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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로 평화를 이루심

로마서 김남준 목사............... 조회 수 2386 추천 수 0 2012.04.10 23:4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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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5:10 
설교자 : 김남준 목사 
참고 : 열린교회 http://www.yullin.org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는 길 2 -십자가로 평화를 이루심 

2006-11-12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롬 5:10).

인간의 행복에 있어서 제일의 필수조건은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이것 없이 인간은 무엇으로도 영속적인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이 모든 악과 불행은 궁극적으로 인간들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상실한 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I. 본문 해설

 

사도는 로마서 1장에서부터 본문에 이르기까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이신칭의(以信?義)의 교리를 역설해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평화를 기초로 영광의 소망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확신 있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5장에 와서 사도는 그런 신자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할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이런 하나님과의 평화는 원리적으로는 단번에 심겨집니다. 중생과 함께 회심을 통해 우리에게 심겨지는 이 평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이 세상에 살면서 이 평화를 실제적으로 계속 누리는 일은 끊임없는 자기 복종과 순종을 요구합니다. 그러하기에 사도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이러한 환란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화평은 누리는 자로서 바라볼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이런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제적인 평화를 누리면서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사도는 다시 한 번 구원받기 전에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연약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우리의 구원을 도울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본질상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죄인이었다는 것입니다(6-7절). 여기서 우리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 자들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II. 비중생자의 영혼

 

A.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

 

사도는 지금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회고합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10절). 이것이 바로 거듭나지 않은 우리의 옛 상태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누구도 그분과 맞설 수 없지만,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거스르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본성상 이처럼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물론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도 하나님이 주신 양심이 그들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나쁘다는 사실도 알고, 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더욱이 인생에서 실패를 경험할 때,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어려운 일을 당한다고 생각하고 겸손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감히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라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식하는 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을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로 언급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골 1:21-22). 또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롬 8:7). 그러므로 모든 자연인(natural man), 곧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B.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

 

이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며 원수 된 상태에 있는 것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본질입니다. 그의 영혼과 마음, 그리고 그의 모든 뜻과 행동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대적 속에 있고, 그 영향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2-3).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무리 그분을 대적하며 원수로 행하다 할지라도 아무런 영향을 받으시지 않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자신 안에 있는 적대감으로 인하여 부질없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적대 행동에 의해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들은 그러한 적대적인 행동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그들에 의하여 이 세상에 실현하려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가 영향을 받고, 또 교회와 가정의 질서가 무너지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는 선한 이웃들이 고통을 받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이 비중생자로서 하나님을 대적한 모든 행동들에 대해 진노하십니다. 지금은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예전에 우리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 보다는 우리의 육체의 욕심에 따라 지내는,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대로 행하며 자신의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불화(不和) 속에 살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III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식

 

거듭나지 않은 세상 사람들과 교회에 출석하고는 있으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겉보기에는 매우 다른 사람들로 보일런지 모르나 본질에 있어서는 똑같이 하나님과 원수 맺고 있습니다. 그들이 비록 교회 안에서 기독교적인 예의와 범절을 익히고 생활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써 그들의 마음과 영혼의 본질이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본질적인 정체는 하나님과 맞서는 원수의 상태입니다. 그러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A. 사물에 대한 판단

 

첫째로, 그들은 하나님과 사물에 대한 판단(judgment)에 있어서 하나님과 원수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모든 사물을 판단함에 있어서 하나님 편에 서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전제(前提)에 의해 모든 사물들을 판단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최고의 궁극적인 가치이고 자신의 인생의 목표라는 사상 아래 모든 것들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을 가장 높고 중요하게 생각하려는 교만이 모든 판단의 근원이 됩니다. 사람이 누구와 원수 맺게 되면, 그는 원수에 대해 비록 좋은 것을 발견할지라도 가장 비열한 생각을 갖거나 그 좋은 것을 옳게 판단함에 있어서 인색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께 대해 매우 저속(低俗)하고 비열한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종종 하나님 앞에 어떤 경의(敬意)와 존경을 표하거나 사랑하는 것처럼 가장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사상과 충돌을 일으키거나 하나님이 자신을 다루시는 손길이 자신의 마음에 기쁨이 되지 않을 때에는 여지없이 하나님과 원수 된 본성을 드러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말은 이것입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겠느냐”(출5:2).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물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 가치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나 영광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한에 있어서 하나님께 공손한 예의를 갖춥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자신의 사상과 욕망이 하나님의 그것과 충돌할 때에는 대담하게도 하나님을 보잘 것 없는 존재로 판단하고 자신의 뜻과 욕망을 따릅니다. 그 경우에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매우 하찮은 존재가 됩니다. 거듭난 신자라 할지라도 죄 가운데 있을 경우, 수시로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여 하나님을 하찮은 존재로 여기는데,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이 세상에 속한 비루(鄙陋)한 것들을 위해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께 속한 교회와 은혜의 수단들을 가볍게 여기는 일들이 얼마나 자주 일어납니까? 이것은 그들의 모든 판단에 있어서 하나님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있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증거입니다.

