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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눅11: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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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윤은철 목사 |
| 참고 : | 갈릴리교회 |
기도의 진정한 의미
눅 11: 5-11
기도란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얼마나 기도를 하십니까? 기도를 잘 하느냐 못하느냐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언어구사를 통하여 기도한다고 해서 그것이 꼭 하나님께서 들으시기에 좋은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말을 잘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십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죄인 세리의 기도를 더 들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세리는 자신의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죄인인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라는 아주 짧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가 오히려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눅 18: 3-4)
우리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며 진심으로 기도를 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에 그 순간에 그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만큼 기도의 순간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기도에 관한 아주 중요한 비유가 나와 있습니다.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할까요? 오늘 성경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기도의 진정한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들은 이미 이웃을 위한 존재가 되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5절 말씀을 다같이 함께 읽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눅11: 5)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비유에는 만약이라는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벗이 왔을 때 먹을 것이 있었다면, 벗이 낮에 왔다면, 이렇게 여러 가지 다른 상황이 있을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가 기도를 설명하는데 완전한 모습이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왜 이 사람이 한 밤중에 자신의 친구에게 찾아가 빵 세 덩이를 빌려달라고 했습니까? 그 까닭은 자신의 집에 밤중에 친구가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밤중에 찾아 온 친구는 먼 여정 길에 지치고 굶주려서 들어 왔습니다. 이스라엘 관습에 의하면 여행 중인 손님이 집에 찾아 왔을 때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곧 율법을 지키는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 (신 10: 19)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딛 1:8)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나그네 인생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그네 대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으로 축복하신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의 말씀에서 그는 이웃에 살고 있는 자신의 벗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구여, 빵 세 덩어리만 빌려 주게. 내 친구가 여행 중에 나에게 왔는데 나에게는 그를 대접할 것이 아무것도 없네.'(눅 11: 6)
우리는 이 내용에서 깨달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나그네를 대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더 큰 의미가 있는데 우리들은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이제는 남은 생애를 이웃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롬 13:9)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우리들의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냥 단순한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아가페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은 먼저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인가를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네 자신과 같이’라는 말은 “네가 네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네 자신이 얼마나 사랑 받는 자인 것과 같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놀라운 사랑을 받았는가를 깨닫는 자만이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이제 우리의 생애는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이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동네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 가는 사람이 새로 이사 오는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 동네는 사람이 살 곳이 못됩니다. 사람들이 너무 예절도 모르고 이기적이고 싸움만 일삼습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저는 이 동네를 떠나기로 결심했지요.” 그러자 그 동네로 이사 온 사람이 그 말을 듣더니 또 한마디 합니다. “그렇습니까? 저는 이 동네 사람들이 가난하고 또 병에 자주 걸려 무척이나 고생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웃이 되려고 이사 오기로 결심했지요.”
이 두 사람의 차이는 간단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좋은 이웃이 되려 하느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내게 좋은 이웃이 되어주기를 바라느냐의 차이인 것입니다. 바로 이 차이에 따라 그들의 삶이 완전히 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자신은 좋은 이웃이 되려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만 내게 좋은 이웃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하는 소위 나쁜 이웃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나 자신이 먼저 좋은 이웃이 되려는 사람은 언제나 나에게 호감을 가진 좋은 이웃들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성경은 선한 사마리아 인처럼 내가 먼저 좋은 이웃이 되어 그들을 내 몸같이 사랑하며 섬기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자신의 주위의 이웃들이 좋은 이웃으로 가득 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이웃과 환경을 찾아다닙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세상적으로 현명한 삶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다면 그는 평생을 항상 남에게 도움만을 받으며 살아갈 것입니다.
성경은 좋은 이웃과 환경을 찾아다니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빛이라는 말은 어두운 세상 속에 들어가 밝은 빛을 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네 자신이 먼저 좋은 이웃이 되어라”라는 말씀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좋은 이웃이 되기를 바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빛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좋은 이웃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끈질긴 기도가 응답이 됩니다.
