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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9:24-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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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우리가 꿈꾸는 기적
요9:24-27
2010.1.3
우리는 [기적]으로 새해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작지만 아름다운 기적이 쉴 새 없이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 그리고 모든 성도들의 삶에 일어나길 소망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새벽부터 다음 주 새벽까지 참회의 여드레를 지내면서 '예수님과 기적'을 면밀히 살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을 통해 우리의 삶에 적용할 실마리를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다가, 나면서부터 보지 못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묻기를, "선생님,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인가요? 이 사람이 지은 스스로의 죄 때문인가요?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에 그런 건가요?" 참으로 무서운 생각이며 말입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거지로 살아야 하는 것도 서러운데 죄인의 굴레까지 씌우니까 말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인심인가 봅니다. 모든 일을 원인과 결과의 틀에 끼워 맞춰서, 사람의 불행은 그의 죄 때문이라고 하고,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면 그의 부모의 죄, 그것도 안 되면 그의 전생의 죄까지 찾으려는 게 당시의 풍습이었습니다. 여하간, 제자들이 그런 고정관념을 따라 질문을 하자 예수님이 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시려는 것이다."(3절).
전혀 다른 눈입니다. 세상의 통념을 가로지르는 생각입니다. 한 사람의 불행을, 그의 죄 탓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드러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입니다. 우리도 이래야 '예수다움'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서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기적 이야기는 언제나, 하나님의 베푸심이 없이는 더 이상 살 수 없는, 더 할 수 없이 불행한 사람과, 그 불행을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기 위한 것으로 보는 예수의 마음이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어려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그 사람의 간절한 바람, 그리고 예수 사랑과 능력이 한데 어우러지는 곳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다시 기적이 일어나는 현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고, 그에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합니다. 실로암 못은 예루살렘 성 아래 골짜기로 한참 내려가야 나오는 곳이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혼자 가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실로암'이라는 샘물에 대해서만 신비감을 갖지만 사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못으로 가는 과정이 그에게는 더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곳에 갔는지 모르지만,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는 그곳에 가서 눈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눈이 밝아져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어찌하여 예수님은 즉석에서 명령만으로 그를 고치지 않고 그렇게 힘든, 어떻게 보면 그가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가라고 했을까요? 능력 있는 명령 다음에 병이 낫고, 지켜보던 사람들이 놀라며, 찬양을 하는 것이 전형적인 기적 이야기의 틀 아닙니까? 그런데 이 사건은 그런 틀을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초능력자고 병자는 그저 수동적으로 병 고침을 받기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권위 있는 명령을 내리는 대신에 꼭 민간요법 같은 것을 하십니다. 더욱이 그의 눈이 밝아진 것은 그 즉시가 아니라, 실로암 못가에 가서 씻은 다음이잖습니까?
저는 이 장면을 볼 때 제 어릴 때 생각이 떠오릅니다. 눈에 작은 티라도 들어가면 할머니는 내 눈 까풀을 뒤집어서 세게 입 바람을 불어서 티를 빼내주시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안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 때 할머니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갑자기 당신의 혀를 쑥 내밀어서 내 눈을 핥으셨습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놀라기는 했지만 티는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때 생각을 하면 할머니의 그 뜨뜻한 혀와 질퍽한 침의 감촉이 아스라이 살아납니다.