 

B. 본성의 취향

 

둘째로, 저들은 본성적인 취향(natural relish)에 있어서 하나님과 원수 됩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특히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대해 생래적인 불쾌감과 적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해 무지하지만, 때로는 본성의 빛에 의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거받기도 하고, 교회에 출석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시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완전하신 성품은 그들의 취향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영원하시며, 불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와 섞인 적당한 삶을 좋아하고, 끊임없이 변전(變轉)하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영원한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 세상의 나라를 유업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품이 지향하는 그 모든 완전함과 영원함, 그리고 불변함은 그들의 본성적 취향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거나, 거기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기뻐할 수 없습니다. 거듭난 사람의 결정적인 특징은 하나님의 성품들을 숙고하고, 거기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더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힘겨운 노동이며, 노예적인 속박이고, 힘겨운 강요입니다. 그들에게 이처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긴 설교를 듣는 것은 좀이 쑤시는 일이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에 대하여 목 매이는 신자들을 보는 것은 견디기 힘들도록 부담스럽고, 때로는 불쾌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이 신자들에게는 크나큰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 사실이 대단히 거북하고 짜증스러운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과 마음은 하나님 앞에 모두 알려지기에는 너무나 세속적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에게 있어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그러나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전혀 기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본성상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자신들을 위한 능력이 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이처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이끌리는 취향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도의 공동생활에서 오는 아름다움과 행복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싫어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지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그들이 하나님과 원수 된 증거입니다. 이 시간,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묻겠습니다. 그대들이 과연 하나님을 기뻐한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어떤 외적 조건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뻐한 적이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들을 발견하고, 그 성품 때문에 위로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 때문에 자신의 죄인 됨을 슬퍼하고, 그 자비하심 때문에 소망 중에 온전해지기를 갈망했던 적이 있습니까? 이따금 하나님의 말씀에 깨어나는 것 같아도 그것이 곧 여러분의 본질이 변하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거의 기도하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마음으로 드리는 은밀한 기도의 즐거움을 압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의 생활을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현재적인 은혜를 공급받습니다. 그러한 은혜의 공급 없이도 넉넉히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임을 입증하는 것이니, 이는 자신들이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날 거듭나지 않은 채 하나님과 더 이상 가까워지지도 않고, 멀리 떨어진 채 살아가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그러합니다.

 

C. 의지의 방향

 

셋째로, 그들의 의지(wills)는 하나님의 의지를 거스르는 방향으로 작용합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지를 잘 알지 못하며, 또 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의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 있는 의지의 방향과 그들의 의지의 방향이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의지의 방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죄인들은 그 목적을 따라 사는 일에 대해 강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슬퍼하시는 일들에 대해 의지를 발동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의지와 맞섭니다. 결코 꺾이지 않는 단호함과 꿋꿋함이 거듭나지 못한 죄인들의 의지에 있습니다. 때로는 그것의 행사가 무시무시하고 폭력적이며 지속적입니다. 자신의 취향과 이익,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충돌하는 하나님의 의지에 대해 완고하게 항거(抗拒)합니다. 이것은 모두 그들의 영혼 안에 하나님과 원수 된 경향이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원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으니, 중생과 회심을 통해 하나님은 이들의 의지를 꺾으시고, 당신의 의지를 받아들이게 하시는 것입니다.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방식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에 녹아지는 방식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그 의지가 하나님께 굴복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원수를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 원수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도 더욱 강하게 그 강함에 맞섭니다. 파멸에 이를 때까지 말입니다.

