라 세일 지방으로 가지 않은 것도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약속의 땅을 향하여 나아가지 않고, 세상의 번영과 형통에 눈멀어 세겜의 땅에 거하였을 때, 그가 누리게 된 일시적인 번영은 후에 그의 마음을 찌르는 칼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더럽히고, 절망과 두려움 속에 난관을 맞이하기까지 그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살았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서있는 거기는 어디입니까? 약속의 땅입니까? 세겜 입니까? 먼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그 유업의 땅을 떠나지 마십시오. 그리고 만일 떠나있다면, 거기로 돌아가십시오. 그것이 인생의 절망과 두려움의 벼랑 끝에 서지 않는 비결입니다.
둘째로는, 그가 세상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세겜에서의 생활이 고통과 괴로움의 연속이었다면, 그는 속히 약속의 땅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번영을 경험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며 여러분은 아마도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떠난 사람들에게도 번영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러나 그 번영은 영혼의 번영과는 상관이 없는 일시적인 육적 번영으로서 베인 풀이 잠시 싱싱한 것과 같습니다. 후일 하나님의 인내가 끝나는 날, 약속의 땅 대신 세상을 사랑한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될 것입니다.
III.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런 깊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창 35:1). 이러한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야곱의 마음에는 변화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가진 인간에게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지성으로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의 지성에 말을 건네실 때에는 언제나 인간의 마음을 사용하십니다. 객관적으로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하든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마음의 상태의 여하에 따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도 하고 듣지 못하기도 합니다. 아주 명백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아니 한 영혼의 어두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생애적인 위기를 만난 이 야곱은 커다란 두려움 속에서 떨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오래전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길을 잘못 걸어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창 35:1).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자녀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지성에 말씀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각과 의지를 분별하고 그 마음을 공유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므로 창조의 목적을 이루고, 믿음의 규칙을 따라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지식에서 자라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많은 말씀은 우리에게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지성이 거짓된 표상에 이끌려 감각에 치우치고, 우리의 마음이 욕정에 굴복할 때에는 더욱 그렇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우리가 현혹되는 감각적인 세상의 질서가 얼마나 헛된 것이고 잠세적인 것인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그것들로 바뀌어 진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하시는데, 우리는 이것을 ‘불행’이라고 부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영원하다고 믿었던 것이 일시적인 것이며, 중요하다고 믿었던 것이 사소한 것이고, 사랑할만하다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만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가장 큰 의무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착하고 부드러운 마음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마음 지킴’이라고 부릅니다.
A. 벧엘로 올라가라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절망의 벼랑 끝에 서있는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벧엘로 올라가게 하신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벧엘은 그의 가족들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벧엘은 그가 홀몸으로 아버지의 집을 떠나 라반의 집으로 갈 때에 하나님을 뵈었던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서원을 한 곳이었습니다. 인생의 위기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명령하셨을까요?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을 생각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그 벧엘에 대해 상세히 설명합니다.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창 35:1). 그곳은 인생의 또 다른 위기 가운데 그가 하나님을 만난 곳이었습니다. 형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외로운 나그네의 길을 가던 절대적인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만나주셨던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인생의 위기 가운데 나타났던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시기 위하여 그를 벧엘로 올라가게 하신 것입니다. 거기는 세겜이 아니라 벧엘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어떻게 나타나셔서 여러분들을 도우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에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 가운데 여러분들에게 나타나셔서 도우셨던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리고 지금 그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의 곤고하던 때, 고난으로 가득 찼던 때, 그러나 주님을 만난 그때를 우리의 신앙의 벧엘로 삼아야 합니다. 절망과 두려움의 막다른 골목에서 여러분의 벧엘을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가 어디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 은총을 지금도 기억하고 계십니까?