그 눈먼 사람이, 실로암 못 가에 가서 눈이 밝아 졌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무엇이었을까요? 볼 수 없던 그였습니다. 그래서 감각은 보통 사람보다 몇 배나 예민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침으로 진흙을 개서 그의 눈에 발라 주던 예수님의 손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대로, 예수님이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마치 원격 조정하듯이 명령만으로 그의 병을 고쳤다고 하면, 그에게는 그렇게 깊은 인상이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병은 고쳤겠지만, 한 인간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뜨거운 감정은 없었을 거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의 눈을 만져준 예수님의 손과 눈가에 촉촉하게 묻었을 그 침의 감촉을 그가 잊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단지 진흙이 아니었습니다. 침으로 갠 진흙을 그의 눈에 바를 때 이미 그와 예수는 거리감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입니다. 이 기적 사건은 초능력자 예수가 리모콘으로 명령하듯 벌인 사건이 아니라, 눈에 진흙을 이겨 바르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끈적끈적한 사랑으로 인해 눈먼 사람이 눈을 뜨는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실로암 못까지 가라고 했을 때, 그는 처음으로 설레는 가슴으로 그곳까지 갔을 것입니다. 그는 전에도 그곳에 가 본 적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전에는 이번처럼 그렇게 소망을 가지고 그 길을 걷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같은 길도 소망을 가지고 가는 길과 그냥 가는 길은 다릅니다. 고생하면서 소망 중에 갔습니다. 그리고는 못에 눈을 씻고 나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의 감격은 수동적으로 가만히 앉아서 리모콘 같은 기적으로 눈이 떠졌을 때와는 달랐을 것입니다. 그 자신도 무언가를 했다는 느낌, 그도 기적에 참여 했다는 그런 뿌듯함이 가득하지 않았을까요? 자기는 없고 누군가에게서 덤으로 시작된 삶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존재감이 솟구쳐 올랐을 거라는 말입니다. 드디어 그는 '나'를 알기 시작한 것이죠.
그가 집으로 돌아가자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이다저다'말이 많았습니다(8-9). 이런 말들은 그가 얼마나 몰라보게 변화 되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죠. 그들은 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예측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일어난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어려웠습니다. 이것 참 이상한 일입니다. 자기 일이 아닌데도 이렇게 받아들이는 일조차 어려운 것은, '죄'라는 고정 관념 때문입니다. 그렇게 숙덕거리며 그에게 일어난 사실을 거부하고 있을 때 그가 말합니다.
"바로 나요!"(9).
이 말은 엄청난 말입니다. 나면서부터 보지도 못하고, 배우지도 못해서, 구걸로 살아가며, 존재도 없는 자로, 죄인으로 여김을 받으며 살아온 그 사람, 한 번도 누구를 똑바로 본적도, 말을 걸어 보지도 못하고 땅바닥만 내려다보며 살던 그가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난생 처음으로 자신을 주장해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당당해 본적이 한 번도 없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몸의 불행을 고친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은 이것입니다. 존재가 당당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크고 놀라운 것은 눈을 뜨게 한 것 보다, 죄의 굴레에서 그를 풀어 놓아 자기를 주장하게 한 것입니다, 세상은 그를 묶었지만 예수님은 그를 풀었던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기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 사람이 눈을 뜨고 자기주장을 하게 되자 그걸 용납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가 예수를 만나 눈을 뜨게 된 사실을 확인 하고도 그 사실과 예수를 믿기는커녕, 예수까지 죄인으로 매도를 하려고 대듭니다. 그들은 사람이 고통에서 해방된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자꾸 묻습니다. 두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합니다. 그래도 그 사람은 분명하게 예수가 자기를 고쳐 주었다고 대답을 합니다. 이것도 그들에게 놀라운 일입니다. 과거의 그는 이럴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궁리 끝에 그들은 그의 부모에게 묻습니다. 그러나 부모들도 그가 다 큰 사람이니 그에게 직접 들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세 번 째 로 그를 찾아가 윽박지릅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로 그 사람은 죄인이다."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것은 정답을 미리 알려주고 찍으라는 소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 정도로 알아듣고 그만 따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서 나온 말이 뭔지 아십니까?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25).