 

D. 정서의 움직임

 

넷째로, 정서(affections)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원수 됩니다. 인간 정신의 크기는 감성과 지성의 크기입니다. 그리고 감성은 육체의 감관을 통해 외부의 사물들을 감각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감성능력이 큰 사람은 남과 똑같은 사물을 보고도 많은 것을 지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성은 그렇게 지각하게 된 것들을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인식하고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정서란 육체의 감관으로 사물들을 볼 때, 마음의 정(情)이 움직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정서의 작용을 변정(變情)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이 거듭난 사람들과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사물들을 볼 때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과 똑같이 육체의 눈으로 보지만, 그것이 마음속으로 지각될 때에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아름다우심, 그분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물들의 질서,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통치에 부합하는 자신의 삶의 의무와 같은 그러한 틀과 방향에 의해 사물들을 지각합니다. 예를 들어 거듭난 신자가 산을 보며 창조주의 위대하심과 자신을 향한 도우심을 인식했던 것이 바로 그런 예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시 121:1).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거듭난 사람들과 같이 육체의 감관으로 사물을 보지만,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 그분의 통치, 그분의 아름다우심, 그분에 대한 인간의 의무와 같은 틀에 의해 사물들이 지각되지 않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끼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끊임없는 정욕과 육체적인 충동, 세속적 번영에 대한 갈망이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그들의 정서가 영향 받음에 있어서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서의 움직임은 그들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그 본질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종교지도자들은 교회 속에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정서의 움직임은 하나님과 원수 됨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에 출석하고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여러분들의 영혼이 거듭나지 않았다면, 여러분들의 정서의 움직임은 하나님과 원수 일 수밖에 없으며, 악의에 가득 차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여러분들의 눈에 들어오는 그 많은 사물들을 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했던 적이 얼마나 됩니까? 그 성품의 아름다우심 때문에 감격했던 적이 얼마나 됩니까? 눈에 보이는 것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세상의 사물들인데, 그것을 통해 아름답고 영원하시며, 불변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 적이 있긴 있었습니까? 여러분들에게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이러한 정서의 움직임들은 사실은 신자로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너무나 일상적이고 필수적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들의 정서의 움직임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원수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자의 마음은 마귀와 같은 마음입니다. 그 부패함과 더러움의 발동이 마귀들보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훨씬 더 많이 억제되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의 덕입니다.

 

E. 실제적인 행함

 

다섯째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실제적인 행함(practice)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원수 됩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은 수시로 행동으로 표출됩니다. 의지가 마음의 욕구를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면, 이 의지는 끊임없이 실제적인 행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을 실행하려고 합니다. 이는 마치 뿌리에서 쏟아나는 새싹과 같습니다. 뿌리가 살아있는 한 그것이 성장하여 잎과 가지를 내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의지의 지속적인 성장은 실제적인 삶으로 더 많이 나타나게 되고, 삶을 통한 실천적인 불순종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의지를 더욱 강화합니다. 이는 마치 땅에 심겨진 식물이 살아있는 뿌리를 통하여 성장하고, 성장한 잎과 가지와 줄기를 통해 양분을 공급받아 뿌리가 성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둘은 매우 밀접하게 결합하여 움직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이처럼 실제적인 행함에 있어서 하나님과 원수로 행동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억제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실제적인 행함은 더욱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로 그것들을 억제하심으로써 이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게 하시고, 교회 안의 질서도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표출하는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는 실제적 행동의 심각성은 거듭났으나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의 경우를 통해서도 잘 추론됩니다. 참으로 거듭나 신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은혜의 공급도 없고 말씀과 참회와 기도 생활을 잃어버린 채 살아간다면, 그들 속에 역사하는 죄의 힘은 매우 심각합니다. 그래서 종종 그들은 자신이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니 전혀 거듭난 적이 없는 비중생자들이 드러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실제적인 삶은 얼마나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그들이 설사 은혜에서 미끄러진 성도들보다 조금 더 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을 그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IV. 화목의 길: 십자가

 

