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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5:25-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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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윤은철 목사 |
참고 : | 갈릴리교회 |
탕자아닌 탕자
눅 15: 25-32
세상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치 우리들의 얼굴을 쉽게 잊어버리며 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거울을 볼 때에는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잘 알지만 일상생활 속에서는 자신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탕자의 이야기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탕자가 아닌 탕자의 이야기는 잘 듣지를 못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큰아들이 바로 탕자가 아닌 탕자입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도 전혀 아버지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마치 버려진 아들처럼 살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본인이 탕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실로 하나님과 아버지께 죄를 지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아들은 자기 동생과 같이 아버지를 떠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결코 자신을 탕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용면에서 보면 그는 둘째 아들 못지않게 아버지를 불신하고 그의 곁을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이 세상에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탕자 아닌 탕자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거듭났지만 여전히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께 벽을 쌓으며 하나님의 것을 누리지 못하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탕자 아닌 탕자는 어떤 사람인가를 함께 생각해 보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아버지와 관계가 끊어진 큰아들입니다.
25절 말씀을 다같이 함께 읽겠습니다.“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눅15:25)맏아들이 있었던 위치는 밭이었습니다. 물론 밭이라고 했을 때 밭은 일하는 장소입니다. 좋은 뜻으로 생각해 보면 맏아들이 가정을 위해 밭에 있다가 왔기 때문에 아주 좋은 아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그 사람이 있는 위치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으로 가셨을 때 마르다의 위치는 예수님의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부엌에 있었습니다. 반면에 마리아의 위치는 예수님과 함께 방에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몹시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녀는 식사를 준비하다가 그만 짜증을 내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너무 바쁜데 마리아가 도와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더구나 자신의 이런 바쁜 상황을 전혀 모른 척 하시는 예수님이 야속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녀는 예수님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접대하는 일에 나 혼자만 남겨 놓은 것을 개의치 아니하시나이까? 그녀에게 말씀하셔서 나를 도와주라고 하소서."(눅10: 40) 이때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이런 답변을 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며 수고하고 있으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그녀에게서 그것을 빼앗지 못하리라." (눅10:41~42)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마르다의 위치가 훨씬 더 좋아 보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곁에서 말씀을 듣고 있지만 마르다는 예수님을 위해 열심히 식사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위해 무엇인가 좀 더 실질적으로 좋은 일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마리아의 위치가 더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마리아가 마르다보다 더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든 자신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자신과 가까이 있는 자를 찾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의 큰 아들은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밭에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부자연스런 모습입니다. 물론 밭에서 일을 했었는지 아니면 밭에서 일하는 일군들을 감독했는지 그것은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아들의 위치는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밭에 있었다는 것은 자신을 마치 종들과 같이 여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서먹하여 멀리 피신하여 있는 모습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큰아들이 이렇게 살았다는 것은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그가 화를 낸 것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이 다 자신의 것이었다는 확신이 있었다면 아버지가 무엇을 한들 그것이 무슨 큰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아버지와의 관계가 깨어진 큰 아들은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위해 큰 찬지를 벌인 것이 커다란 낭비와 같이 여겨진 것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각 사람의 위치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과 사람이 보는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여러분, 성경은 “의”를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한 사람이 의로워지는 것은 그 사람이 아주 훌륭한 좋은 사람이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졌다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보통 세상에서는 ‘의인’하면 아주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을 의미합니다만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은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아주 도덕적이고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된다고 했을 때 얼마나 도덕적으로 깨끗해야 하며 얼마나 많은 덕을 많이 쌓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의인이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약점이 있고 부족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전혀 부끄럽지 않고 떳떳하게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13:6)
아버지와 실질적으로 아들의 관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못하고 산 큰아들입니다. 이것이 큰 아들의 비극입니다.여러분들도 이미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지 못하고 살지는 않으십니까? 나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선하신 나의 아버지로 믿지를 못하고 항상 꾸짖고 나무라는 분노의 아버지로 하나님을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모두 소멸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우신 분이 아니라 항상 우리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축복해 주시는 좋으신 아버지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전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29절의 말씀을 다같이 함께 읽겠습니다.“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눅15:29)큰 아들은 자신의 동생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해를 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그 어떠한 작은 명이라도 어긴 일이 없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아주 모범적인 아들입니다. 정말 착하고 주변에 자식을 둔 모든 부모들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아들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하는 열심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는 그런 아들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조건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열심히 일을 해서 아버지로부터 칭찬을 받아야지만 행복해 하는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이런 아들이 아버지에게 좋을 수 있습니다. 