이 한마디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는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다만 한 가지 아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야 할 존재가 언제 이렇게 변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갑자기 한 인간이 이렇게 당당해 졌는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누군가 갑자기 당당해졌다면 그는 로또 복권에 맞았을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게 아니어도 갑자기 당당해졌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아시는 일'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가 그에게 일으킨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것은 세상 모든 일을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의심을 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의심하고 있는 자아가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태어나면서부터 보지 못하는 사람은 철학자도 아닌데 확실하게 아는 것 하나를 획득합니다. 그것은 고고하게 사유하는 자아가 아닙니다. 논리정연한 설명을 통해서거나, 속으로 많은 궁리를 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침과 진흙을 묻히고, 살과 침이 닿는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체험적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는 무엇을 안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하나'를 확실하게 압니다. 온 몸으로, 온 존재로 아는 것입니다. 그가 아는 그 하나로 인해 그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이 두 쪽이 나도, 그가 다시 병에 걸려 죽게 되거나 과거로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그는 이미 이전의 인간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이 하시는 일'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결론으로 가서 우리에게 기적은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시다. 금년에 우리가 소망 중에 기다릴 기적은 무엇인지 셈 해 봅시다. 눈을 뜨는 것도 있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있고, 병을 고치는 것도 있고, 자식이 잘 되는 것도 있고 뭐 여럿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심리가 우리 기독교신앙 안에 이미 깔려 있는 게 아닙니까? 그러나 오늘 우리가 본 요한복음 본문의 이 기적을 통해서 우리는 뭔가 우리의 기대에 대한 방향성과 목표를 수정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1억 원짜리 주식이 1원이 될 수도 있는 세상입니다.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살기도 하고 죽을 수도 있는 세상입니다. 이제 까지 소중하게 간직해온 것들이 하루아침에 쓸모없이 되고, 전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들이 생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최근의 경제적인 변화들을 보면서 미리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세상이 바뀌고 세기가 바뀐다고 해도 절대로 바뀔 수 없는 하나는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사는 것은 모두 세상에 떠내려가는 것입니다. 이리저리 끌려서 사는 것입니다. 누추하게 사는 것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오늘 성서에 나오는 그 사람입니다. 그가 말합니다. "세상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하나를 소유하라!"고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예수가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존재도 없이 떠내려가듯 살아가던 한 사람이 마침내 알게 된 그 하나를 붙잡고, 어떤 상황에도 굴복하지 않고 살아가는데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드러난다는 것이고, 그것이 진정한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기적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
요9:24-27
2010.1.3
우리는 [기적]으로 새해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작지만 아름다운 기적이 쉴 새 없이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 그리고 모든 성도들의 삶에 일어나길 소망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새벽부터 다음 주 새벽까지 참회의 여드레를 지내면서 '예수님과 기적'을 면밀히 살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을 통해 우리의 삶에 적용할 실마리를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다가, 나면서부터 보지 못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묻기를, "선생님,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인가요? 이 사람이 지은 스스로의 죄 때문인가요?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에 그런 건가요?" 참으로 무서운 생각이며 말입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거지로 살아야 하는 것도 서러운데 죄인의 굴레까지 씌우니까 말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인심인가 봅니다. 모든 일을 원인과 결과의 틀에 끼워 맞춰서, 사람의 불행은 그의 죄 때문이라고 하고,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면 그의 부모의 죄, 그것도 안 되면 그의 전생의 죄까지 찾으려는 게 당시의 풍습이었습니다. 여하간, 제자들이 그런 고정관념을 따라 질문을 하자 예수님이 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시려는 것이다."(3절).
전혀 다른 눈입니다. 세상의 통념을 가로지르는 생각입니다. 한 사람의 불행을, 그의 죄 탓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드러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입니다. 우리도 이래야 '예수다움'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서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기적 이야기는 언제나, 하나님의 베푸심이 없이는 더 이상 살 수 없는, 더 할 수 없이 불행한 사람과, 그 불행을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기 위한 것으로 보는 예수의 마음이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어려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그 사람의 간절한 바람, 그리고 예수 사랑과 능력이 한데 어우러지는 곳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다시 기적이 일어나는 현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고, 그에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합니다. 실로암 못은 예루살렘 성 아래 골짜기로 한참 내려가야 나오는 곳이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혼자 가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실로암'이라는 샘물에 대해서만 신비감을 갖지만 사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못으로 가는 과정이 그에게는 더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곳에 갔는지 모르지만,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는 그곳에 가서 눈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눈이 밝아져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어찌하여 예수님은 즉석에서 명령만으로 그를 고치지 않고 그렇게 힘든, 어떻게 보면 그가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가라고 했을까요? 능력 있는 명령 다음에 병이 낫고, 지켜보던 사람들이 놀라며, 찬양을 하는 것이 전형적인 기적 이야기의 틀 아닙니까? 그런데 이 사건은 그런 틀을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초능력자고 병자는 그저 수동적으로 병 고침을 받기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권위 있는 명령을 내리는 대신에 꼭 민간요법 같은 것을 하십니다. 더욱이 그의 눈이 밝아진 것은 그 즉시가 아니라, 실로암 못가에 가서 씻은 다음이잖습니까?