이제껏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된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로서 하나님과 원수 맺고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가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지도 알아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절망적인 상태에서 하나님과 원수 맺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다시 평화를 누릴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서 성경은 말합니다.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롬 5:10下). 사도는 이 말씀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원수 된 죄인들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희망은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A.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의 희망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이 그처럼 엄청난 심판을 초래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아무 희망이 없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이 그렇게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있었으나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동기는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나, 죄로 말미암아 그렇게 비참하게 또 다른 죄를 선택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아름답고 완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창조 세계는 그 영광스러운 광휘(光輝)를 잃어버렸고, 그로 말미암아 창조주 하나님께 미친 손해와 불명예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진노 가운데 긍휼을 잊지 않으셨으니, 범죄한 그들을 즉시 멸하지 않으시고,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죽어간 수많은 짐승들은 바로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되어 도저히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죄인들을 일시적이나마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돕기 위한 은혜의 방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처지에 있는 인간들을 긍휼이 여기셔서 자신들의 힘으로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과 그 뜻을 알리셨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그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도록 초청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애정 어린 초청을 받아들이고 다시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며 하늘 자원을 공급받는 가운데 살아가나,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초청을 완강히 거부하며 하나님과 원수로 살아가기를 고집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믿고 복종하기 보다는,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을 허락하는 또 다른 신들을 상정(想定)해 내고 하나님께 돌릴 경배를 그들에게 돌렸으니, 이것이 곧 우상 숭배였습니다. 그러한 우상숭배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행복이었기 때문에, 우상숭배는 곧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의 마음속에 있던 탐심을 섬기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 3:5)라고 말하였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외치다 죽어간 수많은 선지자들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과 원수 된 인간들의 욕망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하나님과 원수 된 인간들을 위하여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 스스로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면 그 구원을 받아들일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으니, 이는 곧 원수 되었던 그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셔서 하나님과의 평화 가운데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화목을 위한 유일한 희망이십니다.

 

B.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화목

 

둘째로, 하나님과의 평화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를 맺고 있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 안에 있는 모든 죄는 그 크기에 있어서 무한하며, 따라서 그에 대한 징벌도 영원하고 무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들이 청산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과의 어떤 화목도 없으며, 이런 상태에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사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구속받아야 할 모든 인간들과 같은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들이 종종 있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기를 택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죄인인 인간들 중 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죄 없고 흠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사람 되심이 하나님과 원수 된 모든 인간들의 사람됨과 같지 아니하였으니, 그의 죽으심도 다른 인간들의 죽음과 같을 리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또한 참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참 사람으로서의 모본을 보이셨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셨지만, 궁극적으로는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죄인들을 향한 말할 수 없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V. 십자가의 화목을 받아들이는 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처럼 하나님과 원수 된 채 살아가는 절망적인 죄인을 향한 화목에로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파괴하고 스스로 좋으신 하나님과 원수 맺게 된 것은 인간이었지만 화목의 손을 내미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의 초청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6-18). 이처럼 십자가를 통하여 제시된 하나님과의 평화를 받아들이는 길은 무엇일까요?

 

A. 회개함으로써

 

첫째로,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향한 대적이니, 누구든지 죄를 마음에 품은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 맺는 것입니다. 더욱이 아직 회심과 중생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은 더욱 더 완고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어떤 평화도 수립한 적이 없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진 화목 아래서 살아간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적의(敵意)는 반감(反感)과 대적(對敵)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그것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살았던 모든 죄들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양심으로 하여금 그 죄책을 감당하게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명백하게 명령하신 것들을 거부하고 불순종한 것과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서슴없이 행했던 모든 악한 행동들에 대하여 회개할 뿐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악한 것들을 뉘우쳐야 합니다.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창조주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하기에 모자랐던 무능(無能)이나 혹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고 했던 악한 의지의 행동들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하게 만들었던 자신의 악한 본성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에 대하여 참회하여야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신의 영혼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너무나 가볍게 하나님으로부터의 축복을 말하고 평화를 말하는 것은 참으로 모든 기독교의 진지함으로부터 이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을 회개하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는 그 죄인들을 향한 진노라기보다는 진노 받을 죄인들을 사랑으로 부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성심스러운 초청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까지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은 여러분들이 회개하기만 하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도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면 모두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는 모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가득 있으니, 그것을 찾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얻기 전에 하나님과의 평화를 수립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말합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1-32).