둘째로, 하나님께서 벧엘로 올라가게 하신 것은 세겜 사람들과 헤어지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야곱과 그의 집안의 영적인 형편은 여호와를 섬기며 살아가야 할 유일신 신앙을 잃어버릴 위기에까지 다다랐습니다. 구약의 족장인 야곱은 하나님을 아는 계시를 보존하고, 세상에 전파할 수 있는 계시의 담지자(擔持者)였습니다. 연약하고 부족했지만 하나님은 그와 그의 자손들을 통해 온 세상에 구원을 베푸실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갔던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신앙을 그는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이방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그 안에서의 번영을 즐기는 가운데 그러한 신앙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벧엘로 올라가게 하신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세겜 사람들과의 무역을 통해 물질적인 번영을 누리는 것에 만족함으로써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 본분을 잃어버렸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으로부터 멀어진 삶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한 가운데로 파송 받은 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그들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줍니다. 자기 안에 이미 이루어진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보여줌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리워하게 하고, 그 통치 아래 살아가기를 사모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영혼의 깊은 침체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한 맛을 잃어버리고, 이방 백성과 다름없는 상태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잠시 그 세상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떠나 있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마음이 세속적인 일상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은총을 기억하며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거룩한 영향을 받으며, 다시금 그의 마음이 거룩함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차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감격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하는 수많은 반항심들이 먼저 사라지고, 자기 안에 모든 것들이 하나님만을 찬송하고 높이게 되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해 우리는 종종 세속적인 일상에서 떠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소망이 없다는 인식으로 주님의 임재를 갈망하며 간절히 기도하여야 합니다.
B. 단을 쌓으라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단을 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제사를 위한 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야곱으로 하여금 하나님 한 분 앞에 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절망과 두려움의 벼랑 끝에서 궁극적으로 하나님 한 분 앞에 서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부흥의 본질은 그리스도인 각자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마주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 누구도 하나님께 알려지지 않은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의 마음의 묵상과 모든 생각은 하나님 앞에 낱낱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이상의 삶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인식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부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의 진수는 바로 이러한 신적 임재를 느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통해서 우리는 야곱이 왜 그렇게 철저히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게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세겜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임재를 수시로 경험하며 인생길을 걸어왔습니다. 세겜에 온 뒤에도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그 세겜 땅에 단을 쌓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곳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불렀으니, 이는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즉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전까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호칭하던 것과는 대조를 이루는 신앙 고백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한 때 있었던 일이었고,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철저하게 타락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계시를 보존하고 전파하여야 할 그가 세상 것들에 취하여 이방의 빛이 될 사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단을 쌓으라고 하신 것은 바로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의 빛 앞에 비춰 보라는 의미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시대에 적합한 처세술을 배우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서도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지를 터득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임재의 빛 아래서 참으로 영원한 것이 무엇이며, 잠시 있다 사라지는 잠세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해야 할 것과, 사용해야 할 것을 분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만물의 질서를 따라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절망과 두려움의 벼랑 끝에서 죽음을 생각하는 위기에 있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세우시기 위해 부르시는 성심스러운 초청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르고 계시는 한 어떠한 절망의 끝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르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IV. 자신을 준비함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의 영혼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이 놓여 있는 환경을 흔드심으로써 그 마음을 각성시키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적인 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나아가는 준비가 됩니다. 오늘 이 사람 야곱을 보십시오. 그는 이제껏 세겜에서의 번영과 평안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나 절망과 두려움 속에 있는 그에게 하나님은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벧엘로 올라가서 단을 쌓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벧엘로 올라가 하나님을 뵈옵기 전에 먼저 자신을 준비하였습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은 야곱 자신의 말로써 이렇게 전합니다. “......너희 중에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창 35:2).