저는 이 장면을 볼 때 제 어릴 때 생각이 떠오릅니다. 눈에 작은 티라도 들어가면 할머니는 내 눈 까풀을 뒤집어서 세게 입 바람을 불어서 티를 빼내주시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안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 때 할머니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갑자기 당신의 혀를 쑥 내밀어서 내 눈을 핥으셨습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놀라기는 했지만 티는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때 생각을 하면 할머니의 그 뜨뜻한 혀와 질퍽한 침의 감촉이 아스라이 살아납니다.
그 눈먼 사람이, 실로암 못 가에 가서 눈이 밝아 졌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무엇이었을까요? 볼 수 없던 그였습니다. 그래서 감각은 보통 사람보다 몇 배나 예민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침으로 진흙을 개서 그의 눈에 발라 주던 예수님의 손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대로, 예수님이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마치 원격 조정하듯이 명령만으로 그의 병을 고쳤다고 하면, 그에게는 그렇게 깊은 인상이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병은 고쳤겠지만, 한 인간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뜨거운 감정은 없었을 거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의 눈을 만져준 예수님의 손과 눈가에 촉촉하게 묻었을 그 침의 감촉을 그가 잊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단지 진흙이 아니었습니다. 침으로 갠 진흙을 그의 눈에 바를 때 이미 그와 예수는 거리감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입니다. 이 기적 사건은 초능력자 예수가 리모콘으로 명령하듯 벌인 사건이 아니라, 눈에 진흙을 이겨 바르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끈적끈적한 사랑으로 인해 눈먼 사람이 눈을 뜨는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실로암 못까지 가라고 했을 때, 그는 처음으로 설레는 가슴으로 그곳까지 갔을 것입니다. 그는 전에도 그곳에 가 본 적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전에는 이번처럼 그렇게 소망을 가지고 그 길을 걷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같은 길도 소망을 가지고 가는 길과 그냥 가는 길은 다릅니다. 고생하면서 소망 중에 갔습니다. 그리고는 못에 눈을 씻고 나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의 감격은 수동적으로 가만히 앉아서 리모콘 같은 기적으로 눈이 떠졌을 때와는 달랐을 것입니다. 그 자신도 무언가를 했다는 느낌, 그도 기적에 참여 했다는 그런 뿌듯함이 가득하지 않았을까요? 자기는 없고 누군가에게서 덤으로 시작된 삶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존재감이 솟구쳐 올랐을 거라는 말입니다. 드디어 그는 '나'를 알기 시작한 것이죠.
그가 집으로 돌아가자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이다저다'말이 많았습니다(8-9). 이런 말들은 그가 얼마나 몰라보게 변화 되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죠. 그들은 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예측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일어난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어려웠습니다. 이것 참 이상한 일입니다. 자기 일이 아닌데도 이렇게 받아들이는 일조차 어려운 것은, '죄'라는 고정 관념 때문입니다. 그렇게 숙덕거리며 그에게 일어난 사실을 거부하고 있을 때 그가 말합니다.
"바로 나요!"(9).