 

죄에 대한 진지한 회개는 단지 자신의 죄를 아는 것도 아니고, 분명한 지식도 없이 종교적인 슬픔의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신의 처지를 인하여 다급히 하나님께 좋게 보이려고 취하는 행동은 더더욱 아닙니다. 회개는 다음의 세 요소를 포함합니다. 첫째로, 지성적인 요소입니다. 먼저 자신의 죄에 대하여 명확한 인식을 갖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에 대한 진지한 숙고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죄에 대한 자신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숙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려는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죄를 진지하게 생각할 뿐 아니라, 성령께서 자신의 마음의 눈을 열어 자기의 죄를 정당하게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진지하게 간구하여야 합니다. 둘째로, 감정적인 요소입니다. 죄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법에 비추어 보면 그 죄에 대한 형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자신의 죄를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신의 악함에 대한 생각에 이르게 합니다. 그리고 무엇으로도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나타난 자신을 도울 길이 없음을 깨달아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이 때 그는 범죄함에 대한 깊은 슬픔이 밀려오게 됩니다. 죄인들은 거기서 멈추지 말고 그 죄를 복음 앞으로 데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말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거스르고 불순종하면서 악하게 살아온 나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일이 무엇인가? 그분이 바로 나 같은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으셨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죽이시면서까지 나를 부르지 않으셨는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온 예배당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내가 아직도 회개하지 않고 있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어떻게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마음 밖에 세워 두고 홀로 문을 두드리며 기다리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그분을……. 하나님을 거스르고 불순종하며 살아감으로써 내가 얻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님과의 평화의 상실과 죄로 인한 양심의 가책 밖에 무엇을 얻었다는 말인가?” 셋째로, 의지적인 요소입니다. 곧 그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의지적인 마음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죄를 미워하고, 완전히 새로운 순종을 결심하고 노력하면서 그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우리의 전 인격적인 작용인 것입니다.

 

B. 믿음으로써

 

둘째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고 다시 사셨으며, 그분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이시고,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누구의 강요에 의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한 믿음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일 수 없습니다. 이 믿음은 누구의 강요나 억압이 아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심어린 의지의 동의이며, 마음 깊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즉 하나님은 죄인을 향한 주권적인 은혜의 자비의 방식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분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것에 의해 자신의 모든 삶이 재편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믿음은 자기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구원의 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며 붙잡았던 이 세상의 길과 가치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물질이나 소유, 지위나 학문,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그 어떤 것을 통해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던 이전의 모든 가치관을 그릇된 것이라 생각하고 버리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유일한 구주시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이 믿음은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뢰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그가 예전에 의지하던 모든 것들에 대한 포기를 의미합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확신하고, 그분 외에는 구원받을 길이 아무 곳에도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 밖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부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이나 지위들을 이용은 하겠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을 의지하지 않겠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자신이 의지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라는 고백이며,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은 삼위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지입니다. 이를 통하여 인간은 참으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범죄하기 전의 인간에게도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 온 이후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만드는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감정은 처음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을 보시고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며, 화목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선물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수여하시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믿고자 하는 자에게 믿음을 주시고, 당신을 의지하고자 하는 자에게 의지할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아무리 오래 출석하였다고 하더라도 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사람들이 저절로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일은 매우 희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자들에게 스스로를 보여주시고,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VI. 회심으로 나아오라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의 영혼의 상태가 이처럼 비참하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회심하지 않은 죄인들이 자신의 죄와, 그 죄의 결과로 비참하게 된 자신의 처지와, 미래의 심판적 결과를 미리 인식하는 것만큼 복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자신의 죄에 대한 공정한 인식이 없이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올바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는 진노하시는 분이시지만, 그 죄 가운데서 슬퍼하며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를 원하는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죽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그 죄에서 건져내기를 원하셨습니다. 가장 더러운 죄인이라 할지라도 돌이키는 자를 무한한 사랑으로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이 사실을 입증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고자 하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엄격하심 밖에 보이지 않지만 진심으로 회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비가 더 큰 소망이 됩니다. 이제 참된 신앙의 주변인으로 살던 허무한 삶에서 돌이켜 그리스도의 품으로 회심하기 바랍니다. 영원한 생명과 은혜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눔의 시간
1. 지난 주간의 말씀 “교회가 평화를 누릴 때(눅 19:28~44)”를 듣고 실천 했던 삶이나 한 주간 받은 은혜를 말해 봅시다.
2.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는 원리적인 방법과 실제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환란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화평을 누리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3. 비중생자의 상태는 본질적으로 어떤 상태에 놓여 있습니까? 비중생자의 판단, 본성의 취향, 정서, 의지와 실제적인 삶은 하나님과 세상과 자기 자신에게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말해봅시다.
4. 거듭난 사람의 결정적인 특징은 무엇입니까? 최근에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새롭게 깨닫고 경험하게 된 점이 있다면 말해봅시다.
5.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이자 화목의 길은 무엇입니까? 제시된 이 화목의 길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길은 무엇입니까? 2006-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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