집이 가난한 경우라든지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일손이 딸린다든지 그런 경우에는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도와 열심히 일을 해 주면 좋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는 아주 매우 풍족하고 부유한 아버지입니다. 둘째 아들이 자신이 굶주려 있을 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의 많은 품꾼들은 먹을 것이 풍족하고도 남는도다. 그런데 나는 굶어 죽어가는도다!”(눅15:17) 이 둘째 아들이 이렇게 자신의 아버지에 대하여 말했다는 것은 아버지의 재산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종들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재산이었습니다. 따라서 종들에게 먹을 것을 그렇게 많이 주질 않았습니다. 간신히 먹고 살만큼만 주었습니다. 그런데 품꾼들이 먹을 것이 풍족하고도 남는다고 했으니 이 아버지는 아주 관대하고 또한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은 자신이 그처럼 부요한 아버지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하인처럼 일했습니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그는 아버지에게 조금도 자신의 행복을 위해 무엇인가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었다”라는 말은 자신의 아버지가 그에게는 매우 인색하신 분으로 여겨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단 한번도 간구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문제였습니다. 왜 아버지가 물질을 그렇게 모았을까요? 그것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그 많은 재산은 모두 큰 아들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아들은 아버지가 왜 그렇게 물질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은 항상 종처럼 밭에서 열심히 일을 해야지만 아버지가 자신을 인정해 주고 사랑해 줄 것 같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축복은 일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관계란 서로의 말이 오고 가는 것입니다. 대화가 있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에 창조하셨을 때 일을 하라고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만물을 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라는 것은 그 분의 위대함을 깨닫고 그 분을 기뻐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하고 난 후에 인간에게 찾아온 것이 바로 일이었습니다. 땅에서 땀을 흘려야 살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노력으로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의 운명을 다시 원상태로 돌려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마다 이제는 그 운명이 일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운명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축복을 말씀을 통하여 누리는 운명으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전에는 물질의 세계를 자신의 힘과 재능으로 움직이면서 살아가는 인생이었지만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 딸들은 영의 세계를 움직여서 물질을 다스리는 삶으로 변화가 된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의 삶의 양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어떻게 하면 영적인 일을 이 세상에서 풀어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킬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삶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큰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재산이 자신의 것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31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눅15:31)
아버지가 먼저 강조한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항상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강조한 것이 아버지의 재산이 다 큰 아들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들에 있어 우선순위는 먼저 아버지와 항상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밭에 있었습니다. 밭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의 삶의 모습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열심히 일을 해야지만 아버지가 그 재산을 자신에게 줄 줄로 잘못 알았던 것입니다. 아들이 해야 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항상 함께 있어야 했다는 말씀입니다.
큰 아들은 밭에 나가 일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많은 재산을 어떻게 관리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아버지에 대한 철학을 배우는 것이 옳았습니다. 아버지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지, 아버지는 어떤 것을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는지, 아버지 입장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을 배워야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에서 “아버지는 이런 것을 좋아할 거야”라고 생각을 하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일을 해야 좋아하셔, 그러니까 열심히 일을 해야지.” 아들은 아버지가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알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재산이 자신의 것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더 많은 노동을 하고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재산을 소유하는 방법은 단 한가지뿐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그리스도인의 삶은 육체적인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질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소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체적인 노동을 통하여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남들에게 움직여서 노동하고 애를 쓰셔서 인생들을 도와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항상 말씀으로 명하셔서 물질의 세계를 움직이셨습니다.
마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풍랑 속에서도 뱃머리에서 잠을 자셨습니다. 풍랑으로 인해 물이 넘쳐서 제자들은 배에서 물을 퍼내며 조종간을 잡으며 안간힘을 써서 배가 물 속에 빠지지 않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잠에서 깨어나셔서 “바람아, 풍랑아, 잠잠하라.” 명하시고 선포하셨습니다. 말씀으로 풍랑을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풍랑과 싸워 이겨 보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말씀 단 한 마디로 풍랑을 제압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하는 삶의 방식인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나지 못했다면 제자들이 노력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옳겠습니다만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다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것이 우리의 현실을 정복할 수 있도록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이미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탕자아닌 탕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분명히 탕자가 아닌데도 삶의 모습은 탕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모두 하나님 말씀에 맞추어서 살아가야 하는데 하나님 말씀보고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에 맞추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기분을 맞춰주거나 이해를 시켜주면 그 때에는 뛸 듯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처럼 생각하며 기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날이면 오늘 성경의 첫째 아들처럼 하나님께 대들고 불평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종으로 부리는 삶이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아닌 것입니다. 누가 상전입니까? 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십니까?
오늘 탕자 아닌 탕자처럼 아버지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살아가는 삶이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아버지와 항상 함께 하는 아들의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처럼 항상 주님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시는 귀한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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