A. 이방 신상을 버림
첫째로, 이방 신상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가족들에게 이방 신상을 버리게 하였습니다. 이는 야곱의 가정에 이미 이방 신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더욱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방 신상’이라는 단어가 정관사를 동반한 복수, ‘그 이방신상들’(??????? ???????)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들의 집안에 여러 개의 우상들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구약성경의 번역 중 해설적인 성격을 가진 아람어 탈굼(Jonathan Targum)에는 이 이방 신상들을 “세겜 사람들의 신당에서 가져온 신상들”이라고 토를 달고 있습니다. 고고학적인 자료에 의하면 그 시대에는 큰 신상들 뿐 아니라, 몸에 지니고 다니는 작은 신상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상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야곱이 버리라고 하는 신상들도 그런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들이 자기 손에 든 이방 신상을 야곱에게 넘겨주었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왜 이런 이방 신상들을 몸에 지녔을까요? 야곱은 언약의 족장이었고, 그들의 가정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는 가운데 숱한 환란과 위기를 지나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데 말입니다. 그들이 이방 신상을 지니게 된 것은 적어도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첫째는 세겜 사람들과의 교류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들과의 교역과 친교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그들의 문화가 야곱의 식구들에게 흘러들어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문화 한 복판에는 그들의 농경생활에 도움을 준다고 믿었던 신들에 대한 경배가 있을 것입니다. 아마 그들의 신전에서의 경배행위를 종종 참관하는 가운데 그런 신상들이 흘러 들어왔을 것입니다. 둘째는 농경사회를 통해 비쳐지는 번영에 대한 바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평생을 유목생활로 떠돌던 야곱의 집안보다는 월등한 문명을 누리고 있었을 그들의 땅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그들은 세겜 사람들과의 친선을 통한 번영을 꿈꾸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기서 “이방 신상”이 의미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사랑”입니다. 절망과 환란의 벼랑 끝에서 들린 하나님의 음성을 통하여 야곱이 깨달은 바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와 가족들 안에 뿌리내린 세상 사랑이었습니다. 그렇게 감격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던 야곱이 이처럼 깊은 영혼의 침체에 빠진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가나안을 돌아가는 길에 머무르게 된 세겜에서의 십 여 년의 생활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무슨 획기적인 타락이 있었다면 성경이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냥 거기서 살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하나님의 임재와 마주하였던 신앙의 감격은 아주 천천히 사라지고, 대신 세상에 대한 사랑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라났던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무겁게 짓누르는 힘은 단지 결핍으로 가득 찬 환경이나 죽음의 두려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자기 사랑의 발로인 세상 사랑 밖에는 없습니다. 신자의 영혼은 하나님만을 사랑할 때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마땅히 사랑하여야 할 하나님 대신, 그분을 섬기기 위하여 사용하여야 할 사물들을 사랑하는 것은 영혼의 고통이며 속박입니다. 그분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은 부자유함을 느낍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마음의 자유를 위하여 품은 바 욕망을 실행합니다. 그러나 그 욕망대로 살기 위하여 불순종하게 되면 이것은 곧바로 우리의 양심과 영혼을 속박하여 내적인 자유를 앗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속임’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고 세상을 따르자는 극단적인 배교의 유혹이 아닙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함께 사랑하자는 유혹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유익과 세상으로 받는 유익을 함께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만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그런 온전한 사랑의 교제 자체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교제, 가족과 같은 사귐에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할 때 온전한 순종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온갖 육욕의 욕망을 따라 생겨하는 원천적인 정욕과 창조목적을 거스르는 수시적인 욕망을 하나님의 더 크고 완전하신 목적에 합치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목표의 합치는 실로 사랑이외에 아무 것으로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악’(惡, malorum)이란 바로 이처럼 사랑하여야 할 바 하나님은 버리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식솔들이 지닌 우상들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힘으로써 번영과 행복을 얻어 보려는 그들의 소망을 반영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길에 야곱은 그러한 마음이 그분의 임재 앞에 서기에 적합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 버리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모든 복의 근원되신 하나님만을 인정하던 아브라함과 이삭의 신앙 고백, 그리고 지나간 날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던 때의 자신의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아, 우리 안에 있는 질기디 질긴 세상 사랑을 봅니다. 우리가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지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우리가 행복하게 되는 길에 신앙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던 때가 얼마나 자주 있는지요? 그러나 하나님만이 “만복의 근원” 되십니다. 하나님 밖에서 번영하려고 하였던 모든 시도들을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보다도 더 사랑하던 것은 무엇이었든지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우리가 미래의 번영을 욕망한다면 그럴 수 있지만, 과거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해 오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죄 가운데서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고 유리하던 우리를 찾아오셔서 아들이 흘리신 보혈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끝없이 불순종하고 죄 지은 우리들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인생의 위기 때마다 베풀어 주신 그 크신 구원의 역사를 통하여 당신의 신실하심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곤고할 때마다 베풀어 주신 무한한 은혜의 공급이 있었기에 메마른 땅을 걷는 것 같은 순례의 길에서 아주 엎드러지지 않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헛된 세상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 배신을 당한 채 추루한 영혼으로 살던 날은 지난 날로 족합니다.