이 말은 엄청난 말입니다. 나면서부터 보지도 못하고, 배우지도 못해서, 구걸로 살아가며, 존재도 없는 자로, 죄인으로 여김을 받으며 살아온 그 사람, 한 번도 누구를 똑바로 본적도, 말을 걸어 보지도 못하고 땅바닥만 내려다보며 살던 그가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난생 처음으로 자신을 주장해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당당해 본적이 한 번도 없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몸의 불행을 고친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은 이것입니다. 존재가 당당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크고 놀라운 것은 눈을 뜨게 한 것 보다, 죄의 굴레에서 그를 풀어 놓아 자기를 주장하게 한 것입니다, 세상은 그를 묶었지만 예수님은 그를 풀었던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기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 사람이 눈을 뜨고 자기주장을 하게 되자 그걸 용납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가 예수를 만나 눈을 뜨게 된 사실을 확인 하고도 그 사실과 예수를 믿기는커녕, 예수까지 죄인으로 매도를 하려고 대듭니다. 그들은 사람이 고통에서 해방된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자꾸 묻습니다. 두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합니다. 그래도 그 사람은 분명하게 예수가 자기를 고쳐 주었다고 대답을 합니다. 이것도 그들에게 놀라운 일입니다. 과거의 그는 이럴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궁리 끝에 그들은 그의 부모에게 묻습니다. 그러나 부모들도 그가 다 큰 사람이니 그에게 직접 들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세 번 째 로 그를 찾아가 윽박지릅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로 그 사람은 죄인이다."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것은 정답을 미리 알려주고 찍으라는 소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 정도로 알아듣고 그만 따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서 나온 말이 뭔지 아십니까?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25).
이 한마디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는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다만 한 가지 아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야 할 존재가 언제 이렇게 변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갑자기 한 인간이 이렇게 당당해 졌는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누군가 갑자기 당당해졌다면 그는 로또 복권에 맞았을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게 아니어도 갑자기 당당해졌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아시는 일'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가 그에게 일으킨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것은 세상 모든 일을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의심을 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의심하고 있는 자아가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태어나면서부터 보지 못하는 사람은 철학자도 아닌데 확실하게 아는 것 하나를 획득합니다. 그것은 고고하게 사유하는 자아가 아닙니다. 논리정연한 설명을 통해서거나, 속으로 많은 궁리를 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침과 진흙을 묻히고, 살과 침이 닿는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체험적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는 무엇을 안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하나'를 확실하게 압니다. 온 몸으로, 온 존재로 아는 것입니다. 그가 아는 그 하나로 인해 그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이 두 쪽이 나도, 그가 다시 병에 걸려 죽게 되거나 과거로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그는 이미 이전의 인간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이 하시는 일'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결론으로 가서 우리에게 기적은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시다. 금년에 우리가 소망 중에 기다릴 기적은 무엇인지 셈 해 봅시다. 눈을 뜨는 것도 있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있고, 병을 고치는 것도 있고, 자식이 잘 되는 것도 있고 뭐 여럿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심리가 우리 기독교신앙 안에 이미 깔려 있는 게 아닙니까? 그러나 오늘 우리가 본 요한복음 본문의 이 기적을 통해서 우리는 뭔가 우리의 기대에 대한 방향성과 목표를 수정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1억 원짜리 주식이 1원이 될 수도 있는 세상입니다.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살기도 하고 죽을 수도 있는 세상입니다. 이제 까지 소중하게 간직해온 것들이 하루아침에 쓸모없이 되고, 전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들이 생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최근의 경제적인 변화들을 보면서 미리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세상이 바뀌고 세기가 바뀐다고 해도 절대로 바뀔 수 없는 하나는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사는 것은 모두 세상에 떠내려가는 것입니다. 이리저리 끌려서 사는 것입니다. 누추하게 사는 것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오늘 성서에 나오는 그 사람입니다. 그가 말합니다. "세상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하나를 소유하라!"고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예수가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존재도 없이 떠내려가듯 살아가던 한 사람이 마침내 알게 된 그 하나를 붙잡고, 어떤 상황에도 굴복하지 않고 살아가는데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드러난다는 것이고, 그것이 진정한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기적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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