8절 말씀을 다같이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눅 11: 8)
비록 벗됨을 인함으로는 주지 않을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준다고 하였습니다. 기도라는 것의 성격이 여기 있습니다. 기도는 모든 관계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물론 이 사람이 자신의 벗에게 찾아 온 것은 친구라는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강청이라는 말이 친구라는 관계를 뛰어넘는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에 관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불쌍한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하여 불의한 재판관에게 호소를 합니다. 호소를 하는데 너무나도 귀찮게 계속적으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이 재판관이 이렇게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눅18:5)
재판관과 이 과부는 무슨 관계입니까?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에게 찾아가 계속적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이것이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순간 그 동안에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졌든지 간에 그것은 다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죄를 많이 지어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을지라도 기도하는 순간 그것과는 관계없이 들으시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서 육신으로 계실 때에 늘 하나님께 기도를 하셨습니다. 중요한 일을 눈앞에 두시고는 산에 올라가셔서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셨을 때 사람들을 피하여 기도하러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동일한 기도를 세 번씩 땀방울이 핏방울 되시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 예수님께서 육체로 계실 때에 하나님의 아드님으로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아뢰셨다고 하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 때문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를 하셨습니까? 얼마든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기도를 하지 않으셔도 예수님께서 말만 하시면 하나님께서 다 들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위치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어 나가신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의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이루어나가신 것입니다.
형식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내용은 기도입니다. 내용적으로는 기도를 통하여 얼마만큼 간절히 아들이 아버지를 의존하며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모습을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에는 기도로 낮에는 무시로 기도하시면서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시면서 살아가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왜 기도를 해냐 하느냐의 해답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법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값없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삶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합니까? 기도로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삶 속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나가는 축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기도의 가장 큰 제목은 ‘성령의 충만’입니다.
13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 13)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베스트 중에 베스트를 주시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구하는 여러 가지 기도 제목들이 있습니다. 그 기도 제목 중에는 가정을 위한 것도 있고, 자녀들을 위한 기도도 있고, 건강을 위한 기도도 있고, 재물에 관한 기도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기도 제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도 제목은 바로 ‘성령 충만’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함께 하실 때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이 뜻 가운데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도널드 밀러는 「재즈처럼 하나님은」에서 은혜의 문제에 대해 자신이 가졌던 고민을 표현했습니다. “나는 너무 자주 은혜에 대해 강조하는 설교자들을 보면 몹시 못마땅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 훈련 따위는 필요 없다는 유혹을 받았기 때문이다. 은혜를 얘기하면 온 교회가 사창굴로 변할 것 같았다.”
우리도 언제든 밀러가 빠졌던 바리새인의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밀러는 빛을 사랑하고 어둠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자 자신을 훈련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과시적이고 율법적인 자기 개선 방식을 그는 ‘예수님을 위한 해군 특수부대 요원’처럼 사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그에게 남은 것은 실패와 절망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자기 힘에 의존하여 구원을 얻으려고 할 때 실패와 절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그 실패와 절망을 파괴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2).
율법은 우리 삶에 존재하는 죄에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율법이 할 수 있는 역할은 거기까지인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지금과 다른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성령충만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충만을 사모해야 하고 성령충만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왜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하셨습니까? 성령님이 오실 때 우리들은 비로소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소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임재하심 속에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5:16)
영국이 낳은 청교도 신앙가 존 번연 목사님이 국왕의 명을 어긴 죄로 감옥에 갇혔던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옥사장이 번연 목사님께 윗사람 모르게 옥문을 열어주면서 집에 가셔서 사모님과 식구들을 잠깐 뵙고 오시라고 하였습니다. 얼마쯤 가다가 목사님이 되돌아오기에 왜 오셨냐고 묻는 옥사장에게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호의는 고마우나 성령이 인도하시는 길이 아니라서 돌아왔습니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에 영국 국왕이 직접 감옥을 시찰하면서 존 번연 목사님을 확인하고 돌아갔습니다. 이때 옥사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동하셨기에 목사님도 살고 나도 살았습니다. 이제 제가 언제 목사님께 가시라 오시라 하지 않을테니까 목사님의 마음에 비쳐오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시고 싶을 때 가셨다가 오시고 싶을 때 오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노라면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설 때가 많습니다.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결코 내 고집이나 방법대로 생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적으로 판단하고 세상적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먼저 우리들은 남을 돕는 이웃이 되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여러분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찾았기에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의지의 모습입니다. 셋째로 기도 제목 중의 가장 귀한 것은 성령충만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충만할 때 우리들은 완전한 행복과 기쁨과 기쁨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귀한 삶이 온전히 이루어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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