절망과 두려움의 벼랑 끝에서 다시 하나님을 만나고 싶지 않으십니까? 다시 한 번 벧엘의 감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하나님 밖에서 번영을 꿈꾸었던 것을 회개하십시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던 모든 삶을 참회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을 부르시는 벧엘로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B. 자신을 정결케 함
둘째로, 자신을 정결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벧엘로 올라가기 위한 준비로서 가족들에게 지시되었습니다. ‘정결케 하고’(????????). 이 동사는 특별히 제의적인 불결(왕하 5:10), 도덕적 불결(렘 13:27), 이교적 더러움을 제거하는 의미를 가진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레 11:32). 이 단어는 신약성경,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팔복의 가르침 가운데 나타나는 ‘청결함’의 구약적인 배경을 이루는 단어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여기서 ‘청결한 자’라고 번역된 단어가 바로 ‘카탈로이’(κ?θαροι)인데 이는 원래 ‘(물 같은 것으로) 씻어 낸’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마음이 청결한 자는 자연적 품성 상 깨끗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으로 그 마음이 씻겨 정결하게 된 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에서 이러한 정결의식들이 지향하는 바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었습니다. 더러운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한 몸과 마음의 준비였습니다. 이처럼 이방 신상을 제거하는 것이 그릇된 사랑의 대상을 제거하는 것이라면, 자신을 정결케 하는 것은 우상숭배의 죄로 더러워진 마음을 씻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딸 디나가 강간당한 사건과 시므온과 레위의 만행으로 인하여 서게 된 절망과 두려움의 벼랑 끝에서 각성된 영혼으로 자신과 가족들 안에 있는 불결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특별히 큰 범죄를 저지른 기록은 없으나 세겜에서의 번영과 형통함 속에서 야곱과 그 가족들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이방의 불결한 습속(習俗)들에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와 그 좋은 평강은 모두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그 평화는 신자의 정결한 마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이중적입니다. 원리적인 평화는 최초의 회심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평화는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청결한 마음’은 단지 욕망을 비운 마음이 아닙니다. 신자의 마음의 순결은 무욕(無慾)의 상태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찬 상태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살펴보십시오. 삶의 벼랑 끝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며 기도하고 싶으나 우리의 마음은 부르짖음에 미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긴박한 처지가 되어도 우리의 마음에 순결함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간구는 허공 중에 메아리가 될 뿐입니다. 죄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는 하나님 자신을 갈망하는 자이며, 그 마음은 곧 하나님 자신을 갈망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는 순결을 향한 갈망이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러한 불결이 있으면 제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의 정결함을 얻고 하나님을 뵈옵기 위해 다시 피의 제사를 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의 공로를 의지하여 이미 드려진 제사의 덕을 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제물은 쪼갠 짐승의 살과 피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한 참회의 마음입니다. 진실한 참회와 자기 깨어짐의 통회로써 모든 마음의 불결과 더러움을 회개의 눈물로 씻어내는 것입니다. 능력보다 더 큰 가치는 진실입니다. 거짓된 자의 뛰어난 능력과 많은 재물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십니다.
C. 의복을 바꿈
셋째로, 의복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이방 신상을 제거하는 것이 사랑의 대상을 버리는 것이고, 자신을 정결케 하는 것이 심령의 불결로부터 깨끗하게 되는 것이라면, 의복을 바꾸는 것은 불신앙의 습속에서 돌이켜 경건한 행실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학자 크나벨(Knabel)의 지적대로 그들이 먼 길을 걸어서 벧엘에까지 여행하기 위해서는 흔히 입는 평상복에서 다른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옷을 갈아입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구역 성경에서 옷은 그 사람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통절한 참회나 혹은 의로운 분노의 때에 자신의 옷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광이 사라졌음을 표하는 것이었습니다(삿 11:35, 왕하 5:7). 성도의 경건하고 의로운 행실을 의복에 비유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8).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라오디게아교회의 행위 없는 신앙을 가리켜 ‘벌거벗은 수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절망과 두려움의 막다른 골목길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까지 그는 세겜 땅에서의 번영과 안일한 삶에 취하여 자신이 벌거벗은 줄도 몰랐습니다. 언약 백성으로서 구원 계시의 담지자(擔持者)로서의 거룩한 소명을 잃어버린 채 이방 백성들과 어울려 그냥 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성도로서의 아름다운 지위를 따라 본분을 다하는 삶을 살지 아니하였습니다. 오늘 야곱이 자신의 가족들에게 옷을 갈아입으라는 권위 있는 명령은 세상에서의 성공과 번영에 취하여 성도의 거룩한 삶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명령이기도 합니다.
절망과 두려움의 벼랑 끝에 선 불쌍한 죄인들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은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신 구속의 공로를 인하여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실로 그것은 죄인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생의 갈림길에서 당신을 만나러 벧엘로 올라오는 성도들에게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거룩한 열망도 없이 나태하고 부패한 습속에 빠진 지리멸렬한 생활로부터 돌이키고자 하는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길에서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어찌 할 수 없어 그분의 은총을 구하는 이들에게 나는 말합니다. 먼저 오래된 불순종의 길에서 돌이키십시오. 선한 의지를 가지고 옳은 길을 선택하십시오. 그리고 그 옳은 선택을 따라 살 수 있기 위하여 은혜를 구하십시오.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마음의 경향성은 곧 의지의 선한 선택이며,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오고자 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그 선택을 따라 살게 하시는 거룩한 사랑의 감화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자신의 삶을 돌이키며 당신의 얼굴을 구하는 자를 만나주십니다.
V. 결론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절망과 두려움에 있는 자들을 부르십니다. 우리의 진정한 희망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은 천지 창조의 목적이신 선(善)자체이시며,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항상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 구원의 목적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희망이 됩니다. 야곱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약속의 땅으로 가던 걸음을 멈추고, 세겜에 머무르며 절망과 두려움 속에 고통하였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은 어디입니까? 우리가 거기로 올라가야 합니다. 절망과 두려움이 가득한 우리의 인생의 길이 희망과 기쁨의 길이 될 것입니다.
나눔의 시간
1. 지난 주간의 말씀 “침체와 회복의 갈림길에서(시 107:10-14)”를 듣고 실천했던 삶이나 한 주간 받은 은혜를 말해 봅시다.
2. 하나님께서 침체에 빠진 야곱을 각성시키시고, 그 마음을 낮추신 방법에 대하여 나누어 봅시다.
3. 절망과 두려움에 가득 찬 인생의 갈림길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처음 들었을 때, 야곱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요? 그리고 두 가지 명령은 무엇이었습니까?
4. 벧엘로 올라가기 전, 야곱은 어떻게 자신을 준비하였습니까?
5.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땅에 대해서 나누어 보고, 하나님께서 이 설교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교훈들을 이야기해 봅시다. 2006-09-10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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